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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 (요일 3:11-24)
설교/박조준목사
서로가 사랑하라는 사도 요한의 권면입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새로운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강조되지 않으면 안될 계명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에도 여섯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12절을 보세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십계명 중 첫째에서 넷째까지는 우리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부터 열째 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를 교훈하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한 계명으로 통일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계명은 제일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에 이어서 여섯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생명의 존귀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진주가 아닙니다. 금강석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은 신기합니다. 그 근원이나 형태를 우리가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 그 신비의 문을 다 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은 존귀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섯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누가 살인죄를 범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살인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직접 살인이 있습니다.
본문에도 있다시피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래서 직접 살인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도 가인의 후손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이나 방송에 보면 살인 사건은 말할 것 없고 일가족 몰살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이따금 보도가 됩니다.
물론 계명을 범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살인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국법에 의한 사형입니다. 옛날부터 살인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법에 의거한 사형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음에는 정의에 입각한 전쟁 수행 중에 일어나는 살인입니다. 침략 전쟁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어하기 위해, 정의를 위한 전쟁에서 부득이한 살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부득이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국법으로 사형이 필요 없는 사회,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계를 위해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직접 살인 외에 간접 살인도 많습니다. 부정한 음식, 부정한 약품, 부정한 환경으로 인한 살인이 그것입다. 차량 정비의 부실로 일어나는 사건, 부실 건축물로 일어나는 사건도 말하자면 간접 살인에 속합니다. 무지와 미신으로 병을 길러서 일어나는 간접 살인도 많습니다.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위정자의 실정도 말하자면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내 생활과 내 의무와 내 사업과 내 일상 생활에 특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가정주부는 음식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위생 법칙을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공중 위생을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간접 살인에 참여하지 맙시다.
그리고 심리적 살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대해서 노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왜요? 사도 요한의 말씀과 같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 때 일시적으로 노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오래 품으면 형제를 미워하는 감정으로 변하기가 쉽습니다. 그 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일면 실상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리적 살인을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노나 증오심이나 원한이나 복수를 마음 가운데 품는 것은 벌써 심리적으로 살인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잉태되면 실제로 살인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범하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구설(口舌)적인 살인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입과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계속해서 “형제를 향하여 라가라 하는 사람은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라가”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흔히 욕을 할 때 쓰는 말인데 아마 우리말의 “바보”란 말에 해당할 것입니다. “또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을 존중해서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 없고 말로라도 사람을 멸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학생들 간에 혹은 청년들 간에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라도 지독한 말을 쓰는 것을 이따금 들을 수 있는데 이런 것도 사실 조심해야 합니다. 가령 “이 자식, 죽여 버린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꼭 살인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독한 말입니다.
시편 140편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뱀과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도다.” 뱀처럼 날카로운 말이 있습니다. 독사의 독과 같은 독이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물며 거짓된 입술 혹은 붓끝을 함부로 놀려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거짓 선전으로 다른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입술이나 붓끝으로 사람을 죽이는 정신적 살인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로 다른 사람을 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살인이 있습니다.
인간의 명예도 귀합니다. 그래서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남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적 살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친히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을 죄에 빠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 가지 종류의 살인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입니다.
내가 내 생명을 좌우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생명을 끊는 것도 살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살은 사실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성경에는 자살한 사람이 다섯 명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에서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사울 왕, 사울 왕의 병기 든 사람, 다윗을 배신한 아히도벨이라는 간신, 시므리라고 하는 악한 왕,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들은 다 신앙의 타락자입니다. 자살은 절망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하나님도 안 믿고, 내세도 안 믿고, 내세의 심판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바로 지킬 수가 있습니까? 바른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물질적 육체를 가졌지만 물질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이 그 속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인생관의 회복만이 이 험악한 세상을 변화시켜서 사람이 살 만한 사회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랫동안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성이 나도 자제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물론 위대한 왕이지만 술좌석에서 자기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화를 내면서 그 자리에서 그 부하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부하는 자기의 가까운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가는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다스릴 줄은 알았지만 자기 자신은 다스릴 줄 몰랐다”고 기록했습니다. 감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 인간의 힘으로만은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감정을 자제할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 그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좀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살인의 원인이 되는 사회악, 그러니까 부정과 부패, 빈궁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제는 옳은 정치를 하고 옳은 경제 재건을 하고 옳은 사회 봉사를 해서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인간의 생명이 존중히 여김을 받는가 하는 것이 문명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만 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정신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강력한 종교적인 뒷받침이 없이 이런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13-15절 말씀에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살인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행위보다 그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을 했느냐”라는 물음보다도 “어떻게 했느냐”라는 물음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결과보다도 동기에 더 커다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16절과 17절은 형제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심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도 내가 외면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신 16절 말씀과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면 내 주변에서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자선사업가 할머니는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부모 없이 지내는 고아 소년이 신문팔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치는 거리를 걸으며 배가 고파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순경 아저씨를 붙들고 “너무 배가 고프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좀 도움받을 곳이 없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경찰관은 예수 잘 믿는 할머니의 집을 소개하면서 그 집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집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누르면 “누구냐?”고 물을 터인데 그때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요한복음 3장 16절 할머니가 나와서 너를 도와 줄 거라고 했습니다.
이 춥고 배고픈 어린아이는 경찰관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더니 집 안에서 “거 누구냐?” 하는 할머니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애는 순경 아저씨가 말한 대로 그저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말했더니 문이 열렸습니다. 이 소년은 그때 “요한복음 3장 16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의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와서 손이 꽁꽁 얼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딱한 사정을 보고 따뜻한 난로가에서 불을 쬐라고 했습니다. 이 소년은 몸을 다 녹인 다음에 고기 국물이 있는 좋은 식사를 제공받으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처럼 춥고 배고픈 것을 해결해 주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음식을 다 먹은 후에 2층 목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나니까 작은 방을 가리키면서 거기서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소년은 정신없이 잘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늦게야 일어났습니다. 할머니가 노크를 하고 들어오시더니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주셔서 정말 맛있게 마셨습니다. 이 소년은 계속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닫힌 문이 열리고, 추워서 떨고 있는 나를 따뜻하게 하고, 더러워진 나를 깨끗하게 해주고, 피곤한 나에게 안식을 주고, 목마른 나를 시원하게 하는 비결’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조반 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경을 들고 나오시더니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시면서 이 소년에게 “너는 이 말씀의 뜻을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소년은 대답하기를 “저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것은 사람에게 닫힌 문을 열어주고, 추워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고, 더러운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고, 피곤하고 지친 사람에게 편히 쉬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이 할머니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하신단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란다”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때 이 소년은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무엇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 없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랑은 혀 끝에 있고 참 사랑은 손끝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치 않겠느냐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 다미엔이 그랬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쳐가 그랬습니다. 성 테레사 수녀가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을 예로 들자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낸 사람들에 의해서 장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우리의 신앙을 확실성 있게 만들어 줍니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또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여기서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첫째, 확신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20절을 보세요.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전에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만이 하늘에 속한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신비한 인식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에게 생활 면에서 도전했습니다. 참된 확신이란 단순히 어떤 지식의 획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확신이 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를 참소하는 자의 고발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어떤 교회에서는 자기들만이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처럼 과시하고 성령의 충만을 강조하고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까 방언을 연습시키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진실하시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면 그 생활이 진실해야하는데, 돌아가면서 거짓말은 다 혼자합니다.
우리의 삶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계속 참소할 것입니다. 삶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소위 종교적인 지식으로 자기 신앙을 붙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에 대해서 근본적인 확신이 없다면 이 확신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의 확신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삶 속에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 나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확신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과 확신 없이 하는 말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삶에 확신이 있을 때 어떤 삶의 역경에 부딪혀도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확신이 있어야 열의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어려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용광로처럼 뜨겁게 살며 복음 전파를 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에게는 삶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확신이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고 믿음을 증거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도의 응답입니다.
21-22절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자기 삶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삶에 근거한 기도의 확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 L. 무디가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전도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고 “여러분, 우리 모두 열심히 나가서 믿지 않는 사람을 데려오고 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 이번 기회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계기를 삼읍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자기 아들을 인도하기 위해 기도 제목을 놓고 그 성회 기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들이 전도 대회에 나오려고 생각도 않고 부모의 권면을 한마디로 뿌리쳤습니다.
마음이 상한 이 집사님은 마지막 성회날 D. L. 무디를 찾아가서 실망한 어조와 불평 섞인 말로 “아들을 위해서 금식까지 하면서 기도했고, 말로 다 할 수 없이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D. L. 무디가 “혹시 집사님의 생애 가운데 누구하고 잘못된 관계를 맺은 일은 없습니까?”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자기 교회 안에서 좀 틀어져서 멀리서 보면 피하고 가까이서 보면 얼굴을 돌렸던 사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세요.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 한번 기도해 보세요”라고 D. L. 무디는 충고했습니다.
이 충고를 받은 집사님은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동안의 불편한 관계를 다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도를 하니까 이 집사님 마음속에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확신이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회 마지막날 밤 그 사랑하는 아들이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받아 스스로 교회에 나와서 집회에 참석하고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나아와 자신을 드리는 영광스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고 막혀 있다면 혹시 그것이 주님의 계명 가운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점검하도록 오늘 주신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라고 했는데 이 구절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다음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계명을 지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주님 앞에 요청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수도관이 있습니다. 이 수도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생수를 받으려면 막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전선이 있습니다. 아무리 전등을 훌륭하게 꾸며도 전선이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선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아야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셋째, 주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명령은 먼저 예수를 믿고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라 했는데 이 두 가지 속에 다 요약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의 설교도 “예수를 믿으세요. 사랑하세요”라는 이 두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24절 말씀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에게 어떤 특권을 약속했습니까?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참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주님과 정말 깊은 사랑의 교제를 하며 사랑의 체험을 하기 원하십니까? 모든 계명의 완성된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할 때 주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서로 사랑함으로 확신 있게 살고 기도의 응답받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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