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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에 성공하라 (창 13:8-13)

by 【고동엽】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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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에 성공하라   (창 13:8-13)

(서론)

우리는 매일 같은처소에서 먹고 자고 일어납니다. 또한 같은 직장에서 반복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복되어지는 매일의 삶을 통하여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 시간마다 다른 상황과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힘찬 미래를 향하여 소망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똑같은 시간과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더 못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며,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번민을 잔뜩 안고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일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의 길이 열려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의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의 길, 아니면 실패의 길이 불신자들에게 놓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불신자들에게는 오로지 실패의 길만이 놓여져 있습니다. 지금은 사업이 형통하고 몸이 건강하고 세상의 막강한 권세와 권력을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불신자들의 최후는 실패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는 지옥의 형벌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실패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성공의 길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두 사람 아브람과 롯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였습니다. 아브람과 롯 이 두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롯은 불신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롯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임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7절을 보시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며”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롯을 가리켜서 ‘의로운 롯’이라고 인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아브람과 롯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자녀였는데 결과적으로 아브람은 성공의 길로 들어섰고, 롯은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의 모습을 불신자들과 비교해보면 서로 비슷한 점도 있지만 확연하게 두드러지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자들의 성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브람과 롯의 경우입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간에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이 아브람처럼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에 성공하는 복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 문제 발생의 원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람과 롯의 관계는 삼촌과 조카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람과 롯 사이에 큰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을 통하여 그 문제의 발생원인에 대하여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창세기 12장 1절을 통하여 “---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순종한 아브람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되었고,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 땅의 벧엘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7절을 통하여 “---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벧엘의 땅을 주셨고, 어떠한 경우에도 아브람이 그 땅을 벗어나지 말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 땅을 벗어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하여 창세기 12장 10절은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할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근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먹을 음식이 없어지자 아브람은 벧엘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가뭄이 다가오자 그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망각해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온 것은 오히려 큰 환난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아내 사래를 잃어버릴 뻔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길 뻔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목숨을 지킬 수가 있었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지도 않았고 많은 재물까지도 얻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개입이 없었다고 한다며 틀림없이 아브람은 인생의 큰 실패와 절망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때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임재하신 가나안의 벧엘로 다시금 올라가게 됩니다. 여기에 대하여 창세기 13장 1-2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가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조카인 롯과 함께 많은 재물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물질 때문에 조카인 롯하고 아브람 사이에 큰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그 당시에 아브람과 롯은 많은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가축을 기르던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게 된것입니다. 벧엘이라고 하는 좁은 땅에 아브람의 가축들과 롯의 가축들의 숫자가 불어나자 서로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목자들끼리 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아브람이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브람은 조용히 조카인 롯을 불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창세기 13장 8-9절은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람은 롯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삼촌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 주었습니다. 조카인 롯에게 좋은 땅을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서 어떤 땅이 좋은 땅인지를 심사숙고하게 되었습니다. 동쪽에 있는 요단의 들을 바라보니까 가축들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인 물이 많은 땅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도 있었습니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악하고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지만 롯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욕심을 따라서 그만 그 땅을 선택하고야 말았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브람에게는 가축을 기르기에 불편한 서쪽의 땅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물도 없고 발달한 도시도 없고 삭막한 장소인 서편의 가나안 땅에 이제 아브람의 가축들과 목자들이 우거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틀림없이 아브람의 결정에 가죽을 기르던 목자들은 크게 반발을 하였을 것입니다. 동쪽에 있는 요단의 들은 물도 많고 비옥하고 더군다나 가축을 팔기에 좋은 소돔과 고모라 도시도 있는데 주인인 아브람이 선택한 서쪽의 가나안 땅은 물도 없고 황무지와도 같은 쓸모없는 땅이기에 큰 불평을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관점으로 보아도 아브람의 결정은 참으로 어리석게 보입니다. 실패한 길을 아브람이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배제된 극히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처음에는 롯이 성공의 길로 들어서고 아브람은 실패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였지만 차츰차츰 시간이 흘러갈수록 상황이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롯은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여 끝까지 가나안에 남은 아브람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된 축복이 사람이 됩니다.


2. 신앙의 질 차이는 선택의 차이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갈라지게 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목자들의 다툼과 분쟁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브람과 롯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질적인 차이에 있습니다. 롯도 신앙인이긴 하지만 그는 먼저 세상적인 유익과 이익을 먼저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사업과 가정과 물질의 유익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기되 자신의 사업의 형통과 가정의 평화와 물질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성공의 수단으로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이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신앙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세상적인 명예와 출세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던 멋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아브람이 욕심을 부리고 조카인 롯하고 끝까지 싸웠더라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림과 조롱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에게는 큰 손해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조카인 롯에게 땅을 양보하는 아름다운 미덕을 베풀었습니다. 아브람의 이 행동을 보고서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신앙은 하나님중심이요 신본주의적인 신앙이었습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도 아브람처럼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 중심적인 그리고 신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서 롯과 같은 마음을 갖고서 예배를 드리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과 사업의 번성함과 형통과 가정의 평안함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런 분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브람처럼 모든 일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아브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강하게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할지라도 신앙의 질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아브람처럼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의 자세를 갖고서 항상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아브람의 세 가지 성공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의 자세를 갖고 살아 간 아브람에게는 인생의 세 가지 성공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브람은 하나님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성공은 바로 영권의 성공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는 왜 하나님께로부터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는 평가를 받았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누가복음 12장 21절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에 대하여서는 모든 것이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부자는 하나님에 관해서는 조금도 부요한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부자를 가리켜서 어리석은 부자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우리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의 부요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부요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부요도 품으시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부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관심의 부요를 품은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성공자라는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 많고 좋은 꼴이 풍성한 요단의 들을 포기하고 비록 여건은 열악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나안 땅을 택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창세기 13장 14절을 보시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3장 15-16절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유익을 포기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엄청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직접 나타나시고 그에게 넓은 땅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후손을 하나님께서는 약속해 주셨습니다. 즉 땅의 축복과 자손의 축복을 내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브람과 그의 가정이 하나님을 완전히 독차지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 어디를 눈 씻고 찾아봐도 ‘롯의 하나님’이라는 구절은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부요한 아브람은 그와 후손들이 엄청난 축복을 받았지만 세상의 유익에 부요한 롯에게는 하나님의 어떠한 축복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 도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관심과 헌신에 더욱 더 부요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그런 분들에게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신속하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아브람은 사람으로 부요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즉 아브람은 인권의 성공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롯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과 가축을 기르는 목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롯이 물이 풍부한 요단의 들을 선택했을 때에 사랑하는 아내는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롯이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칭찬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두 딸도 상업과 문명이 발달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한 아빠인 롯을 자랑하면서 친구들에게 소개를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아빠를 잘 두어서 이제 좋은 도시에서 큰 부자로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마냥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르던 목자들도 주인인 롯 때문에 물과 꼴을 구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고 매우 좋아하며 아브람의 목자들을 약 올리고 조롱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롯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두 명의 사위와 수많은 목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마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건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두 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딸마저 부패하고 타락하여 아버지인 롯을 속이고 천륜을 어기는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아버지인 롯을 통하여 이 두 딸이 모압과 암몬이라는 후손들을 낳고야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결과입니까? 롯은 이와 같이 인권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실패한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나안 땅을 선택한 아브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기하게도 아브람에게는 사람들이 자꾸만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아브람이 자신의 집에서 훈련시킨 군인들만 하더라도 무려 318명이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녀도 아브람은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도 얻고 약속의 자녀 이삭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들을 통해서 수많은 후손들을 아브람은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바로 아브람의 후손들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은 영권의 성공도 얻고 인권의 성공도 얻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셋째, 아브람은 물질의 성공도 얻게 되었습니다. 즉 아브람은 물권의 축복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집 안에 군인들을 키우는 갑부는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대 부호라고 할지라도 경호원들을 수백 명을 거느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당시에 혼자의 능력으로도 집안에 군사 318명을 양육하는 엄청난 대 부호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집에서 훈련시킨 군사 318명을 데리고 가서 주변 4대 강국을 좇아가서 전쟁하여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엄청난 전리품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 수많은 전리품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자신의 손에 취하지를 않았습니다. 오직 소년들이 먹은 것과 자신과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만을 제하고는 모든 것을 다 돌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이 물질로 말미암아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부자가 되었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브람은 혼자의 힘으로 군사 318명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엄청난 물질의 축복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집도 잃고 재산도 잃고 가축과 목자도 잃고 처량한 신세가 되어서 춥고 어두운 굴속에 기거하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삼촌인 아브람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하고 먹고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람은 물권에 있어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롯은 물권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론)

우리도 아브람처럼 영권, 인권, 물권 이 세 가지 분야에 있어서 성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물권의 성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권과 인권의 성공을 거두는 것만으로 그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인권과 물권의 성공이 없어도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영권의 성공만 거두어도 그 사람은 아브람처럼 큰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 믿음의 성도들도 아브람처럼 영권, 인권, 물권의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만 할까요?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아브람처럼 인생의 세 가지 분야에서 진정한 성공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유익과 물질과 명예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비록 나에게는 큰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행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아브람처럼 나 자신의 이익보다는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이익을 먼저 구하는 신앙을 소유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상급이 임하게 된다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앞에는 매 시간마다 성공의 길과 실패의 길이 동시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자면 ‘아브람처럼 신본주의의 길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롯처럼 인본주의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브람처럼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아브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여러분이 롯처럼 인간중심적인 인본주의의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롯과 같은 비참한 신세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 선택은 오직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한 길로 들어서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제가 바라고 믿고 원하기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은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가운데에 아브람처럼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가시는 가운데에 아브람이 누렸던 영권과 인권과 물권의 축복을 항상 누리시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피영민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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