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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설교 : 하나님의 청사진 (창 1:26~31)

by 【고동엽】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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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청사진   (창 1:26~31)

  여러분, 여행을 하시거나 혹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길을 걷다가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을 보시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건축에는 문외한입니다만 우리 교회의 건축 과정을 거치면서 건축물에 관한 관심이 전보다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잘은 몰라도 길을 가다가 특이한 건물이 세워진 것을 발견하면 나름대로 어떻게 지어졌나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때마다 참 신기한 게 있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시공한 기술자들의 공력도 대단하게 여겨집니다만, 특히 설계한 건축가의 아이디어가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던 건축물을 어떻게 상상해냈는지 그 창의성에 대해 경탄하게 됩니다. 건축가의 마음속에 처음 착상된 그림이 설계도로 옮겨지고, 그 설계도대로 기술자들에 의해 시공되는 일련의 과정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아무 것도 없던 그때 마음속에 우주만물에 관한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그것은 창조에 대한 청사진 혹은 설계도였습니다. 창세기 1장~2장에 그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ꡑ의 청사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그림,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창조가 완성된 직후 하나님의 느낌이 기록된 창1:31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창1:31ꡒ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ꡓ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 굳게 건설하십니다. 그것이 곧 구원(or 구속)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통해 개인의 인생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새롭게 변화됩니다. 그래서ꡒ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ꡓ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아름다운 청사진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에 맞춰 살아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행복해집니다. 영원히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마치 위대한 건축가의 설계도대로 건물을 지으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낭패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사진대로 살아감으로 영원히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원창조 : 에덴의 창설 -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창조한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빠라ꡑ인데, 단순히 무엇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드는(Ex Nihilo) 창조행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창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기존의 것을 갖고 가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우주만물을 차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말씀으로’ 참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납니다.(3절, 7절, 9절, 11절, 15절, 24절 등) 이와 병행하여 반복되는 표현이 또 있죠. ‘ ~그대로 되니라’입니다.(4절,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등)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말씀의 능력이 큽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 과정 중 마지막 여섯째 날 마지막 순서로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본문 26절~28절 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행위였습니다. 26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의 설계’입니다. 그리고 27절은 ‘창조의 시행’, 28절은 ‘사명의 부여’입니다. 특별히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부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축복과 사명이 붙어 다닙니다.  

  아담과 여자가 에덴동산에 살던 모습이 창세기 2장에 나와 있죠. 창2:8,15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 ...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 ” 그곳은 인간이 지내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강물이 흐르고, 온갖 과수가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마음껏 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무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탁월하게 창조했어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를 어기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에덴’이란 단어의 뜻이 바로 기쁨입니다. 반대로 불순종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입니다. ‘나라’는 백성과 영토, 그리고 주권의 3요소로 이뤄집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내세의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주권(or 통치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종하면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생명을 누립니다. 그 주권은 말씀을 통해 행사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신정 정치(theocracy)인 동시에 말씀 정치(logocracy)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그렸던 청사진이 바로 이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그 청사진을 망가뜨린 것입니다.
  
[2] 인간의 타락 : 에덴의 상실 - 비참한 인간의 운명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불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행위였습니다. 뱀(사실은 그 속에 들어가 역사한 사단)이 여자에게 다가가 유혹합니다. 그때 여자가 결정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계기가 무엇입니까? 창3:5~6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그만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여자는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말에 넘어갔지만 실제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음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 죽음, 그리고 더 나아가 육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입니다. 결국 아담과 여자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에덴의 상실입니다. 그것은 곧 영생의 상실이요 기쁨의 상실입니다. 하나님은 유혹한 뱀에게, 그리고 범죄한 인간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그 중에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가 창3:19,23,24에 나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 )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함으로, 말씀의 통치를 거부함으로 각종 저주와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혼돈, 무질서, 갈등, 불화, 다툼, ... 이런 개인이 모여 사는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그런 혼돈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 당시 그리셨던 청사진과는 영 다른 비참한 모습입니다.

[3] 그리스도의 구원 : 에덴의 회복 - 하나님 나라의 회복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하시면서도 그 가운데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 그리고 당신의 청사진인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뱀을 저주하시는 말씀 속에서 오히려 구원의 소망을 보여주십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장차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 사단의 권세를 궤멸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겁니다. 에덴의 상실은 죄로 인한 것이었는데,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에덴을 회복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창3:15을 가리켜 구원의 복음이 최초로 주어졌다 하여 원시복음(原始福音)이라 부릅니다.

  창3:20~21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좀더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구원의 복음을 들은 아담은 믿음으로 고백하는 의미로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습니다. 하와는 ‘생명’이란 뜻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 범죄한 그들은 죄책감으로 인해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주신 겁니다. 이것은 속죄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 속죄한다는 단어는 ‘카파르’로 ‘덮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짐승이 피 흘려 죽어야 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대속의 개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십자가 사형 틀에 달려 죽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자들마다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인생이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새 사람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재창조’라고 말합니다. 원창조 자체는 완전했지만 인간의 범죄로 망가졌던 것을 십자가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한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고후5:17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동네 골목에 고물 아저씨가 지나가곤 했습니다. “양은 그릇 삽니다! 양은 그릇 바꿉니다!” 소리치면서 다니면 동네 아줌마들이 다 찌그러지고 구멍 난 양은그릇과 양은냄비를 갖고 나옵니다. 그러면 새 것으로 바꿔 줍니다. 고물이 변한 겁니다. 이것처럼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됩니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아시죠. 꽃 이름입니다. 그런데 본래 그리스어로 코스모스는 ‘우주’라는 뜻이고, 본래 ‘조화’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는 조화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와 혼돈 즉 ‘카오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게 재창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운 코스모스가 이뤄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그것은 곧 말씀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이게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럴 때 우리 심령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가정이 변화되고,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 세계가 변화됩니다.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새로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구미 나라들을 보면 지금은 기독교가 많이 쇠퇴했지만 그래도 기독교 문화가 남아 있어 얼마나 부러운 모습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사회나 국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요, 에덴의 회복입니다.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존 밀턴(1608~1674)의 작품을 아시죠. ‘실낙원ꡑ(Paradise Lost)과 ꡐ복락원ꡑ(Paradise Regained)입니다. 에덴이 죄로 말미암아 상실되었다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시 에덴이 회복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 내세에 성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고 말씀으로 통치하는 곳에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   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뤄지기를 소원합니다.

[4]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 에덴의 기쁨과 하나님 나라의 전파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에덴의 기쁨을 회복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으로부터 가정, 교회, 직장 등 삶의 현장에서 에덴의 기쁨과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내 생각과 내 욕심대로 살아온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적극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이 충만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이런 것들을 누림에 그치면 곤란합니다. 그 기쁨과 평안의 물결이 넓게 퍼져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국가로 온 세계로! 그것이 우리 인생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꿈이 있습니다. 그런대 대부분 세속적인 욕심을 추구하는 야망입니다. 그런 야망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허무해집니다. 그것은 인간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청사진,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게 비전입니다. 거룩한 비전! 여기에 우리 인생의 초점이 맞춰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영원히 후회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바입니다.

  지난 주간 제가 인도 단기선교에 참여했었습니다. 인도 캘커타 지역에 우리 교회 협력선교사 로수길 목사님과 변상이 사모님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로수길 목사는 인도인(인도명 : 수크리트 로이)인데 20여년 전 한국에 유학을 왔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인 부인을 만난 겁니다. 17년전 목사 안수를 받고 인도로 돌아갔는데, 처음에는 움막같은 데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후 신학교를 세우고, 사역자들을 배출하여 교회를 계속 개척했습니다.지금 300여 교회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에 교인이 늘어나서 수십 명 이상의 수준이 되면 한국교회와 연결해서 교회당을 건축합니다. 우리교회도 예전에 4개 교회, 그리고 이번에 2개 교회를 지어 헌당했습니다. 그 외에 미션 스쿨, 고아원이 세워졌습니다. 앞으로 병원도 설립될 것입니다. 1만 교회를 꿈꾸고 있고, 뱅갈 지방에서 전 인도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뻗어 나아갈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분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본인의 노력도 있었습니다. 재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청사진에 초점을 맞춘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수 없죠. 로수길 목사가 옛날 한국에 와서 보니까 작은 나라지만 그렇게 큰 자기 조국 인도에 비해 너무 잘 삽니다. 부러웠습니다. 그 비결이 무얼까 생각했는데, 길거리마다 우뚝 선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그는 마음이 다짐했습니다. “아 나도 인도로 돌아가 곳곳에 십자가를 세우리라!” 그것이 하나하나 실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세운 신학교 건물 벽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있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의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을 시도하라!ꡓ(Expect the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the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청사진을 실현하려는 비전은 반드시 이뤄짐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우리 모두 선교사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든 선교사가 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민족과 세계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자기 분야에서 자기 위치에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해도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 단기선교 요행 중 다른 팀을 만나 반나절 동안 합동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 팀은 이랜드 단기 선교팀이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팀이 구성되었는데 벌써 12번째라고 합니다. 전문적인 중심 멤버가 있고 나머지는 그때마다 교대된다고 합니다. 이랜드에 대해 속속들이는 모르지만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번 단기 팀을 보면서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사업을 해도, 돈을 벌어도 이렇게 하면 얼마나 멋집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복음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비전을 가집시다. 우리나라가 지금 어려운 일이 많지만 그런 비전을 붙잡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요즘 선진국은 멀리 앞서 나아가고, 뒤에서 중국이 따라오고 인도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경제신문을 보면 심심치 않게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친디아(Chindia)입니다. 중국(China)과 인도(India)의 조합입니다. 무섭게 떠오르는 나라들입니다. 이번에 9년 만에 인도에 가보니까 아직 수준은 낮지만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더군요. 이런 틈바구니에서 위기감마저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거룩한 비전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 나라를 결코 버리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가 참 신기합니다. 현재 175개국에 750만명의 동포가 흩어져 삽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가는 데마다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국인 가는 데는 김치와 처치(Church)가 있다!” 지난 8월초 개최되었던 선교한국 대회에 청년대학생 5천명 이상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장단기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 3천여 명입니다. 이런 나라가 세계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그대로 붙잡으면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겁니다. 일류 국가 만들어 주실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선교의 도구로 사용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마음속에 꼭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청사진에 맞춰 살아갈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에덴의 기쁨을 회복하고 실패하지 맙시다.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장차 세상 떠날 때 영원한 하나님 나라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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