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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다에 던지라(요나 1장 4절~12절)

by 【고동엽】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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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다에 던지라(요나 1412)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의 창조주되심을 믿습니다. 그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의 섭리와 그의 경륜을 믿고 있습니다. 그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인과율(因果律)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으면 그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인과율의 성실을 믿고 있습니다. 때로 시차(時差)가 있기는 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아침에 심고 저녁에 거두었으면 좋겠지만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그만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은대로 거둡니다. 콩을 거두었다면 반드시 콩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콩을 심지 않았는데 콩이 나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는 합당한 결과가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심은대로 거둘 뿐만 아니라 거두는 바는 심은 바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삽니다. 어려운 것은 '원인'이 깊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결과는 겉에 나타난 사건이기에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합니다마는 원인은 저 깊은 곳에 숨기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원인은 틀림없이 있는 것이고 그 결과도 정확하고 진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는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모릅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한달 두 달을 검사해보아도 원인을 모릅니다. 아시는 대로 정확하게 원인을 알아낼 때까지 치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프다고 진통제를 맞지만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원인을 알고 나서야 치료는 가능합니다. 원인 치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원인을 알아야 하고 그 원인에서부터 치료가 있어야 합니다. 임기응변으로 대충 적당하게 현실을 해결한다고 해도 이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일만 더 복잡해지고 꼬일 뿐입니다. 진실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원인에서부터 바른 치료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심리학에 '원인귀속(原因歸屬)'이라고 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건에는 원인이 분명히 있건만 그 진실의 원인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 원인을 어디엔가 귀속시키려 하는 사회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가 많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 원인을 부정하던가 기피하던가 하면 끝내는 그 원인이 말살되어버립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원인은 절대로 실종되는 법이 없습니다. 원인은 반드시 어디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왜곡해서 다른 어디엔가로 귀속시켜버립니다. 이것은 참으로 크나큰 악입니다. 소위 정치적인 장난이요, 꾀 있다는 사람들의 간교함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질입니까, 정신입니까? 어느 쪽이 원인입니까? 사회적인 것입니까, 개인적인 것입니까? 정치 문제입니까, 도덕 문제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습니까, 나 자신에게 원인이 있습니까? 그것을 분명히 진솔하게 인정치 않고 사람마다 사실 아닌 것에 원인을 귀속시킴으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한 문제의 해결은 없습니다. 일만 복잡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같은 문제를 놓고 토론도 많이 합니다. '청문회'라는 것도 열어보았습니다. 재판도 해보았습니다. 그 많은 날들에 토론을 벌이고 경청도 해보았습니다마는 여전히 진정한 원인을 모르는 채 묻혀버리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원인은 반드시 있고, 어디엔가 엄연히 있는데도 저 요나 선지처럼 깊이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 원인이, 참된 원인이 나타날 때까지는 세상이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나가 가고 있는 바다도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매우 상징적이고 계시적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조그마한 배가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 때 돌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릅니다.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물살에 금방이라도 배는 파손되고 말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저는 군에 있을 때에 범선을 타고 바다를 지나가다가 한번 겪은 일이 있습니다. 풍랑이 일어나 뱃전을 때리고 지나갑니다. 물결은 점점 사나워져서 이 조그마한 배를 한입에 집어삼킬 듯 덮칩니다. 지옥이라도 들어가는 것 같은 두려움까지 일어났습니다. 물결에 푹 파묻히는가 하면 떠밀려 공중으로 획 솟았다가 허청 떨어지는데, '아이쿠,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문자그대로 일엽편주(一葉片舟)입니다. 폭풍우 앞에서 한낱 나뭇잎에 불과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요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는데 그게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배를 타자 맨 밑창에 들어가서 숨듯이 움츠립니다. 졸려서 자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잡니다. 성경은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4, 5)." 그러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모두들 우왕좌왕합니다. 저마다 저희 신에게 살려달라고 빕니다. 저들은 원인을 찾기에 골몰했습니다. 미지의 원인,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 그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제비를 뽑아봅니다.

대체 어느 놈이 탔기에 이런 벌이 내리는가,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덜컥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당장에 '당신이 죄인이다'하고 요나를 바다에 내던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불확실하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확증을 찾기 위해 요나에게 일곱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냐?" "네 생업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고국이 어디냐?" "어느 민족에 속했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되겠느냐?"---저들은 불확실한 미지의 원인을 놓고 고민을 합니다. 분명 풍랑이 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저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죄 때문이다'---이것입니다.하나님께서 그 죄를 겨냥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신이 진노했다고 저들은 믿었습니다. 다시말하면 도덕적 문제로 원인을 귀속시켰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실패를 만났을 때에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정치경제 문제를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생각합니다. 세계정세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문제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사람을 만나보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의 문제는 거개(擧皆)가 도덕적인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은 어떻게든 이 진실을 기피하려 듭니다. 부인하려듭니다. 무시하려듭니다. 무슨 변을 당해도 행여 죄 때문이라고 말하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까지 꾹 눌러가면서 딴 핑계로 극구 변명하려듭니다. 기술적인 문제라느니 과학적인 문제라느니, 경제 문제라느니 정치 문제라느니 하고 자꾸만 다른 데로 원인을 귀속시키려듭니다.

여러분, 참으로 우리가 시인해야 할 것은 바로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런 테두리 안에서 살아보겠다고 무던히도 노력은 했습니다. 그러나 필경은 도덕적 문제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기술 문제도 아니요, 자본 문제도 아닙니다. 세계 정세도 원인이 아니요, 남이 우리에게 못살게 구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우리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 정치를 불신하고 정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도 다 도덕적 문제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시인함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일찍이 독재자 나폴레옹조차도 '전쟁 중일지라도 사람의 도덕심은 물리적인 힘의 수십 배가 넘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전쟁 중에도 도덕성은 문제가 됩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무질서한데 도덕성이 무슨 상관인가, 워낙 어렵고 복잡한데 도덕 같은 것을 살필 경황이 어디 있는가---말이 안됩니다.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고 죽고 하는 전장에서도 도덕성은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도덕적 문제로 돌려서 누구 때문이냐, 무슨 죄 탓이냐, 무슨 탈이 있어서냐 하고 따지기는 하지만 정작 '내 탓이다'하고 나타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고맙게도 요나라고 하는 사람이 '나 때문이오'하고 나타납니다. '이 풍랑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오. 원인은 나에게 있소'하고 자진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 나 생각해보면 어디 죄인이 요나만입니까?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죄인이거늘 오직 요나 한 사람만이 '내 탓이오'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여기에 요나의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는 사생아다'라고 하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일이 잘못되고 보면 저마다 '나 때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니 그 원인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요나는 주저 없이 말합니다. "나는 히브리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자기 때문에 모두가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소인은 남에게 책임을 추궁한다'---군자는 모든 것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살필 줄 알지만 소인배는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남을 살피려듭니다.

우리는 참으로 혼란스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혼란의 원인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있어 책임을 질 것입니까? 흉흉한 세태의 근본책임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 탓이오'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요나가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는 결코 풍랑이 잠들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덕적 문제보다 더 높은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니느웨는 하나의 도성(都城)입니다. 옛 앗시리아의 수도입니다. ()31킬로미터요, ()24킬로미터였다고 합니다. 옛날로 보아서는 큰 도시였습니다. 앗시리아 사람들은 매우 잔인했습니다. 이웃나라를 침범하면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젊은이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그냥 묶어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코를 꿰어서 끌었다고 합니다.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산채로 사막에 묻는데 얼굴만 땅 위로 내어놓게 해서 햇볕에 태워 죽였다고 합니다. 이토록 잔인했기 때문에 앗수르(앗시리아)사람들이 쳐들어온다 하면 한 마을 사람들 전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일이 생겼습니다. 포로로 잡혀 그 고통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앗수르의 니느웨 성을 심판하려 하셨습니다.

40일 후에 멸망시키겠다고 통첩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구약성경 예언서들을 보면 곳곳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에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십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심판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멸망시키시기 전에 반드시 선지자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십니다. '회개하라'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후통첩을 보내시고도 길이 참으신 다음에, 그래도 회개하지 않고, 그 한계에 이르면 심판을 내리십니다.

앗수르---이 잔인한 백성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를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려 하셨습니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40일 후에 멸하겠다'---이 말씀을 전하라 명하십니다. 이 메시지를 지닌 요나가 하나님을 거역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는 중입니다.

'그 잔인한 원수를 단숨에 멸해버리실 것이지 회개하면 구원하시겠다고? 그 원수들은 당연히 망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들에게 복음이라니, 말도 안돼!'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 하는 것이 불만스러웠습니다. 요나서를 다 읽어보면 끝 부분 4장에 가서 나옵니다마는 요나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을 합니다. '내가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행여라도 원수들이 회개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취소하실 것이다.' 요나는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측량 못할 사랑에 대하여 요나는 불만이 높습니다. '저따위 원수들은 망해야 하는데 왜 용서하려 하십니까? 왜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겁니까? 망하게 내버려두시지 않고 어찌하여 저따위들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요나의 뒤틀린 심사를 이해할만합니다. 도망가는 심사를 알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풍랑으로 요나를 굴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풍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관심의 초점을 요나에게 두셨습니다. 요나와 요나의 사역과 니느웨 구원에 초점을 두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추호라도 양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新約)으로 넘어와 보면,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사도 바울을 보내십니다. 바울도 배를 타고 갑니다. 심한 풍랑을 만납니다. 그런데도 그 배에 탄 사람들은 풍랑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2724절에 보면 구원받는 이유가 나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사도 바울 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하여, 바울로 하여금 무사히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한 배를 탄 그 생명들을 모두 구원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난 것부터가 바울로 하여금 로마에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있었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큰 풍랑을 통하여 요나를 굴복시키고 계십니다. 요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의 사역, 니느웨 성을 향한 구원의 사역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제는 요나가 정신을 차릴 법합니다. 줄 항복을 하고 나섭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무슨 일입니까? 일마다 까탈을 잡으려 덤비는 사람들이라면 혹 곡해를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가 자살을 하려나보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은 눈뜨고 못 보겠다는 심사가 아니겠는가'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긍정적으로 한번 보십시오. 요나는 하나님께 생명을 드립니다. 온전히 손을 들고 항복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버립니다.

'하나님이여, 내 뜻을 바칩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어떻게 하시든지 저는 이제 손들고 순종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지금 이루소서.' 그래서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외칩니다. 결단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프랑스사람들이 잘 쓰는 격언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주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자신을 내준다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물질을 얼마큼 던져주었다고 대숩니까? 그런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반지나 보석을 주는 것은 참된 선물이 되지 못한다. 그것들은 참된 선물을 주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일 뿐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를 바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입니다.

믿음의 시()에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합니다/자유를 몰라서가 아니라 당신께 복종하고 싶은 것입니다/복종하고 싶은 분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자유보다도 더 행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당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라 하신다면 그 말씀에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당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면 당신께 온전히 복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나의 자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면 풍랑을 통해서 알게 하실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습니까? 풍랑을 통해서 가로막으실 것입니다. 뜻을 이루시기까지 말입니다. 절대로 기피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풍랑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세상의 흉흉한 풍랑은 자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코 하나님께서 겨냥하고 계십니다. 촛점을 두고 계십니다. 오늘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순종케 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깨우친 것은 여든 살이 넘어서였습니다.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일생이 그렇게 있어온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하필이면 왜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양치기로 광야 40년을 산 것이 무엇 때문인지…… 그는 백발이 성성하게 휘날릴 때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모세는 마침내 그 남은 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던 것입니다. 여담입니다 마는 여러분 가운데도 스스로 나이 많다고 실망하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두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직도 이를 깨닫지 못했다면 지금까지의 생은 준비기간이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풍랑'이 결코 잠잠치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의 격언에 있는 말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저는 이 말에다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 경륜을 알고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요나를 통하여 들어봅시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는 그 시각에 바다는 마침내 평온을 찾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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