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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自繩自縛) (잠언 6: 2)

by 【고동엽】 2022.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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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自繩自縛)   (잠언 6: 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자승자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자기가 만든 밧줄로 스스로를 묶는다는 말입니다. 원수 앞에서 자기를 스스로 묶는다면 고스란히 원수에게 내어주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에는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심으로 우리가 땅에서 자승자박하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생각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인간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묶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으면 죄의 힘으로 자승자박하는 것입니다. 세속과 마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자기 스스로를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존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와 사망의 세력은 우리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늘 해방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해야지 나는 죄와 사망의 종으로 묶여 있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병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에 묶여 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병을 감당할 수 없다. 나는 병의 노예다. 결국에는 병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생각이 자기를 묶기 때문에 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나는 병의 노예가 되고 병에 정복당했다고 생각하면 이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불안과 초조,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종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인으로 생각할 때 자유가 주어지고 종이라고 생각할 때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무능력한 실패자이며, 가난하고 패배한 자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자승자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그 자체로 운명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생각없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삶속에 늘 ‘나는 패배자다. 나는 실패자다. 성공하지 못한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무능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저가 나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히 채우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이 마음에서 나오고 사망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욥은 그의 가산을 다 잃고 자녀들이 비명횡사하게 되고 자기는 몸에 병들어서 처참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기 3장 25절에 보면 욥은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다 잃어 버리기 전에 재산을 잃어버릴 것을 늘 두려워하고 자녀들이 비명횡사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비극이 일어날까 늘 두려워 했습니다. 자기 몸이 병들고 처참하게 되지 않을까 주야로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입니다. 이에 마귀는 그가 생각한대로 그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먼저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묶어 놓았기 때문에 마귀가 그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왕이며 자선사업가인 카네기는 ‘실패한 사람들의 10가지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이런 사람은 핀잔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핑계를 댄다. 둘째, 열등의식과 자기비하에 빠져 있다. 셋째, 삶의 목표가 없다. 넷째,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한다. 다섯째, 과거에 지나치게 연연한다. 여섯째, 독창력 없이 남의 흉내를 내기에 전전긍긍한다. 일곱째, 계획 없이 생활한다. 여덟째, 인생의 지름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노력은 하지 않고 성공의 왕도만 찾아다닌다. 아홉째,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다. 열째, 패배에 대한 원인 분석 없이 실패를 그대로 인정한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실패할 때에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무능력하고 실패자며 가난하고 패배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대로 자승자박하게 되어 그러한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2. 자화상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인간은 그 자화상으로 스스로를 묶습니다. 1900년도 원산에서 케이트 쿠퍼(Kate Cooper)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사 집에 놀러온 촌부가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놀라 고함을 치고 선교사님을 불렀다.“선교사님 누가 벽 속에 숨어 있어요. 저분이 누구예요?”생전 처음 보는 자기자신을 몰라본 것입니다. 그때만해도 우리 나라에 거울이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이 와서 전신을 볼 수 있는 큰 거울을 벽에 걸어 놓으니까 촌부가 그 집에 와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항상 거울을 통해 봅니다. 육체적인 모습을 거울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적인 모습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내적인 모습을 통하여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부정적이면 결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처럼 주님이 그려주신 모습을 마음속에 늘 그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었고 자기의 사는 환경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므로 저주받아 이마에 땀을 흘려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체는 병들고 늙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삼대재앙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자손들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삼대재앙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새로운 자화상을 마음속에 그려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의인이 된 자화상을 그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저주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이 주어지는 자기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시므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신 자화상을 마음속에 그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자기자신을 보는 눈이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바뀌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거울을 통하여 새로운 자화상을 바라보고 자기의 새로운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 나무밑에 서서 늘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게 보이므로 그만 먹고 만 것입니다. 바라보면 거기에 끌려 들어가고 참여하게 됩니다. 자기를 죄와 세속과 마귀의 종으로 여기고 죄와 세속으로 끌려간다고 생각하고 또한 마귀로 인해 점령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바라본대로 마귀와 세속과 죄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종의 멍에에서 해방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의 멍에가 꺾이고 병의 멍에에서 해방된 자기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자기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이 병약하다고 늘 마음속에 상상하고 그렇게 보는 사람은 어떠한 의사도 어떠한 약도 어떠한 환경도 그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비록 병들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자기의 본모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거울을 통하여 고침받은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치료받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모습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친히 짊어지고 청산해 버리셨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이 된 자기 자신을 상상하고 늘 마음속에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새 모습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 왔을 때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서 사십일 동안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열 명은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보고하였습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말하므로 그 땅 거민들을 거인들로 보고 스스로를 메뚜기 같이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결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메뚜기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축복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화상이 달랐습니다. 민수기 14장 9절에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은 대장부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한 자화상을 가질 수 있었고 이로써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인간은 믿음으로 스스로를 묶습니다. 마태복음 8장 13절에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이 스스로를 묶는 밧줄이 됩니다. 죄와 마귀와 세상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묶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파도처럼 다가와도 내안에 계신 예수님은 세상을 향하여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주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세상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탄의 권세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고 세속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질병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므로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으로 고통 당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죽게 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믿음은 아예 우리의 마음속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부정적인 믿음을 갖다주고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질병을 2000년 전에 벗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채찍에 맞으시고 찢기신 것은 우리의 질병을 청산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우리의 감각을 믿고 행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자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살아가려고 했다면 전부 병들고 굶어 죽고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황량한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믿는 사람은 인생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환경을 바라보고 감각이나 느낌으로 인해서 좌절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할 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성공할 수 있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축복을 받는다. 나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환경이나 귀에 들리는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만져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거센 파도위를 걸어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물보라가 쳐도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을 돌이켜 환경을 바라보고 파도를 바라봄으로 두려움이 임했을 때 파도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말씀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 형통한 사람이 되었음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2절로 14절에 “야훼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훼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입술의 말로 스스로를 묶는다
사람이 살고 죽는 권세가 혀에 있으므로 혀의 사용을 통해서 자승자박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잠언 18장 20절로 21절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달려있고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말의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로 자신의 미래를 그르쳤던 대표적인 사람들 중에 1984년 올림픽에 출전했던 매리 데커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육상 선수로 미국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올림픽 경기가 열리기 전에 출연한 한 TV 토크쇼에서 “난 운이 따라 주질 않아요. 난 늘 운이 없는 사람이에요”라는 부정적으로 말을 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녀는 큰 압박감에 시달렸고, 그후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도 패배하고 만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무명의 젊은 권투선수였던 클레이라는 청년은 큰 시합을 앞두고 기자에게 “난 세계 최고다”라는 말로서 신문에 떠들석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이번 시합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말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시합에서 이겼고, 이후의 경기에서도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어떤 말을 만 번 이상 되풀이하면 반드시 미래에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말은 우리의 삶의 습관이 되어서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든지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자승자박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 하나하나가 이처럼 삶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죄와 세속의 말을 하면 죄와 세속에 우리가 묶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에베소서 5장 4절로 5절에 보면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잘못된 말로 인해서 사탄의 권세에 잡히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감사함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또한 생활적으로도 부요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과 함께 축복을 말하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시는 복을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과 나눌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차고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있어 생각과 자화상과 믿음과 입술의 말로 모든 묶임들을 묶거나 풀어 놓으므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었은즉 그러므로 믿음으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이냐, 자유인이냐, 축복받은 사람이냐, 저주받은 사람이냐, 성공자냐, 실패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자화상과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잘 사용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조용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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