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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미결 인생의 고민(열왕기상 18장 20절~24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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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결 인생의 고민(열왕기상 182024)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니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 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물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현대 지성인의 결정적인 약점을 든다면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지식은 많으나 용기가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는 있으나 행복이 없습니다. 또한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뛰고 있으나 성취감이 없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찌들고 시들어감을 외관상으로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산다는 뚜렷한 목적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목적 미결 때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제 인생의 후반에 접어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정리해야 할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적이 결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뛰어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할만큼 그런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지 못할 것은 잊어야 하고 쓸모 없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미적거리면서 잊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세월에 쫓기면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확실하고 결정적인 목적을 갖지 못하고,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느끼지만 지식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래도 내가 아는 바에 대해서는 믿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과학이라고 하는 편리한 방편에 의존해서 살고 있고,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과학이란 정말 소중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과학주의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다보니 과학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순간 과학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우상이 우리 곁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학의 발달에 얼마만큼 기대를 걸고 있습니까? 이대로 발전하면 암도 AIDS도 고칠 수 있고 드디어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믿을 것이 못 되는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 과학입니다. 어떤 암 환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금만 더 있으면 암도 고칠 수 있을 터인데 라고 미련을 두며 떠났다고 합니다. 과학주의를 한번 믿어 보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자기 의지라는 것이 믿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나약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자기 의지를 근거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고집 때문에 목소리가 커지고 허세도 부립니다. 죽어 가고 썩어 가면서도 위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이 가증한 생을 언제까지 지속하려는 것입니까?

중립이나 중용, 또는 소극적이고 기회주의 적인 생각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즉 미결 인생은 언제나 고민이 많고 나약합니다. 제가 육이오 당시 최일선에서 몇 달 동안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간간이 첩보대를 조직하여 적진을 탐지하기 위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첩보대로 나갈 때는 언제나 한 사람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10명 내지 12명이 일렬로 서서 가는데, 때로는 줄을 붙들고 걸어가기도 합니다. 가다가 지뢰를 밟아 죽기도 하고 또는 앞뒤에서 누가 언제 총을 쏠는지 모르니 대단히 불안한 행렬입니다.

그래서 제일 앞뒤에는 서로 서지 않고 가운데만 서려고 눈치를 보며 재주를 부립니다. 사실 어디에 서서 가나 위험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이면 사지에 들어가는 길이니 앞장서는 것도 좋을 듯한데 언제나 가운데만 서려고 유난히 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뢰가 터질 시는 이상하게도 가운데서 밟는 확률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명은 역시 재천이라는 이 야기들을 합니다. 어쨌든 한세상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좀더 똑바로 살았으면 합니다. 예수 믿으려면 좀더 화끈하게 믿자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준비하고 교회까지 와서 졸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좀 미쳤다고 할 만큼 믿어볼 수는 없는가 말입니다. 이제 나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소극적이고 미지근하게 살아갈 것입니까? 미결 인생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겠습니다. 대학 입학시험 보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공하겠느냐고 가끔 물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대답이 성적에 맞추어 일단 대학에 들어가 놓고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성과 상관 없이 눈치로 들어가니 대학생의 약 60% 가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다시 시작하거나 아니면 졸업하고서 자기 적성을 찾아 또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미결 인생은 허우적거리다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릅니다.

서양 사람들의 말 가운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회(Chance), 선택(Choice), 도전(Challenge) 즉 세 개의 C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회, 선택, 도전의 세 가지는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왔는데 선택하지 못하면 기회가 기회 되지 못하고, 선택을 했더라도 도전의 결단이 없으면 선택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첫째, 둘 다 얻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양쪽에서 다 잘 보여서 덕을 보겠다는 속셈입니다. 여당 덕도 보고 야당 덕도 보며, 세상 재미도 얻고 하늘나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향락도 하고 출세도 하겠다니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밥과 술과 떡 중에 어느 것을 먹겠느냐고 물었더니 술에 밥을 말아 떡을 안주해서 먹겠다고 대답했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욕심이 많아서야 되겠습니까? 둘 다 가지겠다, 또는 누구에게나 다 좋게 대하겠다는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것이 좋아 보이고 또다시 생각하면 저것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주 많은 사람이 성공을 못합니다.

이것도 잘할 것 같고 저것도 잘할 것 같아 여러 가지 하다보면 모두 피상적이고 상식선에서 머물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셋째는 하나도 신통치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확실하게 이거다 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결정할 것인데 다 시원치가 않은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인데 왜 이렇게 답이 많이 나옵니까? 답이 많다는 것은 문제 파악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혹시 병에 걸린 경험들이 있습니까? 아파서 누워 있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처방들을 해 줍니다. 왜 그렇게 치료법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병에 맞는 약은 하나면 족하므로 치료법이 많거든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길이 많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여러 갈래의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넷째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단을 못 내립니다. 사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기회는 만드는 것이지 막연히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있있던 일인데, 단 위에서 설교할 때마다 자주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날도 수요일의 설교를 여느 때와 같이 거의 끝내고 있는데 어쩐지 모여 있는 성도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음 주일에는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느끼는 대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다음 예배 시간에 나오지 못할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도록 오늘 회개할 것, 모두 회개해서 깨끗한 심령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 10분 동안 길게 회개하는 통성 기도를 하고 예배를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결혼한지 1년밖에 안 된 23세된 부인이 나가다가 쿵! 하고 쓰러졌습니다. 모두 놀라서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내려놓으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단에 설 때마다 다음 예배 시간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설교하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러분 기회가 내일 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음은 지나가고 건강과 재물은 항상 내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곧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안일한 생각은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방 여자 이세벨을 왕후로 취함으로 해서 바알 신을 섬기게 되고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그는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고 엘리야까지 죽이려고 쫓아다니게 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3년 동안 가뭄이 들어 온 백성들은 물을 얻기 위하여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헤매다가 이제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는 외칩니다.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 : 21).---더 기다릴 수가 없으니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하는 엘리야의 외침입니다. 어느 때까지 미결 인생을 지연할 작정인가 하고 대답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나라도 사회도 경제도 도덕도 종교도 황폐해지고 몸과 마음이 고갈되어 죽어가고 있는데, 왜 정신을 차리지 않느냐고 회개를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6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성격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이상 미온적인 태도로 지속할 생각은 버려야겠습니다. 차든지 덥든지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를 취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버린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버리고 따르라. 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고 대단한 용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선택을 결정하는 용기와 포기하는 용기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버리는 용기에서 추진력을 얻어야만 선택과 미래로 향한 진취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버리고 끊는 위대한 용기로 새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결단하자는 것입니다.

이제 속히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사정없이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가끔 병원에서 아기를 분만하다가 절박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아기를 살리려면 산모가 죽고, 산모를 살리려면 아기가 죽게 되는 경우입니다. 의사는 보호자로 하여금 빨리 결단하도록 재촉합니다. 아기를 죽일 수도 없고 어머니를 죽일 수도 없다고 붙들고 있으면 둘 다 잃게 됩니다. 이 상황은 어느 편을 죽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을 살리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죽인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를 살린다는 데에 우리의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둘 다 얻겠다고 머뭇거리다가는 마침내 둘 다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부득이 하나를 얻기 위하여 나머지 하나를 버리는 결단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의 나약함을 알았고 또한 점점 약해지는 것을 깨달았으면 이제야말로 확실한 것은 믿음뿐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결정된 미래, 약속된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를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이대로 두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알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이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최우선적으로 이 일만을 꼭 이루어야 하겠다는 그 일을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근본적인 한 가지를 반드시 이루고, 그리고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 주시는대로 이루어가면 될 것입니다.

항해하던 배 한 척이 강풍에 밀려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무인도에 기착했습니다. 선장이 말했습니다. "바람이 자면 떠날 것이니 배에서 내리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상당수가 배에서 내렸습니다. 몇 사람은 물과 과일만 찾아 먹고 얼른 배를 탔으므로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무인도의 풍광에 도취되어 헤매다가 기적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선장의 말에 주의하지 않고 방심한 탓에 배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좀 불편하고 괴로워도 바른 장소에 머물러야 합니다. 혹 잠깐 곁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만 곧 돌아와야 합니다. 잠깐 실수했습니까? 바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만일 곁길에 취해 있다가는 중요한 시간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만 미결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십시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믿음으로 결정적인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길은 환한 길입니다. 바르게 직행해야 합니다. 미결 인생은 고민도 많고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아는 것이 있습니까? 행해야 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있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어차피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이니 나의 온 생을 그분께 위탁하고 결단해서 하나님만 믿고 그 말씀에만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은 생애를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가장 아름답고 신령하고 거룩한 시간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미결 인생의 고민(열왕기상 182024)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니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 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물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현대 지성인의 결정적인 약점을 든다면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지식은 많으나 용기가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는 있으나 행복이 없습니다. 또한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뛰고 있으나 성취감이 없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찌들고 시들어감을 외관상으로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산다는 뚜렷한 목적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목적 미결 때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제 인생의 후반에 접어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정리해야 할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적이 결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뛰어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할만큼 그런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지 못할 것은 잊어야 하고 쓸모 없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미적거리면서 잊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세월에 쫓기면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확실하고 결정적인 목적을 갖지 못하고,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느끼지만 지식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래도 내가 아는 바에 대해서는 믿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과학이라고 하는 편리한 방편에 의존해서 살고 있고,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과학이란 정말 소중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과학주의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다보니 과학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순간 과학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우상이 우리 곁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학의 발달에 얼마만큼 기대를 걸고 있습니까? 이대로 발전하면 암도 AIDS도 고칠 수 있고 드디어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믿을 것이 못 되는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 과학입니다. 어떤 암 환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금만 더 있으면 암도 고칠 수 있을 터인데 라고 미련을 두며 떠났다고 합니다. 과학주의를 한번 믿어 보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자기 의지라는 것이 믿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나약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자기 의지를 근거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고집 때문에 목소리가 커지고 허세도 부립니다. 죽어 가고 썩어 가면서도 위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이 가증한 생을 언제까지 지속하려는 것입니까?

중립이나 중용, 또는 소극적이고 기회주의 적인 생각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즉 미결 인생은 언제나 고민이 많고 나약합니다. 제가 육이오 당시 최일선에서 몇 달 동안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간간이 첩보대를 조직하여 적진을 탐지하기 위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첩보대로 나갈 때는 언제나 한 사람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10명 내지 12명이 일렬로 서서 가는데, 때로는 줄을 붙들고 걸어가기도 합니다. 가다가 지뢰를 밟아 죽기도 하고 또는 앞뒤에서 누가 언제 총을 쏠는지 모르니 대단히 불안한 행렬입니다.

그래서 제일 앞뒤에는 서로 서지 않고 가운데만 서려고 눈치를 보며 재주를 부립니다. 사실 어디에 서서 가나 위험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이면 사지에 들어가는 길이니 앞장서는 것도 좋을 듯한데 언제나 가운데만 서려고 유난히 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뢰가 터질 시는 이상하게도 가운데서 밟는 확률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명은 역시 재천이라는 이 야기들을 합니다. 어쨌든 한세상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좀더 똑바로 살았으면 합니다. 예수 믿으려면 좀더 화끈하게 믿자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준비하고 교회까지 와서 졸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좀 미쳤다고 할 만큼 믿어볼 수는 없는가 말입니다. 이제 나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소극적이고 미지근하게 살아갈 것입니까? 미결 인생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겠습니다. 대학 입학시험 보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공하겠느냐고 가끔 물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대답이 성적에 맞추어 일단 대학에 들어가 놓고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성과 상관 없이 눈치로 들어가니 대학생의 약 60% 가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다시 시작하거나 아니면 졸업하고서 자기 적성을 찾아 또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미결 인생은 허우적거리다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릅니다.

서양 사람들의 말 가운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회(Chance), 선택(Choice), 도전(Challenge) 즉 세 개의 C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회, 선택, 도전의 세 가지는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왔는데 선택하지 못하면 기회가 기회 되지 못하고, 선택을 했더라도 도전의 결단이 없으면 선택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첫째, 둘 다 얻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양쪽에서 다 잘 보여서 덕을 보겠다는 속셈입니다. 여당 덕도 보고 야당 덕도 보며, 세상 재미도 얻고 하늘나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향락도 하고 출세도 하겠다니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밥과 술과 떡 중에 어느 것을 먹겠느냐고 물었더니 술에 밥을 말아 떡을 안주해서 먹겠다고 대답했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욕심이 많아서야 되겠습니까? 둘 다 가지겠다, 또는 누구에게나 다 좋게 대하겠다는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것이 좋아 보이고 또다시 생각하면 저것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주 많은 사람이 성공을 못합니다.

이것도 잘할 것 같고 저것도 잘할 것 같아 여러 가지 하다보면 모두 피상적이고 상식선에서 머물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셋째는 하나도 신통치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확실하게 이거다 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결정할 것인데 다 시원치가 않은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인데 왜 이렇게 답이 많이 나옵니까? 답이 많다는 것은 문제 파악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혹시 병에 걸린 경험들이 있습니까? 아파서 누워 있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처방들을 해 줍니다. 왜 그렇게 치료법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병에 맞는 약은 하나면 족하므로 치료법이 많거든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길이 많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여러 갈래의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넷째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단을 못 내립니다. 사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기회는 만드는 것이지 막연히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있있던 일인데, 단 위에서 설교할 때마다 자주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날도 수요일의 설교를 여느 때와 같이 거의 끝내고 있는데 어쩐지 모여 있는 성도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음 주일에는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느끼는 대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다음 예배 시간에 나오지 못할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도록 오늘 회개할 것, 모두 회개해서 깨끗한 심령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 10분 동안 길게 회개하는 통성 기도를 하고 예배를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결혼한지 1년밖에 안 된 23세된 부인이 나가다가 쿵! 하고 쓰러졌습니다. 모두 놀라서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내려놓으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단에 설 때마다 다음 예배 시간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설교하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러분 기회가 내일 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음은 지나가고 건강과 재물은 항상 내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곧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안일한 생각은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방 여자 이세벨을 왕후로 취함으로 해서 바알 신을 섬기게 되고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그는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고 엘리야까지 죽이려고 쫓아다니게 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3년 동안 가뭄이 들어 온 백성들은 물을 얻기 위하여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헤매다가 이제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는 외칩니다.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 : 21).---더 기다릴 수가 없으니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하는 엘리야의 외침입니다. 어느 때까지 미결 인생을 지연할 작정인가 하고 대답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나라도 사회도 경제도 도덕도 종교도 황폐해지고 몸과 마음이 고갈되어 죽어가고 있는데, 왜 정신을 차리지 않느냐고 회개를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6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성격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이상 미온적인 태도로 지속할 생각은 버려야겠습니다. 차든지 덥든지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를 취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버린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버리고 따르라. 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고 대단한 용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선택을 결정하는 용기와 포기하는 용기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버리는 용기에서 추진력을 얻어야만 선택과 미래로 향한 진취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버리고 끊는 위대한 용기로 새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결단하자는 것입니다.

이제 속히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사정없이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가끔 병원에서 아기를 분만하다가 절박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아기를 살리려면 산모가 죽고, 산모를 살리려면 아기가 죽게 되는 경우입니다. 의사는 보호자로 하여금 빨리 결단하도록 재촉합니다. 아기를 죽일 수도 없고 어머니를 죽일 수도 없다고 붙들고 있으면 둘 다 잃게 됩니다. 이 상황은 어느 편을 죽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을 살리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죽인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를 살린다는 데에 우리의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둘 다 얻겠다고 머뭇거리다가는 마침내 둘 다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부득이 하나를 얻기 위하여 나머지 하나를 버리는 결단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의 나약함을 알았고 또한 점점 약해지는 것을 깨달았으면 이제야말로 확실한 것은 믿음뿐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결정된 미래, 약속된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를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이대로 두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알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이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최우선적으로 이 일만을 꼭 이루어야 하겠다는 그 일을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근본적인 한 가지를 반드시 이루고, 그리고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 주시는대로 이루어가면 될 것입니다.

항해하던 배 한 척이 강풍에 밀려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무인도에 기착했습니다. 선장이 말했습니다. "바람이 자면 떠날 것이니 배에서 내리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상당수가 배에서 내렸습니다. 몇 사람은 물과 과일만 찾아 먹고 얼른 배를 탔으므로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무인도의 풍광에 도취되어 헤매다가 기적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선장의 말에 주의하지 않고 방심한 탓에 배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좀 불편하고 괴로워도 바른 장소에 머물러야 합니다. 혹 잠깐 곁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만 곧 돌아와야 합니다. 잠깐 실수했습니까? 바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만일 곁길에 취해 있다가는 중요한 시간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만 미결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십시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믿음으로 결정적인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길은 환한 길입니다. 바르게 직행해야 합니다. 미결 인생은 고민도 많고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아는 것이 있습니까? 행해야 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있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어차피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이니 나의 온 생을 그분께 위탁하고 결단해서 하나님만 믿고 그 말씀에만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은 생애를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가장 아름답고 신령하고 거룩한 시간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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