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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택 (룻 1:15 ~ 19)

by 【고동엽】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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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택  (룻 1:15 ~ 19)


오래 전 광고문구중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한다’는 말이 아주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상업광고였지만,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습니다. 선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질지라도 그 결과는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오래도록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10년도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오히려 10년으로 끝나면 다행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이제까지 나의 선택의 결과이며, 지금 내가 선택하는 길은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지혜롭게 선택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늘 실수하고 후회를 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느낍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의 의지와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참된 지혜와 능력을 구합니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고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현실에 적합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때를 놓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영원히 후회가 없는 선택이어야 합니다. 어느 시기까지는 좋아보이다가, 나중에 가면 후회할 수밖에 없는 선택은 피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지식이 있어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욱 중요한 한 가지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믿음의 선택입니다. 이 믿음의 선택은 인간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선택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택이 기초가 될 때에만이 우리의 지식도 경험도 도움이 될 것이며, 진정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룻기 1장을 통하여 믿음의 선택을 하기 위한 몇 가지 원리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1. 믿음의 선택을 위한 첫 번째 원리는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남편의 이름은 엘리멜렉,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 집안은 이방민족인 모압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모압 여인 중에 두 자부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 후 엘리멜렉이 죽게 되었고, 오래가지 않아서 두 아들도 죽게 됩니다. 결국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문제입니다. 물론 지금도 집안에서 남자가장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당시에는 더욱 더 그러했습니다.

당시는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로서 여자들이 사회활동을 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의 대표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당장 생계마저도 염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 집안이 갑자기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전후해서 살펴보면 이 모든 고난 속에는 나오미 집안이 마땅히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사하는 문제야 요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고, 그 기업을 계속 이어나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언약의 공동체에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오미의 가정이 이스라엘을 떠나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기는 모압에 가서 산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당장 흉년의 문제를 풀 수야 있겠지만, 그와 함께 수반될 영적인 문제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 문제들이 발생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의 약속이 분명하듯이, 불순종의 약속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참담한 고난의 현실 앞에서 나오미는 자기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마다 꼭 누구의 죄를 따지는 것은 건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고 접하는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비록 나오미는 과거에 그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지만, 이제라도 그 자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설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오미의 집안이 모압으로 이주한 것도 그저 공간의 문제가 아니듯이, 또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것도 역시 공간의 문제가 아니듯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자리도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문제입니다.

여호수아 5장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중에 여리고성 앞에서 할례를 행한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여리고성은 이중으로 구성된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온갖 힘을 다 모아도 어려운 상황인데,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받게 하십니다. 이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생명을 건 순종입니다. 할례를 받다가 죽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할례 후에 고통 중에 적군이 쳐들어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것이 필요합니까? 할례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다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알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삶의 방법과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자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 이유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생명같이 지켜야 할 나실인의 규정을 쉽게 포기할 때에 그 결과는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믿음의 자리를 상실할 때에 겪게 되는 결과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손은 후에 자기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해주셨습니다. 그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감당했던 일보다 더 큰 일을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의 몸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잃은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자들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는 이제라도 자기의 고향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자기가 지켜야 할 영적 자리를 이제라도 되찾고자 하는 영적 귀향인 것입니다. 두 여인의 조용한 발걸음은 외형적으로는 초라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는 영광스러운 발걸음이었습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영광의 주님을 만나는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자손만대에 걸쳐 참으로 귀한 영적 열매의 첫 발자국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되찾아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보이는 자리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 즉 내면의 자리를 더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 중에 주일학교 교사들이 계시다면 아이들과의 분반공부 시간을 비우지 않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아이들을 품고 기억하며, 그 어린아이들의 삶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도록 기도하는 눈물의 자리일 것입니다. 성가대원들이 아름다운 찬양으로 주님께는 영광을, 성도에게는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예배 좌석을 비우지 않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자리는 내 입술로 그토록 찬양하는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내 마음속에서는 끊임없는 감격으로, 내 삶속에서는 능력 있는 십자가의 삶으로 나타나는 희생의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 맡기시려고 세우신 직분과 사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기위해서 지켜야 할 나의 영적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내가 압니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는 깊이를 내가 느낍니다.

나의 영성이 얼마나 충만한지, 아니면 메마르고 있는지 내가 잘 압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의 영성에 대해서 결코 만족할 수 없음도 압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도 연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한 영성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가장 적절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신분과 역할과 자리를 정확히 알 때에 우리는 올바른 인생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선택을 위한 두 번째 원리는 현실문제보다는 영적 유익을 먼저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돌아오고자 할 때에 크게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첫째는 자존심과 체면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나오미가 돌아올 때에 베들레헴 온 성읍이 크게 떠들며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반가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좋지 않은 일로 화제가 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때로는 자존심과 체면 문제가 죽음보다 더 괴롭다고 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어떤 대책이 준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겨 둔 것도 없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는 것도 어렵지만, 가본들 그 다음 어떻게 할지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일단 먼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대책이 없긴 하지만, 영적인 회복은 가장 급선무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안개 속을 걸어갈 때에 앞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10m, 100m 밖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내 앞에 보이는 한 걸음부터 걸으면 그 다음은 또 거기서 보일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고자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선택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모압에서 겪는 것보다 훨씬 심한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나마 재혼할 가능성도 더 없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히 모압이 편하고, 유리합니다. 그러나 룻이 가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룻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짧은 고백이지만,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모압에 있으면 영적으로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자신이 혼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우리는 나만 의지를 강하게 하면 어디에서나 자신 있다고 할지 모르나, 영적인 문제는 자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쉬운 문제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며 그 영적 공동체에서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역 모임이나 선교회 모임 같은 것도 단순히 친교 모임이 아닙니다. 다른 사역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모임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나의 영성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중요한 은혜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위대한 평신도가 많이 있음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위대한 평신도보다 언뜻 드러나지 않지만,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자리에선가 묵묵히 믿음의 자리를 지키며 사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보다 성경의 원칙을 더 잘 순종하며 살아가는 분들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혼자서가 아니라 서로가 협력하고, 돌아보는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더욱 힘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룻 당시에 남성 위주의 시대에 이스라엘인도 아닌 이방여인이었던 룻을 준비시키셔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통하여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타락한 것처럼 보이고 암울한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자리에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부흥을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욱 더 그의 나라의 부흥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욱 더 강렬하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3. 믿음의 선택을 위한 세 번째 원리는 나의 만족보다는 사랑의 수고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영적 귀향을 결정하고 나서 두 며느리에게 돌아가라고 말을 합니다. 물론 막막한 나오미로서는 두 자부가 함께 하는 것이 외롭지도 않을 것이고, 그나마 젊은 사람들이니 무엇인가 해도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기의 유익보다는 젊은 자부들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사랑을 보입니다.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본문 16절 이하에 보면 ‘어머니의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다’고 합니다. 유숙한다는 것은 편안한 잠이 아니라, 불편한 잠자리로 밤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고난과 불편도 감수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죽기까지라고 선언합니다.

어느 한 때 같으면 잠시 참고 살겠지만, 영원히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는 룻의 결단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손해와 희생을 염려하지 않고, 철저하게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의 수고는 바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희생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합니다.

어린아이가 500원짜리 동전 두개를 갖고 교회에 가다가 넘어지면서 하나를 잃어버리고 울고 있습니다. 그 동전 두 개는 하나는 헌금으로, 하나는 과자 사먹으라고 받은 돈이었습니다. 잠시 뒤에 그 아이가 일어나면서 하는 말, ‘아 헌금할 돈이 없어졌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헌금할 돈은 손해 보더라도 내가 과자 사먹어야 할 돈은 결코 손해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결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생각,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더 우선이라는 생각! 과연 그 어린이만 그런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른 부서는, 다른 교회는 다른 민족은 어떻게 되든 나는 손해 볼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 주님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위하여 챙기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조바심을 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내가 나를 위하여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믿음의 원칙으로 살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원칙대로 나를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인간의 동정심으로 어느 정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라고 할 만큼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정도까지 가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갖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나의 삶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알게 하시고, 나를 보내시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이 많고, 인색하다는 종래의 관념으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기를 희생하고 사는 것 같은데, 결국 그들이 더 좋아 보인다는 결과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심어야 믿음의 역사가 증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낙원이었던 것은 고3수험생이 없었고,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3 수험생이 되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모두가 긴장하고 많은 희생과 수고를 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관계는 어디에서나 많은 사랑의 수고와 배려가 필요함을 잘 압니다. 우리는 사랑의 짐을 져야 하는 자리가 쓸데없는 고난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나의 영성을 더욱 풍성히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장소문제로 서로 각 부서의 입장이 예민할 때가 있습니다.

일단 더 좋은 장소를 얻으면 행사를 하기에 유리한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양보할 때에 얻을 수 있는, 주는 자의 기쁨과 영적인 채우심의 은혜는 눈으로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는 말씀을 우리는 진리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관념상의 진리가 아니요, 우리 삶의 실제인 체험적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사랑의 수고를 감당해야 할 자리는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많고, 교회 밖에는 더욱 더 많습니다.

이미 언론에 많이 등장해서 지금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거창고등학교가 있습니다. 대도시가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흔한 과외공부도 없이 거의 100%에 가까운 진학률을 보이는 특별한 학교입니다. 더구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의 이념은 많은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 학교의 직업선택의 기준 십계, 10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라. 이상 10가지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간단히 정리한다면 결국 좁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사회를 비추는 빛이 되려면 자신을 불태우는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곳에서 자신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랑의 수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수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까지 감당하며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욱이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며 그 짐을 떠맡는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판단으로는 쉽게 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감격이 있고, 그 감격은 우리의 삶을 십자가의 자리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작은 문제로 서로의 이익을 위해 갈등이 있을 때에 가장 시급한 것은 합리적이고 법적인 판단보다도 십자가의 사랑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것처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들도 무엇도 주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 후에는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보게 되고, 내가 어떠한 희생을 하게 되느냐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그 자리가 더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냥 가만히 두고는 볼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것도 우리 주위로부터 점점 넓어지면서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비전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의 젊음을 불태우면서 보다 유망해 보이고 박수 받는 자리를 마다하고 선교지에 나가서 그의 삶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편안히 쉬면서 살아도 되는 연세의 분들이 남은 생애마저도 의미 있게 쓰임 받고자 분연히 일어나서 이제까지 전혀 살아보지도 않은 생면부지의 땅으로 기꺼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위해서도 우리 주위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많은 분들이 사회에서의 경력에 관계없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섬기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이 감당하는 사랑의 수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사랑의 수고를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비전과 사랑의 수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여유 있는가 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격 속에서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열정을 품고, 충만해진 영성으로 현실을 바라볼 때에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겉으로 볼 때에 같아 보인다고 속까지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 비슷해 보인다고 미래에도 비슷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차이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조건하에서도 거룩한 성도로서의 믿음의 선택을 통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상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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