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마 6:1-4)

by 【고동엽】 2022. 7. 28.
 
전체 목록가기 청지기 목록 돌아가기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마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세계 제일의 갑부였던 죤 록펠러는 그의 손자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철저한 금전교육을 시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말이 되면 자기의 어린 손자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에게 25센트씩 용돈을 주었습니다. 물론 손자들은 받은 용돈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두 가지 조건만큼은 지키도록 했습니다.

"첫째, 용돈의 10%는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쳐라.
둘째, 용돈의 또 다른 10%는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하라."

록펠러는 주말이 되면 또 다시 손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용돈을 어떻게 썼는지 반드시 그에게 보고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일 어떤 손자라도 용돈을 바르게 사용했으면, 그는 상으로 5센트를 더 얹어서 그 주에는 30센트를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반대로 만일 손자 가운데 누구라도 용돈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벌로서 사정없이 5센트를 깎아 20센트만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록펠러는 자기 손자들이 어릴 때부터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자들에게 자기가 준 용돈을 통해서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도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록펠러는 어릴 때부터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나는 장차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리라!"
그래서 그는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33세 때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해 순수익만 일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는 30대에 이미 백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 뒤 10년이 지난 43세 때는 미국 최초의 트러스트를 형성해서 대규모 재벌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그 뒤 또 10년이 지난 53세 때는 전 세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꿈대로 그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해 그는 Alopecia라는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빠져버렸습니다. 또 밤에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에 먹는 음식이라고는 기껏 비스킷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이 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계속해서 말라갔습니다. 전문의가 그를 진단해 보고서는 1년을 넘기기가 어려우니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이처럼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사실 사람들에게서 인심도 많이 잃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저 물질을 손에 움켜쥐기만 했지, 한 번도 선하게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눈물로 자신의 침상을 적시면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만큼이라도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써보리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 동안 움켜쥐었던 손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곳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리버사이드 교회도 그때 세워진 것입니다. 그는 그 교회를 비롯해서 곳곳에 5,000여 개의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인 시카고대학을 비롯해서 그는 24개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자선사업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록펠러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 유명한 페니실린 주사약도 그곳에서 지원한 연구비로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그 한 사람만 일평생 동안 자선사업에 5억 달러 이상을 희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 받은 그의 다섯 아들들과 또 그의 손자들이 자선사업을 위해서 사용한 금액을 합치면 수 십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손을 펴고 나니까, 그의 건강이 급속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건강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그가 54세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건강하게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더욱더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우리가 의를 행할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구제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해야 할 바른 구제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물질의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더 나아가서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가 의를 행할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전반부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세 가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첫째,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구제입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우리가 행해야 할 의입니다.

둘째, 5절 이하에 기록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우리의 신앙적인 의입니다.

셋째, 16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금식입니다. 금식은 우리 자신을 절제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의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경건한 삶을 위해서 늘 힘써야 할 신앙적인 의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의를 행할 때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1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 앞에 두 개의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그들 앞에서," 곧 "사람들 앞에서"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의를 행하려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의를 행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가 다 문제입니까? 마5:16을 읽어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 비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들이 우리가 행하는 착한 행실, 곧 우리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병든 자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셨습니다. 요5:30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 모든 일을 하시면서도 예수님의 원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영광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행하느냐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의를 행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의를 행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있는 것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는 입고 있던 옷도 벗겨지고 실컷 두들겨 맞아서, 거반 죽게 된 채로 길바닥에 버려졌습니다.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또 잠시 뒤에는 레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동족인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서 다 죽어가는데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물론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주된 이유는 깊은 산중이었기에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정해 보십시다. 똑같은 유대인이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마침 그 길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그들이 그를 피해서 지나갔겠습니까?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서로 먼저 돕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했으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도 역시 의를 행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의를 행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는 의를 행하지 않는 이중적인 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우리의 속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살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의를 행하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우리의 의를 행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절 하반부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우리가 가로챔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의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중간에서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상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상은 고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구제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절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이 6번씩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실 때 사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대명사가 바로 "외식하는 자"였습니다.
이미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6가지의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우리에게 세 가지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 외식적으로 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도 외식적으로 했습니다. 또 그들은 금식할 때도 역시 외식적으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외식적으로 구제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구제가 어떤 점에서 외식적이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는 척 하면서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구제하는 목적은 사실 주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받으려고 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남을 도와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들이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려는데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받기를 원하면서, 겉으로는 주는 척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식적이었습니까?

둘째, 그들은 물질의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영광이 돌아가더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기들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했으니까 외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그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들은 회당과 거리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회당과 거리는 사람들이 붐비는 곳입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일 때까지 계속해서 나팔을 힘껏 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명분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구제 받을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에 회당과 성전의 구석진 곳에는 작은 방이 있었습니다. 구제를 위해서 마련된 방이었습니다. The Chamber of the Silent, 곧 "침묵자의 방"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그 방은 들어가는 입구가 양쪽에서 나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제를 하는 사람이 구제하기 위해서 들어오는 입구와 구제를 받는 사람이 구제 받기 위해서 들어오는 입구가 서로 달랐습니다. 구제를 원하는 사람은 조용히 그곳에 가서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자유롭게 놓고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구제를 받기 원하는 사람도 다른 쪽으로 들어가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들고 나올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제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 놓은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곳에서 얼마든지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거리로 나갔습니다. 계속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겉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구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서 더 많은 영광을 차지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받기를 바랬습니다.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 노릇을 했습니다. 얼마든지 은밀하게 할 수 있는 구제를 그렇게 하지 않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공개적으로 구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절 하반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들의 목표대로 그들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는 받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챘기 때문에, 이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책망과 벌뿐이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에게는 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의 구제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3-4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구제의 방법, 동기, 그리고 그 결과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참된 구제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제할 때는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만일 왼손잡이 같으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왼손의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우리가 활동할 때 오른손잡이는 주로 오른손을 많이 이용합니다. 악수할 때도 오른 손을 내밉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오른손으로 먹고, 물건을 집을 때도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구제할 때도 역시 오른손으로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로 오른손을 이용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른손이 왼손에게 자기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른손이 많은 것을 해도 왼손이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합니다. 구제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알고 모르고는 둘째 치고서라도 자기 자신도 기억치 못하게 구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할 바를 했을 따름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구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구제의 자세입니다.
둘째, 참된 구제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구제의 동기는 은밀해야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구제하는 사람이 중간에서 받기가 쉽습니다. 구제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 모르도록 은밀하게 함으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게 해야 합니다.

어떤 마을에 구두를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활도 그다지 넉넉하지 못할텐데,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습니다. 자기 생활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웃에는 부잣집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그는 구두쇠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는 남에게 동전 한 푼 보태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그를 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두쇠 할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구두를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구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구두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구제한 것은 전부 구두쇠 할아버지가 뒤에서 준 돈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구제할 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구제할 때는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누가 주는 지도 모르고,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야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6:1-3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각자가 자기의 이름으로 구제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에 헌금을 해서 교회의 이름으로 구제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때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그것을 모아서 교회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구제를 했습니다.
아무튼 구제를 할 때는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드러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참된 구제의 결과입니다. 4절 하반부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는 잊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원리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면 하나님은 잊어버리십니다. 반대로 내가 잊어버리면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If we remember, God will forget; but if we forget, God will remember."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이 원리를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양과 같은 의인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5:35-36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때 의인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 그러하였나이까?"
그들은 이런저런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기억치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밀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잊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5:40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의인들에게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받은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가운데서 조금 떼어서 다른 이웃들에게 나누어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하나까지라도 귀하게 여기시면서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10:4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냉수 한 그릇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보잘 것 없는 것조차도 예수님은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십시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욱더 힘쓰십시다. 그리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모든 풍성한 상을 다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