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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로마 건국
715∼673. 제2대 왕 누마
673∼641 제3대 왕 툴루스
641∼616 제4대 왕 마르티우스
615∼579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579∼534 제6대 왕 세르비우스
534∼509 제7대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509년 왕정폐지 공화정으로 전환.
494년 귀족과 평민의 투쟁 시작, 호민관 설치
453년 로마, 그리스에 시찰단 파견
449년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 채택
396년 독재관 카밀루스,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 공략
390년 켈트족 침입, 로마 점령
367년 리키니우스 법 성립 -로마의 과두정치를 결정, 정부의 모든 요직을 평민에게 개방
358년 라틴 동맹 경신
338년 이탈리아 중남부로 진출 개시. 라틴 동맹 해체. 로마 연합 성립
312년 아피아 가도 건설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 성립. 타렌툼 전쟁
264∼242 제1차 포에니 전쟁
218∼202 제2차 포에니 전쟁
218년 한니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침공
213년 한니발,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 공략
208년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 에스파냐를 출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
205년 스키피오, 집정관으로 선출됨
202년 자마 회전. 스키피오, 한니발 격파
183년 한니발 자살
171∼168 마케도니아 전쟁
168년 마케도니아 왕조 멸망
1,2 차 포에니 전쟁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 발발
146년 카르타고 멸망. 로마의 속주가 되어 속주 아프리카로 불림
BC 146년경 로마의 주변국가들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호민관에 취임, 농지개혁에 착수, 반대파에게 암살당함.
133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에스파냐 원주민의 반란 거점인 누만티아 제압
123년 가이우스 그라쿠스, 호민관에 취임하여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개혁에 착수
121년 반대파에 몰려 가이우스 그라쿠스 자살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마제국 호민관으로 평민들을 위한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한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로마제국의 평민가문이었으나 증조부가 최고 관직인 콘술(Consul)을 지내면서 정계에 유력한 가문으로 등장했다. 조부는 한니발과 전투에서 사망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이다. 부친 티베리우스는 콘술뿐만아니라 로마제국의 감찰관인 켄소르(Censor)까지 역임하였던 인물이며 어머니는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친 대(大) 스키피오 장군(Publius Cornelius Scipio) 딸인 코르넬리아이다. 10세때 부친 티베리우스가 사망하자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재혼을 하지않고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두 아들의 교육과 양육에만 헌신하였다.
에스파냐에 콰이스토르(회계감사관)로 파견되었고 소(小)스키피오 장군이 주도하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하여 무훈을 세웠다. 기원전 134년 호민관[tribunus plebis, 護民官]으로 선출되어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추진한 농지개혁법의 주요 내용을 보면 로마의 국유지를 귀족이든 평민이든 1인이 소유할 수 있는 상한선을 두었고, 임차된 국유지는 양도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국유지를 과다 소유한 사람은 그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고 평민에게 재분배 해야한다는 것이다.
농지개혁법은 평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으나 특히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귀족세력들은 반대하였다. 원로원은 보수적인 성향의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설득하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추진하는 농지개혁법안을 반대하도록 하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보수적인 성향의 외가인 스키피오 가문과는 정치적 정적관계에 있었다.
그라쿠스는 호민관을 연임하면서 개혁법안을 공고히 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보수파 원로원의 불만과 반대가 폭발하여 평민파 대학살이라는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종사촌 스키피오 나시카가 주동하는 보수파는 몽둥이와 돌을 던지며 그라쿠스와 그의 찬동자들을 학살하였으며 약 300여 명이 처참하게 참살되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살해당해 티베리스 강에 버려졌다. 그가 사망했지만 농지개혁법안은 폐지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이다. BC 133년 호민관이었던 형이 보수파에 의해 살해 당시 소(小) 스키피오 휘하에서 누만티아 전쟁에 종군하였다가 로마로 돌아왔다. 형에 이어 BC 124년과 BC 122년의 호민관에 선출되어 형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아 개혁적 입법을 추진하였다.
형인 티베리우스가 토지분배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동생 가이우스는 곡물법을 추진하였다. 형제가 모두 호민관으로서 평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가이우스가 추진한 곡물법은 국가가 곡물을 시민들에게 배급하는 것으로 최초의 법안이었다.
그이외에도 가이우스는 로마 시민 식민시(植民市)를 설치할 토지(식민시)법안, 군무에 관한 각종 규정을 정한 군사법안, 이탈리아 동맹시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시민권 법안, 부당소득 단속법정의 지배권을 기사(騎士)의 손에 맡기는 재판법안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원로원 강경파이자 가이우스를 반대하였던 집정관 오피미우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무력으로 싸우다 자살하였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로, 농지개혁법은 과거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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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년 마리우스, 호민관에 취임
105년 마리우스, 집정관이 되어 군제개혁에 착수 - 시민군대에서 직업군대로 전환
북아프리카 유구르타 전쟁 승리
마리우스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B.C. 119년 호민관ㆍ115년 법무관ㆍ114년 에스파냐 총독을 역임하였다, 112년 북아프리카에 유구르타(누미디아 왕)가 로마 상인들을 학살하면서 전쟁(戰爭)이 일어나자 많은 귀족 출신의 장군이 이를 평정치 못하고 있던 때에 마리우스는 105년 출진(出陣)하여 진압에 성공했다. 이때 종래의 국가 시민병제도(市民兵制度)를 버리고 빈민을 모아 급여를 주고,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직업군대를 조직하여 차대(次代)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빈민파 마리우스는 102년 게르만인의 테우토네스족을 아쿠아에 섹스티아에서, 101년 킴보리족을 베르켈라에에서 격파하였고 명망(名望)을 높였다. 88~87년 벌족파(閥族派)의 대표인 술라와 투쟁하다 술라에게 패하여 로마를 떠났다. 87년 로마에 귀환한 후, 로마시에서 술라파를 대학살(大虐殺)하고, 86년 7차 집정관직(執政官職)에 복위했으나 얼마 아니하여 병사했다.
그는 중앙 정계에 있어서는 전진(戰陣)에 있을 때처럼 생기를 보이지 못했으나, 민중파 정치가 중 대인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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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호민관 드루수스, 모든 이탈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 제출, 반대파에 암살당함.
이탈리아 동맹시 전쟁 발발.
89년 이탈리아 동맹시 전쟁 종결. 모든 이탈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 부여.
88년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시작
술라, 평화조약 후 귀환. 집정관에 취임.
술라와 마리우스의 대립으로 로마는 내란에 빠짐.
술라
코르넬리우스 가문에 속하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기울어 가난했다. 하지만 활발한 성격과 사람 사귀는 재능이 있었고 계모와 정부(情婦)를 통해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정계에도 진출하였고, BC 107년에는 재무관으로 선출되었다. 로마의 유력한 정치가이자 집정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Caius Marius)의 부장(部將)으로 선발되어, 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와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유구르타를 사로잡음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키는 수훈을 세웠다. 술라는 자신의 상관이자 싸움에만 능했던 마리우스에 비해 외교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BC 104∼BC 101년 킴브리 등 게르만족의 침입을 맞아 또 다시 마리우스의 부장으로 전선에서 싸웠으며, 이때도 그의 외교술을 발휘하여 마르시(Marsi)족과 동맹을 맺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도시국가들과 벌인 전쟁인 동맹시 전쟁(同盟市戰爭)에 나가 승리하였다.
BC 88년에는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 아들과 결혼시켰으며, 자신은 메텔루스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여 유력한 가문과 유대관계를 넓혀갔다. 보수파였던 술라는 선거권과 투표소를 민중 전체에게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였다가 민중파에게 공격을 받아 권력을 상실하고 로마에서 탈출했다. 절치 부심후 로마로 돌아온 술라는 민중파인 호민관 술피키우스를 살해하고 마리우스를 추방하여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술라는 로마의 속주를 침입한 폰투스왕 미트리다테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그리스로 향했는데, 술라가 로마를 비운 사이에 마리우스가 복귀하여 술라는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로마 정규군 양쪽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몰렸지만 미트리다테스 군대를 격파하며 휴전을 맺었고, 휘하 약 3만 5천의 병사를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브린디시에 도착하여 로마 정규군과 2년 동안 전투에서 승리하여 다시 로마의 권력을 차지하였다. 술라는 반대파를 철저하게 처형하였는데 마리우스와 킨나파를 형성하였던 민중파 세력을 몰아내었고 몰수한 반대파의 재산을 노병들에게 분배하였다. 당시 술라의 살생부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도 있었지만 18세에 불과한 청년이라 처형은 모면하였다.
카이사르는 술라에게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여 지중해 연안으로 달아났다.
BC 82년 ‘국가재건을 위한 명목’으로 종신 임기의 독재관(獨裁官)이 되어 호민관 및 민회(民會)의 권한을 축소하고 원로원 지배체제의 회복을 위한 각종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군사력이 권력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와 권사를 분리하였으며 이탈리아 전역의 동맹시민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원로원의 규모와 권한을 확대하여 공화정 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BC 79년 자신이 추진했던 개혁법안들이 확정되자 돌연 독재관을 사임하고 캄파니아에 은퇴하였는데, 이듬해 별장에서 죽었다. 그리스적 교양을 갖춘 인물이며 로마제국의 낡은 법과 제도를 한단계 끌어올린 1급의 장군이자 정치가로도 볼 수 있으나, 그의 인물평에는 이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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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킨나와 마리우스, 로마로 복귀 장악. 술라파 대학살
86년 마리우스 병으로 사망. 킨나 독재 시작
83년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시작
81년 술라, 무기한 독재관에 취임하여 국정개혁 착수
78년 술라가 죽고 폼페이우스 대두
76년 폼페이우스, 스페인 반란 정벌
75년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시작(64년 까지 10년 지속)
미트리다테스 전쟁 88~64
미트라다테스 전쟁 붉은색 - 로마군 진격로, 검은색 - 폰투스군 진격로
73년 스파르타쿠스 반란.
71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스파르타쿠스 반란군 진압.
70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집정관에 취임.
카이사르, 회계감사관에 취임하며 먼나라인 에스파냐에 부임.
69년 클레오파트라,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딸로 태어남.
폼페이우스
로마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권력이 분산되어 서로가 다투던 시기에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를 모으고 양성하여 변방의 작은 도시를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마침 소아시아에서 로마로 복귀하는 술라를 지지하여 그의 충직한 부하 장수로 로마 정계(政界)에 재등장하였다.
기원전 82년 폼페이우스가 25세 때 로마 원로원으로 부터 임페리움의 권한을 받아 로마 정규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었고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술라를 반대하며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의 군사적인 재능이 인정받기 시작했고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고 '마그누스(위대한)'라는 영웅의 호칭을 받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한 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크라수스와 함께 BC 70년에 콘술이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으며 적과의 싸움에서 계속 승리하며 로마제국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나갔다. BC 67년 지중해에서 로마의 상선을 약탈하며 괴롭혔던 해적을 소탕해 버렸고, 또 BC 64년에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BC 63년까지 이집트를 제외한 동방의 대부분을 평정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세입도 크게 늘어났지만 젊은 폼페이우스의 급속한 성장과 인지도는 로마 원로원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BC 60년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3두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원로원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었다. BC 52년에는 단독으로 콘술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폼페이우스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로마제국 최고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독단을 두려워하던 원로원 보수파와 충돌로 카이사르와 대립하게 되었다.
BC 49년 갈리아에서 군사를 이끌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포기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동방으로 이동했다.
BC 48년 8월 9일 그리스 아테네 북쪽 파르사로스의 평원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였고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 믿었던 동방에서 모두 외면받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집트 왕조 또한 폼페이우스를 반기지 않았고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옮겨탄 배에서 암살당하였다.
해적의 토벌, 미트리다테스 전쟁 등 오랜 세월에 걸쳐 로마를 괴롭힌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장군으로서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지만, 보수파이자 공화파인 원로원의 술수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카이사르와의 대립하게 되었다. 그는 전장에서 승리한 명장이었지만 카이사르와 전투에서 한번의 패배를 통해 모든 것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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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폼페이우스,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여 지중해 전역에 팍스 로마나 기초 확립.
크라수스
3두정치에 참여한 한 사람이며, 부호로서도 유명하다.
BC 72년 스파르타쿠스반란을 토벌하고, BC 70년 폼페이우스와 함께 콘술(집정관)로 취임하였다. BC 60년부터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제1회 3두정치를 시작하였으며, BC 55년 다시 콘술이 된 후 속주(屬州)장관으로서 임지(任地) 시리아를 얻었으나, BC 53년 파르티아인(人)과의 싸움에서 패사(敗死)하였다. 그가 죽은 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내전(BC 49~BC 45)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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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폼페이우스, 오리엔트 평정. 지중해 전역이 로마의 패권하에 들어옴.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100?~B.C. 44)로, 영어명의 '시저'이다.
인척 관계 때문에 평민파에 속한 그는 B.C. 60년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같이 제1차 삼두 정치를 행하였다. 하지만 크라수스가 전사한 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심하게 대립하였다.
이에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집트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위에 앉혔으며, 그 뒤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하고 로마에 개선하여 천하 통일을 완수하였다.
독재 정치 가운데서도 곡물 분배 수익자의 제한, 빈민 · 노병의 해외에서의 식민지 건설, 배심 제도의 개정, 태양력의 제정 등 대사업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는 전제 정치를 꾀한다는 의심을 받아 브루투스 등의 공화파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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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카이사르, 호민관 라비에누스의 협력으로 최고 제사장에 취임.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키케로, 집정관에 취임. 옥타비아누스가 태어남.
61년 카이사르, 먼나라인 에스파냐 총독으로 부임.
60년 카이사르, 귀국하여 이듬해 집정관에 출마. 폼페이우스·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정치 결성
좌로부터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59년 카이사르, 집정관에 취임.
카이사르 율리우스 농지법을 민회에서 가결하여 원로원파에 타격을 가함.
북이탈리아 · 일리리아 · 남프랑스 속주 총독이 됨. 총독으로 나가 있는 동안 로마에서 수족처럼 움직여 줄 사람으로 폼페이우스의 오른팔인 가비니우스를 이듬해 집정관에, 클로디우스를 호민관에 포진시킴.
카이사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킴.
카이사르의 성장
카이사르는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의 자손을 자칭하는 유서깊은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서는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외가 쪽이 로마 귀족사회에 큰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평민 출신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카이사르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하였다.
카이사르의 청년 시절에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와 원로원을 중심으로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는 벌족파가 서로 세력을 다투었다. 민중파의 대표자 격은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 킨나였으며 벌족파(술라파)의 수장은 술라였다. 민중파를 지지했던 카이사르는 한때 술라파가 득세했을 때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였으며 술라를 피해 로마 밖으로 도망나가 있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술라가 죽은 후 로마로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그의 정치 생활이 시작되었다.
1차 삼두정치로 집정관에 오르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온 후 청년시절 받은 좋은 교육과 로마 밖을 떠돌며 얻은 경험, 그리고 타고난 언변과 매력적인 외모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첫 번째 아내 코르넬리아가 죽은 후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면서 술라파의 지지까지 얻으며 로마의 고위관직들을 포섭해 나갔다.
카이사르는 민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출중하였으며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서 정책들을 내놓아 인기몰이를 하였다. 또한 로마 속주에 근무할 때는 주변국과의 전투에서 차근차근 그 전과를 쌓아 나가 안팎으로 대정치가로 가는 발판을 닦았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콘술)에 오를 것을 희망했지만, 카이사르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원로원은 그가 집정관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카이사르는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성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원로원의 방해를 이기고 결국에는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를 1차 삼두정치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실현을 위해 폼페이우스와 거래를 하였으며 그의 외동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국유지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에 오른 또 한명의 집정관 비불루스를 무력화시키고 퇴역군인과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갖가지 정책들을 실현해 나갔다. 카이사르의 독주는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불안을 초래하였으며, 귀족세력과 카이사르의 갈등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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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카이사르, 갈리아 총독에 부임. 갈리아 전쟁 1년째 브장송에 월동 숙영지 설치
키케로, 그리스로 망명
57년 갈리아 전쟁 2년째 오를레앙에 월동 숙영지 설치
삼두정치에 대한 원로원파의 반격
56년 갈리아 전쟁 3년째 노르망디 지방에 월동 숙영지 설치
카이사르 · 크라수스 · 폼페이우스의 루카 회담
55년 갈리아 전쟁 4년째 아미앵에 월동 숙영지 설치. 카이사르,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遠征) 감행
루카 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에 취임
마르스 광장에 폼페이우스 극장 완성
크라수스, 임지인 시리아로 떠남
54년 갈리아 전쟁 5년째 아미앵에서 월동. 카이사르,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측근인 발부스와 오피우스를 통해 포로 로마노 확장사업에 착수
원로원파와 삼두정치파의 대치로 정국이 혼란에 빠짐
포로 로마노
53년 갈리아 전쟁 6년째 독일 서부와 디종 부근 및 상스에 월동 숙영지 설치
크라수스, 파르티아 원정 개시
52년 갈리아 전쟁 7년째 아르베르니 족장인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에 맞서 궐기
알레시아 공방전. 베르킨게토릭스, 항복하고 포로가 되다
51년 갈리아 전쟁 8년째 '갈리아의 로마화'에 착수
클레오파트라,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됨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집정관을 역임한 후 카이사르는 로마의 속주였던 프랑스 남부지역(일부 갈리아 지역)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지역 전체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갈리아 지역은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총 7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다. 갈리아 정복으로 켈트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리고 급속도로 로마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일부 켈트족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섰지만 대부분의 켈트족들은 선진적인 로마 문명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갔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시 자신이 참전했다는 표시로 늘 진한 붉은색 망토를 입고 전투에 나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비록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이후에는 보복적인 정치보다는 복속한 켈트족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켈트족에게 정치적 자율권을 주고 농경을 전파해 경제를 일으켰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켈트족은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화하기도 해 반발을 없애고 충성을 다짐받았다.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에게 여러 면에서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정복에서 얻은 약탈로 부유해졌으며 오랫동안 변방지역을 괴롭혀왔던 켈트족을 복속시켜 로마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더불어 그는 7년 동안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군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어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복속된 갈리아 켈트족들의 충성과 넓은 영토도 카이사르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문필에도 재주가 있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기를 <갈리아 전기>로 남기기도 하였다.
갈리아에서의 승승장구로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로부터 더욱 경계를 받았다. 협의롤 통해 로마 정치를 이끌어가던 귀족들은 카이사르의 독주가 장차 귀족권을 약화시키고 1인 독재의 시대를 불러 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카이사르를 견제하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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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원전 58~51)
50년 카이사르, 북이탈리아 속주로 돌아오다
원로원파, 카이사르의 부장 라비에누스에게 접근. 카이사르는 호민관 쿠리오를 앞세워 원로원파에 대항.
카이사르 군단에 대한 해산 명령을 둘러싸고 카이사르파의 신임 호민관 안토니우스와 원로원파의 정치 투쟁이 계속됨
기원전 49년 당시 카이세르와 폼페이우스 세력 상황
49년 1/7 원로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 결의.
1/12 카이사르,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주사위는 던져졌다!") 리미니에 입성.
호민관 안토니우스 및 카시우스가 합류.
루비콘 강
1/17 폼페이우스 로마를 탈출. 키케로에 이어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도 탈출.
로마는 대혼란에 빠짐. 카이사르와 결별한 라비에누스, 카푸아에서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
2/25 폼페이우스 브린디시까지 후퇴
3/17 폼페이우스 그리스로 탈출.
카이사르, 이탈리아 반도를 사실상 제패하고 로마로 진군
3/20 로마로 강행군하던 카이사르, 포르미아의 별장으로 키케로를 찾아가 회담을 함.
12/2 카이사르, 로마에 입성. 독재관에 지명됨. 반술라파의 자손에 대한 공직추방령을 해제,
각 속주 총독에 카이사르파를 임명.
새 화폐 발행을 비롯한 경제정책을 실시.
12/13 폼페이우스를 추격하기 위해 로마를 떠남.
48년 카이사르, 집정관에 선출됨
8/9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 완패, 이집트로 도망감. 카이사르, 폼페이우스를 추격.
안토니우스를 부독재관인 기사단장에 임명하여 로마 본국의 통치를 맡김.
10/4 카이사르, 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만남 - 카이사르를 유혹하는 클레오파트라 7세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려 했던 것은 그를 지지했던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미 전세가 카이사르 쪽으로 기운 것을 보고 폼페이우스를 배신했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이집트로 건너와 정적이긴 하지만 옛 친구이자 한때는 사위이기도 했던 폼페이우스의 시신을 본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을 다투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내쫓고 그녀가 권력을 독점하도록 도왔다. 그 와중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둘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폼페이우스라는 강력한 정적이 사라지고 귀족권이 약화된 로마로 돌아가면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아들을 빈객으로 대동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와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꿈은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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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카이사르, 『내전기』 전3권 완성.
6월 카이사르, 소아시아에 상륙, 카파도키아 지방의 젤라에서 파르나케스를 격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9월 카이사르, 로마에 개선하여 5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됨.
46년 카이사르, 탑수스 회전에서 스키피오군을 대파.
스키피오와 아프라니우스는 살해됨. 카토도 자살하다.
7월 카이사르 로마에 귀환하다.
8월 5일부터 네 차례의 개선식 거행. 율리우스력(태양력) 채택. 국립 조폐소를 창설하다.
45년 카이사르, 에스파냐 속주에서 반카이사르파가 봉기하자 에스파냐로 떠나 반대파 격파
팍스 로마나를 확립하고 민생을 풍족하게 하고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기 위한 전면 개혁에 착수.
44년 1월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에 안토니우스 취임.
2월 원로원과 민회, 카이사르를 종신 독재관에 임명.
3/15 카이사르, 원로원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 당함.
3/16 옥타비아누스(당시 18세)를 양자로 지명(제1 상속인) - 카이사르 유언장 개봉
로마에 체류중이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로 떠남
3/17 안토니우스가 소집한 원로원 회의에서는 암살자들의 형사 책임은 추궁하지 않고 요직 인사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정책을 계승하기로 결정.
3/18 카이사르의 유해가 화장되었으며. 암살자들을 규탄하는 민중의 분노가 고조됨
카이사르의 암살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불안이 귀족 전체에 번지면서 카이사르의 독주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폼페이우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돌아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주도가 되어 카이사르의 암살 계획이 세워졌다. 이 계획에는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데시무스 브루투스도 끼어 있었다.
운명의 날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회랑 앞에서 14명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옷섶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무차별적으로 카이사르를 찔렀다. 카이사르는 총 23곳에 상처를 입고 토가자락을 휘어감은 채 쓰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쓰러진 장소는 그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동상 앞이었다.
쓰러지기 직전 카이사르는 암살 귀족들 사이에서 총애하였던 두 명의 브루투스를 보았다. 죽기 직전 그는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신음을 뱉었다. 카이사르가 말한 브루투스는 두 명의 브루투스 중 데시무스 브루투스였을 것이라는 것이 후세 학자들의 추측이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데시무스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이어 2번째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을 한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본 데시무스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고개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민중의 분노는 거셌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암살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성난 민중들에게 공격당했다. 암살파와 카이사르파는 종신독재관을 제외하고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기로 합의하였다. 카이사르는 화장되었는데, 그의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가 버렸다. 그 때문에 카이사르는 무덤조차 없다.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하게 되고 암살파들과의 내전에 돌입하였다. 키케로, 브루투스 등 암살파가 모두 제거된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카이사르가 마련한 1인 독재 정치는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획득한 후 초대 황제가 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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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8월 옥타비아누스, 집정관에 선출되다.
또한 카이사르의 양자 입적을 공인받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되다.
옥타비아누스 가계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서민 출신이나 그의 어머니가 카이사르의 질녀로 아버지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보호를 받았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그의 유언장에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음을 알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다. 카이사르를 따르는 병사들을 장악하여 BC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제2회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시작하면서 반대파를 추방하였다.
BC 42년에는 필립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세계를 3분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를 탈락시킨 후부터는 안토니우스와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BC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후 패권을 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장군으로서의 역량은 빈약하였으나 아그리파를 비롯하여 여러 부장의 조력과 나아가 전 이탈리아, 그리고 전체 속주(屬州)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100년에 걸친 공화정 말기의 내란을 진정하였다. 질서회복 후에는 비상대권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돌려주었고, BC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았으며,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제정(帝政)을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숙적인 파르티아를 무찔렀지만, 9년에 토이토부르거전투에서 게르만 군대에게 패배하여 3개 군단을 잃고 나서 수세로 변하였다. 한편, 신분질서를 다시 수립하고, 풍기 숙정 등을 단행한 것 외에도 치안과 식량 문제에 마음을 써서 로마시(市)의 질서를 정비하였다. 또한 대규모 건축사업도 일으켜,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변경시켰다고도 한다.
특히 내정의 충실을 기함으로써 41년간의 통치기간 중에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후계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후 티베리우스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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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볼로냐에서 안토니우스 · 레피두스 ·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되다.
27일에 열린 민회가 5년 기한으로 이를 승인하여,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 체제는 완전히 소멸
11/28 제1차 '살생부'가 발표되고 숙청의 태풍이 몰아치다.
12/7 키케로가 살해되다.
42년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결의하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그리스로 출동하여 필리피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연합군을 격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둘 다 자결하다.
필리피 회전 후, 옥타비아누스는 서부,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분담하기로 합의하고, 서쪽과 동쪽으로 갈라지다.
41년 안토니우스,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클레오파트라와 애인관계가 되다.
40년 옥타비아누스, 외교담당으로 마이케나스를 기용하다.
36년 옥타비아누스, 아그리파와 함께 일리리아 제압에 전념하다.
34년 제2차 삼두정치의 종결. 안토니우스,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 거행.
33년 옥타비아누스, 일리리아 전쟁 개선 기념으로 율리아 수도와 옥타비아 회랑을 건설하고, 공공 건축물을 보수하다.
31년 3월 옥타비아누스, 모든 전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가다.
9월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다.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치다.
악티움 해전 : 붉은색 - 옥타비아누스 해군, 푸른색 - 안토니우스 해군
30년 7/31 안토니우스, 자살을 기도. 이튿날 사망하다
8/1 옥타비아누스,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다
카이사리온은 살해되고,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다
29년 8월 옥타비아누스의 웅장하고 화려한 개선식에 로마 시민 열광하다
9월 옥타비아누스, 신격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신전을 포로 로마노에 짓겠다고 공표하다
28년 옥타비아누스, '황제묘' 건설에 착수
원로원을 재편성하여 1천 명이 넘었던 의원수를 다시 600명으로 줄이다
27년 1/13 옥타비아누스, 공화정 체제 복귀를 선언
1/16 원로원,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하기로 결의
26년 아우구스투스, 이베리아 반도의 완전 제패에 착수
24년 아우구스투스, 로마 세계의 서부 재편성을 끝내고 3년 반 만에 로마로 귀환
23년 아우구스투스, '호민관 특권'을 요구하여 원로원의 승인을 받다. 화폐제도 개혁에 착수
22년 아우구스투스, 밀 확보량이 부족하여 위기에 빠진 수도 로마에 사재를 털어 밀을 공급하다
19년 로마의 국민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사망하다
18년 아우구스투스,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 법' 및 '정식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 법'을 제정
13년 아우구스투스, 레피두스의 후임으로 최고 제사장에 선출되다
9년 '평화의 제단' 완공되다. 엘베 강과 도나우 강을 잇는 방어선이 성립되다
4년 친로마파인 유대 왕 헤롯이 사망하다
2년 아우구스투스, 딸 율리아를 '간통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하다
1년 원로원, 아우구스투스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수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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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양자)를 후계자로 결정하다
또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게르마니쿠스를 지명하다
13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에게 '최고사령권'을 수여하다
그후 게르마니아 전선은 게르마니쿠스가 담당하다.
14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 통치자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국세조사를 실시하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마무리하다. 나폴리에 머물고 있던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나다.
9/17 티베리우스, '제1인자'가 되어 로마 제2대 황제에 즉위하다.
17년 5/26 게르마니쿠스, 개선식을 거행하다. 다음 임지가 오리엔트로 결정되어 떠나다.
티베리우스, 통틀어 28년에 걸친 게르마니아 전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고 라인 강 방위체제를 정비
19년 10/10 게르마니쿠스, 사망하다.
20년 시리아 속주 총독 피소가 게르마니쿠스에게 불복종한 죄로 재판을 받고 자살하다.
21년 타쿠팔리나스가 이끄는 북아프리카의 반란이 기세를 더하다.
갈리아 동부에서 고금리에 반발한 반란이 일어나다.
로마의 라인 강 방위 군단이 즉시 진압에 나서다. 시리아 속주 총독 퀴리누스가 사망하다.
22년 티베리우스, 아들 드루수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부여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하여 동의를 얻다.
23년 드루수스 급사하다.
27년 티베리우스, 카프리 섬에 은둔하다.
29년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인 아그리피나와 맏아들 네로 카이사르의 유죄가 확정되어 각각 벤토테네 섬과 폰차 섬에 유배하기로 결정하다.
31년 1/1 아그리피나파 소탕작전의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하다.
10/18 티베리우스,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서 세야누스를 국가반역죄로 고발하다.
원로원은 사형판결을 내리고 그날로 집행하다. 유배된 아그리피나가 벤토테네 섬에서 사망하다.
33년 둘째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사망하다.
속주에서 고리대금을 하고 있던 원로원 의원이 고발당한 것을 발단으로 한 금융 불안과 땅값 하락으로 로마에 일대 금융위기가 발생하다.
티베리우스, '공공자금 투입'을 비롯한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아 위기를 일단 진정시키다.
37년
3/16 티베리우스, 나폴리 만 서쪽 끝의 미세노 곶에 있는 별장에서 사망하다. 향년 77세.
3/18, 게르마니쿠스의 셋째아들 칼리굴라, 제3대 황제에 즉위하다.
9/27 칼리굴라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존칭이 주어지다.
39년 국가 재정 파탄이 명백해지다.
41년 1/24 칼리굴라,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에게 살해되다. 향년 28세. 아내 카이소니아와 딸도 동시에 살해되다.
같은 날,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에게 칼리굴라가 갖고 있던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하다.
클라우디우스, 제4대 황제에 즉위하다. 클라우디우스, 알렉산드리아를 정상화하다.
43년 클라우디우스,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로마군과 합류하여 콜체스터에 입성하다.
브리타니아 속주화에 대한 기본정책을 결정하다.
48년 클라우디우스의 처 메살리나, 중혼죄를 짓고 클라우디우스의 비서관 나르키소스의 명령으로 살해되다.
49년 클라우디우스, 질녀인 아그리피나(칼리굴라의 누이동생)와 네번째로 결혼하다.
50년 아그리피나, 아들 도미티우스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삼다.
그후 도미티우스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가 되다.
54년 10/13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하다. 향년 63세. 같은 날, 네로가 근위병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받다.
원로원, 네로에게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하다. 네로, 16세의 나이로 제5대 황제에 즉위하다.
네로, 파르티아,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점령하고 볼로가세스의 동생 티리다테스를 왕위에 앉히다.
55년 네로, 어머니 아그리피나에게 반항하기 시작하다.
59년 3/21 네로가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하다.
60년 5년마다 열리는 '네로 제전'이 처음으로 거행되어 성황리에 끝나다.
62년 네로의 근위대장 부루스가 사망하다. 세네카가 은퇴하다.
네로,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포파이아 사비나와 결혼하다. 옥타비아를 유배형에 처한 뒤 살해하다.
63년 코르불로와 파르티아 왕제인 티리다테스가 직접 만나 회담하다.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 왕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갈 것을 승낙하다,
64년 네로, 나폴리의 야외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하다.
7/18 대경기장 관람석 밑에 있는 가게에서 난 불이 번져, 아흐레 동안 로마의 대부분을 태우는
대화재가 일어나다. 네로는 화재 진압, 이재민 구제, 화재 후의 재건대책을 진두지휘하다.
네로, 화재 이후의 재건과 도심 개조를 위한 재원 확보를 겸하여 87년 만에 화폐개혁을 실시하다. 네로, 방화죄 및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 등으로 기독교도를 체포하여 처형하다.
로마 대화재
65년 연말에 20∼30명이 가담하여 네로 암살을 획책한 '피소 음모'가 발각되다.
가담자로 의심받은 세네카도 자살하다.
티리다테스,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포로 로마노에서 네로에게 아르메니아 왕관을 받다.
그후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반세기 동안 평화가 계속되다.
66년 청년 장교들이 네로를 죽이고 코르불로를 제위에 앉히려 한 '베네벤토의 음모'가 발각되다.
네로, 가수로서의 기량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리스 여행을 떠나다.
68년 원로원, 에스파냐에서 궐기한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다.
로마 시민들이 '식량'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것을 계기로 네로에 반대하여 궐기하다.
원로원,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다.
6대 황제 – 갈바
7대 황제 – 오토
8대 황제 – 비텔리우스
갈바의 살해 -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전투 - 오토의 자살 -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충돌 -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라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68년 한 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 해를 '네 황제의 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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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네로 로마 교외의 은신처에서 자살하다.
내란 발발, 베스파시아누스가 평정하고, 제9대 황제 즉위하다.
로마 제국의 두 번째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의 자결로 단절된 뒤, 베스파시아누스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로 이어진 내란을 종결시키고 서기 69년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으며, 티투스가 1년 만에 죽은 후에는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암살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을 자가 없자 네르바가 황제로 추대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왕조의 존속기간은 30년 정도로 그리 긴 편은 아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 모두 내란을 끝내고 로마 제국을 재건한 황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도미티아누스도 고대에는 평판이 나빴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재평가[1]되고 있다. 바꿔 말해서 로마의 최전성기로 가는 기틀을 닦은 왕조였다
10대 황제 – 티투스
11대 황제 – 도미티아누스
12대 황제 – 네르바(도미티아누스 살해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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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트라야누스, 제13대 황제에 즉위하다.
101년 트라야누스 황제, 제1차 다키아(오늘날 루마니아) 원정 개시(∼102).
105년 트라야누스 황제, 제2차 다키아 원정 개시(∼106).
117년 하드리아누스, 제14대 황제에 즉위하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쌓아 국경 방위에 힘쓰다.
'하드리아누스' 성벽
AD 117년 로마제국 최대의 영토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 통치 시작.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즉위하다.
194년 세베루스 황제(20대), 제1차 페르시아 원정.
197년 세베루스 황제, 제2차 페르시아 원정.
211년 카라칼라, 황제에 즉위하다.
212년 카라칼라 황제(21대), 로마 제국 영토 안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칙령을 내리다.
216년 카라칼라 황제, 카라칼라 욕장 건설.
로마 군인 황제 시대(235-284년)
세베루스 황제가 군대에 암살 당한 후 50년간 25명의 군인들이 황제에 즉위한다
내전, 외부의 침략, 역병, 경기 침체로 극도의 혼란과 위기의 시대가 된다
이때 로마 제국은 3개로 나뉘어진다
1.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의 로마 제국
2. 갈리아 브리타니아의 갈리아 제국
3.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팔미라 제국으로 3분된다
이후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270-275년)가 3분된 로마 제국을 다시 통합하고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군인 황제 시대의 종말을 가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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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즉위하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43대), 제국을 넷으로 분할하여 두 정제(正帝)와 두 부제(副帝)가 각각 분할 통치하게 함.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막시미아누스 –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갈레리우스 – 발칸반도 서부
디오클레티아누스 – 발칸반도 동부, 이집트, 서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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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기독교도 대박해(∼304).
312년 콘스탄티누스, 서방 황제에 즉위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44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다.
밀라노 칙령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제국을 재통일하고 단독 황제가 되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하고 교회 내 분쟁을 조정하다.
330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이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됨.
379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즉위하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50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뉨.
○ 서로마제국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둘째아들 호노리우스(52대), 황제 즉위
401년 북이탈리아에 침입한 서고트족을 격파, 같은 해부터 궁정을 로마에서 라벤나로 옮김.
410년 서고트족, 로마 약탈.
418년 서고트족, 이베리아 반도에 왕국 건설.
429년 반달족, 북아프리카를 정복하여 왕국 건설.
455년 반달족, 로마 약탈.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62대)를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폐위시킴.
서로마 제국 멸망.
서로마 제국 멸망
○ 동로마제국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맏아들 아르카디우스(52대), 황제 즉위.
527년 유스티니아누스(61대), 황제 즉위. 로마 영토 회복에 힘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전성기를 누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전성기
726년 황제 레옹 3세(76대), 성상 금지령 발포.
1453년 콘스탄티노플,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받고 콘스탄티노스 11세(129대) 황제를 끝으로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멸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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