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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기쁨 (요2서1:4-13)

by 【고동엽】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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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기쁨 (요2서1:4-13)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은 지대한 영향을 받고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일평생 헤어날 수 없는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중에도 친구를 잘 만나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는 자도 있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신중을 기하는 것은 누구를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가정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또 사업을 하더라도 많은 동업자를 만나게 되는데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사업의 성공과 실패에 큰 요인이 됩니다.

이처럼 삶 자체가 무수한 만남의 연속이기에 어떤 만남인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꿔지고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나 명성 있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삶에 유익을 갖고자 합니다. 한 정치인이 실력 있는 자로 부상하면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어떤 이들은 유명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아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자기의 위치를 세워 주고 보호받을 수단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8.15일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50년만에 이루어진 감격적인 만남을 보면서 함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해방 이후 강대국의 개입에 의해 국토가 분단된 이후 남과 북에 흩어져서 50년을 지내 오면서 얼마나 보고 싶어했고, 얼마나 만나고 싶어했던 그리운 혈육이었습니까? 그래서 서울과 평양에서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이북에서 아버지를 만나러 찾아온 어떤 60대의 아들은 침해로 인해 아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 앞에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울었고, 이북에 있는 딸을 만나러 간 어떤 어머니는 주름살이 가득한 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할 수 없어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만남이 얼마나 기쁜 일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난다는 자체가 얼마나 기쁜 일이며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세 번의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50년간 헤어졌던 사랑하는 혈육을 만나기 만나기 위해서 휄체어를 타고 이북을 찾아가고 이북에서 찾아온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암 말기에 있는 90노모가 구급차를 타고 아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찾아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혈육이기 때문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혈연의 만남은 우리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형제를 잘 만나야 하고, 자식을 잘 만나야 합니다. 어떤 부모냐에 따라 자녀의 장래가 결정됩니다. 또한 어떤 자녀냐에 따라 부모의 영광과 욕됨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어떤 형제냐에 따라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배우자의 만남입니다. 가장 길게, 가장 가깝게, 가장 허물없는 만남이 있다면 그것은 부부간의 만남입니다. 부부간의 만남은 약속도 필요 없고 횟수도 필요 없습니다. 부부가 약속 시간을 정해 놓고 만난다든지, 하루에 몇 번을 만나기로 한다는 등 횟수를 제한한다면, 그것은 문제 있는 부부입니다. 내조로 성공한 남편이 있는가 하면 외조로 성공한 아내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 때문에 일평생 속상하고 불행한 아내가 있는가 하면 아내 때문에 불행해진 남편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셋째는, 이웃과의 만남입니다. 이웃이란 친구, 동료, 동네 이웃을 총칭합니다. 이웃을 잘못 만나면 살기가 힘들고 피곤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이웃이냐 입니다. 좋은 이웃을 찾기보다는 내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좋은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좋은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 속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만날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⑴,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
사도 요한의 별명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가 쓴 요한 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를 보면 구구절절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요일4:20). 그런가 하면 요한 일, 이, 삼서 속에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영을 좇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공격하며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사랑을 내세워 무조건 용납하고 타협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피할 것은 피하고 받을 것은 받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①,미혹하는 자를 만난지 말아야 합니다
7절을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했습니다. 요한 당시 맹위를 떨쳤던 두 가지 이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비온주의(Ebionism)로서 예수 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는 단순히 마리아의 아들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지 주의(Gnosticism)로서 예수 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는 인간적 요소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 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신성을 부인하든 인성을 부인하든 예수 님의 참모습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인 것입니다. 미혹이란 그럴싸한 이론과 조건으로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흐리게 만들어 나쁜 쪽으로 끌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좋은 쪽으로 이끌고 인도하는 사람이 있고, 나쁜 쪽으로 유혹하여 이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혹 자를 만나고 따르면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마귀가 사람을 유혹할 때 쓰는 네 가지 수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누구나 다 하는 건데', 둘째는 '이건 작은 것인데(아무것도 아닌데)', 셋째는 '아직 젊은데', 넷째는 '딱 한 번 만이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걸리는 날이면 마귀 유혹에 빠져 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양식되는 진주조개는 한 방울의 소금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바다 속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비록 유혹이 사방에 널려 있고 손짓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미혹하는 자를 멀리합시다. 그리고 이겨냅시다.

②,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교훈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에겐 만남이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인격도 달라지고, 생활도 달라지고, 심지어 얼굴 표정도 달라집니다. 예수 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순종하기를 힘쓰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닮게 되지만, 거역하고 거부하기를 힘쓰는 사람을 자주 만나면 그쪽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그래 맞아, 옳은 말씀이야. 한 말씀도 그른 말씀이 없어.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힘써야지'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뜻과 결심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며 전달하는 사람을 만나면 은혜를 받고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맨날 그 소리, 신물난다, 자기는 뭐 그대로 사나, 들을게 없어, 딴소리 없나"라며 딴전을 피운다든지, 졸고 앉아 있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거기 감염이 되면 그 신앙은 점점 메말라 죽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미혹하는 자들과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상종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했습니다.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만, 사랑과 진리의 선을 엄격히 지킬 것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어느 날 요한이 공중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예수 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그노시스 이단의 우두머리인 케린터스(Cerinthus)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은 큰소리로 "목욕탕에 있는 사람들아, 빨리 나와라. 이단자가 들어왔으니 목욕탕이 무너질까 두렵다"라면서 알몸으로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는 교훈을 오해하여, 교제를 끊고 사람을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고 심방 대원도 집에 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교회 심방 대원을 기쁘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여러분 가정의 평안을 빌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외판원이나 검침원을 대하듯 하지 마십시오. 저는 교인 가정 심방을 자주 못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만날 시간이 많지 못합니다. 이러한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 힘든 일이긴 합니다만 현관에 서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인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 교회 교인들은 예배가 끝나면 한 줄로 서서, 현관에 서 있는 담임 목사와 일일이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한 후 밖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교인이 많으면 그 시간이 한 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습니다. 요한이 인사도 말라,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것이며, 그들의 가르침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친구니까,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니까, 나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이니 까라는 이유로 내 신앙을 파괴하는 사람과 교제하고 거기에 물들면 안 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고,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⑵,꼭 만나야 할 사람들
우리 주변엔 언제나 만남을 피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꼭 만나야 할 사람들과 만나면 좋고 유익하고 기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면 기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①,진리에 행하는 사람입니다. 4절을 보면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진리대로 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을 보고 만나면 심히 기쁘다는 것은 비단 요한 만의 심정은 아닐 것입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신앙이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신자 때보다 횟수가 늘어나고 직분을 맡으면서 믿음의 순수성과 봉사의 열도가 식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속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교회 출석한 지 수년 안에 믿음이 자라고,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순수하게 섬기고, 직분을 멋지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노라면 사도 요한 보다 더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9절에서는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님을 말합니다. 그 뜻은 말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 집에 주님이 가기를 기뻐하시고 거기 머물기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효자고 효부입니까? 노 부모님이 마음 편안하게 머무시는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 드리는 사람이 효자 효부입니다. 그곳은 문화 주택이나 별장이 아닙니다. 이태리 가구나 침대로 꾸민 방이 아닙니다. 부모님 마음을 늘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이고 그 집에 머물기를 기뻐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네 집에 거하기를 기뻐하십니까? 누가 하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 있습니까? 목사일까요? 장로 가정일까요? 권사댁 아니면 집사 댁일까요?

시골에서 양조장을 하던 부자가 전도를 받아 예수 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양조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신앙이 자라면서 고민과 갈등도 점점 커졌습니다. 그가 늘 부러워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꿈에라도 좋으니 주님이 자기 집을 딱 한번만이라도 방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한테 그 이야길 했더니 기도해 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가실 곳도 많고 바쁘셔서 힘드시겠지만 한번만 저희 집을 찾아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린 지 열흘 되는 어느 날 밤, 주님이 마당을 건너 안방 쪽으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쫓아 나가 비틀거리는 주님을 부축해 안방으로 모시는데 역겹고 견디기 어려운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양조장 주인은 속으로 '주님은 양치질도 안하시나 웬 냄새람, 영양 실조인가 왜 비틀거린담'이라고 생각하며 안방에 모셨습니다. 앉으시더니 주님이 "얘야, 다시는 네 집에 올 수가 없겠다." "왜 그러십니까, 주님?" "저쪽 골목에 들어서면서부터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내가 그만 술에 취해 이 모양이 됐느니라. 내가 술에 약한 건너도 잘 알지 않느냐?"라며 털고 일어서시는 주님을 붙잡다가 잠이 깼습니다. 다음날 목사님을 찾아간 그는 "목사님, 제가 제 힘으로 양조장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저도 오늘부터 기도하겠습니다만 제 사업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목사님이 "사업을 위해 기도라니요?"라고 묻자 그는 "오늘부터 저희 양조장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부터 주인은 양조장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목사님은 한술 더 떠 양조장이 빨리 폭삭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날부터 1년만에 양조장이 망하고 대신 떡방아, 보리 방아, 쌀 방아 찧는 방앗간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 꿈에만 주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활 속에 모시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사업, 직장, 가정, 삶이 되도록 합시다.

②,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5절을 보면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라고 했습니다. 짐작 건대 '부녀여'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초대 교회 부녀들 가운데 사랑보다는 시기와 다툼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부녀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자'라고 한 것입니다. 일방적 사랑은 짝사랑이지만 서로 함께 하는 사랑은 극치의 예술인 것입니다. 불황과 감원과 명퇴 그리고 부도 위기로 전전긍긍하는 남편들을 아내는 사랑으로 감싸고 위로해 줘야 합니다. 진학, 취직,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자녀들을 부모는 사랑으로 어루만져 줘야 합니다. 이 삭막하고 전투적인 삶의 현장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면 서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이해하고, 협력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너그럽고, 탓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사랑할 때 힘이 있고,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악은 멀리합시다. 나쁜 사람은 피합시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늘 만납시다. 그리고 나 자신이 바로 꼭 만나 보고 싶은 사람, 만나면 기쁜 사람이 됩시다.



출처/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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