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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검을 가지는 자(마태복음 26장 47절~54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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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가지는 자(마태복음 264754)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 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 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 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 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 당하던 그해에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계속하여 슬픈 음악이 나오고 암살 당하는 순간의 광경이 화면을 통하여 되풀이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충격과 슬픔에 파묻혀 있는 그 때에 영부인인 재클린 여사는 그 경황 중에도 참으로 멋진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은 언제가야 깨달을까!'

()은 폭력을 상징합니다. 무력의 상징입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오늘의 본문 52절에 이 진리의 잠언말씀이 있습니다. 헬라 원문에서 '마카이라'라고 하는 이 ''은 보통의 작은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용 무기입니다. 연필 깎는 칼이나 부엌칼 같은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무기로 쓰는 칼을 가리킵니다. 이런 검을 가지고, 이런 검을 휘두르고, 이런 검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그런 검으로 해서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검이 검을 부릅니다. 폭력이 폭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같은 악순환의 진리를 말씀함입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 진리를 많이 보고 삽니다. 남을 아프게 한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아픔을 당합니다. 우리네 속담에도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가 난다'라든가 '남의 눈에서 피 내리면 내 눈에서 고름이 나야 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공의(公義)입니다. 심판인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갚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남의 눈을 상하게 한 사람은 필경 제 눈이 빠질 것이요, 남의 이빨을 부러뜨린 사람은 필경 제 이빨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크게, 그리고 세밀하게 역사 하십니다. 아무리 사소하다 싶은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놓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시쳇말로 '적당히' 어물쩡 넘어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남에게 몹쓸 짓을 한 그 당장에 아무 일 없었다고 해서 무사히 넘어가 버린 일로 그칠 것 같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어느 때에고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갚음을 당합니다.

여러분, 좀더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어느 때에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불의의 일을 당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만났습니다. 속았습니다. 분해서 못견딜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런 때에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말못할 곡절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잊고 있건 기억하고 있건 간에 지난날의 언젠가에 내가 남에게 똑같은 해를 입힌 적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해를 입힌 가해자와 똑같이 자신이 남에게 해를 입힌 가해자가 되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대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똑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주위에서, 너무도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양심에 둔감하고 생각 없이 사는 데 익숙해져서 밝히 판별을 못하고 지낼 따름입니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우연한 일인지,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면서 일삼아 여쭈어볼 것입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요 정도(正道)입니다. 오늘의 말씀 52절 한 절에만도 ''이라고 하는 말이 세 번이나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흔히 검에는 불의의 검이 있고 의로운 검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분노에는 울분도 있고 의분도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거짓말에도 '하얀 거짓말'이 있고 '새카만 거짓말'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쁜 마음으로 하는 거짓말은 나쁘지만 피차가 좋자고 하는 거짓말은 좋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아이에게 쓴 약을 먹이면서 달다고 속입니다. 아이는 단 줄 알고 먹었는데 먹고 보니 씁니다. '엄마한테 속았다, 엄마가 날 속였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젠 속지 말아야지'하고 그 다음부터는 약을 받아먹지 않게 됩니다. 과연 좋은 거짓말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선한 거짓말도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명심할 일입니다.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폭력에도 개인적인 폭력이 있고, 집단적 국가적인 폭력이 있는데, 개인적인 폭력은 나쁘지만 국가적이라든가 세계적이라든가 하는 집단적 폭력은 반드시 나쁜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필요악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궤변을 농()하는 일도 있습니다마는 그실 집단적 폭력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은 일체의 폭력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시절이 못돼먹었을수록 충동적 폭력이 난무하여 큰 문젯거리가 됩니다. 욱하고 터지는 것 --성경은 이를 엄히 정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를 하십니다. 밤새 기도하시고 산을 내려오십니다. 새벽입니다. 유다와 더불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또 횃불을 들고 동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것입니다. 어둑어둑하니까 누가 누군지 잘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앞장섰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유다)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48, 49)" -참으로 참기 어려운 순간입니다.

세상에, 3년이나 제자로 따라다니던 자가 이렇듯 정면으로 배반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배반을 해도 정도가 있지, 어디 예수님께서 여차직하면 도망을 칠 흉악범이라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등뒤에 데리고 와서, 게다가 아양까지 떨면서 접근합니다. 세상에 이를 보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를 보고 불쌍히 여길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가룟 유다를 책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실 뿐입니다. 참아내지 못한 사람은 곁에 따르던 베드로였습니다. 검을 뽑아 가지고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잘라버립니다. 베드로에게 남의 귀 하나만을 잘라낼 만큼 절묘한 검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목을 친다고 쳤는데 핀트가 맞지 않아서 귀를 자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 베드로를 보시고 "이것까지 참으라(22:51)"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시니, 이것이 예수님 생전이 베푸신 이적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그렇듯 참기 어려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귀중한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욱하고 검을 휘두르게 된 데는 그 나름의 배경이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236절로 죽 읽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지금은 비상시다, 마음의 무장을 단단히 하렷다, 전투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딴 생각 다 버리고 비상한 각오를 할지어다, 곧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겉옷'이란 가장 중요한 재산의 하나입니다. 그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하십니다. 그런데 3년 세월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그 제자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22 : 38)" -이렇게 답답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었다면 주님께서 '내가 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니라'라고 깨우쳐주시기라도 하셨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긴 말씀 없으셨습니다. 설명도 해석도 없으신 채 다만 "족하다"하시고 맙니다. 베드로도 ', 그런가보다'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분통터질 장면, 가증스러운 그 장면을 만나고 보니 바로 이때다 하고 울컥 검을 휘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니 예수님의 그 말씀과 베드로의 그 사건과는 확실히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본심, 그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세속 인간의 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기도 없는 자의 만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 하셨는데 저들은 기도하지 않고 졸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희가 다 도망가리라' '나를 부인하리라'하고 경고하셨는데 이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쿨쿨 잤습니다. 밤새껏 예수님과 함께 기도를 했었더라면 그런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친 행동은 사람이 가장 약할 때에 일어납니다. 남남끼리고 부부간에고 싸움이 붙었을 때에 누가 이겼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거칠고 목청 높은 쪽이 진 것입니다. 여느 때에는 얌전하다가도 술만 몇 잔 들어가면 고함을 지르거나 난폭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하고 비겁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오죽 못났으면 술에다 힘을 빌겠습니까? 불쌍한 사람입니다. 무릇 거친 행동, 거친 말, 발끈하고 치솟는 혈기는 다 약한 자의 소산입니다. 자신이 있고, 여유 만만하고, 인격이 충만하고, 바람직한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만나도 좀처럼 큰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당황하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그리고 온유 겸손하게 매사를 처리합니다.

베드로가 '우리 랍비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듯이 용약 뛰쳐나가 칼을 휘두른 것은 언뜻 보기에 의분인 것 같고, 주님께 대한 충성과 믿음이 꿋꿋해서인 것 같지만 그실 기도하지 않은 탓에 어리석어서요, 믿음이 약한 상태여서 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는 오늘의 이 겟세마네사건에서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도망을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체포당하시고 제자들까지도 체포당할 것만 같은 순간, 그 긴박한 순간에 앞뒤 살필 겨를도 없이 오금아 나 살려라 하고 피해 달아나는 부류입니다. 둘째는, 베드로처럼 분기충천(忿氣沖天)하여 이성을 잃고 마는 축입니다. 이것은 참된 용기가 아닙니다. 세째는, 참 용기의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84절로 8절까지를 보십시다. 당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태연하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저들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요."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수다. 나를 찾았으니 이 사람들(제자들)은 돌아가도록 하라" -여유 만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속절없이 그렇게 당하시는 것은 무력해서가 아니요, 무능해서가 아니요, 무지해서가 아니요, 몰라서가 아니요, 비겁해서가 아니요, 힘이 없어서가 아니요, 도망가지 못해서가 아니요, 대항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참으로 위대하셔서입니다. 얼마든지 할말이 있고, 얼마든지 길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힘도 없으신 것처럼 묵묵히 체포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자진해서 그렇게 당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용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위대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긴박한 그런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8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제가 개인적으로 깊이 사랑하고 은혜 받는 요절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유례없이 억울하고 부조리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앞에 하고 밤새 기도하시면서 얻으신 응답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입니다. 가야바로 인한 사건도 아니요, 빌라도로 해서 빚어진 사건도 아니요, 가룟 유다에 의한 사건도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먹이시는 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온전히 이해하시고 수용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 내가 마시겠다 --감수하십니다. 달게 받으십니다. 기꺼이 수용하십니다.

둘째, 오늘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는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5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가 내려와 저들을 전부 진멸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잡으러 온 무리를 모조리 장님으로 만드실 수도 있습니다. 벼락을 쳐서 그 자리에 다 쓰러지고 말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심입니다. 메시야가 오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입으셔서 만민을 대속 하시리라고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온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 하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과 성취의 관계 안에서 당신의 처지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무슨 사건을 만나든 성경말씀을 생각하시고, 성경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하셔야 할 만민을, 당신께서 만민을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피한다면 저 불쌍한 만백성 심령들은 누가 구한단말인가' -구원의 사역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너희의 자손들을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사역 안에서 당신이 당하시는 현재적 사건을 풀이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위에 말씀한 세 가지 원칙은 지중한 것입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모름지기 우리도 언제나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 처리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러한 경황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교훈 하십니다.

무력, 폭력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평화입니다. 사건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거꾸로 돌아가든 바로 돌아가든 상관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목적대로 하늘의 영광, 땅의 평화를 다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가도, 평화로 시작했다가도 그만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그를 미워하고, 한대 맞으면 한대 때리고 합니다. 툭하면 억울하다고 한을 풀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대로 무슨 일을 당하시든 한결같이 평화로 역사하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고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5 : 39, 40)"하신 말씀 그대로 실천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10절에서도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고 말씀하며, 창세기 96절에서도 이미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그 엄청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고난의 양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고난은 선택적 고난입니다. 도망가다 도망가다 할 수 없어서 당하시는 고난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0:17, 18)"하시는 대로 어디까지나 선택적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하심입니다.

또한 자발적인 수난입니다. 언제나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자발성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평범하고도 필연적인 일이지만 여러분이 자녀를 위하여 고생하는 것도 자발성이 따르지 않는 것이면 무의미합니다. 행여 말 한마디라도, 문득 지나치는 생각일지라도 '저것이 괜히 태어나서 이 고생을 시키네'한다면 부모 된 모든 구실이 다 무효입니다. '낳아놓았으니 마지못해 키운다, 에이그 내 팔자야' -안될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런 푸념이 있어서는 큰일입니다.

십자가를 지되 기쁨으로 지면 십자가요, 억지로 지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자발적이냐 타율적이냐에 따라 전혀 의미가 달라집니다. 형식적으로 졌다고 십자가일 수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솔선해서,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이라야 값진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무슨 봉사를 하든지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지 억지로라든가 체면을 생각해서라든가 하면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당하는 고난이라야 값어치가 있습니다. 억울한 고난, 애매한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어떠한 고난도 은혜가 된다고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말씀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사건 앞에서 일단 하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을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날 괴롭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마음에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면한 사건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2장에서 참으로 유명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58)"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죽기까지라니? 죽으면 그만인데, 보상받을 길도 없는데……' 이것이 우리들 사람의 좁은 소견입니다. 곧잘 참아 나가다가도 '요것 잘 참아내면 받을 보상은 얼마나 될랑가?'부터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죽기까지 한다면 죽은 다음에야 다시 보상받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에서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가질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주님께 복종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렇다면 복종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섭리로 믿는 믿음 안에 예외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외가 있다고, 'accident'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떤 때에는 또 마귀의 장난으로, 마귀의 손으로 되어지는 일인 것만 같고, 사람의 사건인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욥기가 이를 말씀하고, 많은 선지자들이 이를 경고합니다. 악한 자에게 핍박을 당하건 악한 왕에게 고난을 당하건, 그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일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쳤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은 일이었습니다. 이는 악한 자의 승리를 말씀함도 아니요 악한 자를 용납하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 안에서 그 모든 사건이 이루어짐입니다. 이 같은 이해를 가질 때에야 그러한 고난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믿음에 근거하여 임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대목을 소설적으로 다룬 사람들의 이야기에, 또 전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저도 이 이야기를 믿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때의 이삭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쯤 되었습니다. 이삭이 볼 때에 아버지는 백 세가 넘은 노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거역하고 달아나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 있을 때 "노망하셨군요"하고 내빼버리면 그만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꽃같은 청춘인데 죽긴 왜 죽나 하고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바치라시다니, 하나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어요. 아버지께서 나이 많아 단단히 노망드신 게 틀림없어요"하고 일소에 붙여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보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이삭아." "."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 알지?" "알고 말고요." "얼마나 사랑하느냐?" "아버지 목숨보다도 저를 더 사랑하시는 줄로 압니다." "맞다. 정말이지 나는 내 목숨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단다. 너 대신 죽으라 한대도 기꺼이 죽을 수 있다. 나는 너를 마음으로부터 깊이 사랑한다. 그걸 알지?" ".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럼 됐다. 이 제단에 누워라. 하나님께서 너를 바치랍신다." 그러자 이삭은 제 발로 제단에 올라 눕습니다. 아버지가 나뭇단에 불을 붙이면 이제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믿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한테 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겠지? , 압니다, 그럼 됐다, 너는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겠다 --오늘의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무슨 고난을 당하시건 무슨 억울함을 당하시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십자가라도 기꺼이 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에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의심하지 말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실수를 하는지, 왜 검을 휘두르게 되었는지, 그 장면을 가만히 보면 분명히 육적인 충동에서요 순간적인 반사작용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욱하고 올라오니까 그대로, 순간적으로 칼을 빼서 휘두른 것 입니다. 전후좌우를 돌아본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이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까? 그야말로 망령된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그 시간에 그리스도의 권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실 분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 이분이 왕이 되셔야 나도 출세를 할 것인데, 이제 유대나라에서 왕 우편에 앉을 것인데, 그 왕이 십자가를 지시다니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저 유명한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칭찬하신 데 이어서 당신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은 흘려듣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다는 말씀만 새겨들은 나머지 크게 실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 : 22)"라고 말씀드리는데, 이렇게 말한 데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지금 온 백성의 성원을 받고 있는 데다 자기가 아는 성경으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분명히 만왕의 왕이 되시는데 십자가라고 하시니 당치도 않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는 다분히 '내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우리들이 충성을 다하는데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하는 듯한 충성 과시의 기색이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또 부활하실 분이요, 그것을 목적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승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위하여 오셨고 그것을 목적으로 사셨으니, 말하자면 이제 소원을 이루시게 되는 참입니다. 엄청난 승리의 사건인데, 베드로는 그것을 실패로, 낭패로, 민족의 절망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십자가의 길을 막아보려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는 우발적으로 앞뒤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목을 친다고 해결이 되는 것입니까? 저쪽은 군대입니다. 수많은 무장군인이 다가오는데 베드로와 요한 등의 몇 사람이 두 자루밖에 없는 칼을 휘두른다고 뭐가 된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입장만 더 난처하게 만들뿐입니다. 그 사람 말고가 살았으니 망정이지 만일에 죽기라도 했더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사건 안에서 객쩍게도 재판이다 뭐다 하고 쓸데없는 문제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예수님 보고 "당신의 제자가 사람을 죽였다" 할 것이 아닙니까? 예사로 복잡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일을 난처하게 만드는 꼴밖에 못되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행동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런 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벌컥 화를 내놓고는 한 시간도 못 가서 후회합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라고 뒤늦게 가슴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렸을 적에 본 일인데, 우리 앞집 사람이 술만 먹었다 하면 대문짝을 때려부숩니다.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고 부수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래놓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것을 되고 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친께서 그 꼴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쯧쯧 저렇게 다시 수리할 바엔 뭣하러 때려부수었단 말이냐, 어리석도다." 모름지기 좀더 먼 미래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랬다가 하나님 앞에 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반드시 생각할 것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우리는 그 파급효과에 미래에 초래될 사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냥불 하나는 작은 사건이로되 그것이 불붙어 번져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베드로의 그 행위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한 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망동(妄動)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짓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생각지 못한 소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예수님의 허락도 없이, 예수님께 여쭈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막았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능력과 구속적인 역사에 대하여는 상관도 없이 검을 휘둘렀습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온유하고 겸손하게, 털깎는 자 앞에 조용한 양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시고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참된 승리는 거기에 있다고 말씀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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