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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설교 : 첫사랑 찾은 여인의 행복 (로마서7:1-6)

by 【고동엽】 202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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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찾은 여인의 행복   (로마서7:1-6)

I. 나는 행복합니다.

서구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에게 하루에 한번이상 “I love you -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의 고백을 해야 한답니다. 삼일만 이 고백을 하지 않으면 이혼사유가 됩니다.

아무래도 우리네 문화는 이와는 다릅니다. 아마 멀쩡하던 남자가 매일같이 “여보, 사랑해요.”를 반복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혼사유가 될 겝니다. 이 남자 어디서 구린내 풍기고 다니는거 아냐?

저 같은 경우는 그렇습니다. 아들, 딸 낳고 10년 20년 살았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 나 사랑해?” 이건 왠지 어색하고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참 듣기 좋은 소리, 소중한 시간 꼭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제게 해 주는 말 가운데서도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바로 “목사님,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우리교회는 참 행복한 교회입니다.”하는 고백입니다. 오늘도 예배하고 돌아가시면서 “참 행복하다”는 감격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6장과 7장의 진단인 즉슨, “죄에 매여 살기 때문이요, 율법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영성 그 다섯 번째 주일 말씀의 주제는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오늘밤 예배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주제로 좀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게 될 것이고, 오늘 아침에는 동일한 주제아래 「첫사랑 찾은 여인의 행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율법씨 남편?은혜씨 남편

오늘 본문에 보면 “크리스챤”이라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살게 되는데 이 남편의 이름이 Mr. Law - 율법씨입니다. 처음엔 반듯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신사 - 율법씨가 좋아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를 지내고 나니 그는 함께 살만한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그는 일종의 완벽주의자로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도 용납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잘 해 보려고 노력해도 그의 요구엔 한계도 끝도 없었습니다. 이틀을 지나고 나니 그는 폭군으로 변했습니다. 자기가 정한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부인을 때리고 비난합니다. 마침내 아내 “크리스챤”은 만사에 자신감을 잃었고 삶의 의욕마저 상실했습니다.

잘 해 보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실수를 낳고 맙니다. 깊은 열등감에 사로 잡혔고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으며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남편의 가혹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다 부르짖은 이 아내 크리스챤의 절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끔찍한 율법의 남편,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라!”

이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도 바울은 일찍이 못된 남편과 같은 율법씨 밑에서 고생하며 살아본 사람입니다. 지키고 순종해 보려 해도 끝이 없습니다. 자유도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없었습니다.

안식일 법만해도 그렇습니다.

? 설교하다 넥타이가 풀어져도 그것을 고쳐맬 수가 없었습니다.
? 오후 시간 시원한 그늘에게 책을 읽다가 소낙비가 와도 책을 들고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노동으로 규정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 자동차에 오일이 떨어져도 넣을 수가 없습니다.
? 어린 애기가 배고파 울어도 분유를 사 먹여서는 안됩니다. 그랬다가는 남편 율법씨에게 죽도록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지독한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이 컸지만 한달 두달 지나는 사이 묘한 해방감 마져 들었습니다. 얼마후 이 여인은 “전”씨 성을 가진 “도자”라는 친구 즉 “전도자”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 새남편의 이름이 Mr. Grace - 은혜씨입니다.

알고보니 이 은혜가 바로 “크리스챤” 여인의 첫사랑 “J”라는 그 청년이었습니다. 어릴 때 J - Jesus - 예수라 불렸는데 지금은 Mr. Grace - 은혜씨가 된 것입니다.

이 예수 - 은혜씨는 크리스챤이 에덴동산에서 만난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첫사랑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율법씨와 연애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새남편 은혜씨는 크리스챤 여인을 사랑하며 이 여인의 모든 죄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허물이 허물로 보일리 없었고 약점이 약점으로 보일리 없었습니다.

그는 이해심과 동정심, 사랑과 긍휼과 이해로 늘 흘러넘쳤습니다. 크리스챤 여인은 삶의 활기와 자신감을 찾았고 잃었던 인생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점차 매력적인 여인으로, 사랑스런 아내로 바뀌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첫사랑 찾은 여인의 행복」입니다.


III. 율법에 대하여 나는 죽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하게 되면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살고 함께 잠을 잡니다. 함께 밥을 먹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함께 자식을 낳고 삽니다. 함께 재산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되며 소위 한 몸,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율법과 결혼하여 살 때는 율법과 함께 살며 율법이 나를 구속하며 율법의 열매를 맺습니다. 아무리 율법과 붙어살아도 율법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더욱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율법은 마치 진단을 정확하게 잘하지만 전혀 치료 할 줄을 모르는 의사와 같습니다. 율법의사가 할 줄 아는 말이 꼭 한 가지 있습니다. “너의 병은 너무 중하여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너는 망하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이 폭군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꼭 한 가지 - 죽음밖에 없습니다. 죽음만이 율법과 갈라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기는 커녕 일점일획 상처도 입지 않습니다. 이제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으면 됩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보십시요. 십자가에 의해서 율법과의 결혼관계는 깨끗이 끝이 났습니다. 믿는 자는 율법의 모든 정죄와 구속과 저주로부터 자유로와졌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상의 말씀들이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옛남편 율법과의 깨끗한 관계청산, 깨끗한 죽음선언입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채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 후에도 옛애인에게 매이게 됩니다. 신혼여행 가서도 옛날 애인 꿈을 꾸고 옛날 애인 만나러 다니고 - 이거 한심한 얘기 아닙니까?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간음이라고 단언합니다. 율법에 매여 율법적 가치관, 공로와 행위의 안경으로 자기를 보고 남을 판단하는 삶은 신앙인의 간음이다. 이 말입니다.

도종환 시인이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퇴근길에 아내의 무덤에 들렀다 지은 시가 있습니다.

당신의 무덤가에 패랭이꽃 두고 오면
당신은 구름으로 시루봉 넘어 날 따라오고

당신 무덤앞에 소지 한 장 올리고 오면
당신은 초저녁 별이 되어 내 뒤를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가에 노래 한줄 남기고 오면
당신은 풀벌레 울음으로 문간까지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위에 눈물 한올 던지고 오면
당신은 빗줄기 되어 속살에 젖어 오네

착하고 고운 마음이지요. 그러나 죽은 후엔 가슴아픈 사랑은 무의미 할 수 있습니다. 잊어주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더더구나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는데 율법에 매여 사는 것은 백해무익이요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본문이 말씀합니다.

옛날 궁중에 내시로 들어가게 되면 거세를 해버립니다. 남성 기능상실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예쁜 여자가 많아도 유혹이 안됩니다. 남성으로서는 죽은 것입니다. 죽으면 유혹도 미련도 없습니다. 성도가 마귀로부터,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 죽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유혹이 남아 있는 것, 아직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한 은혜 신랑과의 결혼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풍성한 생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련없이 죽어버립시다. 아니, 이미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의한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거쳐 은혜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자원, 행복함, 풍성함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IV. 행복한 결혼 생활의 열망

율법씨와 함께 살던 결혼생활 그리고 은혜씨와 함께 사는 결혼생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도덕과 신앙의 차이요.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요. 그 둘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이 율법씨와 살던 열망이었다면, 6절은 새로운 결혼생활의 열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육신” “죄의 정욕” “사망의 열매”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씨와 사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그리고 6절을 시작하며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원문에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삶을 살지 아니하고 은혜와 함께 사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씨는 맛난 반찬을 요구하지만 반찬 살 돈은 주지 않는 남편과 같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까다로운 법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주지 못합니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 틴 에이저들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성교육이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성적으로 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교육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성교육이 성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는 커녕 성적 충동감만 자극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미국 중고등학교에서는 피임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성교육을 대치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보십시오. 율법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죄의 정욕 때문에 사망의 열매만 맺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신랑을 만나 첫사랑 예수와 신방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열망이 생겼습니다. “죄의 정욕”이 아니라 “사랑의 욕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은혜의 신랑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율법 안에서 저지른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내 대신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도 내가 돌아오기를 오랜시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 신랑에게 죽음인들 아깝겠습니까? 이 몸, 이 마음 다 바쳐도 부족할 뿐이지요. 예수 신랑 만나고 나니 이게 생시입니까 꿈입니까? 여기가 낙원이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만 같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신랑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랑이 없는 곳에 엄격하기만 한 법은 아무런 능력도, 열매도, 결과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곳에 법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자식 낳은 어미에게 아기를 돌보라는 율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라는 법은 어머니들에겐 모욕 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식을 먹여라. 입혀라. 위험에서 보호하라. 깨끗이 씻겨라. 이 따위 율법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은혜 신랑과 사는 우리에겐 사랑의 열망만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또 불러도 모자랍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모자랄 뿐입니다. 드리고 또 드려도 한없이 모자랄 뿐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이 몸밖에 더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할렐루야.


V. 은혜의 영성으로 사는 사람

우리의 신랑 예수를 향한 사랑의 열망이 일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전혀 다른 삶의 동기가 생겨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뜨거워지자 율법안에서 그렇게 노력해도 나타나지 않던 열매들이 맺혀지기 시작합니다. 거룩의 열매, 선의 열매, 의의 열매 말입니다.

본문 7장 5절을 보십시요. “육신에 있을 때는 죄의 정욕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더니” 이제는 성령의 새로운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8장 4절에서는 “율법이 그렇게도 요구하던 그 열매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골치를 썩히던 불량 청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회초리도 선생님들의 가혹한 처벌도 이 아이를 바꿀 수 없더니, 어느날 이 소년이 한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깎고 옷을 단정히 입기 시작하고 그 여학생이 담배 냄새 싫어한다고 담배를 끊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법이 하지 못하던 것, 내 의지가 할 수 없는 것 - 그것을 사랑이 해냅니다.

이때부터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의 법칙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는 용납이 있습니다. 허물이 들어나고도 아프지 않습니다. 어린신앙인들이 더 사랑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연약한 지체들이 더 보호를 받는 곳이 가정입니다.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사는 가정은 평화가 없습니다. 자식들이 삐뚫어집니다. 방황합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거기는 용서가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어머니 품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어머니는 자식 얘기라고 하면 다 속아넘어가 줍니다. 세상에서 제일 속이기 쉬운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철없던 시절 어머니를 멋지게 속여봤습니다. 용돈이 필요해서 “영어 사전?산다고 돈 타고, 그 다음날 ”딕셔너리? 산다고 돈 타고 또 다음날 “콘사이즈? 산다고 돈 타고, 책 한권 사 놓고 세 번씩 어머니 주머니를 긁어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속아주십니다.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너무 공의와 법으로 다루는 집 아이들은 삐뚫어 집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밖에서 방황합니다. 그게 참 이상합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오스카 쉰들러가 독일군 장교에게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무엇이 진정한 힘인가? 죽일 수 있으면서 죽이지 아니하고 때릴 수 있을 때 때리지 않는 것, 바로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것 그것이 참된 힘이다.?

하나님의 사람들! 그들은 좀 허술한 것 같아도 한 가지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은혜로 살아갑니다.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용서로 살아갑니다.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꼬가 자기 결혼생활에 대해 쓴 “부부 이야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는 가정생활에서 좀 칠칠치 못한 면이 많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오바코드도 모자도 머플러도 거의 제자리에 갔다 놓는 법이 별로 없다. 코트를 어디에 놓았는지도 잊은채 난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조금이라도 빨리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이다.」

법을 몰라도 사랑을 아는 여인이다 싶지 않습니까? 참 행복을 아는 여인입니다. 이쯤되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 여러분은 이곳에 오실 때 예수 신랑 보고 싶어 셀레이는 마음으로 달려오셨습니까?
? 여러분은 진정 죄와 율법으로부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죄에 매여 사는 것도 율법에 매여 사는 것도 영적인 간음입니다. 오직 우리는 은혜의 끈에, 예수의 사랑에 매여서 살 뿐입니다.
? 이제 당신은 영광스런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와 함께 잠을 자고 그와 함께 일어납니다.
?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의 열매를 낳습니다.
? 예수와 함께 기뻐하고 예수와 함께 슬퍼합니다.
? 예수님의 모든 풍성함과 부요함이 당신의 것입니다.

묻습니다.
하루 하루 사실 때 첫사랑 - 예수 신랑 만난 그 행복에 젖어 사십니까?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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