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12
그리스도인의 폭력성에 대하여
1 세기 성서시대를 마감하고 2 세기부터 출발하여 종교개혁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 사역과 메시지가 신학 중심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성서신학이라는 별도 분야가 발생했습니다.
칼 바르트(1886-1968)는 교회교의학이라는 기념비적 저술을 남겼습니다. 1 권 창조론에서 성부하나님을 조금 저술하고 12 권 전체가 예수에 관한 신학입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기독론을 통해 화해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예수를 화해자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령론은 쓰지 못하고 작고했습니다.
한국 주류 신학계와 교회는 바르트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 이유가 황당합니다.
바르트가 성부 하나님보다 예수를 너무 많이 말했다는 겁니다. 예수교에서 예수 많이 말한 게 결격 사유라고 합니다.
2 세기 신학이 출발하면서 예수 사역과 메시지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땅의 하나님나라가 실종되고 그에 따라서 삼위일체 신론의 중요성이 망각된 현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못하는 한국교회는 예수를 많이 말하는 게 결격 사유가 됩니다.
결국 예수 사역과 메시지가 그리스도인 믿음 중심이 되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선과 악 정결과 부정의 경계를 허물고 화해와 평화 세계를 여시었습니다.
선과 악을 경계지어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낙오한 실패자들 병든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기득 세력에 강력하게 저항하십니다.
2 세기에 출발한 신학은 예수 사역과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예수께서 어떻게 신인가와 하나님이 세계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를 설명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유대교 하나님이 그리스 철학 옷을 입고 기독교에 니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폭력성은 예수께서 기독교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 신이 기독교 하나님이 된 까닭에서 발생했습니다.
기독교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실은 지배와 폭력에 대한 종식 선언입니다.
인류에게 최초로 선과 악을 생각하게 한 사람은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입니다. 그는 BC 2천 년대 아리안계인 인도 이란에 공유되었던 종교를 개혁한 사람입니다. 동물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드리는 제사가 악임을 선언하고 인간에게 선과 악이 있음을 설교했습니다. 그는 사제를 비롯한 기득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로아스터교가 탄생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마즈다라는 유일신과 그의 쌍둥이 아들인 선한 영 스펜타마잉유와 악한 영 앙그라마잉유의 대결을 통해 이 신들이 세계를 지배합니다.
조로아스터는 악한 자들에 대한 벌과 선한 자들에 대한 보상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1)
이 사상은 플라톤의 천상이 본질(이데아)이고 땅이 가짜(그림자)라는 이원론과 결합하여 악을 물리치고 선한 사람이 되어 신에게로 가는 것이 구원인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아우구스타누스에 의해 기독교 신학으로 정립되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고 악을 포용함으로써 해결하는데 악을 무찔러 없에는 조로아스터 사상이 기독교 신학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가 폭력 종교가 된 원인입니다.
인류 정신사가 18 세기 계몽주의 19 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이성으로 고양된 세계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해야 했습니다. 이때 태동한 신학이 사회인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존엄을 찾으려는 자유주의 신학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실존주의 신학입니다. 이들은 성서가 1 세기 당시 사람들 삶의 정황에서 기록되었음을 인식했습니다. 즉 성서가 그시대 과학 수준과 역사 인식 문학 형태로 씌여졌슴을 인식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자기 시대 삶의 고백을 위하여 성서를 비평했습니다. 이로인해 성서를 문헌 비평과 언어 비평 역사 실증주의 등을 통해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실패가 예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가 복음이 아니라 예수 가르침이 복음입니다. 하르낙은 「기독교 본질」에서 예수 가르침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도덕 신학과 유사한 길 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가치를 이땅에 구현하거나 예수 가르침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기독교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텐데요
현재 그리스도인 믿음이 바리새인 믿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가르침을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고수하면 그 말씀이 법이 됩니다.
말씀을 순종한다는 믿음은 법을 순종하는 유대인 믿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믿음은 사랑을 기준으로 그 법을 해석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사랑은 법의 마침이요(로마13:8) 사랑은 법의 완성이다(로마13:10) 라는 바울 진술의 의미입니다.
바르트는 성서 문자가 말씀이 아니고 그 문자가 성령을 통해 나를 감동시킬 때 말씀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진술과 같습니다.(고후3:6)
유대인들처럼 말씀에 순종을 목표하여 살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고 역시 기득 세력이 그러한 것처럼 차별과 배제 소외가 일어나고 폭력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위대한 지혜자가 됩니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 뻐진 함정입니다.
말씀을 순종하여 살면 폭력이 발생하고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살면 폭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과 사랑으로 사는 것은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훌륭한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는 꼴 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예수께서 가장 싫어한 바리새인 믿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정말 없습니다.
기독교가 분열되어 갈등 폭력 불화를 일으키는 현실이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신앙하고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에 의해 삶의 변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는 믿음이 바리새인 믿음을 벗어나는 길 입니다.
예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자유주의 신학조차도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 의를 따라 사는 기독교 중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사랑하며 삽니다(요한6:28-29)
이것이 자기 의를 버리고 평화로 가는 길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의를 버릴 때만이 갈등과 폭력 불화가 종식됩니다.
당시 독일 주류 신학인 자유주의 신학은 결국 히틀러를 지지하게 됩니다. 자기 의를 찾는 믿음이 빠진 함정입니다. 칼 바르트는 자신의 스승들이기도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데 실망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떠나서 신정통주의 신학을 세웁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에게 신정통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자유주의 신학보다 더 악질이고 폭력인 믿음 형태를 살펴봅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미국에 근본주의 신학이 태동합니다. 미국 근본주의는 1920 년 딕슨, 루벤토리, 윌리엄 라일리가 세계기독교근본주의협회(Worlds christian fundmentals association)를 창립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근본주의자 대부분은 칼뱅주의자들입니다.(2)
지금은 근본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주장하는 바는 같습니다.
이들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서 무오설 즉 성서 비평을 거부하고 문자 그대로 믿을 것을 주장합니다. 문자주의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2. 예수 신성을 강조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죽으심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사역과 메시지 즉 역사성은 거론하지 않습니다.
3. 예수그리스도 부활과 승천 그리고 심판을 위한 재림을 강조합니다.
4. 사탄과 비그리스도인 멸망을 주장합니다.
악을 물리칠 대상으로서 공격하고 선을 숭상합니다. 예수의 원수 사랑은 사실상 폐기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와 사실상 같습니다.
5. 믿는 자들 부활과 하늘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강조합니다.(3)
이들은 땅에서 삶의 구원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사역과 가르침을 알아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 신학이 실종 상태이고 따라서 삼위일체 신론 중요성이 망각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역사 예수는 없고 아버지 하나님 신앙이 중심입니다. 칼뱅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주제인 그리스도인 폭력성애 관해서 우리는 3 번과 4 번을 주목합니다.
근본주의를 담은 복음주의 신학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고 그분은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요한316-17)는 성서 말씀은 외면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의 깊게 관찰하면 목사들이 독생자 예수께서 오셨다는 3 장 16 절만 읽고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요한복음 3 장 17 절은 읽지 않는 관행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가 신학 제목은 복음(기쁜소식)이지만 복음이 아니라 무시무시합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신을 위한 변론」에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근본주의 연구한 결과를 말합니다. 그녀는 근본주의는 깊은 두려움에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랑을 체험해 보지 못한 신앙 형태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근대 신학인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 신학을 평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미국 따라서 비난만 합니다. 미국과 같은편이라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을 비난하는 근본주의 신학이 여과 없이 유입되어 폐쇄성 편협성과 폭력성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복음주의(근본주의)는 예수께서 전하는 하늘 계시와 세속 가치를 구분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종교 광신 속에 들어있는 정치 주장을 펴기도 하고 자본주의 논리를 믿음에 결합합니다.(4)
이들로부터 예수와는 정반대인 번영신학이 태동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복음주의(근본주의)는 폭력적이고 전투적 믿음입니다. 근본주의가 신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성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신의 사랑을 무엇이든지 결과를 얻으려는 결정주의 믿음으로 이해하려는 의도와 한편으로는 신의 사랑을 실천 덕목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입니다. 근본주의는 신의 사랑이 무한하고 산정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신앙 실패입니다.(5)
필자는 근본주의 연구소 소장 목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몰아내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나라가 완성된다고 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면 할 수 있다고 설교합니다.
선을 위해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설교입니다.
신성로마 제국 이전까지는 교회가 제국의 폭력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교회가 직접 폭력 행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샤를마뉴(747 - 814)는 그의 신성로마 제국 확장을 위해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 유대인 대량학살 종교재판 마녀사냥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노예사냥과 노예무역 서구세계의 식민지 개척을 위한 약탈 길이 열렸습니다.(6)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예배 마친후에 목사와 교인들이 무장하고 인디언 사냥을 나갔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피안 구원을 위해 오늘날까지 폭력을 서슴치 않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했다는 가톨릭 성인 끌레르보의 베르나르(1090 - 1153)도 이슬람을 격멸하기 위해 십자군 모병하는 격문을 썼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이슬람 5 억 명을 격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말고 그들을 악의 축이라 호칭하지 말고 의롭다고 칭의 함으로써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누구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낍니다. 인간은 함께가 편안한 정서라는 말 입니다.
근본주의(복음주의) 종교 광기는 이러한 편안함이 없습니다. 근본주의는 불굴의 신념을 전해야 한다는 것 선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없애버려야 한다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기독교 폭력성을 이유로 기독교가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주장하지만
니체는 자신이 기독교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주장합니다.(7)
기독교가 자신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뜻 입니다.
니체는 루터가 삶의 의지를 부정하고 도덕을 부활시켰다고 평가합니다.(
루터는 예수께서 제시한 하늘 계시를 통해 가치관 변화로서 일어나는 새로운 삶에 대해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하나님나라 신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운 그리스 도덕이 하늘 계시를 물리치고 기독교 신학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성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 의를 따르는 길을 가지 못합니다.
도덕과 경건 그리고 말씀 순종은 자기 의 입니다.
니체는 선한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유해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인간은 진리를 훼손하고 미래를 훼손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9)
도덕과 경건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항상 공격할 대상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남과 비교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도덕 경건은 스스로 자기를 이념에 구속함으로서 불안합니다. 자유 없는 불안은 항상 공격할 대상을 찾습니다.
선善이 순결이 아니라 선과 악을 비교하지 않는 상태가 순결이고 이 상태가 자유의 가능성입니다.(10)
라깡은 아버지 하나님 신앙만을 강조하면 덩달아 선이 강조되어서 세상 향유享有enjoy를 막는 믿음이 된다고 합니다.(11)
교조주의자들의 확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 입니다.(12)
진정한 승리란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패한자를 기쁘게 하는 것 입니다.(13)
구약학자 폰 라드는 고대인들이 성스러움을 보호하기 위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스러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피한다고 합니다. 즉 성스러움은 언제나 그 안에 폭력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에 대해 존중을 넘어서 성스러움으로 상징화하면 그로 인해 폭력이 발생합니다. 명망있는 학자도 성서 비평학자를 공개석상에서 성서를 비평한다고 이름을 거론하며 비난하는 폭력을 서슴치 않습니다. 자기는 성서를 성스럽게 대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세상 종교로부터나 세속에서 기독교로 들어온다는 것은 폭력적인 성스러움으로부터 사랑으로 이동하는 행위입니다.(14)
우리는 진리에 사로잡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을 가지고 있습니다.(15)
문화는 신의 세속적 다른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난폭한 이성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16)
인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과학 만능 시대를 거치면서 이성의 폐쇄성과 편협성을 경험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은 신의 세속화입니다.
종교는 세속화를 통해 폐쇄성과 경직성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화는 타락을 막기 위하여 종교를 입고 종교는 폭력을 막기 위해 문화를 입습니다.(폴 틸리히)
신이 땅으로 오심은 폭력과 갈등을 끝내는 평화를 위해서 입니다.(누가2:14)
1 세기 예루살렘은 폭력과 갈등이 난무하는 불화 세계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파멸을 예견하시고 우십니다. 그들이 평화 길을 모르는데 그 이유는 보살핌받는 날을 몰라서 입니다.
보살핌받는으로 번역된 말은 에피스코페인데 방문visit입니다. 즉 신이 오심이고 하나님나라 시작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유대인들이 평화 길을 모르는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상대를 의롭다고 칭의함이(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호칭함) 평화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로마5:1)
로마서 중심은 의롭지 않은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의롭다하여 화해하고 평화하라 입니다. 이러한 칭의가 하나님나라 입니다.(케제만)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성소수자 장애인 등 부정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사회에서 낙오한 사람들 부모 도움 없이 사회에 나와서 두려워하는 청년들 자립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 노후 준비 없이 늙어가는 노인들 이주 노동자들 코로나 전염병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의롭다고 호칭하여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며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어 갈 때 갈등과 폭력이 종식되고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다음회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올리면서 19 개월 간의 글쓰기를 모두 마칩니다.
1. 미르치어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1 이용주 이학사 2005, 460-468p
2.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정준형 웅진자식하우스 2016, 412-421p
3. 최대광외 종교근본주의 「기독교근본주의 정의와 미국과 한국의 근본주의」모시는 사람들 2011, 56p
4. 위르겐 하버마스 지오반나 보리도리 테러시대의 철학 손철성외 문학과 지성사 2004, 59-90p
5. J D 카푸토 종교에 대하여 최생열 동문선 2003, 131-132p
6. 존 캅 영적인 파산 박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4, 81p
7. 프리드리히 니체 이사람을 보라 이상엽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 2016, 25p
8. 같은 책, 159p
9. 같은 책, 175p
10. 쇠얀 키르케고어 불안의 개념 임춘갑 치우 2011, 76 - 77 93p
11.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 샌트너 슬라보예 지젝 이웃 정옥현 도서출판 b 2010, 74p
12.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 강영계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78p
13. 같은 책, 134p
14. 정일권 십자가의 인류학 대장간 2015, 139p
15. F W 니체 M 하이데거 니체의 신은 죽었다 강윤철 스타북스 2011, 264p
16.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조은경 알마출판사 2017, 102p
회원님, 이상태, Seungchul Paik, 외 4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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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 Kim제가 그동안 단편적으로 읽고 들었던 영적양식들이 오염되고 곰팡이 낀 것들이 섞여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받아들였으니요. 이제 목사님 글이 시금석이 되어 이후 저의 독해에 거울 역할을 하리라 봅니다. 가톨릭은 피로 범벅이 된 살육의 역사를 몸에 새기고 있습니다. 설마 그 광기를 받쳐 주는 신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인식합니다.향유의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때, 불만이 가득하여 투덜거리던 집주인 시몬이 오늘날 주류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합니다. 아직도 교회는 향유의 여인을 품어 안지 못합니다. 주님께 깊이 들어가지 못함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향유의 여인 한 장면만 깊이 파고 들기만 해도 목사님의 글 전체를 이해 할 수 있을텐데요.제가 세속적인 꿈을 잃었을 때, 이 세상을 나그네가 하룻밤 머문 여인숙이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몰랐으니까요.교회의 세속화, 선, 도덕, 주님과 말씀의 구분 등등 여러곳에서 행간에 숨은 깊은 의미들이 잘 읽히길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게 됩니다. 제가 처음에 허덕허덕 쫓아오다가 이제야 편안하게 이해되니 그런 바람이 생기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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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um Kim 선생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과 소통하며 생각을 넓힐 수 있었어요. 처음에 그냥 쓰기만하다가 설명하려는 노력이 생긴 건 순전히 선생님 덕 이에요.처음 글 썼을 때 10 여 명이 읽을 때요 선생님이 많은 사람이 읽게 될 거라고 해 주신 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4 년 여 전에 페북 처음 개설하고 글 1 를 썼는데 읽는 사람이 없어서 바로 접었습니다.이번에도 호응이 없었으면 중단했을 거에요. 1회 더 올리고 그동안 소회와 계획은 며칠후 따로 쓰려고 해요.예수는 큰 산 같은 신이라 우리가 전부 아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의 삶의 정황에서, 내가 올라간 산의 자리에서 본 예수를 전했어요. 선생님 자리에서 예수 만나시길 희망합니다.여기서 미리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주신 관심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손녀가 따뜻한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 희망하고요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평화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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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경하나님 나라는 결국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며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네요.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자들을 편드는 세상이네요. 이들과 화해하고 평화하는 것이 곧 사랑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네요.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을 경험하지 못하고 근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논리와 번영신학을 하나님의 뜻으로 호도해 버렸군요.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현장에서 역사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를 제대로 가르쳐야 하겠군요. 교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예수를 바로 알고 이해해서 이 땅에서 화해와 평화를 살도록 해야겠네요.목사님, 잘 읽었습니다.지금까지 쓰신 글을 책으로 출가하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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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백은경 목사님과 함께라서 힘이 컸습니다.나도 한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데 이번에 글 쓰면서 보니 한신을 벽안시하는 목사들이 의외로 많아요 총신은 도대체 신학이 없슴을 알았어요 아예 소통 자체가 안되는 벽이더라구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지경인데도 전혀 되돌아 볼 생각을 안합니다. 신학이 잘못됐다는 인식은 없고 신도들에게 신앙을 독려하는 글들만 가득합니다.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저의 글을 읽어야 하는데 처음에 토론을 좀하다가 비아냥 거려서 차단한 사람이 많습니다.목사님 댓글처럼 깔끔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저와 목사님 신학 방향이 같아서 고맙고 즐거웠습니다.신학 개념들도 좀더 풀어 설명하고 정리해서 출간하려고 해요.이달말에 김근수 선생님은 또 만날 계획인데 언젠가 목사님도 뵐 날이 있기를 기대합니다.건강하시고 평화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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