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 돌아가기] |
구전(口傳)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성희 목사
2. 가장 작고 가벼운 짐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사나이는 자신을 늘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마음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한참 가다보니 사나이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 몹시 기분이 나빴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그는 갑자기 힘이 빠져 가장 뒤쳐져 걸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음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되었다. 이때다 싶어, 사나이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두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지고 온 그 짐이었다.
3. 십자가의 은혜
우리는 기쁨과 감격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은혜가 나를 지배하며 은혜가 나를 강권적으로 주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의 일화입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해서 노래를 배울 수조차 없는 처지였지만 노래를 너무나 잘 불렀기에 교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뉴욕의 맨해튼 홀에서 발표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표회가 끝난 뒤 많은 백인 기자들이 신문에 악평을 써댔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실의에 빠져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에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이런 말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오늘까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이만큼의 생활이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위대함과 재주와 명성도 좋지만, 모든 것보다 은혜를 얻어 매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노래를 불러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곽선희 목사
*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해 볼 때 나의 불성실함과 어리석음을 탄식합니다. 이전의 비참했던 시절과 가망 없던 때에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 한번 감사의 향기를 올리게 하옵소서.
4. 십자가를 지는 삶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챈트니는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5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보편적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모두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영구적인 것이다. 예수님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한 번만 지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져야 하는 것이다.
셋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지적인 일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다.
넷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고통 당하신 것과 같이 봉사할 때도 몸이 아프도록 일해야 하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드려서 수고해야 하고 쾌락에 쓸 수 있는 돈도 남을 위해 사용하는 손해도 맛보아야 한다.
다섯째, 십자가는 곧 죽음이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백 년 동안 아무리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 신연식
5. 사윗감
필란드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왕이 있었다. 왕은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 왕에게는 한 가지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자신의 대를 이을 사윗감을 찾는다는 방을 붙였고, 전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일단 활쏘기 말타기 등 무예시험을 통과한 10명에게 왕이 말했다.
"하늘과 땅, 이웃과 이웃을 하나로 이어주는 나무를 일주일 이내에 구해오너라"
일주일 후, 청년들은 저마다 웅장하고 괴상한 나무를 가져왔다. 그런데, 존 페로라는 청년은 왕 앞에 십자가를 내밀었다. "폐하, 십자가의 세로막대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지요. 가로 막대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지요. 가로막대는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왕은 존 페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십자가 정신'을 바탕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6. 두 개의 나무 십자가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목재 가구와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동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여동생은 집안 일을 열심히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남동생 춘팔은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형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날도 춘팔이는 도박판에 가서 어울리다 돈을 모두 잃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형 춘삼이 크게 다칠 뻔한 위험에 처한 동생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춘팔은 형에게 애걸을 합니다. 도박빚을 갚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지막 남은 통장을 달라고 조릅니다. 형은 할 수 없이 도박빚을 갚고는 삼남매가 행복하게 살자며 통장을 내어줍니다. 그 돈으로 도박을 하다가 운좋게 돈을 많이 땃지만 돌아오는 길에 따라붙은 깡패들과 싸우다가 살인을 하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채 집으로 뛰어들어온 춘팔이 공포에 질려 형에게 사실을 말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경찰이 집을 포위하고 스피커로 자수를 외칩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형을 각오하며 걸어나가려는 춘팔을 돌려세우고 형 춘삼은 피묻은 옷을 벗겨 자기가 입습니다. 만들다 만 나무 십자가를 꼭 쥐어주며 춘삼은 달려 나갔습니다. 경찰의 정지 명령에도 마구 달려 나갔습니다. 마침내 총성이 들리고 춘삼은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죽었습니다. 경찰은 후에 죽은 것은 살인자 춘팔이 아니고 형 춘삼이였음을 알게 되었으나 형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기에 춘팔을 사면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춘팔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도박을 끊고 형대신 나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볼품없던 십자가가 점점 형의 아름다운 작품을 닮아갓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삶도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어느날 형의 무덤을 찾은 춘팔은 두 개의 나무 십자가를 무덤에 꽂습니다. 하나는 형이 만들었던 것 하나는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춘팔의 십자가에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당신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이것은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문기태 목사
7. 아내가 진 십자가
스틴리 존스 박사는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있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이를 모르는 아내의 신뢰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어 그는 불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아내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내가 당장 떠나 버려요! 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아내에게 고백하면서 자기의 죄가 아내를 얼마나 괴롭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했던 비난은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내는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요. 당신을 떠나진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사랑 속에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아내의 사랑으로부터 십자가로 나아갔습니다. 그 시간부터 “나는 구원받은 자였습니다.”라고 그 사람은 고백했습니다.
8. 자기 십자가
성경: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귀찮게 여긴 안경이 생명을 구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통령이었던 데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를 암살자의 총알로부터 구해 주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독한 근시였던 루즈벨트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하나는 가까운 곳을 보고, 또 하나는 먼 곳을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정치 캠페인을 벌이던 중에 밀워키(Milwaukee)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쉬렌크라는 남자가 그를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루우즈벨트는 다쳤지만 연설을 마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상처를 검사했는데 그의 조끼 주머니 속에 있었던 강철로 된 안경집이 총알을 그의 심장을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통령은 대단히 놀라와하면서 부러진 안경집과 그 안에서 부서진 안경을 보면서 "나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갖고 다니는 것을 귀찮아했는데..." 라고 말하며,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그것을 사용하셨구나" 라고 했습니다. 이제 안경은 더 이상 귀찮은 도구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자기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9. 십자가의 사랑
본문: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어느 신앙인의 아름다운 고백이 있습니다. 내 가슴 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속죄에의 불타는 사랑을 담자. 이 불로 하나님을 불같이 사랑하고 이 불로 사람을 불같이 사랑한다. 내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불길로 이 더러워진 거리 구석 구석을 태우리라. 이것이 나의 종교다. 나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다. 예배가 아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의 사랑의 불길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교리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 없는 기독교는 울리는 꽹과리, 휴지 같이 쓰레기통에 버릴 것들이다. 아름다운 결단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신앙의 결단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10. 최후는 최초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밤에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각양각색의 십자가가 진열된 전시관에 갔다. “이 중 하나를 지고 가십시오.” 천사의 말에 그는 ‘가장 가벼워보이고 편해보이는’ 십자가 하나를 골라 짊어졌다. 그러나 보기와는 딴판으로 너무 무겁고 힘들었다. “다른 걸로 바꾸면 안될까요?” 그가 사정하자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그는 더 간편해보이는 십자가를 골랐다. 그러나 두번째 십자가는 더욱 힘들었다. 그는 다시 간청했고 천사가 허락했다. 결과는 마찬가지. 그는 다시 바꾸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차례. 그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제발 바꿔주세요”라며 애원하고 최후의 선택을 했다. 그러자 그 십자가를 본 천사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결국 처음에 택한 십자가를 지셨네요. 이제는 바꾸지 않겠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11. 십자가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를 빼버리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겠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각 사람에게 맞는 적당한 십자가를 정해두고 계십니다. 이미 져야될 십자가는 정해져 있고 누가 대신 져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이라는 것은 말 안 해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사단은 교회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평안하고 안일하고 재미있게 놀기 좋은 세상 유흥 놀이시설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게 하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고난을 더 이상 연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기에 생각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함과 만족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벗어놓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등에 맵시다. 잃어버린 십자가를 되찾아야 합니다. 천국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로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천국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12.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폴란드의 수상 야루젤스키 정부는 공장과 병원 등 공공건물에 있는 십자가를 비롯해, 학교 교실에 있는 십자가까지 모두 떼도록 지시를 내렸다. 폴란드의 교회들은 십자가 금지령을 비난했고, 정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결국 정부는 한 걸음 물러나서, 문서로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만 학교 교실의 십자가를 떼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시했다.
그런데 가르볼린 지역의 학교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어느 열렬한 공산당원은 법은 법이라며, 20년 동안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십자가 7개를 모두 떼어 버렸다. 며칠 뒤 여러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더 많은 수의 십자가를 매달았다. 공산당원은 또다시 그 십자가들을 떼어 냈고, 다음날 6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2가 항의에 나섰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즉시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리 행진에 들어갔다. 항의를 지지하기 위해 마련된 기도회에는 부근 교회의 교인과 학생들 2천5백 명이 참석했다. 경찰들은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를 에워쌌다.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군중들과 경찰 진압대를 향해 폴란드 교회 성직자는 소리 높여 외쳤다.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
- 「청소년을 변화시키는 이야기 131가지」/ 유재덕
13. 즐거운 교환
영화에서 종종 보는 마약 거래 장면은 거의 예외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약과 돈의 교환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돈가방이 비어 있거나 위조지폐로 가득차 있지나 않은지,혹은 밀가루가 섞인 마약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인다. 그러다가 빈 가방이나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눈치가 보이면 양측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피를 튀긴다. 손해 보는 교환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환은 다르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은 모두 ‘쓰레기’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하여 주신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즐거워하신다. 우리의 고통 절망 미움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평안 행복 희망 사랑으로 바꿔주신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도 즐겁고 하나님도 즐거우신 ‘즐거운 교환의 장터’이다.
14.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잇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 였습니다. 어느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턱썩 주저 앉아 엉엉 우려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거든요........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애기도 있잖아요...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던 자매의 모습...
하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http://comesee.wo.to(한태완 목사 홈페이지 에서)
15.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이전에 봤던 한 영화가 생각난다. 한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산 속으로 도망간다. 적들이 사냥개를 몰고 피 냄새를 맡으며 쫓아간다. 사냥개들은 점점 그에게 가까이 온다.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그는 한참을 도망가다 강을 발견한다. 그리고 강에 몸을 담그자 집요하게 따라오던 사냥개의 추적이 멈췄다. 사냥개들이 피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 문제를 집요하게 고소하는 사냥개와 같은 사탄의 소리를 잠재운다. 십자가는 큰 은혜의 강이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누구라도,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용서받는다. 등산을 하다 갑자기 산불이 나서 불길이 밀려오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내 주위에 맞불을 지르면 된다. 그리고 다 타 버린 장소에 서 있으면 불길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다. 내가 내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서 있으면 된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나는 사랑한다. 이 놀라운 십자가에 나는 감격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는 것이다.
/ 김원태
16.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
어떤 사람이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뎌야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난이 한때 방탕하고 사치해서 생긴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긴 가난을 십자가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잘못과 실수로 야기되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고난은 고난이되 신앙 때문에 얻게 된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입니다. 반면 ‘복음의 십자가’는 신앙을 버리면 겪지 않아도 될 불이익과 고난이지만, 순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가 아닌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십자가’입니까?
- 「내가 오늘을 사는 것은」/ 이화영
17. 죽으심의 대가
본문: 요한복음 3장 16∼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국전쟁 피난 시절 부산은 발 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바글거렸습니다. 그때 저는 범일동 매축지 근처에 살았는데 부산 항구에서 화차가 석탄을 잔뜩 싣고 범일동 매축지까지 와서 기관차를 바꿉니다. 그 시간이 10분내지 한 15분쯤 걸립니다. 그동안 피난민들은 개미떼같이 그 화차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립니다. 그래서 그 석탄을 각각 그릇에 담고 혹은 보퉁이에 담아서 연료로 쓰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생사를 걸어놓고 서부활극처럼 차위에 올라가 석탄을 끌어내리면 군인들은 연방 그들을 밀어냅니다. 그 석탄은 훔쳐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 옆에 서 있었는데 한 40대 남자와 한 10살쯤 되는 아들이 그 석탄을 모으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들은 올라가서 석탄을 퍼내고 아버지는 밑에서 받고 그러는데 군인들이 오니까 다 뛰어 내렸습니다. 그 아들도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큰 석탄덩어리 하나가 열차 밑으로 굴러들어가니까 아들이 기어서 그 열차 밑에 들어가서 그 석탄 덩어리를 드러내려고 하는 찰나에 덜커덩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쏜살같이 아버지가 뛰어 들더니 그 아들을 있는 힘껏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열차 바퀴가 아버지의 허리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아들을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그 처참한 모습이 마음속에 아로 새겨져서 항상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용기 목사 설교 중에서
18.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이웃을 만나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아픔의 기쁨을 허락하소서. 십자가의 영광은 용서와 희생의 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소서.
/김영수,
19.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은 해골 모양의 바위 언덕이었다. 언덕 이름은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하였고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 불렀다. 십자가는 악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두 손과 두 발을 고정시킨다. 그러면 손과 발이 찢어지면서 몸속의 피가 흘러나와 결국 죽게 된다. 어떤 죄수는 3일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6시간만에 운명하셨다. 채찍에 너무 많이 맞아 기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죄로 타락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다.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대속의 은혜로 된 것이다. 오늘은 성 금요일.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20. 처절한 십자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그 당시 로마뿐만 아니라 고대 아프리카, 애굽, 바사, 헬라 등에서 유행했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하게 치욕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들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예나 반란자들, 극악한 강도들에게 이런 십자가형이 주어졌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면 약 3일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탈진과 아픔 때문에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난 후에 사흘째에는 절명하게 됩니다. 고통과 탈진이 너무나 심할 경우에는 자비를 베풀어 주는 방법으로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형수의 시체는 연고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주어서 무덤에 장사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나 아주 극악한 사형수의 경우에는 십자가 틀에 내버려두어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일을 계신 것이 아니라 오전 9시에 처형을 당하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한마디로 표현한 그 말 앞뒤에는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런 고통스러운 순간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순간들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렇게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하신 것입니다.
/하용조
21. 십자가 고통의 의미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한다.
22. 갈보리 십자가
한때 남침례교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계셨던 엘리스 풀러 박사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성지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토요일날 사람들이 박사에게 말하기를 “풀러 박사님, 일요일 아침에는 갈보리로 가게 될텐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바로 그 지점에서 박사님이 우리에게 설교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박사는 설교를 해야 할 책임감 때문에 그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곰곰히 생각했지만 도무지 합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곳에서 설교를 할 자격이 도저히 없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는 잠도 자지 않고 마태복음의 십자가 고난의 기사를 그대로 암송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사람들은 갈보리로 걸어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 모든 것이 죽음처럼 고요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할 시간이 되자 풀러 박사는 얼굴을 하늘 쪽으로 돌리고는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낭송을 마친 박사는 “저곳이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 돌아가셨던 곳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작 왓트의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합소서.
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사람들이 갈보리에서 발길을 돌렸을 때 그들의 마음엔 만약 목숨이 천 개가 있다면 그의 보혈로서 그들의 구원을 사실 예수님을 위해 천 개의 목숨이라도 다 드리기 원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마음이십니까?
23. 십자가의 도
성경: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미국의 흑백갈등이 깊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할 때 옆에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들어 칼을 막아주었습니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습니다. 싸움은 멈추어졌고 흑인은 목사의 희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느낀 흑인은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종종 일에 싫증이 나면 흑인은 불평과 원망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는 칼맞은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24. 십자가의 도
어떤 신자가 목사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인 것 같습니다."
불만 섞인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목사는 즉시 성경을 펴들고서 말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래도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 말을 들은 불신자는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돌아갔다.
25. 곱하기 십자가
십자가를 세워 놓고 보면 더하기표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를 등에 지면 곱하기표로 변한다. 기독교는 더하기의 종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하는 곱하기의 종교다. 100만원에 100만원을 더하면 200만원이다. 그러나 100만원에 100만원을 곱하면 10억원이 된다. 더하기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해타산적인 사람은 희생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곱하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못 박는 십자가를 진다. 이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포함된 십자가다. 죄인 된 나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질 때 죄인 된 나는 죽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는 십자가다. 사명의 십자가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과 수치 받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자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사명의 십자가를 짐으로 곱하기의 기적을 이룬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26. 텅 빈 십자가
지난주 어느날 기독교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분이 '십자가'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연약해 보이는 아가씨가 사람 키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매는데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봤더니 속이 텅 빈 십자가 였습니다. 얇은 베니어판으로 조립한 다음 겉에 나무결무늬의 벽지를 발라 만든 모양만 '십자가'였습니다. 아마도 교회당 강단 뒤 휘장 가운데 거는 십자가인 모양입니다.
아하! 십자가! 사형틀. 어깨에 매면 장정이라도 휘청거릴 만큼 무겁게 짓누르는 십자가! 내가 달려 죽어야 할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그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십자가는 예사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언젠가 어느 시골교회에서 둥이 휜 소나무로 만든 진짜 십자가가 휘장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반지르르 하고 멋진(?)십자가를 살 돈이 없어서 누군가가 서투른 솜씨를 냈겠지요.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내 십자가를 내가 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십자가를 지되 '속이 텅 빈 무늬만 십자가'를 지지 말고, 울퉁불퉁한 옹이가 그대로 있는 무거운 진짜 십자가를 매야 합니다. 멋진 십자가를 사서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그 '무늬만 십자가'를 진 아가씨를 보면서 쉽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27. 네 십자가부터 먼저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 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데 간데 없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 없단다
28. 십자가를 진 사람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사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 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29. 내게 맞는 십자가
상점을 경영하는 한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상점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십자가를 골라 보아라.”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골랐습니다. 한 십자가는 매우 아름다운 금십자가였는데 너무 무거웠습니다. 다른 것은 가볍기는 한데 표면이 매우 거칠어서 어깨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고르던 끝에 그는 방구석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것은 바로 그가 처음부터 지고 있던 십자가였습니다. 고난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은 작은 부스러기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리차드 범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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