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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제 13 강

by 【고동엽】 2022. 7. 16.

바울서신 제 13 강

 

빌레몬서

 

1. 에베소서

에베소서의 중심적인 사상들을 보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이방잊들의 하나의 를 이루게 된 것, 그들이 율법의 그 울타리 율법의 그 장벽을 허물고 율법을 유대인들은 울타리라고 봤어요. 곧 이스라엘의 성결을 지키는 즉, 이방인들과 선민인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이방인들의 불결한 ?로 부터 지키는 울타리로 봤다고. 근데 바울이 바로 이 사상을 이어 받아서 사실 율법이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만을 갈라 놓는 장벽 노릇을 한게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전체를 갈라 놓는 장벽, 이중 장벽 노릇을 한 것이예요.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성벽을 보호하는 울타리로 긍정적으로 봤는데 바울도 바로 그 생각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세운 통찰력으로 보나 --율법은 사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가로막는 담벼락이었는데 뿐만 아니라 인간들과 하나님을 가로 막는 담벼락인데--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속죄의 죽음으로 곧 화해의 죽음으로 곧 화해의 죽음으로 이 장벽을 헐어버리고 율법의 장벽을 헐어버렸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인간들끼리 또 화해를 시키고, 그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해서 교회 안에서 하나의 백성을 이룬거라. 이것이 이사야서의 예언된 성취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 인간과 인간,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되었던 그 장벽을 제거해서 하나님과 인간, 이방인과 유대인의의 화해를 이루어서 평화를 이룬 분이라.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굉장히 칭송하는 중요한 사상이예요. 2장에 있어서 이것은 갈 3:8-29절,고전 12:12절 등 롬 1:16절에 이미 설명한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또 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이방인들이나 헬라인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또는 종이나 상전이나, 남자나 여자나, 인종적, 性적인 구분, 신분적인 사회적인 구분이 다 의미를 잃어버렸음을 말 했는데 이것을 더 깊이 묵상하는 것이 에베소서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사도적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 하나님의 역사를 뒤돌아 보면서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탄하고 있어요.

둘째로 중요한 사상이 3장에 바로 이러한 역사가 바울 자신의 그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곧 비밀을 자신이 사도로서 맡아 관리함으로 일어났던 자신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자 오이코노모스(?) 비밀의 관리자임을 이야기함으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인류를 자기에게 화해 시키고 인류를 또 하나로 화해시키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자기 사도직의 의미를 또 묵상해요.

세번째로 중요한 사상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서 이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그런데 이미 고전 12장이라든지 롬 12장등에 은사들과 은사에 따른 교회 내에서 직분들과 역할들을 설명할 때, 바울은 이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메타포(비유)를 사용했어요. 그곳에서는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양한 지체들이 있다는것, 그런데 이 지체들이 다 개별적이고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다양성에 강조점이 있었어요. 그런데 골로새서, 에베소서에서는 이 교회가 하나님의 몸이라는 사상이 조금 더 발전을 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머리 사상,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임을 강조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일치를 강조하고 머리와 몸으로서의 관계 일치와 동시에 주종의 관계를 강조하고 동시에 몸의 하나됨을 강조했어요.

네번째로 이 교회가 그런데 이 아까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바울은 그 자신의 그 이방의 사도직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은혜의 역사를 뒤돌아 보는 관점에서 셀레로이션? 한다고 했는데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사 속에 --그 영원한 구원사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이 교회의 그 영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예정과 이 교회의 그 하늘에 하늘적인, 초월적인 지위와 그리고 이 교회가 지금 현재의 벌써 높임바된 뒤에 이 청상의 삶에 동행하는 것을 강조해요. 교회가 영원한 예정의지에서 부터 나와서 지금 현재 벌써 하늘의 높임 받은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 예수의 삶에 동참한 2:22, 2:50, 5:27절입니다.

다섯번째로 윤리, 기독교 윤리에 대한 강조가 있는데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은 자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4:17이하, 5:3이하에서 강조해요. 여기서 특히 세례가 옛 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으로 회심을 분명히 사건화한 것으로 호서가 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으므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것을 강조해요. 그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사건인데 그것을 세례가 그것으로 표시했어요. 그래서 물속에 잠겼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옛 죄인으로서의 자아가 죽고 장사되고 다시 물에서 깨끗이 씻긴 몸으로 떠오르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을 입고 새 사람으로 부활할 것을 상징한단 말이예요. 그것을 내세워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더이상 옛사람대로 살아서는 안될 것을 강조해요.

마지막으로 이와같은 윤리적 강조는 아마 소아시아에 퇴폐되기 시작한 영지주의적 경향에 대한 투쟁과 연관이 되어 있을 텐데 골로새서, 에베소서에도 이 영지주의자들의 세계관과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도덕적인 타락에 대해 경고하고 있어요. 영지주의자들은 한편 영의 세계인 하늘과 물질적인 땅 사이의 많은 악령들이 존재하면서 인간들의 운명을 左之右之 한다고 봤어요. 특히 하늘에 있는 별들이 이런 악령들의 그 거처지로서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우리 영혼이 하늘의 영의 세계로 복귀해서 구원을 얻는데 방해하고 길을 막고 인간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그러한 영적인 악령들의 손에 노예로서 고난을 받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러니까 이런 그 악령들을 어떻게 하면 잘 기쁨을 주고 환심을 사서 어떻게 이 땅에서의 삶을 좀더 평안하게 하고 영혼의 구원을 얻느냐? 자기들의 비밀지식을 가졌다느니 무슨 특별한 종교의식을 통해서 그런일을 해야 되느니 이런식의 가르침을 했는데 그러한 경향이 벌써 에베소 소아시아 지역에 벌써 일어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골로새서와 마찬가지이지만 그리스도가 모든 영들 위에 승리하신 --모든 악령들을 무장해제하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모든 악령들 위에 승리하시고 그들을 무장 해제하고 그러니까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들까지도 하나님께 화해시킨, 그래서 온 우주가 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종식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이 되도록 삶을 굉장히 강조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승리하신 그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반역하는 영들이 조금 있긴 있지만,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κυριοσ(주)이시므로 조만간 나머지 반발하는 세력까지도 전부 해체시키고, 무장 해제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들도 하나님께 화해 시킬 것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의지에 따라 옛사람 같이 죄악을 저지르고 고난을 받는 그리고 그들의 종 노릇을 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들과의 거룩한 전쟁을 계속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이런 6장에서는 거룩한 전쟁, 聖戰 --구약의 聖戰-- 사상을 교회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이 잔존하는 악령들과의 전쟁에 적용을 해요. 이미 승리하시고 우주에 군림하시는 주의 은혜로 이런 아직도 반발하는 악령들과 대적해서 싸워야 할 것이지 그들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러나 그들에게 순종할 필요는 더 더구나 없어요. 그래서 죄를 짓고 고난을 받고 그래서는 안될 것이예요. 이런 것을 강조해요. 골로새서도 마찬가지예요.

 

2. 빌레몬서

그점에 있어서 자 에베소서는 대충 그렇게 하고 빌레몬서를 봐요. 빌레몬서는 마지막으로 빌레몬서를 읽어보라구요. 짧은 편지니까. 이 편지가 아주 이제 보겠지만 아주 지혜롭게 쓰여진 편지라. 아마 바울의 편지중에 가장 지혜롭게 쓰여진 편지일거예요. 그래서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된다구요. 하여간, 바울이 암시적으로 하는 말을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천천히 누가 한번 큰 소리로 읽어봐요.

신약의 모든 책중에 이 편지가 가장 개인적이고 아름다운 편지예요. 아주 엄청난 지헤와 ?를 살피는 조심성을 가지고 있는 편지라. 이 편지에서 목사로서의 바울,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이 아주 잘 드러난다구요. 고린도 전후서에서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또 이 빌레몬서에서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이 잘 드러나요. 그래서 우리가 배울게 많아요.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바울에게서 참 진정한 목자의-- 모습을 잘 배울 수 있고 또 오늘같이 교회의 사회적 역할, 또는 복음의 사회적 의미가 강조되는 시대에 또 빌레몬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어떻게 상호 교회 안에서의 관계 되는 것에서도 많은 교훈을 줘요. 우선 이 빌레몬은 아마 골로새가 위치했던 라이크로스? 계곡의 어느 곳에 있었던 그리스도인인 것 같아요. 골로새나 아마 인근지역에 있었던 그리스도인인데 상당히 부요한 그리스도인임이 여기서 드러나요. 노예들을 거느린 상당히 부요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바울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예요.

그런데 이제 신앙이 훌륭하고 또 집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2절을 보는 바와 같이, 자기 집에 교회를 초청해서 자기 집에서 교회가 모인다구요. 지금 요새말로 하면 House church죠. 초대 교회들이 다 이랬죠. 부자 집에서 교회가 모였다구요. 빌레몬집이 그래요. 이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집안의 노예였는데 도방을 해가지고, 아마 빌레몬집의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한 것 같아요. 도망을 갔는데, --인제 아마 큰 도시로 간 것 같아요. 큰 도시의 익명성을 누릴려고 해요. 멀리 지금 바울이 어느 감옥에 있느냐가 문제인데, 전통적으로 로마 감옥에 있다고 보는데, 에베소 감옥에 있든지, 아니면 아이자라 감옥에, 아니면 고린도 감옥에 있었느냐는 여러설이 있는데 옥중서신들이 다 어느 감옥에서 쓰여졌느냐하면 전통적으로 로마 감옥에서 쓰여졌다고 그러는데, 다 그런거냐 아니면 지금 이야기한 그런 어느 곳이냐 하는것이냐 확실히 모른다 이거예요. 큰 도시에 있는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로마일 가능성이 있지. 도망을 갔는데-- 이 오네시모가 체포되어 가지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도망 온 노예라는 것이 발각이 되었는지 같이 감옥에 살게 되었어요. 바울하고 거기서 바울의 복음 선포로 이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구요. 그래서 바울을 이제 섬기는자가 되었어요. 바울을 돕는자가 되었다구요.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의 도움을 계속해서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이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지금 돌려 보내는거라. 돌려 보내는데, 바로 이 편지를 쥐어서 보내요. 오네시모에게 “너 주인한테 돌아가라. 이 편지를 가지고 가거라.” 그래서 지금 이 편지를 써서 보낸단 말이예요. 우리도 아까 이야기한대로 바울의 목회자, 목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첫째로 이 바울은 부자인 빌레몬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고 노예인 오네시모에게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이것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것이예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롬 1:16절 또는 갈 3:28절 아까 이야기한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힘이라 그래서 이 복음에는 인위적인 편파주의가 있을 수 없어요. 복음은 주로 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자들을 무시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예요. 오늘날 같이 이념적인 분규가 심하고 계층적인 분규가 심한 사회에서는 도시의 중산층 교회에서는 마치 복음이 부자들만, 부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 같이 아주 중산층적인 태도와 가치관만 강조하고, 반면에 해방신학 하는 사람들은 복음은 마치 가난한 자들만 위한 것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말이예요. 복음은 부자나 가난한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서울의 무슨 어떤 부자동네 아주 엄청나게 큰 교회 목사가 --저기 미국의 그 말썽 많은 로버트 슐러의 수제자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그 위대한 스승 로버트 슐러를 초청해가지고 힐튼 호텔에서 무슨 목회자 수련회를 했대요. 거기 참가 자격, 장년 천명이상 모이는 교회 목사 이상들만 참가 자격을 해가지고 힐튼 호텔에서 돈을 쫘악 내가지고 로버트 슐러를 데려오는데 돈즐 잔뜩 줘가지고 해서 수련회를 했대요. 바로 그런 목회자는 복음은 누구만을 위해서 있는거냐 하면 부자와 귀족들만 위해서 있는거라. 그래서 그런사람, 천명이상 거느린 목사만 진짜 목사고 나머지는 목사가 아니라. 목사도 아니예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칼빈신학교는 “크리스찬 리포움 쳐치”라 CRC라고 화란의 개혁교회가 두개로 갈라졌어요. 하나는 모르겠어요. 화란말로 모르겠는데 하여간 화란의 개혁 교회가 크게 두개로 갈라 졌는데, 그 갈라진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 이중 자유주의 쪽으로 하는 사람들은 “르포움드 쳐치 인 아메리카”라는 교단이고, 좀 보수적인 여기서 갈라진 사람들은 “크리스챤 르포움드 쳐치”라는 교단을 만들었어요. 이 두개는 완전히 다른 교단인데, 서부 미시간에 화란계 이민들의 중심지예요. 화란계 이민들이 모여사는 몇 곳이 있어요. 아이오하도 몇 곳이 있는데 여기에 한 반은 “르포움드 쳐치인 아메리카”하고, 반은 “크리스챤 르포움드 쳐치”인데 (칼빈은 크리스찬 르포움드 쳐치계통) 바로 미시간 호숫가에서 45분 차로 가는 거리에 훌란드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이 학교의 세미나가 있었어요. 로버트 슐러가 바로 여기 출신인 RCA라는 화란 계통이예요. 그런데 이 친구가  화란 사람들에게 크리스챤 르포움드 쳐치나 RCA 사람들에게 아주 눈에 가시라. 이 사람 때문에 아주 창피하게 느낀다구. 이 사람 엉터리 복음, 완전히 자본주의적, 상품주의적 엉터리복음을 선포한다고 아주 화란 사람들이 창피하게 생각한다구요.

그런데 이 친구가 자기가 산상 수훈을 강해 했다고 LA에 있는 크리스탈 쳐치(수정 교회)에서 산상 수훈 강해한 것을 책으로 냈다구. 그런데 뭐라고 냈느냐 하면 (칠판) 8복, 라틴말로 (메아티튜스) 복이 있다. Be happy happy to(?)라는 책을 냈다고 자기가 산상 수훈 강해 8복 강해. 이 친구 사상이라는게 그거 아냐? 이른바 적극적인 사고방식, 적극적으로 나가면 물질적인 축복 받고 성공하고 건강하니 그래서 행복하게 산다는거 아니예요? 하나님께 많이 바치면 하나님께서 몇배로 갚아주고. 모든 축복이 다 물질적인 반대 급부로 이루어진다는거 아니예요? 그래서 이 팔복은 우는자가 복이 있고 굶주린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거꾸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적극적으로 사고해 가지고 돈 많이 버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거라. 완전히 산상 수훈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거라.

이 책이 출판해서 나 거기 있을때 86년인가  그리스챤 르포움드 쳐치에서 지난 1년동안에 가장 나쁜책, 'The ? book year'이 상을 줬다고요. 같은 화란 사람들이 아주 창피하게 생각한다고요. 로버터 슐러 같은 자가 자기들 중 하나라, 정작 미국 사람들은 그러는데... 여기 한국의 조선 사람들이 로버트 슐러가 예수님 다음으로 생각하고 아니면 적어도 바울 사도 다음쯤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을 데려다가 그 난리를 피웠다는데 그래서 이 복음이 부자와 귀족들만 위한 것이라.

반면에 또 해방 신학, 민중 신학하는 사람들이 복음은 누구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느냐 하면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예요. 그렇지 않고 빌레몬을 위해서도 있고 오네시모를 위해서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하나님 앞에 똑 같이 죄인들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 것을 우리가 여기서 발견을 해요. 바울이 진정한 의미로 차별없이 모두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이 복음을 선포한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둘째로 바울의 복음 선포는 아주 효과적인 거였어요. 그래서 이 빌레몬이 아주 철저하게 회심을 하고 그래서 자기 집에서 교회를 세울 정도로 마찬가지로 오네시모에게 아주 완전한 회개를 이루고 회심을 이루어서 완전한 변화를 이루었어요. 전에는 이 아무 쓸모없고 반역하고 달아난 노예였는데 이런 사람을 복음으로 하나님께 쓸모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다구요. 그래서 바울을 신실하게 섬기고 이제 자기 옛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갈 각오가 되어 있는 돌아 갔다고 하는 보통 이 도망간 노예가 그것도 아마 상당한 금전을 도둑질 해 가지고 도망간 노예가 돌아오면 죽사하게 맞고 감옥살이 하고 그럴 판인데 그런데 어떻게 적당히 바울을 사바사바 해가지고 ‘아 내가 당신 감옥에서 고생하니까 당신좀 섬기게 도와 달라’고 이런 부탁 하지 않고, 자기 주인에게 돌아가는 자기가 도망간 것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돌아가는 그런 오네시모의 모습에서 바울의 복음 선포가 효과적이었음으로 적당히 중간쯤에서 끝나는게 아니고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요. 이것은 오네시모가, 이 오네시모라는 이름 자체가 ‘유용한자’라는 뜻인데 이제 어떻게 하느냐 하면 11절에 ‘무익한 자였으나’ 이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유용한 자’가 되었다고 오네시모 이름으로 우리 언어 유희를 해요.

세번째로 바울은 어떤 그 혁명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아요. 가령 노예제도는 완전히 철폐되어야 된다는 구호를 외쳐대지 않아요. ‘빌레몬 네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를 부린다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그런 말 한마디 없어요. 그러나 이 진정한 혁명을 가져오는 그런 가르침을 하고 있어요. 그는 노예제도가 철폐되어야 된다든가 또는 오네시모가 ‘너 참 도망 잘했다. 그 노예 제도라는 것은 당연히 도망해야지, 너 잘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오네시모를 옛 주인에게 돌려보내요. 이렇게 보면 당시 바울이 그 노예 제도를 존중한 것을, 사회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요새말로 하면. 그러나 바울이 오네시모를 스스로 어떻게 취급해요? ‘내가 감옥에서 낳은 아들이다.’ 아들로 취급하고 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 받지 말고 형제로 받으라고.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 가져오는 진정한 혁명이라는 말이예요.

제도적 혁명보다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정신에 혁명을 가져와요. 주종의 관계를 주안에서 형제의 관계로 뒤집어 놓는 것이 복음이라 이말이예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이 세상적으로 주와 종과, 하늘과 땅 차이의 관계인데 주안에서는 형제로서 그러니까 같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기능적인 차이, 主從의 기능적인 차이는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관계의 본질적인 면이 탈바꿈하는 것이죠. 그래서 노예제도... 하나의 인간 인격체가 되는 것이고, 아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주인인 빌레몬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라 말이요. 여러분들이 이 편지를 받았을때 이 편지를 받는 빌레몬의 입장을 생각해 봐요. 그가 진정으로 바울의 복음을 이해 했다면 오네시모를 더 이상 옛날 같이 종으로 다루지 않고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 형제로 다룰 수 밖에 없는거라 말이예요.

이와 같이 복음은 항상 무슨 이념적인 선동을 통해서 변화를 가져오기 보다는 항상 그 사람들의 심장을 변화 시키고 사람들의 세계관, 인생관을 변화 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 관계에서 본질적인 면 이웃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켜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거라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노예를 우리 지금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때 고대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모습이 노예제도였지요. 모든 고대 문명은 노예들의 희생위에 세워진 문명이지요. 에집트의 피라밋 문명도 그렇지요. 헬라의 이른바 민주 사회도 노예들의 민주 사회의, 헬라의 그리스도의 민주사회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인권을 갖고 자유를 갖고 그런게 아니지요. 자유인들만, 시민들만, 그 소수의 시민들의 그런 자유로운 삶, 자유로운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노예들이 아무런 인권도 보장 받음 없이 그 하귀(?)의 일정으로 항상 그랬어요.

오늘날 우리 관점으로 볼 때 고대 사회의 악질적인 모습이 노예제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예제도의 문제점을 우리 신약 성경은 의식을 해요. 가령 고린도전서 7장 같은 곳에서도 그러고 지금 이런 것에서도, 그러나 어느곳에서도 명백히 노예 제도가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니까 이것을 철폐해야 된다는 그러한 명백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예요. 노예 제도가 복음에 위배되는 것임은 다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거라. 아까 갈라디아서3:28절 같은 것이 바로 그런거라. 그리스도안에서 자유인도 노예도 없다는 그 소리는 지금 이 세상적인 노예와 자유인의 분리가 이제 이 세상에 악함의 표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의 그 관계 또는 새로 회복된 하나님의 cosmos의 새 질서 속에는 그런 이 세상의 죄악의 모습인 착취당하는 노예와 착취하는 주인이 없어져 버린다 말이요. 그래서 이 노예 제도의 문제점을 신약성경에서는 곳곳에서 말하고 있어요. 그것의 죄악성, 곧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곳에서 노예 제도를 철폐해야 된다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아까 이야기 한대로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의 그 심장을 변화 시키고 이웃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키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 새로운 태도를 넣어 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혁명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복음의 역사를 주욱 보면 항상 복음은 해방하는 --해방의 복음으로-- 힘을 발휘했어요. 그래서 고대 사회의 노예제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구요. 신약전서 어디에서나 노예 제도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지만, 자 이복음이 전파된 곳에 노예제도가 철폐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어요. 고대 사회 속에서도 최근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아프리카 사람들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것을 금한 것도 영국의 국회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미국에서 노예 해방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물론 노예 제도가 복음에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엉터리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었지만... 이 복음에 진정으로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동했고 항상 억압 받은 사람들에 대한 해방의 복음으로 힘을 발휘했어요. 우리 한국에서도 그렇지요.

요새는 이 바울의 가르침이 여자들을 억누르기 위해서 자꾸 쓰는데 정 반대로 사실은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이 가는 곳에는 항상 여자들의 해방이 있어요. 이것이 없는 곳에는 항상 여자들을 억누르고 있어요. 오늘날 여러분들 중동에 한번, 인도에 한번 가봐요. 여자들이 얼마나 노예로 사는가? 인도나  파키스탄공항에 내려보면 벌써 알아요. 또는 중동의 공항에 내려보면 이 여자들이 눈만 내놓고 다 뒤집어 쓰고 거의 장님이 되어가지고 공항에 자기 남편이나 아들의 손에 이끌려서 왔다 갔다 한다구요. 눈만 내놨으니까 좌우가 안보이잖아요. 그래서 자꾸 부딪힌다구. 그러니까 장님 이끌듯이 남자가 이끌고 이리저리 다닌다구요. 그게 여자들의 노예상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슬람에 가면... 예수 당시도 그랬죠. 유대인들도 힐련?에 의하면 남자는 마음대로 여자를 이혼할 수 있어요. 땅을 조금 태워도 이혼사유가 되고, 우리말로 밥이 좀 설어도 이혼사유가 되요. 이혼 증서만 써주고 나가라고 해요. 그게 이제 오늘날 이스람 샤리아법에도 그대로 있어가지고 이슬람들은 어쩌면 통일이 되어 버렸어요. 재판소에 갈 필요도 없어요. “내가 너를 이혼한다. 내가 너를 이혼한다. 내가 너를 이혼한다.” 3번하면 끝. 이 여자들의 그 억압이라는 것은(노예상이라는 것은) 지금도 복음이 안들어간 회교권에나 힌두권에는 말 할 수 없어요. 힌두의 과부를 태워 죽이는 법, 이게 영국 식민 통치자들이 19C에 법을 금했는데 엄청난 반발을 일으키며 금했어요. 이게 뭔지 말아요 여러분들, 남편이 죽으면 힌두 장례식은 화장을 해요. 시체를 장작불에 태우는데 거기에 그 과부가 아무리 청춘이어서 아직 삶이 창창 남았든 어쨋든 그 남편의 장례 화장불에 뛰어 들어가 같이 죽어야 되는 거라구요. 힌두법에는 그짓을 했어요.

이것은 옛날 고대 우상 숭배한 종교에서 인간을 재물로 바쳤던 이 제도를 영국의 식민 통치자들이 금했는데 힌두교들이 엄청나게 반발을 했어요.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이 토속 종교의 부활이 일어나는 운동이 있어가지고 이란의 호메이니옹이 회교 부활운동이 있어 가지고 이란 사람들은 상당히 서구화 해가지고 여자들이 이런거 안쓰고 다녔다고요. 호메이니 혁명 이후에는 다 쓰게 만들었다구요. 여자들이 억압을 받게 되고 그 영향으로 심지어 인도네시아 같은 데서도 이 이슬람 사회의 그 코란의 샤리아법을 현대 법으로 쓰기는 어렵다고 해가지고 ? 대부분이 현대적? 그런데 이 호메이니 혁명이후  ?........... 이슬람 공화국의 리야드다 전부 현대적인 법은 때려치우고 코란의 샤리아 법을 그대로 적용을 했어요. 도둑질하면 팔을 잘라 버리고, 간음하다 잡히면 곤장을 40대인가 때려서 죽기도 해요. 또는 목을 매서 처형을 시키고, 옛날에 1970년대 사우디 아라비아 공주 하나가 공개적으로 칼로 목을 침을 당해서 죽었어요. 왜냐 하면 그 여자가 영국 남자하고 살았는데 발각이 되었어요. 이 사우디 아라비아는 왕자 공주가 수백명이예요. 왜냐하면 부인을 정당하게 4명을 얻을 수 있으니까 거기서 난 왕자 공주들이 수십명이라고요. 그중의 하나가 처형을 당했어요. 그것을 영국의 어떤 여행자가 비밀리에 그 장면을 찍어가지고 내가 영국에 있을때 BBC에서 방송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게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크게 외교적인 문제가 되었다구요.

하여간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 이런 나라들이 다시 자기들이 이슬람 퍼블릭?이 되어야 한다고 회교들이 심지어 여자들이 이 샤리아 법을 해야 된다고 해요. 그러면 남자들은 부인을 4명까지 얻어도 되는 거고 아무렇게나 이혼해 버려도 되는 것이고 여자들의 권리는 아무 것도 없는 거라. 그런데 그런 법을 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리고 머리에 쓰고 다니고 그래야 된다 이거예요. 이런 식으로 회교 국가에서 일어나 가지고 인도네시아에서 지금 가령 수하르트 군부 정권에서 그들은 자꾸 독재를 해서라도 조금 국가를 현대화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맞선 근본주의자들과 투쟁하는데 에집트도 마찬가지예요. 무바라크 정권은 자꾸 세속화하고 현대화 하려고 하는데 이 근본주의 회교 주의자들은 자꾸 이슬람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더 억압이 된다구요. 이 영향을 받아서 인도에서도 일부 여자들이 아까 이야기한 그 미망인 태워 죽이는 법을 부활한다고 데모를 해요. 저희들 다 죽고 싶은 모양이지요. 도대체 이런것을 보면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얽어매는 쇠사슬인가를 알게되요. 종교라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주는게 아니고 사람들을 얽어매는 쇠사슬인 것이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어느곳에서나 해방운동이 일어나는데 노예의 해방운동이, 여자들의 해방운동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운동이 오늘날 바울의 가르침을 가지고 자꾸 교회내에서 여자들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와 바울의 정신에 어긋난 사람들이라구요. 이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자꾸 고린도전서 11:32이하를 둘러대면서 여자들은 잠잠하라 했으니까 찍소리도 말고 가만히 있어라하는데, 그것은 바울의 복음을 이해 하지 못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못한다구요. 그런 문자주의자들은 그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구요.

네번째로 바울은 자기 사도적 권위를 어떻게 쓰나를 우리가 잘 볼 수가 있어요. 우리 한국에서도 복음이 여자들의 해방이어 가지고 여자들이 여기 남자들 틈에 앉아 신학 공부한다고 앉아 있어요. 바울의 복음이 없었어 봐요. 지금 여러분들 치마를 둘러쓰고 집앞에 왔다 갔다 할 정도지 어떻게 서울에 와서 어디 지금 이 틈에 앉아 있어요? 나 어렸을때 우리 할머니들도 치마쓰고 다녔다구요. 그리고 좀 시골에서 행세하는 집안에서 여자가 시장에 간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잠잠하라 소리는 무엇을 전제하느냐 하면 여자들이 복음의 자유를 얻어가지고 교회에서 활발히 말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라구요. 그런데 여자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이런 동네가 떠내려가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러가지로 분파로 또 성만찬에 부자들이 과시하느라고 잔뜩 음식을 챙겨오고, 잔뜩 맛있는 포도주 가지고 와서 먹고 마시고 해 가지고 곤드레 만드레 해서 굉장히 무드있어 하고, 노예들은 먹을게 없어서 곤란이 일어나고, 성령 은사를 받았다고 그 은사중에서도 좀 밖에 드러나는 은사, 방언하고,환상보고, 에언한다고 하는 온갖 곳에서 떠들어 대는데, 그중에 한 몫한 것이 여자들이라... 바울이 뭐라 했느냐 하면 여자들이 기도하는 것은 좋다 공적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좋은데 너울을 쓰고 하고 그리고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물어볼 것 있으면 집에가서 물어보고, 이렇게 질서를 잡는거라구요. 그런데 그 질서 잡음이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고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었던 일, 고대사에나 헬라사에서 있을 수 없었던 일, 남녀가 함께 모이는 곳에서, 고대 유대 회당에서 남녀가 어떻게 함께 모여요? 여자들은 저기 따로 저기 뒤에 앉아있어야지. 남녀가 함께 모여가지고 거기서 막 떠들어대는데 남자들은 못당해요. 그런 인류애의 보편적인 것이지. 여자들이 말이 많아요. 그래서 무질서해서 질서를 잡는거예요.

그래서 이 질서가 제대로 유지되는 곳에는 갈라디아서 3:28에 들어 맞는 거라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의 질서 속에서는 남자고 여자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말이예요.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고 그것은 다 빼버리고 바울이 질서잡는 그말만 그냥 확대화 해가지고 여자들은 꿈쩍도, 찍소리도 말라고 자꾸 윽박지른단 말이예요.

바울은 8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빌레몬의 순종을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있음을 은근히 말하죠. 이 권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울은 아주 이 세상적인 성신 원리로 비상하잖아요. 사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자기가 빌레몬에게 한 섬김에 근거해서 이 권위를 주장해요.

특히 19절을 보면 ‘너는 나에게 네 자신으로 빚졌다’해요. 왜냐 하면 복음의 섬김을 통해서 그가 영생을 얻었으므로 생명을 얻었으므로라고 은근히 상기시켜요. 바로 이런 사도적 권위를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주장하는게 아니고 그래서 가령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주장하는게 아니고 ‘아 나 지금 감옥에서 고생이 많은데 너만 그렇게 편히 살면 되느냐? 나를 좀 도와다오 그러니 네 종 오네시모를 나에게돌려 보내면 어떠냐?’ 이런 말도 하지 않아요. 자기 사도적 권위를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쓴게 아니고 도리어 18-19절에 오네시모가 너에게 무슨 빚진 일이 있으면 만약 못 갚을 빚을 졌다든가 네 재산을 축내고 도둑질해 도망 갔다든가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다 갚아 주마’ 자기가 다 대신 갚아 주겠다고 해요. 여기서도 바울이 자기의 교회, 자기를 통해서 회심한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누를 전혀 안끼치려고 하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볼 수가 있지요. 이 권위를 바울은 다만 사도적 사역만을 위해서 쓰라는 말이예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움을 위해서만 쓰라. 구체적으로 다시말하면 빌레몬과 오네시모사이에 화해를 가져오고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 일에만 지금 사도적 권위를 쓰고 있는 거예요.

다섯번째로 보면 바울의 이 그 온화한 모습을 봐요. 8절과 9절에 내가 명령할 수 있지만 명령을 하는게 하니고 호소한다 그랬어요. 이런 것에 어디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있어요? 오늘 우리 목회자들의 큰 병폐 하나가 권위주의로 나가는 것인데, 내가 명령할 수도 있지만 명령하지 않고 내가 호소한다고, 또 자기쪽에서 일방적인 결정을 하는게 아니고 빌레몬의 동의를 구하는 자세, 14절, 20절에 보면 나를 도와 달라고 바울이 호소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 이게 다 사랑의 근거에서 나온다구요. 권위주의적인 목회자의 모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온화한 목회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여섯번째로 바울의 지혜와 민감성. 이 편지의 스타일 자체가 아주 지혜롭고 아주 주의 깊게 문장 하나 하나를 골라서 행간에 많은 것을 함축하면서 자기의 호소와 오네시모를 제대로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호소와 자기 사도적 권위 내지는 빌레몬이 자기에게 진 빚을 상기 시킴을 잘 발란스를 이루었어요.

한편 바울이 ‘오네시모가 너에게 도망을 가서 큰 해를 입혔는데 용서해 주고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간곡한 호소가 있지요. 그 호소를 하고는 곧 바울이 항상 무엇을 덧 붙이느냐 하면(그 발란스를 이루느냐 하면) ‘네가 나한테 얼마나 빚졌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진 것이 얼마인가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네가 나에게 얼마나 빚졌는가를 생각해보라.’고 은근히 상기 시키는 아주 지혜롭게 쓴 편지예요.

그래서 12, 13, 20절을 보면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이 바울에게 돌려 보내서 감옥에서 바울의 시중들기를 바라는 바울의 소망이 행간에 함축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명령하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도 않고-- 아주 간접적으로 지혜롭게 표현하고 있어요. 이것은 바울이 빌레몬이 오네시모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예요. 빌레몬이 결국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할 일이고, 왜냐하면 빌레몬이 바울에게 무엇을 선물한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사랑의 선물이어야만 진정한 선물이기 때문에 강요함이 전혀 없어요. 오늘 한국 목회자들의 이 권위주의와 강요, 우리 한국 교회 요소의 신앙생활이 강요 요소가 많아요. 헌금, 주일 성수라든지 기도회 참석이라든지 너무 강요 요소가 많아요. 그래서 이 신앙생활이 고달픈거라. 그래서 한국에서의 신앙 생활은 고달퍼요. 기쁨이 별로 없다구요. 맨 강요, 모든게 강요. 교회 내에서의 강요하는게 굉장히 많아요. 설교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호령하고 강요하는 것도 있지만 그 외의 여러가지 분위기라든지, 강요하고 몰아 붙이고... 그러면 외적인 것은 성장이야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적인 인격의 성장이 있는지 그것을 한번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예요.

일곱번째로 바울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을 자기가 갚겠노라고 해요. 18, 19절, 자기의 그 양을 위해서 이렇게 까지 자기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목회자를 봐요. 우리 한국에서 이 목회자는 무조건 대우만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관념이 있는데, 여러분들 나중에 다 목회자가 될 텐데 지난번에 어떤 권사님 한분이 나보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같이 먹었어요. 옛날부터 나를 한번 대접하려고 했대요. 그렇다고 어디 좋은데로 가자고해서 점심이니까 좋은데로 갈 것이 아니라 설렁탕이나 간단히 먹자고 설렁탕 하나씩 먹었어요. 노인 권사님이니까 아무래도 느리지. 그래서 내가 먼저 돈을 냈다고. 그랬더니 깜짝 놀래가지고 어디 목사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목사님은 당연히 받기만 하는거야? 아주 인식이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목사가 권사님 위해서 점심 한번 사는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느냐 말이요? 당연한 것이지. 바울 보라구요. 우리 한국에서는 이상하단 말이야. 장로하고 목사하고 어디가면 장로가 사야되고, 권사하고 목사하고 어디가면 꼭 권사가 사야되고. 왜 그래요? 생각해 보라구요. 그럴 이유가 있나? 하여간 목회자는 종이라고 하면서도 상전 대우만 받아야 한다구요. 종님이니까? 사전에 從자 뒤에 님자는 없어요. 놈자가 붙어야지.

마지막으로 바울의 오네시모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구구절절히 표현이 되어 있어요. 10절에 ‘내 아들 오네시모, 내가 감옥에서 낳았다.’고 이런 표현, 11절에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자기 이름값 하는 유용한 자’가 되었다고, 12절에 우리말 번역이 잘못된 것 같아요. 오네시모가 나의 심복이라, 우리말로 종이 아니고 (폴랑크랑?) 그가 나의 심장이라. 심복이라면 내가 데리고 다니고, 내가 신임하는 나의 모든것을 알아서 해주는 꼬봉이라, 그런 소리가 아니예요? 그게 아니고 정반대, 나의 심장이라 그말이요. 정서, 감정이 싹트는 심장이라는 뜻이예요. 16절에 내게 아주 귀한자라 오네시모가. 18, 19절에 그대신에 빚도 갚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바울이 오네시모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표현하는데 빌레몬이 이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 한번 빌레몬이라 한다면 꼼짝 못하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빌레몬이라 했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아마 오네시모를 형제로  환영하고 며칠 잘 대접하고 쉬게 했다가 다시 바울에게 가서 감옥에서 고생하는 바울을 돌보라고 보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거 강요하는 곳이 하나도 없다구요. 그래서 지금 내가 몇가지로 간추렸는데 이 편지는 사회 계층간의 문제,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바울이 어떻게 해결하나에 대해서도 오늘날 사회 계층 문제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줘요. 그러나 목사 바울의 참 모습도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주 귀한 편지예요. 자 오늘은 거기까지.

 

이번 학기는 여기까지 종강.

바울서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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