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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예수님

밀알이 되신 예수님 (요12:20-26)

by 【고동엽】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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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이 되신 예수님    (요12:20-26)

지난 주 토요일 온 교회가 힘을 합해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하나님의 딸 잔타가, 우리 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우리는 잔타가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래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잔타를 데려가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왜 잔타를 데려가셔야만 했을까요?
지난 주간, 아프가니스탄에 의료선교 활동을 떠났던 분당 샘물교회 성도들 23명이 탈레반에 의해 인질로 붙잡혔고, 그 중에 배형규 목사님이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러 간 의료선교팀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합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이런 사태는 막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수시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지구상에 자연재해는 끊이지 않는 것일까? 왜 매년 태풍과 홍수와 지진과 폭염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야 하는가? 왜 이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직,간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질병과 고통과 실업과 원치 않는 불행이 닥치는 것을 막아주시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볼 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선하시지 않거나, 아니면 전능하시지 않은, 어떤 면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쓸 수 없는 무능한 분은 아니신가?
사실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제 마음 속에 끊임없이 맴도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하시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오늘 말씀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죽어라, 그래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이고 생명의 법칙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깨달음으로 오늘 우리의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루살렘을 찾아온 이방인
먼저, 20-22절 말씀을 보면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 몇 명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뵙기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 지식인들로서, 민주주의와 인본주의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입니다. 또한 종교성도 강해서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영혼불멸과 사후세계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은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타인과 구별되었으며, 내용도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직접 듣고 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표적, 특히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을 보며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다는 것은 죽음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한 호기심에 의해, ‘예수가 누굴까? 어떻게 생겼을까?’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영적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이렇게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한복음에는 “때” 사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니다’, 또는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가 무슨 때입니까? 이 때는 고난의 때이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 때이며, 구속역사를 완성하는 때입니다. 한 마디로 죽을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때를 ‘죽을 때’라고 하시지 않고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자체를 곧 영광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를 영광의 때라고 봅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며 환호성을 하고 찬송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죽음이 영광이 됩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24절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습니다. 밀알의 법칙은 생명의 법칙이며 자연의 원리입니다. 한 알의 밀에는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밀알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닮은 똑같은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능력, 즉 생산력이 있을 때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성장해서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생명체인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밀이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2-3cm 땅 속에 묻혀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먼저 돋아나서 물과 양분을 흡수합니다. 그 다음에 싹이 돋습니다. 그리고 씨 속의 양분이 싹으로 이동해 분해됩니다. 햇빛을 받아 탄소 동화작용을 하며 자라나, 꽃을 피우고 무럭무럭 자라가 결국 수많은 알곡을 맺게 됩니다. 여기에서 땅 속에 묻히고 배젖을 탄생시키기 까지가 썩는 과정입니다. 나중에는 빈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래야 다른 생명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썩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렇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4개월 후에 열매를 맺게 되는 데 보통 100-125알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5년 후면 100-125억알을 맺게 되고, 이것은 200명이 34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100% 썩는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칙입니다. 100% 자기 분해를 해야지만 열매를 맺습니다. 아니면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아니 나중엔 자기 생명도 잃게 됩니다.
썩는다는 것은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를 본성상으로 거부합니다. 나의 존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며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더 풍성한 생명을 위한 과정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새로운 생명을 위한 놀라운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 한 알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100개 이상으로 다시 풍성해 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밀알의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황태자이시지만, 모든 영광을 다 보리시고 한 알의 밀처럼 이 땅에 떨어지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시고, 머리 둘 곳도 없으셨으며,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인생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기 때지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100% 자기가 깨어지고, 분해되고, 썩는 과정을 사셨습니다. 빌립보서 2:6-8절 말씀처럼, 자기를 비우는 삶을 사셨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케노시스’는 십자가의 죽음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깨어짐의 절정은 죽음인 것입니다. 이 죽음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삶으로, 죽음으로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열매 맺는 사람을 원합니다. 풍성하고 의미있고 보람있는 삶을 원합니다. 또한 우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는 하나님께서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를 사셨지만 미래를 바라보시며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실 수 있었습니다. 열매를 보셨기 때문에 오늘 썩는 삶을 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그래서 예수님은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람은 지구에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죽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 때, 악착같이 돈을 위해, 권력을 위해, 대지 몇 평에 건평 몇 평 집을 위해 살 때, 결국 무엇이 남겠습니까?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입니다. 게다가 죽음 후 심판까지 받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의 끝인 이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미워한다는 말씀은 자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인간적인 모든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와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생명의 구속 역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과 건강과 물질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젊음과 청춘과 나의 온 생애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어리석고 시간 낭비와 같은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삶이고, 현명하며, 열매 맺는 삶인 것입니다. ‘프쉬케’의 생명을 ‘조에’를 얻는데 투자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러므로 이 약속을 붙들고 이 약속에 투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또한 예수님은 26절에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곧 예수님을 섬기는 자이며, 그는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고통스럽고 아픔이 있지만, 나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어찌 썩는 과정이 즐겁기만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생명의 진리입니다. 해산의 수고가 있어서 새생명의 탄생을 보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적으로도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기업가를 보고, 사업가를 보십시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 얼마나 고통과 인내와 수고와 노력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때론 우리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체험을 하거나, 아니면 그 고통과 고난의 과정을 옆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저렇게 죽어야 하는가? 꼭 저렇게 썩어야 하는가? 쓸모없는 일이 아닌가? 낭비가 아닌가? 하나님은 꼭 그렇게 하셔야 하는가?” “잔타 안됐다... 불쌍하다... 수술을 안했으면 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부모님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이 집사님은 얼마나 마음이 힘들까... 목사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좋은 일 하려고 했던 길병원 선생님들... 이것은 인간적인 마음에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친다면 신앙인의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되어진 모든 일들은 사람의 힘으로 계획할 수도 진행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규찬집사님에게 잔타에게 새생명을 주고 싶어하는 간절한 영적소원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길병원을 동원해 수술팀을 준비시켜 주셨고, 영암교회와 밀알심장재단을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렇게 순조롭게 모든 일을 연결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순식간에 없었던 일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 있냐고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원망이나 허탈감에 빠져있을 것이 아니라, 잔타의 생명을 데려가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우리는 잔타가 다시 살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잔타를 데려가셨는가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우리 가슴 속에 새겨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길병원 선생님들도 두 번에 걸친 수술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밀알심장재단도, 영암교회도 최선의 후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이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던 대로 성공했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도적질 당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잘 되었다면, 영암교회가 좋은 일했다! 길병원이 캄보디아의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줬다! 아마 교회 자랑, 병원 자랑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 교회만 해도 온 성도가 이 일에 관심을 갖고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관하신 일의 영광을 사람이 다 가로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한 무릎을 꺾어 주셨고, 기도하게 하셨고, 생명의 소중함과 선교의 시급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성공하셨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보다 천국이 분명 더 좋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으셨고, 잔타는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받아주셔서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고, 이 세상 그 어떤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천국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음으로 영접하시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해 오해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조그마한 개미를 가지고 이리저리 장난치면서 놀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즐기고 계시지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친히 썩는 밀알이 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이 고통당하는 길을 걸어가게 계획하셨고, 아들이 순종하며 가는 그 고난의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여러분! 자식이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딸 잔타의 고통 중에서도 끝까지 함께해 주시고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정확한 시간에 딸을 데려가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두 번에 걸친 수술 이후, 잔타의 회복을 위해 의료진은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온 선교팀들이 방문하여 믿음의 큰 도전을 받고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수술 이후 몸의 여러 장기와 기관들이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그 동안 부모님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잔타가 부르심을 받기 1시간 전에 허락해 주셨습니다. 잔타의 부모님들이 사랑하는 딸의 손과 발을 쓰다듬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잔타를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품 속에서 하늘나라로 가게 해 주셨습니다. 다른 의료진들은 하루 전에 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규찬집사님은 하루 더 남으셨습니다. 그러나 집사님도 그날 밤 11시 비행기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 집사님에게 하나님께서는 잔타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해 주셨고, 임종예배까지 드리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아 주셨습니다. 자식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사랑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밤 9시, 부모님들과 함께 수술받은 5명의 아이들의 보호자, 그리고 현지 선교사님들이 함께 모여 입관예배를 드렸습니다. 포이펫에 남아있던 가족들과 성도님들도 연락을 받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기 위해 새벽 2시에 출발하셔서, 22일 주일 오전 11시에 프놈펜 깔멧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셨습니다. 부모님들과 형제들, 그리고 친척들이 입관 전 잔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고, 함께 발인예배를 드렸습니다.
장지는 구견회선교사님께서 사역하시는 시아누크빌 근교의 빵 따 쁘롱 교회 내 묘지였습니다. 잔타 가족과 포이펫영암교회 성도님들, 서울 광명교회 성도님들과,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오신 강릉영동대학 간호학과 교수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구견회 선교사님과 신학생들 등 100명이 넘는 분들이 참석해 잔타의 생명을 받아주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장례가 마친 뒤 잔타의 부모님들은 캄보디아에서는 할 수 없는 심장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잔타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잔타를 위해 최선의 다해 주신 한국의 의료진들과 헌혈해 주신 많은 분들, 그리고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께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의 말씀을 꼭 드려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보다 풍성하게 열매맺도록 하시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믿음으로 영접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겪는 어떤 고통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겪는 어떤 고통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시다!”

셋째, 이제는 각자가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썩는 밀알의 삶을 살고 있는가?”

결국 모든 인생은 죽습니다! 다만 그 날과 때를 모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언제 죽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는가’입니다. 어떤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인가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잔타의 마지막 6개월의 삶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누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했음을 확신합니다. 직접적으로는 다섯 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함께 수술 받은 다섯 명 중에 4명은 퇴원하였고, 한 명도 곧 퇴원할 것입니다. 또한 그 다섯 명의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이번 일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들도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면서 잔타 때문에 내 아이가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잔타는 그 아이들의 부모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밀알심장재단에서는 앞으로 5년동안 매년 20명씩 100명의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들을 수술하는 협정을 맺었습니다. 앞으로 캄보디아의 100명의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잔타의 이름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져 죽어감을 통해서 죽었던 105명의 아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욱 생명력있게 증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행하셨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남은 것은 우리입니다. 잔타와 그의 가족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영광을 드리겠습니까? 이제는 누가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썩는 밀알이 되어 이 땅에 새생명을 심어주셨듯이, 잔타 또한 썩는 밀알이 되어 캄보디아 땅에 예수님의 생명을 심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을 알고 믿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이 땅에 세워진지 60년이 넘은 우리 영암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겠습니까? 그냥 이 일을 묻어두고 바쁜 일상 속으로 되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일들이 무의미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잔타가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삶을 산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도전이 되었습니까? 이제 이 일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지나쳐 버리고 무시해 버릴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 인간적인 생각과 계획을 버리는 회개 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친 것을 회개합니다!” 예수님처럼 잔타처럼 내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열매맺도록 하겠다는 썩는 밀알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복음을 위해 전도하고 선교하겠다는 생명의 운동이 우리 안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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