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적인 부흥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우리의 삶에 주의 약속의 말씀과 그분의 부드럽고 사랑 넘치는 용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정결함과 치유를 경험한다.
그런 후에야 진정한 변화가 찾아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적인 부흥을 체험할 수 있다.
새해에 우리나라와 여러분들의 가정에 큰 부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2. 지혜로운 영적 훈련
최근에 내 친구 한 명이 수양관에 갔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침묵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앞을 보지 않고 걷다가 그만 내 친구와 부딪혔다. 그 바람에 내 친구는 거의 넘어질뻔했다. 그런데 그 여성은 침묵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미안합니다”라는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러나 사실 침묵 훈련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과 말하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훈련이 아니다. 이와 정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예수님께서 계실 공간을 만들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부딪혔을 때 우리가 친절과 예의로 그들에게 반응하기 위한 연습이다. 우리의 일차적인 임무는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을 읽었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기도했는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이런 훈련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는 다만 돛을 올리기만 하면 된다.
- 「평범 이상의 삶」/ 존 오트버그
3. 천박한 영성과 진실한 영성
가끔 영성을 주장하면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을 지나치게 나누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대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보다 어디에 가든지 사람을 나눕니다. 그런 분들은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잘 나눠야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을 나눕니다. 가정을 망가지게 해야 십자가를 잘 지는 것인 줄 압니다. 그렇게 나눔을 통해 나의 영성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천박한 영성에서 생기는 태도입니다. 진짜 깊은 영성은 창녀 마리아에게도 손을 내밀었던 예수님의 영성을 따르는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은 무조건 깨끗하고 육신은 무조건 더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육신적인 삶은 영혼의 건강을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천박한 영성을 분별하여 그런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박한 영성이 무엇입니까? "믿습니다"고 하는 믿음이 지나쳐 병원에 가지 않고 병을 키우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교회생활은 재미있게 하면서 가정에서는 남편과 자녀를 쫄쫄 굶기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항상 산에 들어가 기도해야 기도발이 먹히고 기도하는 것 같다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주일에 '운전기사 일하게 하는 죄'를 짓지 않게 버스를 안타겠다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명절에 전혀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내 신앙을 증명하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가족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을 외면하고 교회 생활 잘하지 말고 남편도 챙기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려고 해야 합니다. 성경은 “피곤해도 남편이 요구하면 응해주고, 아내가 요구하면 응해주라”고 말합니다(고전 7:4).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4. 니들이 영성을 알아?
중세 시대에 시므온이란 사람은 나무 위에 올라가 살았다고 해서 "주상성자 시므온"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아마도 나무 위에 원두막처럼 처소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경건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그의 생활을 다른 말로는 "금욕주의 경건"이라고 한다. 일체의 육체의 욕망을 배제하고 오로지 영적인 생활에만 전념하는 것, 그것을 금욕주의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시므온의 그런 생활을 영성이나 혹은 경건의 최상으로 보는 사고가 있는 것 같다. 시므온의 그런 생활을 영성이나 경건이라고 한다면 에녹의 생활은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에녹은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니"말이다. 자녀를 낳는 것은 육적인 생활이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영적인 생활인데 이 둘이 어찌 상치되지 않는가? 참다운 영성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자녀를 낳는 것이고 자녀를 낳으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5. 인간은 영적 존재
한 소년이 동산 위 무지개를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말 등에 올라타고 동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무지개는 저 멀리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년은 다시 산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다 위에 무지개가 떠 있었습니다. 소년은 피곤에 지쳐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습니다. 그 욕심 많은 소년의 이름은 나폴레옹. 그는 정말 꿈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처절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한없이 외롭고 비참했습니다. 죽기 직전, 그가 남긴 말은 단 세 마디.
"프랑스, 군인, 조세핀."
인생의 허무가 담긴 아쉬운 절규였습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조국 프랑스, 그의 분신 군인, 마지막으로 그와 이혼한 처음 아내 조세핀. 천하를 호령하고 소유했던 최고의 부자 나폴레옹도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는데, 하물며 보통사람들의 삶이야 오죽 허허로울까요? 세상은 점점 풍요롭고 편리한데, 사람들은 왜 점점 허무의 늪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로 창조됐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만족을 얻을 때까지 인간은 근원적 고독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허둥대며 살도록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물질적 풍요를 누리도록 많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제대로 섬길 때 만족과 풍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닮아 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온전할 때 영성이 회복되고 삶이 부요해지며 형통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김정호 목사(번동교회)
6. 영성과 물질
입만 열면 '영성' '영성' 하며 영성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이나 단체가 신용이 없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물질 문제에 대하여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많이 봅니다. 마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하는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물질문제에 걸려서 곤란을 겪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아마도 영성과 물질은 서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른 영성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영성과 물질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바른 영성은 물질도 투명하고 깨끗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매사가 정확하고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영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최용우
7. 마구간과 말구유의 영성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칼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카드들과 부모님이 준비한 멋진 선물들입니다. 게다가 흰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면 마음도 흥분됩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강아지처럼 눈 위를 이리 저리 뛰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아직도 머리 속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속에 한 장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높고 빛나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지구촌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구간과 말구유의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마구간과 말구유의 영성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지극히 낮아지는 삶과 끊임없는 희생의 삶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를 포기하는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가 되셨으며, 자신의 몸을 십자가 상에서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성탄절에는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장식물 뒤에 숨겨져 있는 말구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곳에 외롭게 홀로 누워 계신 그 아기 예수님을 만지십시오. 그 아기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경배할 수 있는 묵상의 시간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8. 예수님의 영성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심은 영성의 극치입니다. 겸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겸손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하는 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반 이상은 무릎을 꿇고 하는 일입니다. 씨앗을 심고, 그 심은 것을 돌보고, 잡초를 제거하고…. 이 모든 일은 자세를 낮춰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야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고,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무릎을 꿇는 것이나, 농부가 무릎을 꿇고 일하는 모습이나, 예배를 드릴 때 무릎을 꿇는 것이나 그 모습은 한결같이 겸손합니다.어떻게 하면 더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섬기면 됩니다. 내가 섬길 때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꾸 칭찬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낮아질 수 있는 길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며 그들의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꾸 높이다 보면 우리 자신이 낮아집니다. 겸손을 구할 때 이 방법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엉뚱하게 자신을 비하하면 안 됩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다른 사람을 높임으로 자신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는 길입니다.
/ 강준민 외
9. 영적인 성장
울산에 사는 김현석 군은 '열성 이영양성 수포성 표피 박리증'이라는 조금 긴 이름의 병을 앓고 있는 청년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온 몸에 물집이 생기고 피부가 짓무르면서 거의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지금 20살이 되었지만 몸무게가 10Kg밖에 나가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는 4 살난 아이같습니다. 김군의 어머니는 노동으로 20년간 그의 병수발을 들었으며 이번에 이웃 주민들의 따스한 온정으로 귀한 성금을 전달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이에 걸맞는 성장을 하지 못하며 중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당장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며 병을 고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병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병은 가지가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않아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병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면 영적인 열매는 당연히 열리지 않습니다.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 기도: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아 많은 과실을 맺게 하소서.
10. 영적성숙
이 세상에는 귀중한 것 치고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어떤 경기에서 이기려면 모든 기술을 완전히 익히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때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숙련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아주 쉽게 하여 마치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바친 수고와 노력의 대가이다. 천재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무서울 정도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영적 성숙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절대로 성숙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대가없는 영적 성숙을 바란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식품 건강기구가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범사에 형통하고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영혼이 잘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엡4:15).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건강해지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최홍준 목사(호산나교회)
11. 영적 성숙의 목표
1960년대 유명한 복음주의자이며 교회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감당한 토저 목사는 오늘날의 교회에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며 다만 살만 찐다고 합니다. 둘째는,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참관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 것입니다. 토저 목사는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아야 하며, 나아가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줄 알고, 더 많은 사람들을 세워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킬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 중의 어느 특별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를 알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께서 주시는 성장의 길, 즉 은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장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영적 성장의 기반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 홍성건
12. 참 영성의 표시
신약성경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참 영성의 표시는 사랑이다. 요한 안트는 “위대한 지식은 이방인들에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고, 위대한 일들도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오직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시험이며 참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값비싸고 좋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유무가 우리 자신의 영성과 다른 사람들의 영성을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사랑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사랑에 대한 의미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성경의 저자들이 의미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경의 저자들에게 있어서 또한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느낌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 사랑은 느낌을 초월하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것을 하겠다는 헌신이다. 테레사 수녀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가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들을 행할 때 그 일들은 위대한 일들이 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 만큼의 일을 하느냐보다는 얼마 만큼의 사랑을 쏟느냐에 더 관심을 두고 계신다.”
13. 영성의 의미
영성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의 유행어가 된지는 이미 오래다. 영성이라는 말을 쓰지 아니하면 영성이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게리 토마스는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책에서 자연주의 영성, 감각주의 영성, 전통주의 영성, 금욕주의 영성, 행동주의 영성, 박애주의 영성, 열정주의 영성, 묵상주의 영성, 그리고 지성주의 영성의 9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영성을 추구하는 단계이지 영성 자체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영성은 그러한 단계를 거쳐서 "이미 도달한 어떠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 상태를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고 한다. 비록 우리의 현실은 땅에 발을 디디고 분주하게 살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루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듯이 세상을 사는 것! 그래서 세상의 모든 욕심도 욕망도 초월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영성이 아니겠는가? 게리 토마스의 이론은 이 고차적인 영성에 이르는 단계요 과정일 뿐이다.
14. 바른 영성의 시대
영성이란 영적 성품이나 영적 기질을 말한다. 영성이 훌륭하다는 것은 영적 성품이 훌륭하다는 말이다. 영성은 은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은사적인 혹은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셔서 쉬게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배우는 것이 마음이 쉼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멍에를 메고도 쉼을 누릴 수 있는 그 단계까지 올라가야 참다운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멍에의 무게에 눌려서 정신도 못차리는 그 상태를 영성이 있다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신다. 십자가가 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십자가의 무게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주님을 사랑해서 멘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영력이라야 영성이 밑바탕된 영력이다. 이 시대에 참다운 영성이 있는가?
15. 영적 엥겔 계수
통계학에 '엥겔 지수'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한 가정이나 사회 또는 국가의 생활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전체 생계비 지출 총액에서 음식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따라서 엥겔 계수가 높을수록 후진국에 속한다. 말하자면 자기 소득 중에서 먹는 것에 쓰는 비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후진국에 가깝다. 반대로 그 비율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그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엥겔 계수도 똑같다. 하루에 자기 육체의 본능을 위하여 쓰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을수록 그는 덜 경건한 사람이다. 반면에 경건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그것을 반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한다면 경건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장엄한 성가가 울려 퍼지는 예배당 안에서가 아니라 불꽃 튀는 유혹과 욕망의 현장에서 말이다. 자기 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말이다. 나의 인기나 명예가 짓밝히려는 바로 그 곳에서 말이다. 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을 좇아 행동하는 경건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느 하루가 아니라 매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경건이란 훈련의 결과요 반복의 열매이다. 이와 같이 경건한 사람을 살기 위해서, 지금 그대는 하루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어느 정도의 힘을 쏟고 있는가?
/이재철
16. 영적인 생활의 중요성
일본의 어느 한 학교에서 가난한 학생이 얼마나 있는가를 조사하기 위하여 선생님이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는가 질문하였다. 그런데 9살의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가 넉넉한 집의 아이인 줄 알고 있는데 손을 드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왜 아침을 못 먹었지?"
그 아이가 대답했다.
"저희 집에서는 영의 양식을 먹기 전에 아침을 먹지 않아요. 저는 오늘 늦잠을 자서 영적 식량만 먹은 후에 그냥 왔어요."
17. 영적 빈곤
미국에 '히티 그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미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미국 사상 최대의 구두쇠'라고 말한다. 이 할머니는 가스값이 두려워 평생을 차가운 오트밀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들이 다리에 상처가 났는데 치료비가 아까와 치료하기를 미루다가 결국은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통장에는 1억불이 예금되어 있었다. 억만 장자가 극빈자로 살아간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다. 그런데 엄청난 영적 축복을 받고서도 아주 가난한 극빈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음을 생각할 때 이 또한 비극이 아닐까?
18. 영혼의 식량준비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돌면서 온 집에서 식량 준비를 하는 대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예정이라면 너도 나도 라면을 박스로 사들이고 중요한 생필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서 가게에 있는 라면박스는 모두 동이 났다는 것이다. 인간이 절박한 상황에 부딪히면 자기 몸만 생각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보다. 그저 굶어 죽기는 싫어서....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어떠한가?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예고에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써가며 식량준비를 하면서 정작 주님 오신다는 확실한 예정에도 불구하고 영의 식량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의 영혼은 아마도 굶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19. 영적갈증
어느 한 가족이 섬의 주변 약 8마일을 자전거로 돌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그만 다리로 계속해서 페달을 밟기에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이미 짐작했던 일이지만, 목이 마를 거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막내 아이가 목이 많이 말라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마실 것이 있는 곳은 아직도 5마일 정도를 더 가야만 했습니다. 그 주변에도 시원한 물이 풍부하게 있었지만, 수질을 알 수 없어 감히 마실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와 같은 영적인 곤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영적인 물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물을 마시려고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찾아내어 갈증을 해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함으로, 또 그의 선하심에 대해 묵상함으로 그 갈증을 가라앉혔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굶주릴 때 하나님은 생명의 양식인 말씀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갈증 해소제를 받아 목을 축이십시오. 육신에 물이 필요하듯 영혼은 말씀이 필요합니다.
20. 영적 피난처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유럽의 대학생들과 젊은이들 중에는 삶에 대해 번민, 갈등을 느끼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랜시스쉐퍼 박사 부부는 1955년 스위스 알프스 산 한 계곡 웨이모라는 마을에 라브리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삶에 지친 영혼들이 라브리에서 쉼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하였다. 여름철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 원두막이나 오두막에서 잠시 머물러 비를 피하듯이 라브리에서 인생의 폭풍과 소나기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힘든 삶에 지쳐 있다.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방황하며 갈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영적 피난처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줄 피난처가 없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하며 살아가지만 더욱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인생의 해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인생의 답을 주시는 분이 계신다. 바로 우리의 영적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영적 피난처요 우리들이 쉼을 얻을 수 있는 오두막이다(마 11:28).
21. 영적 편식
요사이 복음을 좀더 쉽게 그리고 빠르게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떤 선택 기준을 세워놓고 간략화된 신조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단순화된 신조는 단편적이고도 세분화되지 못한 복음을 제시,영적 편식을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케이크 위에 장식용으로 놓인 앵두 몇 개를 빼먹으면서 케이크를 먹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믿는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은 바른 믿음과 집중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고 미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특허처방은 개별적으로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복음 전체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얼마 가지 않아 영적 편식으로 인한 결핍증이 나타나 정신적인 파멸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현미경으로도 분석해야 하지만 또 망원경으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믿음생활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받을 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함은 위험을 초래한다. 수동성은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토양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박관 목사(독일내과 병원장)
22. 하이든의 영성(영감)
고전음악 작곡자들이 대개 신앙이 좋은 분들인데 내가 알기로는 그 중에 재일은 하이든이 아닌가 한다. 프랑크 조셉 하이든의 곡은 거의가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그의 생애도 그렇다. 그는 백 개 이상의 심포니와 팔십 개 이상의 소나타, 그리고 두개의 위대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작곡할 때, 그리고 작곡하는 중에 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리하면 내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마치 악보의 음이 춤추는 것 같고 나의 마음도 춤추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좋은 곡이 있어서 내가 기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할 때에 기쁜 곡에 여기서 작곡되게 되더라, 하는 이야기이다.
/ 곽선희목사 설교예화 중
23. 영적인 유산소 운동
요사이 ‘유산소 운동’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운동은 산소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하는 운동이다. 심폐 지구력을 기르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조깅, 에어로빅, 수영, 자전거 타기, 등산 등이 이에 속한다.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한 후 샤워를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우리의 영적 건강을 촉진시키는 유산소 운동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충만한 봉사, 섬김의 봉사이다. 성령충만하면 섬김의 태도가 달라지고 영적으로 건강해지며 삶에 활력이 넘치기 때문이다. 남을 섬기며 봉사하는 사람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남이 갖는 것을 더 기뻐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런 인간이 될 것을 강조하신다.
베블리 라헤이가 쓴 「성령충만한 여인」에서 여인은 부엌일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모든 냄비와 그릇과 부엌 물건들의 주님, 식사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함으로써 성도가 되게 해주옵소서. 당신께 드리는 봉사를 받아주소서. 당신께 이 일을 해드리나이다.” 단순한 부엌일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생각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다. 걸레를 들면서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먼지 쌓이고 더럽고 어지러운 곳을 깨끗하게 해주는 걸레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라고 생각하고, 걸레를 빨면서 “이 더러운 걸레가 하얗게 되듯이 나의 마음도 성령으로 정결케 하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다. 작은 섬김을 통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영성은 민감해야 한다
- 영성 회복의 신앙 / 양창삼
24. 영적 권세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권력의 이동(Power shift)'이라는 책에서 권세, 권력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흘러간다고 했습니다.
문명이 발달되기 전에는 ‘완력’이라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힘, 체력이라는 권세가 있었는데 힘센 사람이 제일이었습니다. 다음에는 ‘경제력’이 권세가 되었는데, 돈이 많으면 양반이 되고, 돈이 권세였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돈을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력’, 지식이 권세였습니다. 기술이 있고 지식이 많으면 권세를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권세 앞에는 많은 돈도 몰려 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도덕적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덕성을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힘을 못 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靈的)인 권세’입니다.
25. 아직 아닙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이상하게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지거나 썰렁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인은 간단합니다.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이나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어두움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둠의 영은 고통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복음 전파자를 공격하게 됩니다. 어둠의 영은 자기 수중의 인간들에게 물질, 명예, 권세, 쾌락, 식도락, 투자... 같은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처럼 가치관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복을 주며 예수를 믿으면 사랑, 기쁨, 소망, 행복, 영원이 함께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대화 중에 물질, 명예, 권세, 쾌락, 식도락, 투자... 이런 단어가 많은가 사랑, 기쁨, 소망, 행복, 영원, 믿음... 이런 단어가 많은가를 따져보면 그 대화의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얼어버린다면 아직 때가 아닙니다.
/최용우
26. 영적인 무감각
목사님이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청년은 “난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이시고 변화되어 올바른 삶을 살도록 권면하시는 것을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요?” 라고 묻자,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군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은 인정하시죠?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아요.”
목사님은 한 예를 들어서 그 청년에게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돈을 빌려도 빌린 돈의 액수와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나 그것에 관해 흥미가 없고 별로 느낌이 와닿지 않는다고 당신에게 말한다면 그에게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즉각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갚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것은 죄에 빠지기 쉽고 영적인 것에 무감각해져서 결국 올바른 판단을 못하여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27. 영적인 추수꾼이 되려면
기독교 신앙은 씨앗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고 알곡을 거두는 추수신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칭찬받는 영적인 추수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하는데, 오직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밭이 옥토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구할 때 우리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를 없애주십니다. 마음밭을 옥토로 일구었으면,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지려면 매일 세끼를 먹는 것처럼 매일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또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물입니다. 물이 없으면 곡식이 자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밭에 성령의 이른비와 늦은비가 내려야 할 것을 성령은 말씀하십니다.(신명기11:14)
마지막으로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는 남보다 땀을 더 흘립니다. 신앙의 열매를 추수할 때도 우리의 헌신과 수고가 더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영혼추수의 대장이 되어서 농부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시다.
28. 영적 소경
어느 목사가 글래스고우에서 열심히 옥외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 마지막에 결론을 내릴 쯤, 어떤 불신자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목사 양반, 나는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소. 나는 그것들을 본 적이 없소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검은 색안경을 낀 소경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 부근에 클리이드 강이 있지만 저는 믿지 않소. 여기 사람들이 많이 서 있지만 저는 믿지 않소. 나는 그들을 본 적이 없소. 나는 맹인으로 태어났거든요." 그러자 불신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29. 영의 눈이 열린 사람
찬송가 작사가 ‘페니 크로스비’의 이야기다. 그녀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매우 영리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시를 아름답게 짓는 재능이 있었지만 그녀의 장애는 너무나 큰 벽이었다. 그녀는 날마다 무력함에 시달리면서 길고 긴 어둠의 세월을 보냈다. 그녀의 나이 30세가 되던 어느 날,뉴욕의 전도 집회에서 “웬 말인가 나를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라는 찬송을 반복하여 부르는 중에 갑자기 구원의 감격과 어두웠던 과거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제 새로운 인생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부분을 부르다 “저도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나요”라는 물음을 가졌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시를 쓰고 노래를 짓는 재능을 주지 않았느냐.” 그때부터 그녀는 95세가 되기까지 8000곡의 찬송시를 지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영의 눈이 열리는 순간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구원의 체험과 사명의 발견이다.
/장학일 목사(예수마을교회)
30. 에바다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는 정신적 장애, 영적인 장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이 물음 앞에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백성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네가 가서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저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 받기를 원한다.”
현대에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그 하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외롭고 답답한, 자기만의 세계 속에 폐쇄된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들어야 할 음성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은 이 괴롭고 어두운, 그리고 모든 질서가 뒤바뀐 세상 속에 오셔서 다시 한번 세상을 고치고자 하십니다. 귀먹고 어눌했던 사람을 향해, 주님은 세상을 창조했던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 열려라.” 그리고 열렸습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이동원
31. 영적 훈련
서독 함부르크에 사는 빌도어 홀만 박사는 <스포츠>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는 남성은 55세에 이르면 심장과 순환기 계통의 능력이 젊었을 때에 비해 평균 3분의 2로 약화된다. 이와는 달리 50대 노인이라 할지라도 육체적으로 잘 단련만 되어 있다면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는 20대의 평범한 젊은이만큼은 건강할 수가 있다."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는 데는 신체 단련이 필수적이듯이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는 영적 훈련, 즉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예배에의 참여 등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32. 육적인 삶 영적인 삶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자기의 생일을 묻는 이에게 항상 자신에게는 두 가지 생일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하나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생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날이라고 했다.우리 크리스천은 모두 이 두 가지의 생일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두 가지의 삶을 누리고 있다.하나는 생리적인 삶 곧 육체적인 생명이요, 또 하나는 신앙적인 삶 곧 영적인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적인 생명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하지만 육신의 생명을 화학적으로 분해하면 전부 3000여원어치에 해당하는 값싼 것이라고 한다.호흡이 끊어지면 죽고 만다.우리는 죽고 나면 한줌의 흙으로 변한다.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얼마 안가서 주름이 지고 만다.시편 90편은 ‘인생은 70이 지나면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처럼 이 땅에서 사라지는 존재’라고 했다. 성경의 주제는 참 생명이다.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이 성경의 주제다.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33. 영적 살인
안 집사는 길가던 젊은 여자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가 슈퍼마켓으로 들어가자 그곳까지 따라 들어서 계속 말을 붙였다. 그 여자는 물건을 사가지고 내빼듯 나갔다. 안집사는 계속 쫓아가며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다동'이라고만 말하고 도망갔다. 그때부터 안 집사는 그 여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한달이 지났다. 그후 안집사는 그 수퍼마켓을 찾아가서 그 여자의 외모를 말하면서, 어디 사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여자네 집이 상을 당한 집이라고 했다. 그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니 바로 길에서 만남 그 여자가 놀라면서 나왔다. 그 날 그 자리에서 기도해주고 7명을 등록시켰다. 역전에서 전도할 때 일이었다. 어느 젊은이에게 "청년,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했다. 그러자 그 청년 "왜 구원 받냐, 십원 받지" 하면서 시비를 걸다가 끝내는 구두발로 허벅지를 차서 피멍이 들게 하였다. 안집사는 아파서 주저앉으면서도 그 청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다. 안집사는 그 청년이 전도지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전도지를 버리지 않고 구겨서라도 주머니에 넣었으니 감사합니다."
안집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혼날까봐 말도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나 때문에 고난받았구나." 하는 음성을 들려 주셨다. 그로부터 1주일 후에 전화가 왔다.
"저는 김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바로 당신을 때린 사람입니다. 나, 예수 믿겠습니다. 1주일동안 잠 한숨 못 잤습니다. 잠만 자면 지옥이 보여서 고통스러워 죽겠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믿고, 가족 전체를 전도하였고, 지금은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 전도 왕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안집사는 1990년에만 1,400명을 전도하여 결신 시켰다. 그녀는 예수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하지 않는 것이 '영적 살인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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