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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하나님이다(이사야 41장 8절~16절)

by 【고동엽】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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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하나님이다(이사야 41816)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지렁이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1950년대 벽두에 우리 민족은 무서운 전쟁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버리고 있습니다마는 이 엄청난 사건은 우리 민족사에 일대 전기를 이루었습니다.

1963, 제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시절, 저는 순회 목사 인정을 받아서 여러 교회를 돌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좌담을 하게 되거나, 혹 차나 식사를 함께 나누게 되면 가끔 마음 아픈 질문을 받게 됩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 가운데서 제게 이렇게 묻는 분이 있습니다. "내 아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죽었습니다. 당신네 민족끼리 싸우는 전쟁에 왜 우리가 나가서 싸우다가 죽어야 합니까?"----난처한 질문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궁리 끝에 이런 궁색한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본디 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38선으로 막아 둘로 갈라놓은 자가 누구입니까? 당신네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당신네들이 그 전쟁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부모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할 때에 저는 참으로 괴롭습니다. 전쟁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더구나 625 전쟁은 동족상잔이기 때문에 더 큰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한 민족이 둘로 나뉘어 외국의 군수물품을 빌어다 서로 싸우고 죽였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625전쟁은 38선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장벽과 강대국들의 분단책이 그 첫째 원인이었습니다. 더구나 힘과 무력으로 통일을 하겠다고 하는 국제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저지른 최대의 범행이었던 것입니다. 작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누구도 잘했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큰 손실만 남겨놓고 그 전쟁은 끝났습니다. 아니,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무서운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유증을 그대로 앓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많은 문제가 이 전쟁과 연계되고 있는 것입니다. 혁명, 경제공황, 혼란과 무질서, 폭력시위----전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국사람들은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보고 '시위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합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시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입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더불어 많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장의 경제가 문제입니다. 정치판이 염려됩니다. 문화계와 교육계에도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피부에 와 닿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를 두려움과 걱정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마는 알고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환난에 대한 예지능력과 그릇된 지식이 오히려 더 많은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건에 대한 과장된 판단 때문에 우리는 심리적으로 더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필요 이상의 위기의식, 필요 이상의 절망의식, 필요 이상의 불행의식을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집권자의 위기가 민족의 위기는 아닙니다. 집권당의 위기가 국민의 위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마치 나라 형편이 급변이라도 하는 듯 착각을 해야 합니까? 정부는 아무리 여러 번 바뀌어도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민족과 국가는 의연히 제 갈 길을 갈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불안과 공포와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40년 역사입니다.

가만히 보면 불행도 아닌 것을 불행으로 여겨서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주택문제를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흔히들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내 집 마련하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였다느니, 평생 내 집 한번 못 가져보고 말 것 같다느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 집이 뭐 그리 대숩니까? 스위스 같은 복지국가도 인구의 97퍼센트가 임대주택에 산다고 합니다. 복지국가라 이름하는 나라의 대부분은 70퍼센트 이상의 인구가 남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내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내 집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주고 들어가 살면 내 집입니다. 내 집이 따로 있는 것입니까? 누구네 집에서건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에 내 집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루하루 평안하게 살면서도 임대주택이라는 이유로 불행해 합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목사인 저도 내 집 없이 삽니다. 평생을 남의 집에 살면서도 저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내 집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십시다.

우리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어느 곳을 여행해보아도 우리 나라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살면서도 당장에 망하기라도 하는 양,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인 양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은연중에 가르치고 선전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는 지식, 바른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으로 괜한 사람들까지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정작 행복을 누리면서도 나는 불행하다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왜 두려움 속에서 불행감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우리의 죄의식이 문제입니다. 도덕성이 상실된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성이 파괴된 것이 문제입니다. 좀 잘살게 되었다고 방탕하고 타락된 생활을 일삼아서야 되겠습니까? 느느니 술집입니다. 사치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너무나도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축복을 배신하고 그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이제 더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복을 주십사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없습니다. 풍년이 들었다고 그것으로 술이나 빚어 먹었으니, 다시 풍년을 주십사고 기원드릴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앞에 있을시련과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정결함은 무너지고 불의와 부정, 타락과 사치만이 만연해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우리는 그 무서운 멸망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리 민족사를 비교 연구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입니다. 늘 침략을 당했습니다. 강한 세력에 짓밟히고 찢기 우는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민족 역시 그러합니다. 언제 한번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까?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짓밟히고 빼앗기며 억압 아래 살아왔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비참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지 2천여 년이 넘도록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민족의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도 그러합니다. 그 많은 수난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공통점이 많은 민족입니다.

외국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보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45년이나 굳건히 버텨온 북한의 '김일성 왕국'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통치가 가능하냐 합니다. 그 둘이 남한의 시위입니다. 날마다 이다시피 시위하고 파업하는 것이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그들은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의아해합니다. 당장 망할 것 같은데 용케 버티는 것이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경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625를 겪은 민족입니다. 엄청난 시련을 겪은 강인한 민족입니다. 내분이 있고 갈등이 심하다고 해서 이 민족을 공산당에게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죽을 사람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망하지 않습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은총, 그 초월적인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환난이 있습니다. 죄악이 있습니다. 재난이 있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비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역사의 주인이시다'----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한때 세계를 놀라게 했던 유명한 신학자 하비 칵스(Harvey Cox)는 그의 저서 Secular City (세속도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명사로 표현하기보다는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하나님께서는 빈곤과 고난과 타락의 이 엄청난 죄악의 세속도시에 아직도 살아 역사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와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속도시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하비 칵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부르시고 선택하셨다'---선민사상을 말함입니다. '무자격 하지만 내가 너를 불렀노라. 지명하여 불렀노라. 내가 너의 구속자이니라.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이렇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의 명칭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십니다. 첫째로,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라 하면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 문제가 다릅니다. 이 말씀에는 '내가 너희 이스라엘의 주인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것입니다. 절대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노예는 돈을 주고 사야 비로소 완전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생명재산능력지식 할 것 없이 그대로 주인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 가지의 조건이 따릅니다. 그 하나가 종은 주인에게 절대순종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합니다.

절대순종, 절대위탁 하여야 합니다. 그 둘은 모든 것을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의 모든 생활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는 것 죽는 것까지 주인에게 맡겼으므로 종은 주인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주인의 은혜를 누리고 삽니다. 종은 주인을 위하여 살고, 주인이 내리는 특권을 누리고 사는 신분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둘째로, "나의 택한 야곱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르셨기에 사명이 있다고 주님은 주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중도에 내버리지 않을 것이다, 원수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악에게서 승리하도록 지켜줄 것이다----당신이 당신의 것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구구절절이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내가 너희를 쓰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분명 하나님의 뜻이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구속하셨고 오늘도 내일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벗'---히브리어로 '오하비'라고 하는 이 말은 '아하브(love)'라는 원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의 계속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낮은 사람을 당신의 위치로 격상시키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벗,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10)"---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1 4절에서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하십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지렁이가 무엇입니까? 땅 속에 있거나 땅 위를 기어다니다가 흔히 사람의 발에 짓밟히는 천한 것이 지렁이입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 그를 하나님께서 구속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짓밟히고 짓밟히던 민족을 이제 높여서 온 세계에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본디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간사한 사람이요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그 지렁이 같은 야곱, 그 민족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을 삼으십니다. 부끄러움에 처해졌던 저들, 그 민족을 높여서 오늘과 같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10)" 개인적인 사랑을 약속하십니다. 구속과 보호와 승리와 함께 하심을 보장하십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난 가운데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6백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무참히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그 수용소를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어가면서 눈물로 절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종전이 된 후, 수용소를 청소하던 사람들은 벽에 씌어진 찬송가 가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하는 글귀가 또박또박 씌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아래로 이러한 글귀가 이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어떠한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보호하심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은 세계 어느 곳이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을 뿐더러 정착하여 살수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세계 도처에 퍼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요리집 곧 음식점이 생기고, 일본사람이 사는 곳에는 상점과 백화점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사람이 사는 곳에는 무엇이 생기겠습니까? 교회라고 합니다. 한국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나 교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이제는 한국 선교사를 요구합니다. 역수출하여 그곳에 와서 선교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단 두 명의 재학생만을 둔 브라질의 어느 신학대학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세워 학생을 모집하여도 선뜻 주의 일을 하겠다고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우리 나라의 신학교는 어떠합니까? 신학교도 많거니와 신학생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관계하고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만 해도 한 해의 입학경쟁률이 41이나 됩니다. 4년제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다시 입학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몇 년씩 제수를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모여드는 주의 종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아프리카 등지로 선교사를 파견해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백인 선교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 옛날, 백인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잊지 않고 지금에 와서도 선교사를 가리켜 'imperialistic agent' 라고 합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이유로 백인은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흑인도 안된다고 합니다. 다만 그 중간인 황인종만이 알맞다고 문을 열어놓고 환영한다고 합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본 일이 없는 민족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 세계를 향하여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이럴진대 어찌 하나님의 쓰심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우리는 625를 통하여 잃어버린 것이 많았습니다마는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파괴된 것이 많았습니다마는 건설은 더 컸습니다. 많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마는 높은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그 백성을 인도하시고 오늘도 살아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오늘을 보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절대주권의 선택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면서 충성을 다짐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저 영원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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