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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의 이름 (사도행전 3:1~10)

by 【고동엽】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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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의 이름  (사도행전 3:1~10)

오늘은 성령강림주일로 지킵니다. 기독교 초기 역사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성에 대해 지금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생각할 때 이해되지 아니하는 부분은 '어떻게 제자들이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같이 살았습니다. 출퇴근 하는 식의 만남이 아니라 아예 가족 구성으로 같이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체험들은 제자들만이 받은 축복이라고 생각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가는 신비 체험을 했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서 물 위를 걸어본 사람은 베드로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자신에게 나타난 그 신비 사건 하나만 기억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으라면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흥 집회는 만 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좋으셨는지 하루 종일 설교를 하셨죠? 제자들이 조금은 짜증스럽게 반응합니다. "이제 그만 돌려보내소서. 날이 기울어졌나이다. 배도 고프고 갈 길도 멉니다." "아니, 그러면 너희가 먹을 것을 좀 주면 될 거 아니냐?" "이곳은 빈들이요 먹을 것이 어디 있습니까? 돈도 없습니다.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한데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일어난 것이 오병이어 기적 사건입니다. 자기들도 배불리 먹었고 자기 손으로 다 나눠줬습니다. 그 중에 남은 것을 12바구니나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됩니까? 이 사건 하나만 해도 "이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순종하고 순교 당해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어떻게 살아납니까? 자기 친구 나사로가 죽어 썩어 냄새나는 무덤 현장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시니까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함께 지낸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봐야 됩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십자가 사건이 닥쳤을 때는 하나도 안 남고 모두다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나만도 못한 신앙의 소유자였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체험한 경험들을 우리가 똑같이 경험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 사역의 직접 경험자들이 아닙니다. 전하여진 말씀을 듣고 간접 경험의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그래도 열심히 믿고 순교를 당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직접 경험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한 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몇 번씩이나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만져보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만난 제자들이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갈릴리 바다로 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찾아가 제자들을 만나시는데,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예수님의 12제자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사역자들이 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성령체험 이후입니다. 오순절 성령체험 이후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일상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세상 사람들도 다 계시다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적 사역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절대로 냉담합니다. 문제는 성령님의 체험적 내재성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성령 강림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며 성령 충만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신학적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성령 충만해진 제자들의 초기 선교 활동이 비로소 소개되고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가 처음으로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을 때 일어났던 작은 사건 하나를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기독교가 가고자 하는 길의 본질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조명함으로 우리들의 신앙생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초대 교회는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자기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1절에 소개되고 있는데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에 제자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성전에 가서 기도를 드렸던 확실한 증거 기록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은 지금 우리들이 쓰는 시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 구 시"는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가서 기도드린 것을 제일 먼저 실천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제 삼 시, 제 육 시, 제 구 시인데,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오전 9시와 12시, 오후 3시입니다. 아마 오늘날과 같은 문명권에서 이런 일은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이슬람교에서는 하루에 5번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는 농사를 짓던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다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살아갑니다. 오늘날도 초대 교회 본질적 모습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의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창립 역사의 과거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우리 대한민국의 경우는 어느 동네에 교회가 하나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처음부터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누구네 집 사랑방 같은 것을 하나 빌려서 그 이름을 기도처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다 교회로 창립을 보게 된 것이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회들도 다 그렇습니다. 유럽에 교회가 생겨진 모습을 보시면 루디아와 그 종업원 몇 사람이 모여서 기도를 드렸는데 바울 선생이 처음으로 유럽으로 건너가서 성경 말씀에 기록하기를 어디 기도처가 없는가 하여 살피다가 기도하는 사람들 만나서 루디아의 집을 기도처로 정하고 거기서 기도하다가 그것이 유럽 최초의 교회인 유럽 빌립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로부터 시작하고 기독교는 기도로부터 시작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지금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이런 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2000년 역사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대한민국 땅에 처음으로 찾아와서 순교를 당한 외국 선교사들의 역사를 다 따져 봐도 200년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면 2000년에 비해서 10분의 1밖에 안 되는 2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가? 사실 우리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명도 없던 시절에 유럽은 90퍼센트 이상이 다 예수 믿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우리나라에 예배당 하나도 없었을 때 유럽은 우리가 지금 관광 가서 보는 세계적인 대성전을 다 완성했습니다. 그 후에나 우리나라에 겨우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계 선교는 지금 미국과 대한민국 교회가 아니면 안 됩니다. 미국이 현재로서는 가장 많이 하고 대한민국이 두 번째입니다. 이 두 나라가 아니면 세계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한민국 교회가 이렇게 훌륭한 성장을 했으며 세계 선교에 이렇게 역사가 짧은데도 유럽 교회보다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는가? 얼마 전에 헝가리 선교사가 저에게 편지가 보내왔습니다. 우리가 만든 "갈보리 MISSION"을 보내주었는데 다 살펴보더니 헝가리 한 나라가 하는 것보다도 갈보리교회 하나가 하는 것이 더 많다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지금 이런 실정입니다.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앞에 내놓을 만한 장점이 무엇인가? 무엇을 잘해서 그렇게 되었나? 신학적 지식이 앞서가서? 그것은 독일 교회입니다. 사회정의 실현이 뛰어나서? 그것은 미국교회입니다. 역사와 전통이 깊어서? 그것은 이태리입니다. 예배의 절차와 내용이 장엄해서? 그것은 러시아 교회입니다. 못 따라갑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한 가지를 잘합니다. 세계 어느 교회도 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기도 운동입니다. 다니면서 보세요. 대한민국과 같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오는 교회가 있는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아왔습니다. 우리 한국인으로서 목사가 된 사람은 잘못하면 교인들에게 아주 나쁜 별명이 하나 붙습니다. 새벽기도 안하는 목사를 보고 교인들이 저 목사는 가짜 목사라고 합니다. 기도도 안하고 맹탕으로 목회한다고 합니다. 가짜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별명이 붙습니다. 대체적으로 기도 생활을 항상 하는 사람들은 이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영혼이 풍성해서 그런 것입니다. 평생 가야 기도 한마디 심각하게 안하는 사람은 원망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 교인들에게 담임 목사로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곳에 계시다가 먼 곳으로 이사를 가셔서 다른 교회를 출석하는 그런 때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교회에 대해 아무 원망도 하지 마시고 조용히 봉사하면서 사세요. 교인들이 그동안 그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눈물로 기도를 드리고 헌금하고 교회를 만들었겠습니까?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 한마디 안하는 사람이 그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혜택을 받고 예배를 드리겠다며 이런 저런 원망을 털어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 위에 기독교는 창조적 발전이 가능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초대 교회 지도자로서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성전에 가서 기도함으로 세계 선교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웠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성전에 들어가려 할 때 앞에서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은 일이 벌어집니다. 매우 불쌍한 사람 한명이 돈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교를 향하여 세상은 언제나 무엇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오늘 이 사람은 출생 당시부터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리고 지금까지 생활이 빈궁해서 구걸 행각을 해야만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앉아있는 장소가 구걸하기에는 대단히 좋은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도시는 성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군데군데 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미문은 제일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문이라서 그곳에 자리를 정하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에게 돈을 좀 달라고 동냥을 하는 신체 장애인이요 자생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라고 했습니다.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세상 앞에 내놓는 간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랬더니 세상이 기독교를 향하여 "그러면 뭘 좀 내놔라!" 그래서 항상 무엇을 얻을까 하여 끊임없이 교회를 두드립니다. "무엇을 좀 교회가 내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왜 교회가 잠잠하고 있느냐? 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기독교는 이런 질문을 끝없이 받아왔습니다. 만약 어떤 교회가 좀 성장했다고 합시다. 교인이 많아지면 그 교회는 그때부터 계속해서 사회의 요청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계속 얻어맞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 사랑을 간판으로 내거는 교회가 이 사회에 대해서 그렇게 냉담하냐?" 여러분, 지나간 몇 십 년 동안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이 데모를 가장 많이 하는 장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명동성당입니다. 아니, 왜 성당 앞에서 데모합니까? 교회가 가만히 있지 말고 일에 동참하라는 사회적 요청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 목회자들은 이 사회참여 분야가 얼마나 신경이 써지는지 아주 잠이 안 옵니다. 어떤 때는 안 해서 욕먹고 해서 잘못했다고 욕먹고 정말 힘이 듭니다. 제가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할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 하면 "북한에 식량 보내기 운동"을 미주 이민 교회에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것은 어떤지 모르지만 좌우간 같은 동지들이 굶어 죽는다는데 식량 좀 보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인들에게 광고하면 헌금이 많이 나왔습니다. "한 사람 앞에 밀가루 한 포대씩 보냅시다." 하면 한 사람이 100 포대씩 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보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국에 가서 기차에 산더미같이 싣고 수없이 보내주는 작업을 제가 4~5년 하다가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속하고 있는 미국 장로교단 PCUSA에서 이것을 효과적으로 하려고 북한에 있는 거물급들을 미국으로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 교계의 지도자들 5명이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굶어 죽는다고 하니까 형제들에게 식량을 보내주는데 당신들과 손잡고 이렇게 보내주면 북한 굶주리는 형제들에게 나눠주십시오." 그것을 협의하고 '이것을 통해서 북한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이다.' 기도하고 바라는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소속한 노회의 노회장이라는 직분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처음에 와서 머무는 장소가 LA이니까 이 목사가 그 사람들을 환영해서 총회로 하룻밤 재워서 환영사하고 보내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노회장이라는 직책에 있을 때니까 총회가 명령을 하니 하라는 대로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대표자로 온 사람이 강영섭 조선 기독교 연맹 위원장인데 강양욱 목사의 아들입니다. 강양욱 목사는 김일성의 외삼촌입니다. 이런 실력자들이 왔습니다.

LA의 한인 목사들을 다 불러 호텔에서 총회에서 시키는 대로 환영해서 잘 먹이고 잘 재워서 총회로 잘 보내는 작업을 하는데 제가 책임자니까 이쪽 대표자와 그쪽 대표자들이 나란히 앉아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매스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와서 계속 찍어대는데 저에게 환영사를 하라고 해서 환영사를 했습니다. "저 분이 이렇게 오셔서 반갑습니다. 동족끼리 만나서…." 이런 말을 하고 신문 기자들은 저에게 남북이 한번 끌어안으라고 해서 징그럽지만 어떡합니까?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공산당을 한번 끌어안으라고 해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잘 지나갔습니다. 그 이튿날 우리 한인 신문에 주먹 같은 글씨로 크게 났습니다. "미주 조총련이 생기는데 교계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러면 저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 교회가 사회 참여하면 이렇습니다. 안하면 안하는 대로 크게 욕먹습니다. 하고 나면 왜 그렇게 하느냐고 참 힘이 듭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도 365일 거의 날마다 편지가 날아옵니다. "여기에 동참하라, 저기에 동참하라!" 안하면 안한다고 채찍이고 달라고 요청하는데 왜 안주느냐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런 과정을 2000년이나 겪어왔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줄 수 있는 겁니까? 지금 여기서 바라보는 것은 돈입니다. "돈 좀 주십쇼."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교회는 세상을 향해 달라고 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주는 그런 기관이 아닙니다. 우선 세상이 달라는 대로 줄 수 있는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줍니까? 세상이 요청하는 것은 은과 금입니다. "빨리 돈 내놓으시오." "교회가 좀 도와주시오." 교회가 아무리 커도 실제 예산의 규모를 보면 우리 갈보리교회도 성장한 교회 중에 하나인데 일 년 예산이라야 조그만 기업 하나 하는 것 것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헌금 가지고 450군데 선교비 보내고 자체 운영하고 하면 매일 적자 운영하며 나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청은 끊임없이 옵니다. 어떤 때 '여기는 우리가 좀 보내야 되겠다.'해서 보냅니다.

그러면 답변이 어떻게 오는지 아십니까? "갈보리교회가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거기에 배로 보태서 좀 우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한번 그런 대접 받아보세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비웃는 겁니다. "교회가 그 정도하니 이런 계획 좀 도와달라는데 이렇게 조금 주시니 도로 가져가십시오." 그러면서 "우리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러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뭘 좀 내놓으시오." 항상 바라보며 무엇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돈이 없다는 말에 이 사람은 일단 실망했습니다. '저 사람은 나만도 못한 사람들인가? 나는 동냥은 하지만 그래도 몇 푼의 돈은 있는데…. 아니면 지독한 구두쇠라서 주기 싫으니까 그냥 지나가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때로 세상의 실망스러운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지금 당장 길바닥에 앉아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현실적으로 시급한 문제에 대해 교회가 왜 저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나?" 반응을 주지 않는데 대한 비판의 소리가 아주 높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가?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줄게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을 네게 주겠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뭐냐? 기독교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열심히 나누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것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유일한 힘이요 재산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본질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주는 것이 본질적 모습입니다. 그가 앉은뱅이에서 일어나 걸었다고 했는데 인간 회복을 뜻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때에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그 사람에게 주었다면 오늘은 수입이 많이 생겼다고 아주 좋아했을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아마 몇 끼 정도의 식사를 즐겁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그의 문제는 또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만족시키려면 베드로는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매일 가서 만원씩 주워야 합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인간됨의 최고 가치와 영혼의 구원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영원한 영혼의 축복이 인간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돈보다도 더 귀한 것을 주는 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도록 회복된 인간이 되는 것이 돈 몇 푼을 주는 것보다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를 기독교 초기에 이렇게 베드로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 선교를 많이 합니다. 저는 6~8월 이 때가 되면 무척 바빠집니다. 왜냐하면 휴가 기간이라 이 기간을 이용해서 하는 세미나에 강사로 많이 요청하기 때문에 매우 바빠집니다. 오늘도 4부 예배 마치고 중국으로 가야 합니다. 잘못하면 선교라는 것이 헌 옷이나 걷어다 주고 마는 일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부수적으로 하는 것뿐이지 결국 주고자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으시오. 이것이 인간됨의 최고의 행복입니다."라는 진리를 주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은사 목사님 가운데 이연호 목사님을 제가 너무 좋아해서 가끔 이야기합니다. 이 목사님은 대한민국의 기독교 미술가 1인자이십니다. 난민촌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심방을 하시면서 느끼는 것은 '이 가난한 교인들에게 라면 한 박스라도 내가 사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목사님 자신은 돈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 난민촌의 모습을 많이 그려서 그것을 복사해서 교인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배가 고픈 교인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라면 한 박스가 훨씬 낫지 그림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주시니까 받았습니다.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최고 부자들이 사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받은 그림 대신 라면 한 박스 얻어먹었다면 그것은 며칠이면 다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영원했습니다. "이야! 집안의 가보다. 이것은 보물이다. 목사님이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준 것은 이 그림을 보고 그때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감사함을 잊어버리지 말자." 영원한 진리와 같이 되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일평생 형제들에게 줄 수 있는 소유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 복음을 나누어 주는 일을 365일 하루도 빼지 않고 제 일평생을 통해서 할 자신이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또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내가 돈이 많이 벌면 어떤 일을 하겠다." 이런 사람은 진짜 돈 생기면 안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은과 금이 내게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쓰는 것도 귀한 일이고, 만약 없다면 마음을 나누어줄 수도 있고, 기도로 선물해 줄 수 있고, 용기를 주는 말도 할 수 있고, 협조할 수도 있습니다. 나누어주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인간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힘이 있고 줄 것이 많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요청하는 것을 우리가 응해주려고 하지 말고 교회가 주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열심히 주면 그것이 가장 귀한 사역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을 합니다. 성전에 베드로를 따라 들어갑니다. 그동안 성전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성전에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갑니다. 인간 회복의 문제에 있어 교회에 나오는 것도 내 힘으로 못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 등에 업혀서 마지못해 오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권능으로 성령을 받아 자기 발로 걸어서 성전에 즐겁게 찾아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생 능력의 신앙이 되도록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나누어줄 수 있는 힘! 신체적 구원보다 더 기쁜 일이 히브리 민족의 인간대우, 그것이 뭐냐? "예배 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래서 항상 예배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길로 베드로를 따라 성전에 들어가 생전 처음 가져보는 아브라함 후손됨의 긍지인 하나님 백성됨의 가치를 예배 안에서 찾았습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돈을 받아간 사람이 한명이나 있습니까?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마실 것 염려하지 말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인간됨의 가치는 이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 기독교 국가가 어떤지 여러분, 평가해 보세요. 앞으로도 기독교는 가야할 길이 분명합니다. 세상이 달라는 것을 무분별하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어서 인간됨의 회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이요 전도요 선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고요한 아침의 나라, 기도를 많이 함으로 영적인 축복을 받아 이제는 세계 교회로 우뚝 섰습니다. 옛날에는 유럽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선교했으나 지금은 대한민국의 선교사가 유럽에 수천 명 있습니다.

돌아오는 8월에 파리에서 유럽에 있는 한인 선교사 전부 모아놓을 테니 이필재 목사 와서 강의해 달라고 해서 약속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내가 겪고 있는 모든 비인간적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여 내가 자유로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이 은혜가 오늘 예배 공동체에 참석한 모두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임재하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의 진리를 기독교의 본질로 저희들이 이해하면서, 그때나 이때나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은 세상이 손을 내밀며 요구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진리를 주는 것임을 저희들이 깨닫고 세계 선교에 계속해서 갈보리교회가 공헌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다 이 진리에 몸을 담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누어주되 다 참여하고 열심히 아버지를 섬기는 귀한 사역자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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