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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비밀 (요 2:12-25)

by 【고동엽】 2022.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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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비밀  (요 2:12-25)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전’
지난 주에는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난 주에 말씀하신 것 중에서 특별히 21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이라고 하면 솔로몬이 지었고, 스룹바벨과 헤롯이 개축했던,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헤롯왕이 46년 동안 지은 이 성전이야 말로 거룩한 성전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신앙의 본체라고 생각하는 성전을 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듣고 분개하며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46년 동안 지은 이 성전을 어떻게 3일만에 짓겠다고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성전과 유대인들이 말하는 성전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의 비밀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성전관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등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배와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배와 제사를 통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십니다. 이런 성전이었기에 그들의 생각이 지나치게 발전해서 ‘성전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전 절대주의, 성전의 우상화까지 발전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보면 돌로 만든 웅장한 성전의 터와 건물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 성전을 차지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모슬렘이 피나는 투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고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전을 차지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고, 그것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 되어오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성전 탈환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에게는 통곡의 벽에 그들의 기도문을 집어 넣고, 기도문을 외우는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

그러나 구약에서는 성전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요?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전은 솔로몬보다 다윗이 먼저 짓고 싶어했습니다. 다윗의 집은 화려한데 하나님의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애 전체를 바쳐 하나님의 집을 지을 준비를 했지만 하나님이 다윗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손에 피가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짓게 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하나님의 집을 짓습니다. 성전 기공식을 할 때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때 솔로몬이 기도할 때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대하 6장 18절입니다. 이 말씀이 성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과 함께 거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솔로몬이 두려워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이 전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보다 크신 분이 어떻게 내가 지은 집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솔로몬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나님께 내가 지은 집에 계시라고 말할 수 있겠고 가두어 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성전 안에도 계시고 밖에도 계시며, 우주 안에도 계시고 밖에도 계신데 어떻게 내가 지은 집에만 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면 솔로몬은 영적 통찰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부친인 다윗이 염원했고, 모든 백성들이 열심히 지은 집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시고, 예배할 때 받아주시고, 찬양을 받아주시옵소서”라며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보다 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나고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성전에 거하셔서 예배를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전이 천막으로 지어졌든, 돌로 지어졌든, 황금으로 지어졌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든지 한국에 있든지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진짜 성전이고, 황금으로 만든 성전이 진짜 성전이라고 믿습니다. 성전을 우상화, 절대화했습니다. 성전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피비린내 나는 유혈 투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전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우리의 예배와 기도를 받으시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 삼고, 종교를 핑계 삼고, 예배를 핑계 삼아 성전을 자기의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는 곳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보다는 건물이 중요하고, 제사보다는 젯밥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교회의 머리, 예수 그리스도

오늘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성전에 대해서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잘못된 성전관입니다. 이 잘못된 성전관 때문에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양과 소를 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상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를 너희들의 이익의 수단으로, 장사의 수단으로, 쾌락의 수단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잘못된 성전관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시며 채찍을 드셨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성전관, 교회관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반목과 질시와 이기심과 탐욕을 충족 시켜주기만 합니다. 이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가 아무리 많더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성전, 교회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진짜 성전은 ‘자기 육체’, 즉 예수님의 몸입니다. 물론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전의 본질, 핵심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2,23절에서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예표였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성막이 있습니다.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막 안에서 제사가 드려집니다. 제사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당시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미래에 올 메시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구약 성전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채 건물을 보고, 제사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 교회

그러면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3일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일만에 일으키겠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요 둘째는 부활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의 본질입니다.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혈입니다. 보혈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보혈입니다. 부활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이 성령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할 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보혈과 성령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모인 이유는 십자가를 경험하고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십자가를 경험하고 부활을 경험한다면 이 교회야 말로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요 해답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십자가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전관입니다.

교회란 보혈의 공동체요 능력 공동체입니다.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돌로 만들었든 벽돌로 만들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로교, 침례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귀신이 떠나고, 질병이 떠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 어쩔 줄 모르는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무리, 이것이 교회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변화받고 무장될 때 모든 미움과 죽음과 좌절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교회를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은 알아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오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까요? 어떤 분께서는 이해하시고, 어떤 분은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이해해야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이해해야 잘못된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건물이나 교파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보혈의 능력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성령 체험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충만입니다. 성령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시킬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가정과 직장과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선교사로 떠날 것입니다. 그 안에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용솟음치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가없이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23-25절에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유월절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로 그 다음에는 채찍을 들어서 소와 양을 내쫓고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지만 그들에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어렵고, 병들고, 약한 사람을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창녀, 세리, 죄인,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기대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존경하고 따라갑니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정을 주고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기대를 합니다. 그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보상이 되지 않았을 때 기대감이 질투가 되고, 분노가 되고, 미움이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헌신적으로 키웁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내게 이럴 수 있느냐?’며 섭섭해 합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요 인간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대가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배신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이 변하면 인간은 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라본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은 우리가 사랑하고 이해하고 도와줄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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