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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갈라디아서 5:16–17).

by 고동엽 2026. 1. 20.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갈라디아서 5:16–17).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받드는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17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이라는 제목 앞에 서 있습니다. 성결은 교회의 장식품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숨결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자에게 반드시 따라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결은 결코 인간의 자력으로 꾸며낸 도덕의 화관이 아닙니다. 성결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룩한 전쟁의 승리요, 은혜의 질서 속에서 자라나는 새 사람의 광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줍니까.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왜 필연적으로 싸움이며 동시에 복음의 능력인지, 그 깊이를 펼쳐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서는 본래 “복음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사도의 심장 같은 편지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시도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을 때, 바울은 단호히 외쳤습니다. 의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이며, 믿음으로 전가받는 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거룩한 삶은 필요 없습니까?” 바울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말합니다. 참 복음은 방종을 낳지 않고, 성령을 낳는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책을 씻을 뿐 아니라 죄의 권세를 꺾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꺾인 죄의 잔재와 맞서 싸우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안에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성결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증거”이며, “칭의의 원인”이 아니라 “칭의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려 애쓰는 이유는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의롭다 하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첫 마디는 명령처럼 들립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러나 이 명령은 채찍만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약속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길은 단순히 더 높은 도덕적 결심을 요구하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인간의 결심은 오늘 뜨겁고 내일 식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붙잡아 일으키고, 상한 마음을 새롭게 하며, 넘어져도 다시 걷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복음으로 마음을 녹이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 주실 때 그 사랑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순종으로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생각이 새로워지고, 욕망이 정돈되고, 선택이 달라지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현실을 드러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단순한 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타락한 본성의 경향을 뜻합니다. 육체는 하나님을 미워한다고 꼭 소리치지 않습니다. 육체는 조용히 “나”를 높이고, “나”의 안전과 쾌락과 인정과 통제를 우상으로 세웁니다. 육체는 종교의 옷까지 입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나 속으로는 자기 의를 사랑하고, 은혜를 값싸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대신 사람 앞에서의 칭찬을 탐합니다. 반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육체는 편안한 길을 찾고, 성령은 거룩한 길을 여십니다. 육체는 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고, 성령은 영원한 기쁨을 빚으십니다. 육체는 죄와 타협하자 속삭이고, 성령은 죄를 죽이라 외치십니다. 이 둘은 화해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라고 말합니다. 대적함, 곧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아는 것이 성도의 성결에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성결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거룩해지려면 싸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의 유혹이 줄어들고 마음이 항상 맑아야만 성결이 이루어진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전에는 죄가 왕처럼 군림하여 우리를 끌고 갔고, 우리는 죄의 결정을 “나의 성격”이나 “어쩔 수 없는 습관”으로 포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시면 죄가 더 선명히 보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보이듯이, 은혜가 임하면 죄가 드러납니다. 그러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양심이 깨어나고,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있다는 사실은 절망의 증거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육체는 육체끼리 평화롭게 공존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계시면, 육체는 반발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거룩을 향한 갈망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을 붙드신 흔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참으로 현실적이며, 동시에 깊이 위로가 됩니다. 성도는 때때로 원하는 선을 온전히 이루지 못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고 싶고, 거룩하게 살고 싶고, 말을 절제하고 싶고, 탐욕을 버리고 싶고, 미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도는 자기 안에서 다른 법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한숨을 쉽니다. “나는 왜 이 모양입니까.” 하지만 이 구절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의 변명으로 쓰라고 주신 문장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성화의 여정에서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화의 길도 은혜로 걷게 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선을 완벽히 이루지 못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복음의 깊이를 새롭게 마십니다. 성결은 자랑의 사다리가 아니라, 은혜의 우물로 더 깊이 내려가게 하는 길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은 단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수준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수단,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통로를 따라 걷는 것입니다. 성령은 공중에서 떠도는 감정의 바람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새기시고,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이며, 기도로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이며, 성도의 교제 속에서 책망과 위로를 받는 삶이며, 성찬과 세례의 약속을 붙드는 삶입니다. 성령은 이런 평범해 보이는 길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더 극적인 체험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화려한 불꽃보다 꾸준한 등불을 더 많이 사용하십니다.

성결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옵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이시는 분이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으면 성결은 순간의 흉내로 끝납니다. 참 성결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흐르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데려가십니다. 십자가는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길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에게 적용하셔서 옛 사람을 죽이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에게 적용하셔서 새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죽임과 살림이 성화의 심장입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단지 죄책감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약속하는 거짓 기쁨을 거절하고, 그 죄 뒤에 숨은 우상을 끌어내어 십자가 아래에서 부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단지 “나쁜 것 하지 말기”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결은 단번에 완성되는 조각품이 아닙니다. 성결은 매일의 전투이며, 매일의 의탁입니다. 어떤 날은 승리의 노래가 있고, 어떤 날은 눈물의 회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보다 강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감정보다 신실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어제보다 우리의 내일을 더 밝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결의 싸움에서 가장 큰 비극은 넘어짐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다시 일으키십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회개의 길을 여십니다. 마음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무너진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깊이 맛보게 하십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품으로 더 단단히 묶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실제적인 장면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오랫동안 분노의 죄와 싸운다고 하겠습니다. 가족에게, 동료에게, 작은 일에도 마음이 끓어오르고 말이 날카로워집니다. 그분은 매번 후회하고, 매번 “다음엔 안 그래야지” 결심하지만 또 반복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말씀을 읽다가, 성령께서 마음을 찌르십니다. “너는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 그 질문 앞에서 그분은 처음으로 자기 분노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분노는 단지 성격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왕좌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이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내 계획이 흔들리면, 내 자존심이 상하면, 나는 왕좌를 지키기 위해 화를 무기로 사용해 왔던 것입니다. 그때 그분이 성령 안에서 한 걸음 나아갑니다. “주님, 저는 제 인생의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제 왕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성령님, 제 혀를 지켜 주십시오. 제 마음의 우상을 드러내 주십시오. 화가 올라올 때, 잠시 멈추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온유를 기억하게 하십시오.” 그 후로도 완벽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분노가 올라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갔다면, 이제는 싸움이 생깁니다. 멈춤이 생깁니다. 사과가 빨라집니다. 회개가 깊어집니다. 무엇보다 “나는 원래 이래”라는 체념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바꾸고 계신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의 실제입니다. 성결은 한 번의 폭죽이 아니라, 매일의 방향 전환이며, 매일의 은혜 의탁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분명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성결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죄는 언제나 ‘작게’ 시작하여 ‘크게’ 삼킵니다. 육체의 욕심은 언제나 달콤한 언어로 다가와 “이 정도는 괜찮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거룩한 두려움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이 두려움은 율법주의적 공포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경외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할 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두려워하듯,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성결은 차갑고 딱딱한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열정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시고, 그 사랑이 죄를 멀리하게 하십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화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성도의 실제적 순종”이 함께 움직이는 신비로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동시에 우리가 애써야 하는 일입니다. 이 둘은 경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에 우리가 일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붙드시기에 우리가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깨우치시기에 우리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로하시기에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길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은혜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가 나를 움직이기에 나는 순종해야 한다”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은혜를 핑계로 게으르지 마십시오. 결단을 핑계로 자기 의를 세우지 마십시오. 성령은 게으름을 깨우시고, 자기 의를 부수십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결은 단지 개인의 경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령이 이루시는 성결은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말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지고, 판단이 줄어들고, 긍휼이 늘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되,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 속에서 성도는 “다른 영”을 가진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세상은 효율과 성취를 숭배하지만, 성령은 사랑과 진실을 열매 맺게 하십니다. 세상은 자기 정당화를 외치지만, 성령은 겸손한 회개를 가능케 하십니다. 세상은 상대를 이기려 하지만, 성령은 섬김의 승리를 맛보게 하십니다. 이런 삶이 세상 앞에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결은 침묵의 설교이며, 삶으로 읽히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이루시는 성결의 목적은 “우리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아들의 형상으로 빚으셔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비추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래서 성결의 여정은 결국 예배입니다. 매일의 선택이 예배가 되고, 매일의 절제가 예배가 되고, 매일의 사랑이 예배가 됩니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은 우리를 더 억눌린 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로운 자녀로 만듭니다. 죄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자유, 선을 선택할 자유, 자신을 내어줄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시다. 육체와 성령의 싸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미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고, 성령께서 그 승리를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동시에 방심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기도로 숨 쉬십시오. 넘어지면 회개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성결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는 길이며, 성령은 그 사랑을 우리 안에서 불꽃처럼 지피십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설교요약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단순한 도덕적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 안에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육체(타락한 본성)와 성령은 서로 대적하며, 성도 안에는 성화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싸움 자체는 성령의 내주와 역사로 인한 정상적인 현상일 수 있으며, 성결은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기도, 교회 공동체, 은혜의 방편을 통해 죄를 죽이고(죽임) 의를 살리며(살림),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안에 빚으십니다. 성도는 은혜 의존의 겸손과 실제적 순종의 결단을 함께 붙들며, 성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묵상 포인트

  • 내 안에서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육체의 욕심”은 무엇이며, 그것이 약속하는 기쁨은 진짜입니까 거짓입니까.
  • 죄를 이기려는 나의 방식은 “자기 힘”입니까, “성령의 방편(말씀·기도·공동체)”입니까.
  • 넘어짐 이후에 나는 체념으로 가는가, 회개로 돌아오는가. 회개가 나를 다시 그리스도께 붙게 합니까.
  • 성결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망이 내 안에 살아 있습니까.

강해

갈 5:16의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현재적·지속적 삶의 방향을 요구합니다. 이어지는 약속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성화가 단지 금지의 목록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성령의 통치)’ 아래서 죄의 욕망이 실현되지 못하게 되는 실제적 능력을 말합니다. 5:17은 성도 안의 이중적 현실을 밝힙니다. 육체는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는 성도의 내면에서 “두 원리”가 충돌함을 의미하며, 성화가 자동 진행이 아니라 전쟁임을 드러냅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문장은 성도에게 겸손을 주고, 동시에 은혜의 필요를 절감하게 하여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붙게 합니다. 성화는 전 과정에서 성령의 주권적 역사이며, 그 역사 속에서 성도는 책임 있는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주석

  • “행하라”: 단회적 결단보다 지속적 걸음(생활양식)을 강조합니다.
  • “육체의 욕심”: 단순 육체성(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자기를 주인 삼는 타락한 경향성입니다.
  • “서로 대적”: 양립이 아니라 적대입니다. 성도는 중립지대가 아니라 전장에 서 있습니다.
  •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선을 향한 뜻이 즉시 완성되지 않게 하심으로, 자기 의를 꺾고 은혜에 더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측면이 있습니다(성화의 교육학).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본 본문은 신약이므로 히브리어 직접 주석은 제한적입니다. 다만 구약의 “행하다/걷다” 개념은 히브리어 halak (הלך, “걷다”)에 자주 담기며, 언약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행함”으로 삶 전체가 예배가 됨을 보여 줍니다(창 17:1 등). 바울의 “행하라”는 표현은 이런 성경적 “삶의 길” 사상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성령을 따라 행하라”: pneumati peripateite (πνεύματι περιπατεῖτε). peripateō는 “생활하다, 행하다”의 뜻으로, 신앙을 순간이 아니라 일상적 보행으로 묘사합니다.
  • “육체의 욕심”: epithymian sarkos (ἐπιθυμίαν σαρκὸς). epithymia는 강한 욕망/갈망으로, 가치중립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타락한 육체에 속한 욕망입니다.
  • “거스르다”: antikeitai (ἀντίκειται) 계열의 대립/적대 개념이 문맥에 깔려 있으며, 양 진영의 충돌을 표현합니다.
  • “서로 대적”: allēlois antikeitai (서로에게 대항하다)와 같은 구조로 이해되며, 성화의 내적 갈등이 구조적임을 나타냅니다.

금언

  • 성결은 구원의 대가가 아니라, 구원이 남긴 향기입니다.
  • 싸움이 사라졌다면 거룩이 온 것이 아니라, 감각이 잠든 것일 수 있습니다.
  • 성령을 따라 걷는 자는 완벽을 자랑하지 않고, 회개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 죄를 죽이는 것은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기쁨을 떠나는 것입니다.

신학적 정리

  • 성결(성화)은 칭의와 분리되지 않으나 동일하지도 않습니다. 칭의는 단번의 법정적 선언, 성화는 점진적 변화입니다.
  • 성화의 근거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성령은 그 연합의 적용자이십니다.
  • 성화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면서 성도의 실제적 순종을 요구하는 “은혜 안의 책임” 구조입니다.
  • 성화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형상 닮음입니다.

주제별 정리

  • 내적 전쟁: 육체와 성령의 적대는 성도 안에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 방편: 말씀·기도·성례·교회 공동체는 성령께서 성화를 이루시는 주요 통로입니다.
  • 회개: 성화의 핵심 리듬은 “넘어짐-회개-복음 재확인-순종”입니다.
  • 자유: 성령의 인도는 규범의 압박이 아니라 죄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목회적 정리

  • 성도에게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정죄가 아니라 위로로 해석하게 도우십시오.
  • 반복되는 죄에 대해 단순한 의지 강화를 처방하기보다, 욕망의 뿌리(우상·두려움·자기 의)를 복음으로 드러내게 하십시오.
  • 실패 후 즉시 십자가로 돌아오게 하되, 죄에 대한 타협은 단호히 끊도록 인도하십시오.
  • 성화의 열매를 평가할 때, 완벽보다 방향·회개·겸손·사랑의 성장에 주목하십시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매일 말씀 앞에 서서 성령의 빛으로 마음의 우상을 점검하겠습니다.
  • 유혹의 순간에 “즉시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선택하도록 기도하며 멈추겠습니다.
  • 넘어질 때 체념하지 않고 회개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 붙들겠습니다.
  • 공동체 안에서 정직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책망과 위로를 겸손히 받겠습니다.
  • 가정과 직장에서 성결이 관계를 새롭게 하는 열매로 나타나도록 말과 태도를 지키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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