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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1~13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에는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습니다. 인간은 사건 그 자체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든 다른 사람에 관한 것이든 역사적인 것이든 간에 하나의 사건을 두고 정확하게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과 실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알 수도 없거니와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아는 바를 표현하여 전달한다 하여도 그 내용과 의미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하고 후회를 합니다. 그때마다 이 일을 내가 왜 진작 몰랐던가 하는 후회로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지식은 없는 것만 못합니다마는 한편으로는 그 잘못된 지식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형편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행과 불행을 두고, 어느 쪽이 잘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일이 잘 끝나게 될 것
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출발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을 복되다 할 수도 없고, 현재의 일이 잘 진행된다 하여 그 끝도 반드시 아름다우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현재와 미래 그리고 하나님의 뜻, 그 자체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도 무지할 뿐만 아니라 오해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항상 답답하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나마 우리의 지식 가운데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주로 눈으로 보는 것과 이성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았다고 하여 그것으로 확실한 것을 본 것도 아니며 아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본질적인 실제를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외부적이요 부분적인 투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무엇을 보았다 하면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만으로 전체를 본 것처럼 확실시하려듭니다마는 본질적인 실제를 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마음을 본 것도 아니요 진실을 본 것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판단함에 가장 믿을만한 근거가 되는 것이 이성입니다. 그러나 이성 자체가 이미 병들어 있으면 투영된 그림자마저도 바로 볼 수가 없으며, 판단도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오해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맹신하는 과학이라는 것도 사실을 바로 말해주지는 못합니다. 과학은 어떤 현상이나 우연의 결과, 통계 등의 겉모양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과학이 사랑을 말해줍니까 진실을 말해줍니까? 거룩함을 말해줍니까 나의 운명을 말해주더란 말입니까? 이 과학을 통하여 바른 지식을 얻으려 하는 것도 사실은 낙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인격과 인격의 관계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여기에는 오해가 많고 편견도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인격을 인식함에는 두 가지의 베일(Veil) 때문에 불확실하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자기 자신에 대한 편견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 자기의 경험, 자기의 지식, 자기의 욕망, 자기의 판단에 대한 편견이 우리 마음에 이미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마는 백번 이야기해본들 남자가 여자의 입장을 알 리가 없으며 여자 또한 남자의 입장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 쪽의 편견으로 보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의 베일은 상대방의 숨겨진 부분입니다. 지금 상대방이 나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한마디 뿐이요 보여줄 수 있는 사건도 순간의 한 장면뿐입니다. 내가 보고 아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대부분 숨겨져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단편적인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전체를 간파하려든다면 잘못입니다. 그 숨겨진 부분에 더욱 많은 문제가 감추어져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흐려집니다.
그렇다면 참된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오직 참사랑으로써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곧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기로 하시고 친히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교훈 하시는 많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는 정치적인 메시야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욕망에 집착된 메시야니즘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대하여 저가 우리 민족을 이 비참함에서, 이 노예생활에서 건져내어 주리라 생각하고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해방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까지도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라는 답답한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또한 저들에게는 자기 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자기가 옳고 자기가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을 모른 채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사람들이 제사장이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실제를 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안다는 것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중에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해보고는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듣고 있던 제자들이 가끔 질문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합니다. '저런 사람들을 앞에 놓고 가르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습니다. 삼년 동안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애를 썼는데도 끝까지 딴청만 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아가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놀라우신 지혜로 그 많은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바다를 고요하게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시며, 한 자리에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등, 행하신 그 많은 이적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깨우쳐주셨음에도 저들의 베일을 벗기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적을 통하여 저들을 가르쳤건만 저들의 고집은 끝끝내 깨뜨려지지 않은 채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오해하면서 점점 완악해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굳은 마음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로 깨어지고 녹아져 사랑 안에서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중생하여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의미도 하나님도, 그리고 나와 이웃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 하는 역사, 이 사랑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는 결론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중생의 역사가 없이 고집과 편견 속에 살아갈 때에 거기에는 불신과 배척과 완악함만이 높아져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
문에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니 모르게 되고, 무지하고 보니 교만하고, 마침내는 어리석음과 고집만이 남더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으면 어떠한 지식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를 두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다. 적어도 사랑을 하는 동안은 마음이 열리면서 나도 알고 저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편견이 생기면서 미워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오해가 쌓여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는 보고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게 되어 그 누구도 마음을 돌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사랑으로 알아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의 말씀을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릅니다. 다시 말하여 사랑할 때에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 때에 그 채널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나와 이웃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귀로 들어야만 지식이 성립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당면한 현실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의 길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미워하고 헐뜯으면서 양극으로 치닫는 한 어떠한 설명을 통해서도 지식은 성립되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의 근본은 사랑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이제"라는 말과 "그때"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이제"와 "그때" 사이에 중요한 문제의 관계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유리에 수은을 칠한 요즈음의 거울은 깨끗하고 환하게 보이지만 옛날의 거울은 돌을 매끈하게 갈아놓은 것이거나 구리나 쇠판을 갈고 닦아 만든 반들반들한 면에 얼굴을 비춰보는 것이어서 투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울로 보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보는 일은 언제나 희미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모든 오해가 간접적인 것에서 생깁니다. 누구든지 직접 만날 때에는 별문제가 없는데 돌아돌아 듣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전화는 큰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전화라는 것은 매우 편리한 물건이기도 하지만 얼굴을 못 보는 채 말을 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언젠가 사무원이 전화를 받으면서 "여보세요! 얼굴이 안 보인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셔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대의 얼굴과 그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주고받으면 간단한 것인데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화통만 붙들고 있다보니 갖가지 오해와 문제가 생기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직접 듣지 않는 말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어떠한 매개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보고 듣는다는 것은 다 희미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편견과 오해가 있고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그때에 가서야 바른 지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은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언제나 비스듬히 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투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직선적이며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복합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머니 품에 안겨 어머니를 쳐다보던 어린아이가 "엄마 엄마, 엄마 눈 속에 내 얼굴이 있네"라고 하면서 신기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린 눈망울로 엄마의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자기의 얼굴이 비춰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이런 순간에야 무슨 다른 뒷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참된 지식이 있고 참된 만남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이렇게 멀리 있을 때에는 부분적으로 알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적인 지식이 문제가 되어 편견을 만들고 오해를 낳게 합니다. 그러나 직접 대할 때에는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총체적이요 종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구석을 아는 것만 가지고 전체를 아는 것처럼 비판하거나 말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얼굴을 바로 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본 후에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시기를 받아 열일곱 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후 13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다가 마침내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마침 심한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은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들이 팔아 넘긴 동생인 것을 알고는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때 요셉은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고생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기가 막혀 이가 갈릴 터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를 팔아 넘기던 형들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에 그 쪽을 보지 않고 하나님
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고 나서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족을 살리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사 여기에 있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형님들에게 걱정도 한탄도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형님들의 가족들은 내가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 사람의 여유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보았기에 사실을 바로 볼 수가 있었고 전체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사랑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저주 같고 저 사건은 축복 같아 보이던 것이 이제 와서 보니 모두가 다 사랑이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에는 칭찬도 하지만 때리기도 하고 충고도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아버지로부터 많은 매를 맞으며 자랐습니다. 칭찬을 들을 때에는 물론 기분이 좋지만 매를 맞을 때에는 왜 때리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모를 일이, 저의 경우에는 오대 독자라고 하시면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오대 독자를 왜 때리십니까?"라고 대들다가 더 맞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철이 들어서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종합적인 것입니다. 부모님이 내게 해주시는 모든 것이 그대로 사랑이더란 말입니다. 알고 보면 매를 맞는다는 것이 어디 보통의 사랑입니까? 실로 그 매 속에 구체적인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증오요 이것은 사랑이다, 성공은 사랑이요 실패는 저주이다, 건강은 축복이요 병들면 버림받은 것이다 - 이러한 인식은 부분적이요 편견적인 것으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하여 똑바로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모두가 사랑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한 청년이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대학의 신학 과정을 마친 후 선교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 청년은 너무 기뻐서 당장 옷과 구두를 준비하려고 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자동차 사고를 당해 부득이 한쪽 다리를 자르게 되었습니다. 의족을 하게 된 그는 크게 낙망하여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나간다는데 어찌하여 다리를 자르시는 겁니까?"라고 울부짖으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낙심해 있던 그는 어느 날 아프리카로 갈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설마 나 같은 사람도 받아주겠는가'하는 마음으로 신청하였으나 합격을 하여 마침내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떠나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그는 식인종들을 만나게 되어 죽음의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식인종들이 빙 둘러싸고는 이 백인을 잡아먹겠다며 축제를 벌입니다. 그때에 이 선교사는 의족인 자기의 한쪽 다리를 뚝 떼어서 저들에게 던졌습니다.
고무다리를 받아든 식인종들은 이것을 먹어보더니 질겁을 합니다. "이것은 신이다!"라고 하면서 이 선교사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들을 쉽게 전도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는 그때에 가서야 자기의 다리 하나가 잘린 이유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끔 어리석은 원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 사람이 어리석고 미련하여 그 얄팍한 부분적인 지식으로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본문 말씀은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나의 단점과 장점은 무엇이며, 어디 어떻게 쓰여야 쓸모 있는지를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나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은 그때에 가서야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 내가 고독해야 했고, 병들어야 했으며, 왜 실패하며, 남달리 어려운 고통 속에 평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그때에 가서 알게 됩니다. 비로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며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과거에 매여 지난날 이루어놓은 업적이 무너지고 명예가 훼손될까 염려되어 이것을 챙기느라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으며 이를 위해 걱정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의 행복을 원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제가 잘 알고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아흔이 넘도록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저의 고향에서 장로님이셨던 저의 할아버지에게 형님이라고 부르시며 자주 저의 집으로 찾아오셔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한국 교단에 분열이 거듭되던 시기에 저는 그분이 가자는 편으로 따라가지 않고 저 나름대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위 말하는 교파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디에서 인사를 드려도 매우 섭섭해하시면서 "나쁜 놈, 너는 남이다"라며 자기 말을 듣지 않았음을 계속 언짢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저로서도 몹시 섭섭하여 "목사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설명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으실 정도입니다. 그래서 정 그러시면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으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분 연세가 여든이 넘으시자 "이제 내게는 원수가 없다. 난 너를 볼 때마다 반갑고 대견하고 기쁘다"라고 하시며 저의 집에 자주 찾아오기도 하시고 기도도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여든이 되어서야 철이 난 것입니다. 철이 날 것이면 한 마흔쯤에서 날 것이지 이렇게 늦게 난다면 철 못나고 죽은 사람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 나이 쉰이 넘었거든 남 이야길랑 하지 마십시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이야기하고 함부로 대할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이제는 죽은 다음까지를 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뵈올 날이 가까워옵니다.
마침내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얼굴과 얼굴로 대하는 그 순간, 나의 모든 행위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겠습니까? 실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유명한 찰스 스퍼젼(Charles Spurgeon) 목사님이 어느 날 농촌을 방문하는 중에 어떤 농장 건물 꼭대기에 세워놓은 바람개비를 보았습니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그 뱅뱅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꼬리에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써 붙여 놓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은 좀 못마땅하다 싶어 거기 있는 한 농부를 보고 "형제여, 하나님의 사랑이 이 바람개비처럼 변덕이 많다는 말이오? 어찌하여 바람개비에다 저런 소리를 써 붙여놓았소?"하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농부가 대답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지 다 하나님의 사랑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이야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든 바람을 따라 바람개비는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느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내 자세만 바로 하면 모든 것이 사랑이기에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써 붙였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얼굴과 얼굴로 대하는 정면의 방향으로 내 자세만 바로 정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이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이제는 행이다 불행이다, 잘되었다 못되었다 하며 나무라거나 시기하지 마십시다. 지금은 아는 바가 없고 또한 희미하게 알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그리하여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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