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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출 15:1-21)

by 【고동엽】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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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출 15:1-21)

제가 살던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에 ‘매직(Magic) 103’이라는 FM라디오 방송국이 하나 있었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 그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광고가 나온 적이 있는데 이런 것이었습니다. 먼저 화면에 어떤 젊은 부부가 지금 막 새로 태어난 자기 딸아이를 함께 들여다보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들 옆에 있던 라디오에서 “그녀가 사랑스럽지 않아요? 정말 멋진 애 아니에요? 태어나고 일 분도 채 안 되었지만 정말 둘도 없는 소중한 제 딸 아니겠어요? (Isn’t she lovely? Isn’t she wonderful? Isn’t she precious? Less than one minute old.)”라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유명한 노래가 우연히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노래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그 부부는 완전히 행복에 잠긴 황홀한 미소를 짓게 되고, 그 순간 텔레비전 화면에 “음악은 마법입니다. (Music is magic.)”라는 자막이 나오면서 그 ‘매직(Magic) 103’이라는 방송국을 선전하는 광고입니다.

정말 그 광고 문안대로 음악은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어떤 노래의 가사가 듣는 이의 사정이나 심정에 꼭 맞아 떨어지게 될 때 음악은 실로 마술과 같은 신비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팝송도 이처럼 어느 순간 어느 경우에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답다면, 하물며 성도가 부르는 찬송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기쁠 때 찬송하고 슬플 때 기도하라’는 말처럼, 특히 어떤 기쁨의 체험을 두고 부르는 찬양은 성도의 심령을 그야말로 가장 황홀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 같은 찬송의 최고 경지를 체험한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의 도우심을 입어 홍해를 무사히 건넜을 때였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1절 이하 18절까지 기록된 그 노래는 후에 ‘모세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게 되었으며 이스라엘 자자손손에 이르도록 가장 유명한 대중찬송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유명했던지 나중에는 ‘모세의 노래’라는 제목을 굳이 말하지 않고 그저 ‘그 찬송 (시 106:12)’하면 다 알아 들을 정도로 유명한 찬송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 ‘모세의 노래’는 그처럼 유명한 찬송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모세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들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의 심령이 반응하는 그대로 노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도 그 가사의 내용이 그들 자신의 신앙고백들과 그야말로 ‘매직(magic)’처럼 꼭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이 ‘모세의 노래’를 함께 배우면서, 과연 성도는 어떤 이유들 때문에 그처럼 감동적인 찬송을 함께 부르게 되는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하나님 살아 계심을 느끼는 까닭에 힘 있는 찬송으로 영광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총 다섯 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모세의 노래’라는 찬송의 제1연의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본문 출애굽기 15장 1절부터 5절까지 기록된 것으로서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라는 가사였습니다.


이 제1연에 보면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내」 혹은 「나의」라는 말과 또 「여호와」, 「하나님」, 혹은 「그」, 「그의」라는 단어들입니다. 그 중에서 「나」라는 말들은 이 찬송을 부르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뚜렷이 보여 줍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각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고 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찬송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기 이전에 먼저 ‘내’가 부르는 찬송이 되어야만 합니다. ‘나’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감동되어 부르는 찬송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교인들이 모여 함께 부른다 하더라도 그 찬송은 맥 빠진 소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휘자가 선창을 하고 아무리 성가대원들이 열심히 부른다 해도, 회중의 성도 각자가 ‘나의 노래’로 고백하고 불러야 만이 진정 힘 있는 찬송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란 말들은 이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밝혀 줍니다. 모세의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기도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가 부르는 찬송의 ‘간접 목적어’이기도 했으며 또한 ‘직접 목적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특히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두고 힘차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영화로우신 하나님, 힘과 노래와 구원이 되신 하나님, 자신과 또한 자신의 조상의 하나님되신 하나님, 용사이시며 ‘여호와(스스로 계신 자)’이신 하나님-이런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즉 여호와께서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심 그 자체를 두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그의 벅찬 감동을 노래하는 가사들인 것입니다. 성도가 찬송 드릴 때 그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믿음과 감격과 고백이 있어야 만이 실로 힘 있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른 찬송 중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해 주신 무엇’을 두고 부르는 노래들도 많이 있습니다. 찬송가를 주제별로 분류할 때 ‘부르심과 영접’이라든지 ‘시련과 극복’ 또는 ‘평안과 위로’ 등 ‘성도의 생애’ 항목에 속한 거의 모든 찬송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성도의 찬송 중에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그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두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내게 베풀어 주신 어떤 축복과 은혜를 두고도 찬송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그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 바로 이것만 생각해도 우리의 심령이 펄펄 끓어올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40장)라는 찬송이 바로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두고 사람이 돌릴 수 있는 최대 최고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찬송인 것입니다. 어떤 찬송을 부를 때에도, 먼저 나 자신으로 하여금 이 찬송을 부르게 하시는 하나님, 이 찬송을 받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끼는 가운데, 그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면서 힘 있게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베풀어 주신 구원의 감격 때문에 뜨거운 찬송으로 감사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의 노래’ 제1연에도 나타났고 특히 제2연부터 제4연까지에 더욱 강조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중 제2연에 해당되는 본문 출애굽기 15장 6절로 8절에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두 번 반복되고 있는 「오른손」이란 표현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그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 굳이 그 오른손까지 사용하실 필요조차 없이 그저 「콧김」에 해당할 바람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라고 모세는 노래했던 것입니다.


제3연의 가사는 본문 9절과 10절에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출애굽을 방해하려는 원수의 악한 뜻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는 도무지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통쾌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욕심과 살의를 버리지 못하고 홍해까지 쫓아온 애굽 왕 바로였지만, 그의 최정예 군대와 마병과 병거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람 한번 살짝 불어 보내시니까 그야말로 「납 같이」 한 순간에 수장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4연은 본문 11절로 12절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는 가사였읍니다.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이것은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나 그 능력에 있어서 그 어떤 적수(rival)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노래한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이 노래하는 대상으로서 이보다 더 위대한 대상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모세는 그의 찬송의 제1연으로부터 제4연까지 하나님의 유일하신 존재와 능력을 반복하여 찬송하면서, 매 연의 끝마다 하나님의 행하신 한 가지 뚜렷한 역사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 유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홍해의 기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나이다」,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같이 잠겼나이다」,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는 표현들은, 그처럼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그 악한 원수들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홍해 가운데서 사라지게 되는 것을 목격한 생생한 흥분과 감격을 노래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모세와 그의 백성들은 그 놀라운, 그 신비한 하나님의 구원을 지금 막 체험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존재와도 상대가 되지 않을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크신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일에 사용하신 것을 아직도 그들 피부에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 막 목도하고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찬송은 평생 불러도 결코 지겨울 수가 없는 항상 생생한 감격이 되살아나는 영원한 찬송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정도였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겨우 애굽 군대의 손에서 구원받게 된 것을 두고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큰 감격의 찬송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면, 오늘날 원수 사단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 큰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 성도에게 어찌 감격의 찬송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가르실 때에는 겨우 ‘콧김’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이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까지 하시면서 이루어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우리가 어찌 소리 높여 찬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 때문에 성도는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403장)라고, 실로 찬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찬송을 올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연가(戀歌)도 도무지 따라올 수 없는 이런 찬송, 예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우리의 인격 중심부에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우리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이 찬송, 오직 구원의 은혜에 감격한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이런 감격적인 찬송을 함께 부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도는 약속된 미래의 축복을 믿음으로써 기쁨의 찬송으로 서로 화답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의 노래’의 마지막 제5연의 내용이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13절로부터 17절까지 기록하기를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약하자면, 광야 여행길의 모든 어려움을 통과하고 끝내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이르게 될 것을 두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기 「은혜」라는 단어는 ‘불변의 사랑(steadfast love)’이라는 뜻의 히브리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기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그 변함없으신 사랑으로써 그 백성을 가나안 땅에 이를 때까지도 계속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 그것을 두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블레셋, 에돔, 모압, 가나안 땅에 거하고 있는 열방과 거민과 방백과 영웅들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 할 것이라고 모세는 역설적으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선하신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의 인도를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의 결과 이르게 될 가나안 땅의 축복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상상만 해도 너무나도 멋진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가나안 땅을 여기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표현하지 않고, 「주의 성결한 처소」이며 「주의 기업의 산」이며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곳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친히 구별하여 예비하신 거룩한 땅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실 땅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예배받기 위하여 준비하신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가운데 살게 될 가나안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세의 마음이었기에, 비록 그의 몸은 이제 막 홍해를 건넌 자리에 있었지만, 아직 넘어갈 광야 행군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 있었지만, 모세는 그처럼 큰 기쁨으로 소망의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 땅 위에 속한 한 처소를 생각하면서도 그 곳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장소로 생각한 까닭에 그처럼 큰 기쁨의 찬송을 부를 줄 알았다면, 가나안 땅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저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될 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미 당신의 독생자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우리를 앞으로도 끊임없는 사랑으로 계속 견인하시고 이 광야 세상에서 모든 환난을 넉넉히 통과하게 해 주실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찬송이야 얼마나 기쁨에 넘치는 것이 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어 주실 금세와 내세의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는 지금 앞길을 막고 있는 돈 문제나 건강 문제나 가정의 문제로 인하여 미리 떨고 두려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것들은 「돌같이 고요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잘 먹고 잘 사는 정도로 끝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그곳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님과 동거할 수 있는 처소입니다.


바로 그런 소망을 가진 성도들만이 ‘나 가난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 버렸네… / 이후로 생명 양식 주와 함께 먹으며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221장)라는 찬송을 터질 듯한 기쁨을 가슴에 품고 함께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천당이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은 결코 부를 수 없는 노래, 그러나 가나안 복지가 영안에 뚜렷이 보이는 성도들은 춤을 추면서 부르고 싶은 노래,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만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이 금세와 내세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이 기쁜 찬송을 함께 부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출애굽기 15장 18절에 보면 이 아름답고 영감 넘치는 ‘모세의 노래’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라는 또 하나의 멋진 구절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잇습니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을 송축하고, 과거에 홍해에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리며, 또한 미래에도 광야에서나 가나안에서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생각하니, 실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히 우리를 다스리신다’고 마지막으로 또 한번 크게 소리 높여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계시록 15장 3절에 보면 이 ‘모세의 노래’를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선 성도들이 또 부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찬송은 이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저 천국에서도 함께 부르게 될 노래인 것입니다. 거기서 함께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 땅에서 그 ‘모세의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꼭 같은 찬송의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 때문에,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은총 때문에, 그리고 ‘저 생명 시냇가에 길이 살겠네’라는 꼭 같은 소망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꼭 같은 찬송을 부르면서도 어떤 교인은 그 찬송을 힘차게, 뜨겁게, 기쁘게 부르는데,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맥없이 입술만 달싹거리면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노래’와 같은 찬송의 가사에 그 심령이 공감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따라서, 꼭 같은 찬송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매직(magic)’처럼 그 심령에 황홀하게 전율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따라 부르기도 귀찮은 노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그런 찬송을 함께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이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천당에 가서 그 ‘모세의 노래’를 부를 때 그게 무슨 노래인지, 어떤 감동으로 부르는 노래인지, 그 가사도 곡조도 모르는 사람이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천당에서 그 새 노래를 함께 부를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구원, 장차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약속, 이보다도 더 멋진, 이보다도 더 우리를 감격하게 하고 기쁨에 넘치게 할 찬송의 제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의 이름을 힘차게, 여호와께서 행하신 구원을 뜨겁게, 그리고 그 이루어 주실 약속을 기쁨으로 함께 찬송함으로써, 마귀가 놀라서 도망치고 천사가 부러워하는 이 찬송의 신비한 힘을 항상 충만하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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