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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 (요한계시록 2: 1~ 7)
첫마음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 때 샘터사 편집부장이었던 작가 정채봉 씨가 쓴 첫마음이란 글을 소개합니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며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날의 첫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는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 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정채봉의 생각하는 동화2 '내 가슴속 램프'중에서>
꼭 잃지 말아야 할 것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인 뿐만 아니라 가정도, 부부도,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가 꼭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이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진 전시회에 똑같은 사진이 나란히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본 어떤 사람이 작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습니까?" 그랬더니 작가는 "똑같은 사진이 아닙니다. 이쪽에 있는 사진은 아침 노을을 찍은 사진이고, 저쪽에 있는 사진은 저녁 노을을 찍은 사진입니다."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구별 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작가는 다시 이런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일출을 찍은 사진은 동해에서 찍은 사진이고, 일몰의 사진을 찍은 것은 서해에서 찍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똑같은 사진인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전혀 반대가 되는 사진입니다. 한쪽 사진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찍었고, 또 그 한쪽의 사진은 해가 서쪽하늘을 넘어가는 것을 찍은 것입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은 없지만, 동해에서 찍었기 때문에 일출의 사진이고, 서해에서 찍었기 때문에 일몰의 사진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실하게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살았고 또 마음을 다 하여서 보람있게 살아갔는데, 지금은 괜히 짜증이 나고 일이 하기 싫어지고 마음 속에 불평만 자꾸 가득 찹니다.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하고, 똑같이 직장에서 일하고, 똑같은 시간에 잠을 자는 대도,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과거에는 창조적인 삶의 자리에 서 있었고, 지금은 무엇인가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삶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나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똑 같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같은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과거처럼 드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도 지난 날의 예배처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생명의 싹을 틔우는 것 같은 창조적인 삶을 살아갔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예배의 기쁨도 없고, 마음의 평안도 잃어 버렸고, 그리고 모든 것에 의욕을 상실해 버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될 때에 창조적이고, 생명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언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일에 뜨거운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요 교회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과 이 교회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느냐? 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서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은 참 생명이 살아 넘치는 신앙인과 교회가 될 수가 있고, 또 잘못된 자리에 서 있으면, 지는 해와 같은 신앙인과 교회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리차드 칼슨 박사가 쓴 책 가운데 "사랑은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입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좁혀서 말하면 두 사람의 관계입니다. 더구나 부부간의 관계라는 것은 두 인격의 만남입니다. 이 사랑 속에서 참 오묘한 것은 큰 일에 대해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두 사이에 자라나고 있는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애쓰고 그 어렵고 힘든 경우에는 두 부부가 하나가 됩니다. 사업에 실패했거나 본의 아닌 엄청난 문제에 도전 받게 될 때 사랑은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작은 일에 문? ┛?있다는 것입니다. 큰 일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용기와 창의성을 가지고 대처하게 되고 그리고 합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별로 문제가 없는데 사소한 일, 예컨대 TV 채널을 선택하는 일로 부부가 티격태격하고 다투게 됩니다. 거기까지도 괜찮은데 당신은 그 수준이라서 그런 걸 보느냐? 하면, 그래 수준 높은 사람 좋은 대로 해 봐 하면서 싸우고. 이어서 딴 방으로 가서 보라고 내 쫓으니까 둘이 따로따로 TV를 보다가 이렇게 되면서 부부가 금이 가기 시작을 합니다. 그 말 한마디에. 또 그런가 하면 전기 스위치를 왜 켰느냐 껐느냐. 또 치약을 몸통부터 눌러서 짜는가? 이런 것 가지고 또 서로 한 마디씩 하게 되면 마음이 상합니다. 양말을 벗어서 아무데나 내 던진다, 한 평생 잔 소리를 해도 못 고칩니다. "당신은 근본적으로 가정교육을 잘못 받아서……" 이렇게 나오는 날이면 일은 끝나는 겁니다. 족보 문제까지 나오면 못 고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소한 일, 자그마한 일인데 거기서 상대방의 인격을 헐뜯고 상대방의 명예를 짓밟고 자존심을 묵살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리차드 칼슨 박사는 100가지 처방을 내놓습니다. 사소한 일이 부딪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100가지를 설명을 하는 데, 그 중에 99번째가 "처음처럼 행동하라." 는 말입니다. 라이프지 최신호에 "사랑의 과학"이라는 논문이 나와 있는데 처음 사랑, 즉 다시 말해서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정말 저 사람 없이는 내가 못 살 거 같애.'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가느냐? 하고 과학적으로 연구해 보았더니 18개월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고로 오래간 사람이 3년 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대처가 없이는 그대로 자연현상으로 사랑이 이어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여기 처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오늘 본문 성경에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직접 처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한 통을 소개합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에 있는 항구도시로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바울은 두란노서원을 세우고 3년 동안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또한 아시아 전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행19:10). 에베소 교회는 아주 훌륭한 교회입니다. 본문의 편지는 개척초기부터 역사를 섬겨온 상당한 신앙경륜을 가진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에베소 교인들의 ? 寧?위한 그간의 수고와 인내와 헌신을 인정하셨습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으로 주를 섬겼던 점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크고 좋은 대표적인 교회인데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있는데 첫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마디 책망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본문 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현대어 성경에는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 즉 첫 사랑이 무엇입니까? 첫 사랑은 예수님을 처음 만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며,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그 사랑을 말합니다. 또한 부르심의 은혜에 감사하여 뜨겁고 희생적으로 사명을 감당하였던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논리정연한 복음진리가 있었고, 가슴에는 뜨거운 사랑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물질을 드려 미자립 개척교회를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남녀 성도들은 절제되고 부끄럼없는 교제로 세속적인 음란문화를 극복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그릇을 이루어 같은 방향, 같은 영적인 힘으로 투쟁하였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개척된지 40여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었고 사도 바울에게 말씀공부를 하였던 어린 양들도 장성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자 교회는! 안정되고 기반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숙원사업이었던 예배당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어졌습니다. 이제는 금식하며 기도할 절박한 기도제목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사이엔가 초창기의 왕성한 영적인 삶이 사라졌습니다. 모임은 형식화되고 은혜가 없어졌습니다. 어떤 말씀이 선포되어도 아멘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말씀에 관한 지식은 청산유수였지만, 그들의 가슴은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양들의 발길이 끊겼고, 선교사 파송 역사는 부진해졌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성경에 보는 대로 수고가 있었고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니까 불평과 원망 뿐이었습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아주 정의감이 강하고 비판이 있고 개혁이 있는 교회고 의를 주장하는 교회였고 그래서 이단을 척결했어요. 아주 잘 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랑이 없었어요. 사랑 없는 개혁, 사랑 없는 이단 척결, 사랑 없는 비판. 결국은 상처 뿐입니다. 분열로 그렇게 멍들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는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하고" 그랬습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뎠다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대단히 잘 했어요. 그러나 사랑이 없었고 그래서 교만했고 여기서 원망과 불평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피곤하고 절망하고 비판하고 분열하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이는 지식은 교만하게 되고 수고와 업적이라는 것은 원망과 불평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대책은 사랑 뿐입니다. 사랑을 떠났기 때문에 잃어버린 사랑, 실종된 사랑에 관심을 가지고 다시 처음 사랑을 찾아 돌아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현대인의 일곱 가지 불안
심리학자인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은 현대인은 일곱 가지를 고민한다고 했습니다. 불안이 있는데 그 불안의 첫째는 가난해질까 봐 불안해하는 경제적 불안이고, 그 다음은 실패할까 봐 불안해하는 명예에 대한 불안이고 그 다음에는 질병, 건강에 대한 불안이 있고, 그 다음에는 사랑의 손실, 사랑이 깨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이 있고, 그 다음에는 노쇠에 대한 불안이 있고, 그 다음에 자기가 누리는 자유, 자유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 마지막에 죽을까 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합니다.
일곱 가지 불안 중에서 사랑에 대해서 걱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사랑에 대해서 또 다시 한 번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라. 아가페 프로토스, 이 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고 본질적이고 속성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사랑이 근본적인, 본래적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가운데는 이걸 자세하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훈계를 들어보세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그랬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중심 이동이고 목적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던 자가 저를 기쁘게 하려고 할 때 그게 사랑입니다. 내가 목적이 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목적이 될 때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중심이 상대방에게 가 있는데 어느새 이게 되돌아 왔어요. 자, 선한 일 하면 칭찬 받아요. 표창장도 받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어느 사이에 고만 칭찬 받는데 매력을 느끼고 사랑은 없어졌어요. 좋은 일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축복 받는데 그만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서 어느 사이에 그만 이걸 잃어버렸어요.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근본적인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남는 게 뭡니까?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디서 떨어지고 무엇 때문에 ? 蔘便틈쩝?어디서부터 잘못 되기 시작했는지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습관이나 익숙해진 것으로부터의 탈피
운동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이걸 운동을 해서 할 때에 이걸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이 저절로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운동을 잘 하는 세계적인 선수들은 자기가 장점이 뭔지 단점이 뭔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내버려두면 단점이 나온다고 합니다. 꼭 생각을 하고 '요거는 내 단점이다, 요건 내 장점이다' 한 번 더 생각을 하고 시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잠깐이라도 생각을 놓치면 안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사랑은 자유 현상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성이 아니고 의지입니다. 사랑은 훈련도 하고 공부도 해야 되고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그랬습니다. 순간순간 하나의 사건에도 생각이라는 것을 얹어 가지고 행동하고 말해야 되는 됩니다. 그래서 습관이나 혹은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내가 탈피! 하고 항상 새롭게 생각하고 처음처럼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이 사랑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고 했습니다. 회개란 말은 리턴(Return)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라.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 그 쪽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져라" 그랬습니다.
단테의 "신곡"이라고 하는 책 ‘지옥편’에 보면 지옥도 층계가 있어요. 점점 더 내려가고 내려가면 지옥 맨 밑바닥 제일 깊은 곳에 제일 무서운 죄인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가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가롯유다, 그 다음에 자기를 사랑한 친구 시이저를 배신한 부르투스와 키시우스가 그 맨 밑바닥에 있다고 합니다. 단테가 생각한 것은 배신이라는 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입니다. 소크라데스는 무지가 큰 죄라고 했고 헬라 사람들은 교만이 큰 죄라고 했고 피히테라고 하는 사람은 나태가 가장 큰 죄라고 했는데 단테는 배신, 가장 소중한 첫 사랑의 배신, 이것이 가장 큰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배신, 누굴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 자신의 사랑을 자신이 배신한 것입니다. 자신이 받는 사랑을 자신이 배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처음 사랑으! 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첫 사랑을 버리게 되었습니까? 어쩌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복음역사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고생과 희생이 따르는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보다는, 이제는 나이도 들었으니 편하게 신앙생활하자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요즘같은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장래에 대한 근심과 염려 때문에 영적 기본생활을 놓쳐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방향을 주셨습니까?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첫째로, 예수님은 첫 사랑을 어디에서 잃게 되었는지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어디에서'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첫 사랑을 놓친 장소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생각하라'는 것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드려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되어 점차 역사에서 방관자가 되면서부터 사랑이 식어갔는지, 아니면 모든 면에 풍요로운 환경과 사회와 직장과 교회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후부터 영적인 일에 신경을 끄게 되었는지 곰곰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첫 사랑을 놓치게 된 장소와 그 원인을 발견한 후에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정이 떨어지면 그간의 모든 관계는 끝이 납니다. 혈기넘친 연애감정으로 결혼한 부부들이 걸핏하면 치고박고 싸우다 돌아서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회개하고 돌아서기만 하면, 딱딱하게 굳어진 메마른 내면을 뜨거운 사랑의 단비로 적셔 주십니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한 신앙의 열심을 회복시켜 주셔서 귀하게 쓰임받게 도우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처음 행위란 예수님을 만난 기쁨 가운데 양들을 섬기며 헌신하고 충성하였던 자세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구신자적인 악습을 버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촛대가 옮겨지면 에베소 교회는 망하게 되고, 첫 사랑을 회복하지 못한 교인들은 세상 가운데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는 지금 잔해만 남아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개척된지 40여년 만에 책망을 받은 것은 비슷한 연륜에 있는 우리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건강진단을 받아야 자기 몸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듯이 나 자신의 영적인 건강상태를 진단 받을 필요가! 있고, 교회의 모든 것도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 전반에 걸쳐 컨설팅을 하려고 합니다. 정확한 진단을 받고 새로운 미래, 교회의 비젼을 세워가려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다면 처음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그의 저서「20세기말의 교회」에서 ??교회는 죽어가는 문화 속에서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세상에 주고 있는데 그 기준은 ‘사랑하는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서로 상처받고 마음 상하고 신앙을 잃으면 안됩니다. 무디지에는 소개하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망하게 하는 10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실었습니다. ①교회 내 특정 교인의 요구 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②교회 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③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 하라 ④사랑 안에서 결코 참된 것을 말하지 말라 ⑤불평 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 두라 ⑥남을 용서하되 오직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자만 용서하라 ⑦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⑧공중기도 시간을 통하여 교회에 대한 불만을 다 토해내라 ⑨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⑩하나님이 당신에게 교회를 분열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행하라. 교회는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
우리의 신앙생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책임감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인내는 짜증 만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런 인내는 화목하게 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 지루할 뿐입니다. 설교도 찬송도 길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 지겨울 뿐입니다. 예배니 인내니 봉사니 충성이니..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행위들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신앙행위가 될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겉보기에는 그럴듯 해도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형식과 원망과 피곤과 짜증과 불평뿐이요 피차의 저주와 정죄와 아집과 교만만 남을 뿐입니다. 직분을 맡아 봉사하든 가정에서 집안 일을 하든 회사에서 일을! 하든 그 모든 것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단과 싸우는 것도 진리를 파수하는 것도 목숨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도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에게 어느날 누군가가 물었다."선생님, 노이로제 증세가 없는 건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이 물음에 프로이트는 대답하기를 "노이로제 증세가 없는 건전한 사람이란 바로 사랑할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라고 답변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도 이렇게 사랑을 강조했는데 건전한 신앙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사랑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하여 "첫째, 사랑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둘째, 사랑은 존경하는 것이며 셋째, 사랑은 이해하고 넷째,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고 다섯째, 사랑은 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처음이 어떻습니까? 처음 구원 받은 것 감사하고 죄 사함 받은 것 감사하고 천국 약속 받은 것 감사하고 십자가 중심의 깨끗한 신앙으로 출발을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만 보고 나왔는데 그 다음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나 못 알아주나 칭찬하나 안 하나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첫 사랑엔 이런 게 없었거든요. 오로지 예수, 오로지 하나님,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족하고 충만했는데 어쩌자고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의 평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만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고 무엇 때문에 피곤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사랑을 잃었어요. 이제 다시 찾는 길은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요, 그 뜨거운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玖?온 세상을 다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반가워질 것입니다. 삼라만상이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될 때 바로 거기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와 정통교리에 입각하고 동기가 아주 순수한 행위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행위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고 40년이 흘러갔을 때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님께 계시를 받는 중에 그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으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수용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도의 간절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목자와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책망합니다. 이것을 다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수용성을 놓쳐버리면 신앙생활 끝장나는 것입니다. 기도의 간절성을 놓쳐버리면 감각도 업고 체험도 없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목자와의 관계가 깨져버리면 그 영혼의 고독 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됩니다.
처음 믿음으로 돌아갑시다. 언제나 처음 때를 생각해보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의 그 각오, 처음의 그 열정, 처음의 그 약속을 상기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이루면서 새로운 각오로 내일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그 처음으로, 새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기쁨과 감사로 양육하기로 다짐했던 그 처음으로, 병상에서 회복되었을 때 새 생명을 다시 찾은 그 감격의 그 처음으로, 처음으로 신앙생활하면서 경험했던 그 기쁨과 그 감격의 마음과 자세의 그 처음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새로운 믿음생활을 다짐했던 그 처음으로, 여러 성경공부와 전도폭발훈련을 마치면서, 영성훈련을 받고 그 감격스런 마음의 결단과 함께 약속한 새출발의 그 처음으로, 신학교 입학을 하면서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송을 감격스럽게 불렀던 그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거나 교회에 처음 부임할 때의 새로운 마음가짐의 그 처음으로, 장로 또는 권사나 안수집사의 직분을 받아서 임직할 때의 그 충성을 다짐하던 그 처음으로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주! 님의 따뜻한 분부와 명령에 순종하여 이제부터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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