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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설교 3,276편 】◑/천국 설교 33편

천국의 열쇠(12) (마 16 : 13 - 20)

by 【고동엽】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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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12)  (마 16 : 13 - 20)


요즘 들어 부쩍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한 학생들의 자살로부터 시작해서 카드 빚을 해결하지 못해 어린 자식까지 살해하고 자살하는 주부까지 신문과 텔레비전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얼마 전에는 재벌의 총수까지 투신을 하여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까지 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 자신이 저들이 살기 힘든 세상을 만든 공범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살은 어떤 면에서도 합리화 될 수 없고 받아 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탓합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데는 세상의 탓이 많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문제의 전부일까요? 세상이 나아지면 사람들은 과연 자살을 하지 않게 될까요? 모두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답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통 쉽게 생각해서 사회보장제도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나라에서도 사람들은 자살을 합니다. 오히려 우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자살이 꼭 세상과 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살은 세상과 사회의 문제인 동시에 개인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면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사람들과 언론들이 자살의 문제를 세상과 사회의 탓으로만 몰아가는 것에 대하여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자살한 사람에게만 세상이 힘든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힘들다고 그때마다 자살을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자살한 사람 못지않게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루하루를 전쟁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에 한 두 번 쯤 죽고 싶으리만큼 사방이 꽉 막히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세상은 과연 가난한 자에게만 힘이 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재벌 총수가 자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삶은 모두에게 다 힘듭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 힘들고 부자들은 세상이 힘들지 않은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 못지않게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부자가 되어 좀 넓은 집에서 살고 좀 좋은 자가용을 타고 산다고 사는 것이 편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냥 생활이 좀 넉넉하면 그것으로 삶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줄로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삶의 무게는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다 똑같이 무겁고 힘든 것입니다.

세상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만 힘들고 어려운 곳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때가 한번도 없었을까요?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나빠졌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과거 지난 세상은 지금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었나요? 과연 세상이 그렇게 살 수 없으리만큼 갑자기 나빠진 것일까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에게 언제나 살기 힘든 곳 아닙니까?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저는 사람들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나약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정신이 약해진 것은 역설적이지만 세상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세상이 점점 인간적으로 발전하고 나아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나빠지면 인간이 약해지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빠지면 인간은 오히려 보편적으로 강해집니다. 세상이 좋아지고 편해지면 인간은 오히려 보편적으로 약해집니다. 사람이 강해지면 세상이 좀 힘들어도 이겨 삽니다. 그러나 사람이 약해지면 세상이 조금만 힘들어져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포기합니다. 저는 요즘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자살의 현상이 바로 그와 같은 우리의 나약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사람은 누구나 최소한 한두 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거꾸러트림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을 당하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때문에 누구나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만 합니다. 준비가 있어야만 합니다. 과연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고난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크고 강하다는 것은 다 잘 알고 있지만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고난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 즉 고난은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피하지 아니하고 직면했듯이 골리앗과 같은 감담 할 수 없어 보이는 고난을 직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고난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고난과 고통 중에 죽을 수도 있지만 내가 스스로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고집과 오기를 가져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며 큰 소리 치며 당당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의 모든 줄이 끊어 졌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고난의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줄이 끊어져 살 소망이 없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세상에 우리를 구원할 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 자신을 구원해 줄 줄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지식도 명예도 권세도 그 어느 것도 자신을 구원할 줄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고 하여도 부부는 부부일 뿐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도 한계가 있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은 언제나 혼자입니다. 남편이 대신 줄 것 같지만, 아내가 대신 줄 것 같지만, 부모가 대신해 주고 자식이 대신해 줄 것 같지만 아닙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은 결국 언제나 혼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식구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좋을 때는 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은 결국 사람입니다.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도 좋을 때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절박한 고난 중에는 그것이 그렇게 큰 힘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에게는 돈만 있으면 죽지 않겠지만 사람들이 꼭 돈 때문에만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이 격는 고난의 문제가 모두 돈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돈으로도 해결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문제 해결의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귀히 여기는 돈과 명예와 권력 그리고 지식과 경험 속에도 구원의 능력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줄이 끊어져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상이 줄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것이 줄인 줄 알고 그것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참 안타까운 것은 자살하는 사람과 자살하는 사람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세상만 탓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탓한다는 것은 세상이 좀 나아지면, 세상이 좀 달라지면 세상이 저들에게 구원의 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좋아져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살을 생각 할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세상의 모든 줄이 다 끊어져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이 달라지고 발전하는 것은 옳은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의 문제가 다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낭만적인 생각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매우 불신앙적인 생각입니다. 우리 인생의 구원은 세상과 사람이 달라져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과 사람에 궁극적인 희망과 소망을 걸고 살면 살수록 구원의 문제는 점점 우리에게서 해결이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줄이 끊어졌을 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세상의 줄을 놓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과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까지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여 죽고 싶으리만큼 힘들 때 해야 할 마지막 세 번 째 는 진정한 구원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은 우리의 좋은 친구는 될 수 있지만 절대로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신도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절대로 하나님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게 될 때,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그리고 아주 철저히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고난 고난 해도 다윗처럼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은 아마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 (시 62:1-2)

시편 3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가면서 쓴 시편입니다. 세상에 고난 고난해도 그보다 더 큰 고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무엘하 15장 30절 이하에 보니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였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라고 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럴 때 살고 싶으셨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이 때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 하시는 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 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꺽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구원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시 3: 1 - 8)

다윗이 당한 고난 중에는 무고히 당하는 고난도 있었지만 자기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받는 고난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될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염치가 없어서라도 잠잠할 것 같은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당당히 용서와 구원을 간구합니다. 뻔뻔하다하리만큼 다윗은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자기가 죽고 망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느냐고 떼를 씁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시 6:5)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습니다. 믿음은 사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삶이고 삶이 곧 믿음입니다. 사는 것이 좀 힘들고 어렵다고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의 운명이 아닙니다. 우리의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우리가 죽고 망할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죽고 망할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죽고 망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때때로 죽고 망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은 우리가 줄을 잘못 서고 잡았기 때문입니다. 줄이 아닌 것을 줄인 줄 알고 붙잡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끊이 끊어졌다고 죽게 되었다고 절망하고 포기할 것 없습니다.
잘못된 삶의 길과 식을 버리고 참 구원의 길과 식을 선택하면 됩니다. 식이 잘못 됬으면 바꾸면 됩니다. 길이 잘못 됬으면 바로 찾으면 됩니다. 식을 바꾸면 문제는 풀리고 길을 바로 찾으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주일마다 천국의 열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는 믿음에 있고 믿음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고백에 있다는 것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主)이십니다. 줄이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세상과 사람은 우리의 주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과 사람은 그냥 좋을 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저들이 아무리 좋고 또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에 한계가 있고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줄을 붙잡고 살면 반드시 삶이 끊어 질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만 줄을 삼고 매달린다면, 다윗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윗의 표현대로 천만인이 둘러치려 하여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열쇠입니다. 계시록에도 보면 예수님을 열쇠로 표현하였습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으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계 3:7) 엉뚱한 세상과 사람과 자신과 지식 그리고 명예와 권력으로 세상을 열고 닫으려 하다가 패가망신하여 산다죽는다 하지 말고,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만 자신의 주인을 삼아 그 믿음의 열쇠로 이 땅에서도 천국을 열고 닫으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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