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살이 삶 (1)
눅 14:25-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기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
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우리나라 기독교는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신 있게 내 놓을 것은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일본교회에서는 한국을 성지라고 부릅니다. 한국 기독교계를 한번 둘러보는 것이 꿈이고 희망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대만의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을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러워합니다. 또한 세계의 선교학자들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기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참으로 기적을 낳았습니다.
한편 한국 기독교를 돌아보면 성장한 모습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시급히 보완하고 가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내적 성숙”이고 “영적성장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양적 성장을 이룬 반면 내적 신앙의 성숙함이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인의 자기부정의 삶이고 자기 축소의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신앙인들은 열심도 있고 깊은 신앙체험도 있는데 그에 비해서 자기부정이나 자기 축소의 정신발휘가 부족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닌 취약점이고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좀 더 깊고 원숙한 예수를 따르는 정신의 신앙이 요구됩니다.
그 예수를 따르는 정신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 그리스도인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기 못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은 실제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고 헬라어로 “미세이”(misei)라는 말로 “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중심을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뜻은 “바스타조”(bastazo) 즉 “우유부단, 무소신을 버리고 결단하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친 자기중심적 삶”이고 또 하나는 “무소신”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예수의 정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살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예수살이라고 말 합니다. 머슴살이, 시집살이, 종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의미 입니다. 머슴살이나 시집살이 그리고 종살이에서 내가 강조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배제하고 오직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예수살이”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예수살이의 기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자기를 덜 사랑하고 소신과 결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순종의 삶”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순종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하고 판단될 때 그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는 삶이 순종의 삶이고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그 순종을 요구하는 일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면 순종하고 따르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순종의 차원은 그리 쉽게 결단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요구하는 순종의 길에는 상당한 갈등과 고민과 주저함이 들어있는 요구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가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신실한 크리스천 부부가 결혼을 했습니다. 드디어 기도하고 기다리던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해산하는 아내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남편이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땀을 흘렸습니다. 그때아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나오는 아이를 보니까 기형아였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이 남편이 순간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에게는 비밀로 했습니다. 여러 시간이 지나고 기도한 후에 이 남편이 아내에게 조용히 그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내가 뭐라 대답했겠습니까. 그 대답이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대답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가 아니면 불순종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이 내 경우라 생각하고 대답을 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상태에서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때 그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한참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그런 불행한 아이를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우리 부부에게 맡기신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을 거예요.”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이런 대답을 준비했습니까. 이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그 삶이 자기부정의 삶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즉 예수살이의 삶인 것입니다.
“나의 몫을 인정하는 삶”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삶의 몫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몫을 받아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몫이 내가 세상에서 발휘하고 살아갈 인생의 길이고 은사이고 할 일이고 사명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충실히 살아가는 삶이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벗어나고 회피하고 포기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가 되려하고 남자가 여자가 되려 하고 자꾸만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뜯어 고치고 자기 정체성까지 부정하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나는 나만의 고유한 몫이 있고 은사가 있고 이 세상에 나만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값이고 나의 삶의 이유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무시한다면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가였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4.25~1658.9.3)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에 보기 흉한 혹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크롬웰이 유명한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초상화를 그려온 것을 보니까 얼굴에 있는 혹을 빼고 그려왔습니다. 그래서 크롬웰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 혹을 빼면 내가 아니지 않느냐, 그대로 그려라”해서 초상화를 다시 그렸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은 아름다움을 신봉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하고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다시 꾸미고 바꾸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나만의 고유한 몫이 있고 은사가 있고 생이 있고 모양이 있는데 이것을 자꾸만 부정하면 자기 자신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몫을 회피하지 말고 전가하지 말고 자기가 지는 결단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삶”
인생은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면 때가 되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보장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한 알의 밀알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반드시 썩어야 합니다. 그것이 밀알의 사명이고 도리이고 할일 입니다. 그러면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썩는 삶이 신앙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오늘 심는 삶이고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오늘 씨를 뿌리면 언젠가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뿌리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고 생산적인 삶인 것입니다. 거둘 때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거두지 않으면 내 주위의 어떤 사람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 뿌리는 삶이 축복의 삶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내가 오늘 아주 작은 것을 심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결국 어떻게 거두어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직업을 잃은 실직자가 구걸에 나섰습니다. 어느 겨울 추운 날 식당 앞에 가서 손님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어느 손님이 그에게 1000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돈으로 음식을 사서 먹는데 어느 굶주린 노인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을 나누어 그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데 신문팔이 소년이 오니까 그 음식의 반은 떼어 소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 음식을 받아 들고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그때 길을 잃고 헤매는 개가 곁에서 쳐다보자 또 반을 떼어 그 개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 실직자가 그 개를 데리고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개 주인은 잃어버린 개를 찾았다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실직자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같이 양심적인 사람을 보지 못했소, 내일 내 사무실로 찾아오시오, 나는 당신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소.”
내가 뿌린 씨가 이렇게 전개되더니 결국 때가 되니까 이렇게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 씨를 내가 거두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거두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실을 누가 거두든지 거둘 때는 큰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살이 삶은 실망하지 않고 때가 되면 거두게 될 줄 믿고 오늘 열심히 심는 삶입니다. 내가 오늘 심으면 자라나고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열심히 심고 있습니까. 심으십시오, 그러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다가 풀리지 않는 문제는 하나님께 돌리는 삶”
사람이 살아가다가 보면 숫한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많은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때그때마다 풀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를 만나도 크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곧 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때로 별 방법을 다 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만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힘든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믿음과 신앙과 기도와 지혜가 필요한 때 입니다. 살다 보면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생각이 짧으면 신앙 상에 큰 시험이 오고 낙심이 오고 회의가 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때는 스스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시험 들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눈먼 소경이 예수께 왔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인간의 논리로 풀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이유를 놓고 해석하고 알아보려 해 보았자 해답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알아보려고 할수록 스스로에게 더 큰 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회의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시험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만나게 되거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입니다.
198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엘리 비젤(Elie Wiesel)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밤“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고난의 삶을 토대로 해서 쓴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 비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이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 소년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 누이가 고문당해 죽어 가는데도 이 소년은 바라만 볼 뿐 속수무책 입니다. 자신이 도울 길이 전무합니다. 그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내 아버지 어머니 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이 소년이 그렇게도 신뢰하고 믿던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지며 울부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이 시간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계십니까, 어디서 무얼하고 있기에 당신이 택했다는 이 백성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하고 울부짖으며 목 놓아 웁니다.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 광경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절박한 순간입니까. 자기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듣고 믿고 신뢰해 왔는데 그런데 이 절박한 순간에 아무 도움도 없고 액션도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하나님이냐 그 말입니다. 정말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면 이 절박한 상황에 보란 듯이 나타나서 저 범법자들에게 벼락을 때리든지 보기 좋게 거꾸러트려 죽게 하시든지 해야 이해되고 그래야 하나님이지 않겠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손오공처럼 그렇게 위기에 빠지면 금방 나타나서 구원해 주시고 목마를 때는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고 몸이 아플 때는 손을 얹어 금방 기적같이 낫게 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기대하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응답이 늦고 길이 막힐 때는 야단입니다. 그러니 이 소년이 그 상황에서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게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빨리 다가와 도와주신 것이 아니고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 위에 계시단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이 그렇게 다급해할 때도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이렇게 조용하시고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부르짖어도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 조용히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 그 삶이 진정어린 예수살이의 신앙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도 처자도 형제와 자매도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값싼 은혜만 구하고 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지 못하고 그냥 가볍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영적으로 성숙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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