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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14) (마 16 : 13 - 20)
어느 감리교회 목사님이 교회의 중직자 중에 한 사람인 어느 남자 권사님에게 요즘 교회에 자주 빠지고 있는 교인가정 심방을 부탁하였습니다. 주일 예배 후 인사를 하다가 그 권사님에게 심방을 하셨느냐고 물었을 때 그 권사님은 목사님에게 ‘왜 제가 목사님의 성공을 위하여 그렇게까지 노력을 해야만 합니까?’라며 정색을 하며 되묻더랍니다. 그 권사님의 도발적인 대답에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그 목사님으로부터 들으면서 저는 내심 그 권사님의 말이 참으로 도발적이고 공격적이어서 목사님이 무척 당황스러웠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84년 처음으로 담임목사가 되었던 교회는 장년 주일 출석이 150명 정도되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부임 하자마자 연말까지 300명 출석을 목표로 기도하고 노력하자고 교회와 교인들 앞에 발표하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출석교인 300명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김 목사 너는 왜 300명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교인들을 들 볶느냐?’ 그 질문에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니었고 교인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과 교회와 교인들을 위하여 좋은 일인 것은 틀림없었으나 제가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제가 그토록 열심히 교인 배가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며 교인들을 강권한 것은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시 하나님께 출석교인 300명에 대한 기도를 취소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기도와 노력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교인배가 운동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저는 그 때 목회가 개인적인 성공과 야망을 위하여 얼마든지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부족하지만 저의 목회가 하나님과 교회를 빙자하여 저 개인적인 성공과 야망을 위하여 이용되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합니다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는 그와 같은 면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매사에 열정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순수한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에 집착하며 욕심 부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저 개인적으로 평생을 바쳐 이룩하고자 진실된 의미의 성공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호주와 뉴우질랜드의 전도집회 중에도 똑같은 갈등과 싸움을 격어야만 했습니다. 전도집회의 성공을 개인의 성공으로 동일시하려는 마음이 아직도 제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날 집회가 끝난 후 그것을 하나님께 내려 놓았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집회는 둘쨋 날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있었습니다. 20년이 넘은 싸움이지만 아직도 제게는 늘 처음 하는 싸움 같이 익숙해지지 않는 서툰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 싸움을 싸우려고 합니다.
제가 또 하나 욕심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소 시장의 소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여러 번 반복한 예화이지만 또 다시 반복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중요한 예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라 난 청량리 중앙교회의 임택진 목사님께서 시무하실 때 상도동에 있는 큰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눈치채신 청량리 중앙교회의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막았습니다. 장로님중의 선임이신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다음 달부터 당장 생활비를 올려 드릴터이니 가지 마십시오’
그때 임 목사님은 그 장로님에게 제가 평생을 잊지 않고,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목표로 삼을 근사하고 멋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 시장의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값이 올라도 가고 내려도 가지만 나는 소 시장의 소는 아니요’
목사님은 훗날 저에게 개인적으로 당신이라고 돈이 싫은 것도 아니요 필요없는 것도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소 시장의 소처럼 돈에 팔려 다니는 삶을 살 수는 없지 않는 것이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나도 평생 소 시장의 소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목사라고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분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단의 장로님 세미나에 가서 강의를 하는 중 그와 같은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장로님 한 분이 예수님은 사역 하실 때 머리 둘 곳 없이 주리고 목말라 하시며 사역을 하셨는데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서슴치 않고 그 장로님에게 ‘그때는 장로님들이 계시지 않아서 그랬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깨끗한 가난은 인정하나 가난을 무조건 깨끗한 것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부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이며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공격도 받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제 평생의 목표 중에 하나는 돈에 대하여 당당하고 깨끗하여 시시하게 돈에 팔려다니고 끌려 다니는 소 시장의 소 노릇은 하지 않고 인생을 마치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저는 정말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리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망의 뿌리는 죄요 죄의 뿌리는 욕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다스릴 수 있다면 죄를 다스릴 수 있고 죄를 다스릴 수 있다면 사망과 실패를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욕심중의 욕심은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교만과 물질입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교만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자유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 바둑을 어께 너머로 조금 배우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한 10급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이상한 것은 남의 바둑을 옆에서 훈수할 때는 실력이 8급 정도로 올라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저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 바둑을 둘 때보다 남의 바둑을 훈수 할 때 더 실력이 올라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자기 바둑을 두게 되면 승부욕이라는 욕심이 생기게 되는데 그 욕심이 눈을 어둡게 하여 볼 수 있는 수를 보지 못하게 하여 실력을 떨어트리게 하고 결국에는 패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바둑을 훈수할 때는 그 승부욕이라는 욕심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눈이 밝아져서 자기 바둑을 둘 때 보다 더 정확히 수를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이 마치 바둑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누가 수를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읽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가 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승패가 달려있는 수 읽기는 마음이 깨끗할 때 가장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읽히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수를 읽고 본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를 읽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인생에서 패배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승부는 결국 깨끗함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승리할 수 없습니다. 소 시장의 소처럼 돈에 대한 욕심에 사로 잡혀 평생을 사는 사람도 역시 궁극적으로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사람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욕심을 부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자신의 삶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부리며 살아도 삶이 채워지지 않는 까닭은 채울 수 없는 것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배부름과 만족 즉 채움을 주는 것은 利가 아니라 義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利에 속한 것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利를 추구하고 사는 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나 利를 통하여 행복과 만족을 얻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그 어리석음에 깊이 빠져 살다보면 그 어리석음에서 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을 존귀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때문에 제게 제 아이들은 제 생명보다 귀하고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우리들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본래부터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사람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어도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와 쾌락을 누리는 일에 전무후무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통하여 참 삶의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전도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헛되도다’
‘모든 강물은 연하여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도다’
부귀와 영화와 쾌락은 솔로몬에게 바다로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그것을 통하여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만족하고 행복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이 다 헛되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솔로몬이 세상보다,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크고 귀한 솔로몬에게 막상 천하가 주어졌지만 그 천하가 솔로몬을 채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불행과 어리석음은 그 ‘솔로몬의 헛됨’에 인생을 걸고 산다는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利에 배부름과 만족이 있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부름과 만족이 利에 있는 것이 아니라 義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로 사는데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좇아 바르게 사는데 배부름과 만족 그리고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고, 그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죄까지 지면서 참 우리에게 행복과 만족 그리고 배부름을 가져다 주는 義를 파괴하면서 사니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의 양식을 가지고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남편을 다섯 여섯을 두면서 그것이 부끄러워 아무도 없는 대낮에 도둑질하는 것처럼 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네게 주는 물을 마시면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되어 다시는 갈함이 없으리라’
예수를 믿어가면서 저는 조금씩 조금씩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세상엔 배부름이 없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뜻 그리고 하나님의 의속에 참 배부름과 만족 그리고 시원함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그의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정말로 근사한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과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솔로몬에게 없었던 고백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하였던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여호와로 자신의 목자를 삼고 그의 뜻과 가르침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였던 다윗은 ‘자신에게는 부족함이 없고 늘 잔이 넘치는 기쁨과 만족이 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요즘 여러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속에 진정한 만족과 채움 그리고 행복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그와 같은 만족과 채움 그리고 행복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은 그것이 利와 세상의 부족과 박탈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해 지시려면 그와 같은 치명적인 어리석음에서부터 벗어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욕심을 채우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면 행복해 집니다. 세상과 利에 대한 욕심과 야망을 버리고 세상과 利에 대한 소명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특권층이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과 욕심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 특권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욥은 당대의 부자였습니다. 그 부함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자로 불리우지 않고 의로운 자로 불리웠습니다.
저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꼭 가난해지고 초야에 묻혀 나물 먹고 물 마시는 삶을 사는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기독교적인 철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매우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행복하면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사람들이야 어떻게 살든 말든 자신은 상관 없다는 무책임한 자세는 절대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꼭 가난해지고 초야에 묻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난하게 살든 부하게 살든, 높은 사람으로 살든 낮은 사람으로 살든 중요한 것은 利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채우려고 하지 마시고 먼저 비우려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워진 삶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채우는데 먼저 마음과 소원을 두고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체험하면서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좋아서 자주 부르는 찬송 중에 ‘내 영혼이 은총입어’ 찬송이 있습니다. 저는 그 찬송의 가사 중에 2절 가사가 참 좋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사람들은 행복이 궁궐에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삶을 경험한 사람의 간증과 고백은 행복이 예수님을 주로 모심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살다보면 높은 산 거친 들에 사는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궁궐에 살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처럼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행복과 불행이 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과 만족은 세상과 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천국의 열쇠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었습니다. 천국과 그 천국을 여는 열쇠는 세상과 利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욕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욕심과 기대를 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욕심과 기대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의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우리들에게 배부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살아서도 천국을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삶의 관심과 욕심을 세상에 두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에 두고 살아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만족과 배부름을 누리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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