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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청지기

청지기의 규칙과 축복 (에베소서 4:15~16)

by 【고동엽】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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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의 규칙과 축복   (에베소서 4:15~16)


당회원과 교역자는 청지기입니다. 나아가 우리 모든 성도들도 다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청지기로 살아야 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하라

첫 번째로 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에게까지 자랄찌라”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참된 것을 행하여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말합니다. 사랑으로 행하고, 참된 것을 행하고, 그에게까지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참된 것’이란 말은 진리를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사랑으로 진리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문맥이 뒤의 ‘그에게까지 자랄찌라’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왜 진리를 행하라고 하느냐? 진리가 교회의 기초이고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이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느냐? 성장, 즉 자라는 데는 사랑으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비료를 먹어야 영적인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하라, 그리고 자라가라고 말씀합니다. 청지기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청지기로서 청지기의 옷을 입어야 됩니다. 이 옷의 재료가 두 가지라야 됩니다. 하나는 진리라는 재료, 하나는 생명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성이라는 게 있어야 청지기의 요건이 되고 생명은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자라야 되는데 그것은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규칙이 사랑 안에서 행하여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지체의식

두 번째로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강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16절 상반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교회를 말합니다.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우리의 지체는 각 마디가 있습니다. 모든 지체에는 마디가 있습니다. 마디가 없으면 다리나 팔은 뻣뻣해서 안 됩니다. 우리의 지체가 허리나 몸을 움직이는 모든 기능들이 전부 지체의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디가 서로서로 도움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도움을 입는다는 말은 수동적인 뜻 뿐 아니라 도움을 준다는 것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두 번째 규칙으로 도움을 입고 도움을 주면서 동역하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혼자 충성된 것이 아닙니다. 타인과의 충성을 나눌 줄 알고 타인도 함께 충성하게 하는 이와 같은 동역의 충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를 잘 들여 다 보십시오. 눈, 코, 입, 귀를 보면 눈만으로 어떻게 삽니까? 귀가 들어서 눈에도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목구비만이 아니라 안 보이는 이 모든 기능도 다 그렇습니다. 뱃속에서 ‘시장하다’고 느끼면 입이 먹어주어야 됩니다. 또 입은 먹기만 하면 안 됩니다. 먹은 것을 잘 소화해 주어야 됩니다. 서로 도와야 됩니다.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입어야 우리 몸은 건강하게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기능도 이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똑같은 몸의 구조입니다. 몸이 각 마디를 서로 통하여 연락하고 상합하며 각 지체의 분량대로 움직여 주어야 몸이 건강해지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처럼 교회도 이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파트너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동역의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것은 청지기 규칙의 가장 실제적이고 핵심적인 규칙입니다.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 힘이 납니다. 힘을 잃고 있다가 남의 도움을 받으면 힘이 납니다. 가뭄에 시들어있는 채소에 물을 주면 생기를 얻어서 힘을 얻습니다. 도움을 받는 것은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도와주면 더 힘을 얻습니다. 내가 도움 받을 때 힘을 얻는 것과, 내가 가진 힘을 가지고 남을 도와줄 때 내게 생기는 힘과는 질이 다릅니다. 받을 때의 기쁨과 줄 때의 기쁨은 질이 다릅니다. 우리는 받는 기쁨에 중독되면 안 됩니다. 주는 기쁨과 같이 어우러져야 됩니다. 평생 받는 환자가 되면 그 인생은 불행합니다. 주는 기쁨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 꽃을 보려면 다리가 이동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이 잘못 꽂힌 것은 다시 만져줄 수도 있고 위치가 비뚤어지면 다시 손을 봐줄 수 있습니다. 다리가 가주어야 손이 돌봐줄 수 있습니다. 또 다리가 가준 들 손이 뒷짐을 지고 일을 안 해주면 가는 것도 헛일입니다. 서로 돕고 서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도움을 입는다’는 이 말을 여러분이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연락하는 것입니다. 연락은 상호 오고 가는 것입니다.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라” 서로 협동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동역의 지혜가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상합하고 연락하라

요즘 사회적으로 제일 문제 삼고 있는 게 양극화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에 양극화 현상이라는 게 서로 도움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양극은 불행이 아닙니다. 최고와 최저는 불행이 아닙니다. 최고와 최저가 서로 동역이 바로 되면 양쪽 다 중요하고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왜 자꾸 갈등하고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 동역의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 그렇습니다.
부동산 전문가가 말해놓은 글을 보니까 배울 게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부동산을 가지고 논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금 자꾸 정책적으로 초대형 아파트, 초호화 아파트에 여러 가지 정책들이 적용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6억 이상 가진 집 소유주들의 고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계는 몇 천만원짜리를 차도 탓도 안 하고, 승용차는 몇 억원짜리 타도 탓도 안 하면서 집은 왜 고급 집을 사면 이렇게 사회가 들볶고, 정부가 들볶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진국은 안 그렇습니다. 귀족출신들은 귀족들끼리 모여서 돈을 펑펑 쓰도록 자유를 줍니다. 그 돈이 전부 평민들에게로 유익이 오는 돈입니다. 돈 가진 사람이 돈을 쓰게 해야 되는데 지금 돈을 쓰면 문제시 하고 죄악시 하고 도둑의식으로 봅니다.
우리 몸의 지체를 봅시다. 손가락이 힘이 있습니까? 팔이 힘이 있습니까? 손가락 힘과 팔의 힘은 다릅니다. 물론 팔의 힘이 셉니다. 그런데 이 팔이 팔 힘을 내야지 팔이 손가락처럼 힘을 쓰면 팔은 아무 일도 못합니다. 팔은 팔 힘을 내고, 손가락은 손가락 힘을 내는 이것이 동역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연락하고 상합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 “각 지체의 분량대로”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문맥을 잘 관찰해보면 곧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체는 분량대로 힘을 내야 됩니다. 팔은 팔 힘을, 손가락은 손가락 힘을 내야 됩니다. 동역이라는 것은 팔이 손가락하고 같이 힘을 내면서 나도 너와 같다고 하면 동역이 안 됩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더 써야 되고, 힘이 적은 사람은 적은 힘을 쓰면서 동역을 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보고 짐을 잔뜩 지워놓고 힘이 있는 사람이 짐을 덜 지면 동역이 안 되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무거운 짐을 져야 됩니다. 힘이 적은 사람이 가벼운 짐을 져야 됩니다. 이것이 합쳐질 때 주님이 주시는 동역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팔이 되어야 할 사람은 팔 힘을 써야 됩니다. 손가락이 되어야 할 사람은 손가락 힘을 써야 됩니다. 당회원들과 교역자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교회에서 팔입니다. 장로님들이나 교역자들이 ‘나는 교회에서 손가락인데 그중에도 새끼손가락이다’ 그렇게 엉뚱한 겸손을 가지지 말기 바랍니다. 겸손도 좋지만 엉뚱한 겸손은 추합니다. 교역자라는 이 존재는 중요합니다. 교역자가 힘을 잃으면 손가락도 힘을 다 잃어버립니다. 목사가 힘을 잃어버리면 교인들도 힘을 다 잃어버립니다. 교육부서를 맡은 교역자가 힘을 잃으면 교사들도 힘을 다 잃습니다. 교역자와 당회원이라는 이 존재는 부인할 것도 없고 재론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팔로서 팔 힘을 내어야 될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교회를 섬기면서 손가락처럼 섬겨왔다면 오늘부터 여러분은 팔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동역이 일어납니다. 교역자와 장로가 손가락처럼 처신하면 우리 교인들도 새끼손가락처럼 되고 맙니다. 교인들이 손가락 힘을 제대로 나게 하려면 위에서 팔 힘을 받쳐주어야 됩니다. 손이 아무리 철봉을 잡고 있어도 팔이 힘을 주지 않으면 못 올라갑니다. 교인들이 아무리 달라붙어도 교역자와 당회원의 헌신이 없으면 교회는 힘을 못 냅니다. 분명한 원리인데도 이 원리가 살아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세금을 많이 내어야 될 사람은 많이 내야 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사회에 힘을 많이 쏟아 주어야 됩니다.
구라파에 사는 한 사람이 제게 통신을 보내왔는데 아주 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런던이나 파리 등 구라파의 쟁쟁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세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세금을 아무 소리 안 하고 다 내고 산다는 것입니다. 많이 내야 할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내야 할 사람은 적게 내는 그 균형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진 게 선진국인데 우리나라 사회의 모순은 지금 힘 있는 사람들이 힘을 안 냅니다. 힘을 감춥니다. 힘을 낭비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힘을 제대로만 내면 우리 사회가 지금 막강한 사회가 됩니다. 왜 이만불 고비가 안 넘어 가느냐? 힘이 누수되기 때문입니다. 이 교육열이 뒷바탕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동역의 원리만 살리면 단시간 안에 이, 삼만불시대에 올라선다고 경제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들이 국가발전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힘을 약한 자들, 낮은 자들,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팔 힘을 내어야 하는데 전부 새끼 손가락 힘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안에도 똑같다는 게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팔이 곯아 있으면 손가락은 아무리 성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각자의 힘을 다하라

장로님과 교역자들 부부는 동역자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남편은 팔이고 아내는 손가락입니다. 장로님들이 교회에서 맡은 부서와 업무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내가 영적으로 관리를 해 주어야 됩니다. “여보, 당신이 맡고 있는 그 부서의 일을 열심히 하세요.” “당신이 맡고 있는 그 교구,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옆에서 자꾸 보조자의 역할을 해주어야 됩니다. 장로의 직을 수행하는 사람은 남편이지만 계속 아내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고 충고해주고 잘못하거든 잔소리도 하십시오. 것인데 목사에게 잔소리 많이 하는 사모가 훌륭한 사모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님들은 잔소리 받을 짓을 많이 하고 살아갑니다. 교인들이 목사님들은 완전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목사만큼 사적인 생활에 엉터리가 없습니다. 전부 잔소리 받을 거리인데 거기에 대해 잔소리를 안 해주고 지나가버리면 목사는 망가집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충성된 청지기가 되는 데는 아내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내의 자리가 비어있는 장로님들은 심리적으로는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가족이 중요한 것입니다. 남편이 혹시 기도회에 못 나오면 아내가 그 남편의 자리를 메워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안 나오고, 아내도 안 나오고, 장로도 안 나오고, 권사도 안 나오고 그 빈자리를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다. 누가 메우라는 것입니까? 부득이해서 빠질 수 있지만 아내고 그 자리를 메워야 됩니다. 그것이 동역이고 당회원의 가정입니다. 그래서 감독의 자격에도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교회감독이 될 수 있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이 역할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다 잘 되는 게 좋지만 한 편이 부득이 할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교회봉사에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족이 메워야 하는 것입니다. 안 메우고 세월을 보내면 영적인 것과 존경을 얼마나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존경도가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데도 너무 오랫동안 공백이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모릅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부부간에 이 동역이 안 일어나면 당회원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교역자로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위해서 기도의 자리, 수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남편이 예배기도를 맡은 것을 주보에서 보거든 한 주간 동안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교역자들이 매 주일마다 교인들 앞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남편이 말씀을 들고 성도들 앞에 서는 그 일을 위해서 사모들이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면 안 됩니다. 남편의 사역을 위해서 교회의 기도자리를 늘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보다 앞서지 말고 행동도 앞서지 말자!” 앞설 수도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부자연스럽고 부덕해집니다. 여러분들은 팔이 되려고 하지 말기 바랍니다. 손가락으로 역할을 하면 됩니다. 팔 힘은 남편이 내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으로 팔 힘을 내게 해야지 여러분이 팔 힘을 내게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어느 교회는 장로님 부인들은 교회 부서에 직책을 맡기지 않게 하는 행정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전도회 회장도 장로부인은 안 맡기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지 사유를 알아보니까 한 때 부덕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주 좋은 교회입니다. 저는 늘 자부심을 가지고 목회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상에서 최고가 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최악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그야말로 다른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악질적인 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주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최고들이 많으면 뭐합니까? 최악이 하나만 있어도 그 최고가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최악이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서로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유지되어 가는 좋은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최고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고, 최악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고민은 없습니다. 얼마나 은혜 안에 목회하는 목사입니까? 최고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최악을 경계할 필요도 없는 우리 교회의 목회분위기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그 나름대로 지금 동역의 묘를 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교역자 부인들은 아주 묘한 신분입니다. 교역자도 아니면서 교역자에게 제일 가까이 있고, 교인이면서 일반교인과는 구별된 사람입니다. 사모가 교인들이 대하기는 교역자들 대하는 것보다 더 신중하고 어려운 존재입니다. 교역자 부인들은 그렇게 교역자와 함께 할 때에는 모든 것이 자유롭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과 함께 심방을 가면 사모는 아주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남편없이 심방을 가면 사모는 행동과 말하는데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사모를 그렇게 보호를 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남편과 교역자와 같이 심방을 가면 사모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역자 없이 교인과 사모와 사적으로 만나면 서로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 부인들은 언제나 자기 남편이나 교역자와 같이 심방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역자 부인들은 자기 소속 여전도회에서는 아무리 해도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전도회에 가서는 열심히 하게 되면 반드시 부자유하게 됩니다. 그만큼 부인들의 역할은 중요하고 이것 없이는 남자들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동역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2007년도에는 당회원과 교역자가 힘 있는 팔로서 서야 됩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손가락으로서 함께 동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팔 힘을 써야 됩니다. 그것을 안 하고 있으니까 사회도 교회도 공동체도 가정도 교회도 병이 들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분량대로 해야 됩니다.


교회를 위해 쓰임 받으라

세 번째 청지기의 규칙은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에 ‘자라게 하며 세운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자라게 하며 세워간다는 것이 청지기의 규칙입니다. 청지기는 자라게 하는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맨토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됩니다. 세워주기를 바라는 자리가 아니고 교역자와 당회원은 교회를 세워가는 역할입니다. 즉 자신이 바로 서야 남을 세웁니다. 자기가 바로 서야 교회를 세웁니다. 자기 자세가 지금 비뚤어져 있는 사람이 남을 바로 세워주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없습니다. 내가 바로 서 있는 자리에서 교회를 세워가야 됩니다.
우리가 교회부흥을 위해서 약 2년간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빈자리가 없도록 우리가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도는 하되 빈자리 때문에, 교회의 부흥 때문에 스트레스는 받지 말기 바랍니다. ‘주여, 교회의 부흥은 물 흐르듯 성령께서 하시는 줄 믿습니다. 심고 물주는 일은 우리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부흥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빈자리 때문에 스트레스는 받지 말기 바랍니다. 앉아있는 성도만 보십시오. 앉아있는 자리가 더 귀한 것입니다. 앉아있는 자리의 지체들이 서로 상합하고 연락하고 서로 팔 힘, 손가락 힘을 내면서 동역할 때 거기에 빈자리가 메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내가 내 모습도 바로 못 세우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옆자리를 세운단 말입니까? 내가 내 모습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충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청지기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데 이 축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하는 말을 집합해 보니까 주님 앞에 많이 쓰이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축복이 무엇이냐? 우리는 축복을 어떤 선물을 받듯이 하는데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많이 쓰이는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하라” 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와 가장 긴 터널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 하면, 규모로 보나 높이로 보나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라고 할 것입니다. 다음에 가장 긴 터널이라 하면, 으레 영국에서 유럽 대륙으로 연결하는 도버해협 터널을 떠올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도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대로 그 두 가지가 다 일본에 있습니다. 그 다리 이름이 ‘세토대교’로 길이가 9.4킬로로 교각의 길이가 1.99키로 아주 긴 다리입니다. 다음에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해저터널로 ‘세이칸터널’인데 53.85킬로의 해저터널입니다. 전부 기차운행을 위해서 20년 동안 천문학적인 투자를 해서 일본이 건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미국에서 했는데 지진이 많은 나라 일본에서 이런 대교, 이런 터널을 건설한데에 대해 이것은 공학의 혁명이고 놀라운 인류의 업적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우리는 왜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까? 지금 이 다리와 터널이 일본정부의 골칫거리 중에 골칫거리입니다. 유명했다면 한국사람들이 벌써 그 다리를 건너갔을 것입니다. 이 공사를 기획하고 시작한 그 때는 해저터널을 놓아서 열차를 운행하면 엄청난 교통단축이 되고 유익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국운을 걸고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사하는 기간에 사회환경이 변했습니다. 항공산업이 발달해서 비행장이 여기저기 생기게 되고 항공요금이 저렴하게 되니까 누가 기차를 타려고 합니까? 기차를 타는 사람이 거의 없고 전부 비행기를 타려고 합니다. 20년 동안에 변화될 공사비용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너무 적자가 많이 나니까 일본정부에서 이것을 팔려고 하는데 M사가 그것을 사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교이름도 바뀐다는 것인데 어떨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도버해협터널은 그렇게도 유명하냐? 수많은 차량들이 지금도 그 다리와 터널을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유명해졌고 관광객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많이 쓰이는 게 복입니다. 나는 그 자료를 보고는 ‘이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굉장히 어수선합니다. 정부가 ‘2030프로젝트’라 해서 천문학적인 예산을 가지고 한반도를 마치 무슨 샹그릴라, 이상국가를 만들 것처럼 그림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모두 좋습니다. 행정수도 이전도 좋고 균형개발도 좋습니다. 그러나 2,30년 후에 세토대교처럼, 세이칸터널처럼 저런 시설이 안 생겨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자기 돈 안 드니까, 눈먼 돈이니까 선거 때만 되면 백성들을 현혹시킵니다. 20년 후에 우리나라에도 일본의 이 전철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사용되지 않는 것, 그보다 불행한 게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것, 충성하는 것, 하나님께 내 것을 드려서 섬기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기 바랍니다. 내 것이 사용되지 않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용되지 않는 것을 안심하고 있을 게 아닙니다. 조금만 있으면 녹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와 관계없는 세상 것이 되고 맙니다.

맺는 말

우리 장로님들이 저와 같은 장수시대를 살고 계시지만 2,30년 안에 다 하나님 앞에 가야 됩니다. 이 땅에 애착하는 그게 2,30년 후에 나와 아무 관계없는 녹스는 것으로 끝납니다. 녹슬기 전에 쓰여 져야 됩니다. 내 건강도, 시간도, 재물도, 재능도,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은 모든 것은 쓰여 져야 됩니다.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청지기의 축복을 군데군데마다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충성한다는 말은 쓰여 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다 써서 열 달란트를 거두는 게 충성입니다. 우리는 다섯 달란트를 안 쓰고 또 다섯 달란트를 얻으려는 잘못된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가 쓰여 져서 열 달란트가 되는 것이지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버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은사가 그런 것입니다. 청지기의 축복은 충성이라는 개념이 쓰여집니다. 금문교처럼, 도버해협터널처럼 온 지구촌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모든 성도들이, 우리 자손들이 나를 본받고 싶어 하는 그런 청지기의 걸음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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