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과원지기의 믿음(누가복음 13 : 6~9)
무화과나무는 이름 그대로 꽃을 볼 수 없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가 많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날씨가 추운 서울이나 경기도 지방에서는 볼 수가 없고 대체로 따뜻한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관상나무가 아닙니다. 나뭇잎이 가랑잎 같아서 볼품이 없으며 자라는 모양도 비뚤어지고 꼬이면서 자라기 때문에 재목으로 쓰이지도 못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오직 그 열매를 목적으로 하여 심는 나무입니다.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그 나무는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목적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며 귀중한 목적은 많은 것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희생적인 수고를 하여도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높은 목적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또 목적이 뚜렷할 때에는 수고할 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희미한 일이라면 우리는 수고할 수 없고 투자할 수도 없습니다.
좋은 목적을 세우고 많은 수고를 기울였는데 그 결과가 목적을 배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한 목적과 다르게 헛된 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고와 투자를 한 주인은 낙심하며 피곤에 지치게 됩니다. 아무리 고생과 수고를 했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그 동안의 고통은 모두 잊어버리고 위로를 받지만, 결과가 빗나갈 때 그 동안에 수고한 것이 배나 더 무겁게 누르는 고통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목적이 크고 수고가 많으면 많을수록 실망은 더 큰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은 일에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희생하지 않은 일에 열매가 없다고 하여 원망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에 합당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열매가 없다면 이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말씀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실 때 나무가 곧 말라 버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무화과나무의 예를 들어서 비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아주 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시는 소중한 비유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하여 깨달아야 할 진리는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목적이 있고 특별히 인간 개별적으로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뜻을 두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기의 생의 존재적 의미에 대하여 간증하는 말로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사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뚜렷한 목적을 부여하여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모두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이 땅에 보내어졌으며, 또한 어떤 위대한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뜻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 사람에게도 분명한 목적을 두시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현재적 목적, 지금 이 시간이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목적이 있는 시간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건강이나 재산 등 모든 형편의 사는 모습 그대로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목적하신 뜻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라는 이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며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련하여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며 필요한 일들이므로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적 목적이 있음과 함께 섭리적 목적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작에서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까지 그 목적 속에서 경영하시고 섭리하여 오셨습니다. 시간과 정성과 물질과 많은 은사를 투자하시며, 때로는 훈련을 통하여 우리를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수고에 대한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가복음 11:13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셨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들이 말하기를 제 철이 아닌데 무슨 열매가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열매가 익을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익은 열매를 바라셨던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한 가지는 그리 잘 가꾸지 않아도 열매가 잘 맺히며, 또 한 가지는 무화과란 한문으로 꽃이 없는 열매라는 말인데 사실은 꽃이 없는 게 아니라 열매 속에 꽃이 있어서 열매 자체가 꽃이기도 합니다.
모든 열매는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익지 않은 것은 떫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는 익지 않은 것도 그런 대로 먹을 수가 있기 때문에 시장할 때는 그것을 따먹고 우선 시장기는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잘 익어서 맛있는 열매를 구하신 것이 아니라 익지 않은 열매라도 맺혀 있기를 바랐는데 그것마저 없었기 때문에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3년을 기다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귀를 기울려야 하겠습니다. 3년을 기다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내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죄를 짓는다고 하여 당장 벌을 내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살아 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잘못할 때마다 책망하고 실수하는 것마다 때린다면 아마 매일 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열번 눈감아 주다가 한번 책망하고, 백번 참다가 한번 매질하는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이 오래 참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오래 참으시는 것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3년이라고 하는 이것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리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농부가 가을을 기다리며 참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인내가 아니라 계속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 가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써 많은 투자를 하시고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훈련시키십니다. 건강을 통하여, 물질을 통하여, 사회적 지위를 통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 살아가는 방법들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시며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3년뿐만 아니라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동안도 많은 은사와 함께 조언하시고 훈련시키시며 기다려 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삼 년이란 말은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만 무한히 용서하시는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성서적 문맥에 의하여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죄인에 대하여 참아 주시나 교만한 자에게는 참지 않으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떠난 자는 기다려 주시지만 하나님의 인내를 만홀히 여기며 비웃는 자를 용서하시지 않으십니다. 셋째로 우상을 섬겨도 참으시지만 하나님을 우상화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정면적으로 도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 없이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의 상징이면서 또한 사랑과 인내의 한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 안에서 용서하시고 십자가 안에서 인내하시고 십자가 안에서 구속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3년을 두고 투자하고 수고를 했으나 열매가 없으므로 땅만 버리지 말고 찍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주인을 헛되게 고생시켰으니 이 무화과나무는 찍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결단이며 백번 마땅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 대한 변명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원지기의 중보적 역할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일 년만 더 참아 주시기를 간구하여 1년간 더 수고하고 노력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당연히 찍혀 버려야 할 열매 없는 이 무화과나무는 중보자의 간구로 인하여 위기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직 살아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은 이 중보자의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희생하시거나 대신 기도해 주는 자가 있으므로 그 위에 내가 서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중보자의 간구는 굉장히 신앙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생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본래부터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아니라 무엇인가 조금 잘못되어 오늘은 열매가 없지마는 내일은 열매가 있을 것이며, 지금은 비생산적 현상이지만 장차는 생산적인 현상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자의 신앙입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는데 아직도 나을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까지 소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우리가 쓰는 영어 가운데 always, "항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정 생활에서 이 항상이라는 말은 쓰지 않아야 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남편에게 왜 항상 늦게 오느냐고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을 향하여 왜 항상 화를 내느냐고 하면 이 항상이라고 하는 말로 인하여 생리적인 것이 되고 본래적인 것이 되어 고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족보까지 들추어서 말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대화의 문은 막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이라는 말 대신 something wro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조금 잘못되어서 이런 현상이 된 것 같은, 어쩌다 있는 실수처럼 이렇게 병리적인 것으로 보아야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실수를 했을 때 다른 사람은 쉽게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극구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 아이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며 그 본래적인 것을 부인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언제든지 허다한 허물을 가리워 줍니다. 엄청난 사고라도 실수로 보며 본래적인 것으로 보아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보자의 사랑이며 신앙입니다.
둘째로 그 열매 없는 이유로 인한 심판을 함께 나누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는 이유를 과원지기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두고 본 결과 그는 거름도 잘 주었고 김도 매고 수고할 만큼 잘했다고 생각하여 과원지기에게는 단 한마디의 책망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무에 있다고 보아서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그 책임을 나무에게만 돌리지 않고 책임을 나누어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 백성을 멸하시려거든 자기의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 버려 달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잘못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라든 사회든 교회든 가정이든 그 무엇이 잘못되었든지 잘못된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여 묵묵히 그 책임에 동참하는 자세가 바로 사랑입니다. 이같이 책임을 같이 지고 형벌을 같이 받겠다고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서는 아쉬운 것입니다.
셋째로 책임지고 열매맺게 할 테니 한번 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1년만 더 참아 달라고 하는 것은 이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는 것이 아니라, 다시 거름을 주고 김을 매어 1년 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꼭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 버리라고 하는 마지막 기회를 요청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은 제한된 기회입니다. 종말론적 기회이며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이 소중한 마지막 기회에는 분명히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평소에는 10분의 1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급할 때는 그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 당시 피난 나올 때는 열 말들이 쌀 한 가마니도 거뜬히 들고 뛸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결국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서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신적 혹은 육체적인 능력을 언제 발휘할 수 있느냐 하면 우리의 마음이 큰 감격에 부딪혀서 뜨거워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일, 이등을 다투는 아이들은 공부가 잘되고 하지 말라고 하여도 잘하지만 끝번을 면치 못하는 아이들은 아무리 하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불안에 떨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잘 되지 않으며 오히려 거짓 지혜가 발동하게 되고 사랑과 긍지를 느끼게 되면 창의력이 발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대신 매를 맞으신 그리스도, 나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할 때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과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 종말론적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각박한 세상만 바라보아서는 인간이 인간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뜨거운 감격을 안겨 줄 수 있는 수고를 지불하셨습니다. 심판 받은 죄악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는 중보적 역할을 담당하며 그 소식을 듣는 자마다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는 희생을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한번 통곡하고 회개하여 심판 받은 자리에서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어 열매 맺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벌써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을 인하여 오
늘의 우리가 있게 하여 주신 그 거룩한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마지막 기회에는 분명히 열매를 맺어서 오랫동안 인내하신 하나님의 뜻이 결실되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서 아름답게 열매 맺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인의 고민(창세기 4장 1절~12절) (0) | 2024.11.27 |
---|---|
교회의 속성(사도행전 9장 26절~31절) (0) | 2024.11.27 |
나는 네 하나님이다(이사야 41장 8절~16절) (0) | 2024.11.27 |
종교개혁자의 궁극적 관심(로마서 4장 16절~25절) (0) | 2024.11.17 |
어떤 감사로 보답할까(데살로니가전서 3장 7절~13절) (0) | 2024.11.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