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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기는 260년간으로 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과 유대의 마카비 혁명, 하스몬 왕조, 헤롯 왕조 그리고 로마 제국의 유대 통치가 들어가 있다.
제1장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
1. 북이스라엘의 역사
BC 931년부터 722년까지 존재했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혈통의 순수성을 내세울 수 없는 ‘사마리아인’(samaritan)을 만든다.
BC 732년 앗수르의 티글랏 빌레셀 3세는 북이스라엘 마을 전체를 점령하여 통째로 주민들을 앗수르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림 - 혼혈족 사마리아인의 역사가 시작됨
BC 722년 티글랏 빌레셀 3세의 아들 살만 에셀 5세는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3년간 공성전 끝에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정복(왕하 17:5-6)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
BC 722년~705년 까지 사르곤 2세는 총독을 파견하고 혼혈 정책을 강화시킴.
2. 남유다의 역사
BC 609년 애굽 왕 느고가 앗수르의 남은 군대를 모아 부상하는 바벨론을 막고자 원정을 떠날 때 요시아 왕은 전략적 요충지인 므깃도에 출정했다가 사망함
(1차 갈그미스 전투, 애굽 vs 바벨론 전투)
BC 606년 애굽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패함
바벨론의 느부갓네살(605-562)왕은 예루살렘으로 처들어와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유능한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잡아가게 됨(1차 포로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함됨)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모든 지역이 바벨론 땅으로 됨.
BC 598년 애굽으로 원조를 요청했던 남유다의 왕 여호야김이 죽고 18세 된 여호야긴이 왕에 오름. 이때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선지자 에스겔과 핵심브레인 1만명을 잡아감(2차 포로 왕하 24:11-16).
이어 여호야긴의 삼촌이자 요시야의 셋째 아들 맛다니야를 바벨론 식으로 시드기야로 이름을 바꾸고 남유다 왕으로 앉힘.
시드기야는 애굽에 원조를 요청하고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조언을 거절하였음.
바벨론은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포위함. 이때 기근이 심해짐(왕하25:2-3).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포위한 지 18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남유다 멸망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결박 당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감(3차 포로)
멸망한 유다 땅은 바벨론이 지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주가 됨.
바벨론이 지명한 첫번째 총독은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였음.
총독의 일을 시작한지 2개월만에 이스마엘에 의해 암살당함.
이스마엘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예레미야까지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 함(왕하 25:26).
2차 포로로 끌려갔던 여호야긴 왕은 끌려간지 37년째 풀려나 부족함 없는 대접 받음(왕하 25:27-30).
바벨론 포로들은 이주의 자유와 집의 소유를 허락 받았지만 포로의 슬픔은 존재(노래 : 바벨론 강가에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지 못하는 대신 차츰 장로들의 지도 아래 종교적 공동체를 유지하고, 회당을 짓고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고 서기관들은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함(디아스포라 유대인)
한편 애굽으로 내려간 후손들은 헬라 제국 시대 프톨레미 왕조가 유대를 통치할 때 70인역이 만들어지고 이후 노예에서 해방되어 300년만에 귀환하게 됨.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의 70년간 포로 생활은 광야 생활 40년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다시 맺고 재교육을 위한 기간이었음(렘 31:31-34)
3. 70년 만에 페르시아로부터 돌아온 유대인
페르시아 고레스 왕(키루스 2세)이 바벨론 성으로 진격했을 때 마르둑 제사장들과 바벨론 백성은 성문을 열고 고레스를 해방자로 맞이함. 바벨론은 유대에서 끌려온 포로들을 다른 나라에서 끌려온 포로들과 구분하기 위해 ‘유대인’이라 블리움.
이들은 월등한 민족으로 살아남았고 다니엘,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에스라, 에스더, 느헤미야 같은 인재를 배출 하였음(렘 29:4-10)
따라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소망을 주기 위함이었음(29:11-14)
BC 538년 70년 만에 바벨론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화려했던 바벨론 성은 모두 파괴되었고 성벽은 허물어버렸으며 100개나 되었던 청동문은 다 녹여져 버림.
BC 538년 고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서방화 정책을 추구하며 70년 만에 유대인의 귀환 명령을 내리고 페르시아의 국고로 예루살렘의 성전까지 건축하게 됨(대하 36:22-23).
고레스는 귀환 명령을 내린 1년 후 페르시아의 지방화 정책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 약탈해갔던 성전 기물을 반환하여 줌(스 1:3-4:7).
BC 538년 1차 귀환에는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가 있었고 BC 458년 2차 귀환에는 학자 에스라가 있었으며 BC 444년 3차 귀환은 느헤미야가 있었다
예루살렘으로의 1차 귀환과 2차 귀환 사이의 사건이 에스더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예레미야의 편지와 에스겔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회당을 통해 율법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기에 타 민족과는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엄격한 질서와 책임감을 강조하자 느헤미야를 두려워한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일행을 데리고 사마리아로 도망해 버린다
이후 사마리아로 도망한 도비야 일행이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성경의 필사본을 남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하며 신구약 중간기 400년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보내신다.
제2장 헬라 제국 시대
헬라 제국은 260년간 헬레니즘을 제국 전체에 퍼뜨리며 헬라어를 사용하게 함.
헬라어로 70인역 번역하여 구약 성경의 세계화를 이루게 됨.
헬레 제국이 유대를 통치하면서 유대에는 마카비 혁명 후 하스몬 왕조와 헤롯 왕조의 등장유대에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들이 등장.
1.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
고레스왕은 바벨론 제국의 정책이었던 중앙 집중화를 채택하지 않고 지방화 정책을 펼쳐 여러 나라에서 끌어왔던 포로들을 돌려 보냄.
이는 광활한 제국에서 각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시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데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3대 왕 다리우스 1세는 2번에 걸쳐 그리스를 침략하러 갔다가 모두 진다
BC 492년 1차 전투 - 폭풍을 만나 제대로 공격 못하고 퇴각
BC 490년 2차 전투 -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에 패배
페르시아의 4대 왕인 크세르크세스(히브리 표현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다스림.
BC 480년 3차 전투 -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에 패배
아하수에르는 4년간 그리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재위 7년째 에스더를 왕비로 맞이함.
BC 444년 페르시아의 5대 왕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아하수에로 아들)가 왕일 때 느헤미야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됨
BC 331년 페르시아의 7대 왕 다리우스 3세 때에 그리스 북쪽에 있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제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됨.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
2.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전쟁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아테네는 해군이 강했고, 스파르타는 육군이 강했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해군력이 강했던 아테네에게 큰 공이 돌아 감.
아테네가 항구도시인 고린도(코린트)를 지배하려 하자 스파르타를 비롯한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일으킴.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21)
- 스파르타의 아테네 침공.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아 스파르타의 승리.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421-415)
- 양측이 휴전을 맺고 전쟁 이전 상태로 회복.
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415-404)
- 아테네가 시칠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원정군을 보냄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남.
이때 스파르타는 과거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끌어들여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이기게 됨. 이 전쟁의 결과는 지중해 지역에서의 그리스 문명의 종말을 가져 오게 만듬.
펠로폰네소스 전쟁 결과 -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권력이 이동하다가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 의해 짓밟히게 됨.
세계 역사는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헬라 제국이라는 새로운 강자앞에 모두 무릎 끊게 됨.
3. 알렉산더 제국
①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BC 356~323)의 등장
알렉산드로스는 BC 356년 필리포스 2세와 에페이로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고 그의 영향으로 철학과 의학, 과학적 탐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BC 340년에 16세의 나이에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움을 공격하는 동안 마케도니아 통치를 맡아 트라키아(트라케) 부족인 마이디족을 무찔렀으며 2년 뒤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동맹국들을 격파한 카이로네아 전투와 테베의 신성동맹을 격파할 때도 참여하였다
BC 339년 필리포스 2세는 올림피아스와 이혼했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의 새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분란을 일으킨 뒤 어머니와 함께 에페이로스로 달아났다가 일리리아로 갔다.
BC 336년에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자 군대의 지지를 받아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즉시 경쟁자와 반대 세력들을 필리포스 2세 살해 조종 혐의를 씌워 제거했다.
BC 336년 남쪽으로 진군해 불안정한 테살리아를 되찾고 코린트에서 열린 그리스 동맹회의에서 소아시아 침공을 수행할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BC 335년 봄에는 트라키아로 진군했으며 트리발리인을 격파하고 도나우 강을 건너 게타이인을 분산시키는 한편, 마케도니아를 침략한 일리리아인들의 연합군을 무찔렀다.원정 기간 동안에 테베 민주주의자들이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뜨리며 반란을일으켰고 아테네를 제외한 다른 그리스 국가들도 테베를 동조하고 지지했다.14일 만에 알렉산드로스는 일리리아의 펠리온(알바니아 코르처 근처)에서 테베까지 386㎞를 행군하여 테베 도시를 철저히 파괴한다.
그 와중에서 6,000명이 살해당하고 남은 생존자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그러자 주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잔혹한 조치에 겁을 먹고 복종하였으며 코린트 • 칼키스 • 카드메아(테베 성채)등 에는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배치한다.
② 페르시아 원정의 시작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를 때부터 페르시아 원정을 결심하고 있었다. BC 334년 봄에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때부터 충성해온 안티파트로스를 왕위 대리자로 마케도니아에 남겨두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 원정길에 나선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약 3만 명과 기병 5,000여 명(그 가운데 1만 4,000명 가량이 마케도니아인이었음), 그리고 그리스 동맹에서 파견한 7,000명 가량의 연합군을 직접 지휘했다.원정군은 측량사 • 기술자 • 건축가 • 과학자 • 궁정관리 • 역사가 들을 대동했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처음으로 일리움(트로이)을 방문하였고 이어 마르마라 해 부근의 그라니코스(코카바스) 강에서 페르시아군과 최초로 마주쳤다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의 계획은 알렉산더가 강을 건너도록 유인하여 육박전으로 그를 살해하는 것이었는데 페르시아군의 전열이 깨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가 이긴다
이때 다리우스 3세 수하의 많은 그리스 용병들이 학살당했으며 2,000명의 생존자들은 사슬에 묶여 마케도니아로 송환되었다.
소아시아 서부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당하거나 자진해서 항복하였다.
③ 소아시아와 이소스 전투
BC 334년 겨울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서부를 정복하고 리키아와 피시디아의 산악 부족들을 복속시켰으며 BC 333년 봄에는 해안도로를 따라 페르가로 진군했다
이어 고르디움에서 앙키라(앙카라)로 진격하고 카파도키아와 실리시아 관문(퀼레크보아지)을 통해 남쪽으로 진출했다.BC 333년 가을 알렉산드로스가 미리안드로스(이스켄데룬)에 진지를 치고 있을 때 얼마 떨어지지않은 북쪽의 이수스에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데 페르시아군은 대패하고 다리우스 3세는 가족을 포기한 채 알렉산더의 수중에서 도망쳐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로가 된 여자들을 정중하게 대접하도록 했다. (이소스 전투)
④ 지중해 해안지방과 이집트의 정복
BC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시리아와 페니키아까지 진군해 들어갔다. 페니키아 도시들인 마라토스와 아라도스는 저항 없이 수중에 들어왔다.
그는 파르메니오를 앞서 파견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다리우스 3세의 군자금을 비롯한 풍부한 전리품을 확보하도록 했다.다리우스 3세가 평화 협상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응답으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역사적 과오를 조목조목 밝히면서 자신을 아시아의 군주로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오만한 답장도 보낸다. 그후 비블로스(주바일)와 시돈을 쉽게 점령
하였으나 섬도시 두로(티루스)에서는 강력한 저항에 7개월 동안이나 부딪혔다.
그러나 결국 BC 332년 7월 티루스를 함락시킨다.
티루스 점령은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과였다.
BC 332년 11월에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도착했다.
멤피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어로 '아피스'라고 하는 하피 신에게 이집트의 신성한 황소를 제물로 바치고 파라오들의 전통적인 이중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겨울 동안 이집트의 행정을 재편하면서 그는 이집트인 총독들을 고용하고 반면에 군대의 지휘는 별도로 마케도니아인이 맡도록 했다.
그리고 나일 강 서쪽 지류 전망 좋은 지대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하도록 하고 로도스 출신 건축가 데이노크라테스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는 이집트 정복으로 지중해 동부해안 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하게 장악했다.BC 331년 봄 그는 티루스로 돌아와 마케도니아인 부하를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BC 331년 7월 알렉산드로스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타프사코스에 있었다.
그는 강을 따라 바빌론으로 내려가는 직접적인 통로를 택하지 않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가로질러 티그리스 강을 향해 나아갔다.
다리우스 3세는 유프라테스 강 건널목에 파견된 마자이오스 휘하의 선발대로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받고 그를 가로막기 위해 티그리스 강 위쪽으로 행군했다.전투는 니네베와 아르벨라 사이의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치러졌다. - 가우가멜라 전투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기병대와 그리스 용병대를 이끌고 메디아로 피신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시와 그 지방 전역을 점령했다.
항복한 페르시안인 마자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인 군사령관과 함께 통치권을 행사하는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받았으며 이례적으로 주화를 만드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하여 페르시아 총독 아리오바르자네스가 지키는 페르시아 관문 고개를 우회하여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였고 상징적인 의식으로 크세르크세스 궁전을 불태웠다.
BC 330년 봄에 알렉산드로스는 북쪽의 메디아로 진군해 수도인 엑바타나를 점령했으며
여름에는 라가이(테헤란 근처 라이)와 카스피 해 관문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카스피 해 관문에서 박트리아 총독 베소스가 다리우스 3세를 칼로 찔러 죽이고 찬탈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시신을 페르세폴리스의 왕실묘지로 보내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매장하도록 했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 마자이오스를 총독으로 임명한 데서 드러나듯이 정책적으로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을 연합해 지배세력을 구축하여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는 구상을 하게 된다.
⑤ 아시아 원정
다리우스 3세가 죽자 알렉산드로스가 왕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장애물이 없어졌다. BC 330년 로도스에서 발행한 한 명문(銘文)에서는 그를 '아시아(즉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라고 불렀으며 그 직후부터 아시아에서 발행한 주화에는 왕의 칭호가 덧붙었다.이제 그의 동방진출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카스피 해 지방으로 가서 드라카르타를 점령하고 엘부르즈 산맥에 거주하는 산악부족인 마르디족을 제압했다. 아리아에서 사티바르자네스를 진압하고 아리아인의 알렉산드리아(헤라트)를 건설했다.
드랑기아나의 프라다(나데알리 근처)에서 파르메니오와 그 일가를 파멸시켰다
BC 330년 겨울 알렉산드로스는 헬만드 강 계곡 위쪽으로 밀고 올라가 아라코시아를 지나고 오늘날의 카불이 있는 지점 너머의 산악지대를 넘어서 파로파미사다이족의 땅으로 진입해 그곳에서 카프카즈 산맥 옆에 또다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이때 베소스는 박트리아에서 찬탈한 대왕 칭호를 가지고 동방의 총독들에게 전(全)민족적인 반란을 선동하고 있었다.베소스는 생포되어 매질을 당하고 박트라로 송환되었으며 이후 페르시아의 관례에 따라 코와 두 귀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엑바타나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했다.
마라칸다(사마르칸트)에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키로폴리스를 경유해 페르시아 제국의 경계선인 작사르테스(지금의 시르다리야) 강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라는 뜻)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BC 328년 가을에 원정에서 마주친 가운데 가장 완강했던 적을 만나 격파하였다. 자원병들이 나서서 옥시아르테스가 거점으로 삼았던 험한 바위산을 점령했으며 포로 가운데는 그의 딸 록사나가 있었다. 화해를 이루려는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와 결혼했다. 나머지 적들은 항복하거나 분쇄되었다.
마라칸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술자리에서 다투다가 가장 신임하는 지휘관 중 한 사람인 클레이토스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알렉산드로스는 점차 동방의 절대주의에 물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실 의상을 즐겨 입었고, 박트라에서도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에게도 페르시아 궁정 의례를 강요하려고 시도했다.
⑥ 인도 원정
BC 327년 초여름 알렉산드로스는 지휘부가 재편되고 증강된 군대를 이끌고 박트리아를 떠났다. 바미안과 고르반트 계곡을 끼고 힌두쿠시 산맥을 다시 넘으면서 알렉산더는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BC 326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아토크 부근에서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로 진입했다.
6월에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 좌안에서 최후의 큰 전투를 치렀다.
그곳에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니케아(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와 알렉산드리아 부케팔라(그곳에서 죽은 자기 말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본뜸)라는 2개의 도시를 건설했으며 포로스는 그의 동맹자가 되었다.
히드라오테스(라비) 강 부근의 말리 성읍을 습격할 때 알렉산드로스는 심한 부상을 입고 몸이 쇠약해졌다.이후로 알렉산드로스는 자기 휘하의 총독들에 대해 자기 부재중에 저질러진 엄청난 실정에 대한 본보기로 처벌한다. BC 326년~324년에 총독 1/3 이상이 교체되고 페르시스와 수시아나, 카르마니아, 파라이타케네 등지의 페르시아인 사트라프를 비롯한 6인이 처형되었으며 코이노스의 동생 클레안드로스를 비롯한 메디아의 장군 3인이 금품 강요죄로 고발당해 카르마니아로 소환되고 그곳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BC 324년 봄에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원정을 마치고 엘람의 수도이며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중심지인 수사에 돌아왔다.수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을 기념하는 잔치를 열고 그 자리에서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을 하나의 지배민족으로 융화시키는 정책을 더욱 장려하기 위해 자신을 비롯한 80명의 공직자들이 페르시아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도록 했다.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딸인 바르시네('스타테이라'라고도 함)와 결혼하였고 토착민을 아내로 맞은 1만 명의 병사들은 후한 지참금을 보상으로 받았다.이러한 민족동화정책은 알렉산더와 그의 변화된 제국 개념에 동조하지 않는 마케도니아인들 사이에 갈수록 더 큰 마찰을 가져왔다. 페르시아인을 동등한 조건으로 군대와 지방행정기관에 받아들이기로 한 그의 결정은 심한 원성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거기에다 마케도니아식 군사훈련을 받은 3만 명의 토착민 청년들이 도착하고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등지에서 온 동양인들이 기병대에 들어옴으로써 불만은 더욱 커졌다.
BC 324년 알렉산드로스는 크라테로스 휘하의 마케도니아 퇴역군인들을 본국으로 보내도록 결정했는데 왕실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에서 공공연한 명령 불복종이 일어났다
BC 324년 여름 알렉산더는 유랑하는 용병 문제에 부딪힌다.용병은 아시아와 그리스에서만 수천 명에 달했으며 그 대부분은 자기 도시에서 쫓겨난 정치적 망명자들이었다.BC 324년 가을 헤파이스티온이 엑바타나에서 죽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은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⑦ 알렉산드로스 사망
BC 323년 6월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을 개량하고 페르시아 만 해안지방에 정착촌을 만드는 사업계획으로 분주하던 중에 장시간의 연회와 술잔치 끝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
그리고 10일 후인 6월 13일 그는 33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로 빼돌려 결국에는 황금관에 넣어 알렉산드리아에 안치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나자 제국은 하나의 단위로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왕위 후계자가 지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휘하 장군들은 필리포스 2세의 서자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록사나에게서 난 알렉산드로스의 유복자 알렉산더 4세를 공동 왕으로 지명하고 자신들끼리 여러 차례의 담합을 거쳐 총독직을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아리다이오스는 BC 317년에,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BC 310년에 살해당했다.
알렉산더 사후 제국의 후계자
알렉산드로스 사후 헬라 제국의 속주들은 독립적인 왕국이 되어 안티고누스를 비롯한 새로운 왕조가 세워진다
즉 알렉산드로스 후계자들은 BC 315년까지 키산트로스가 마케도니아를, 리시마코스가 드라케를 안티고누스가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다스린다.
그리고 프톨레미가 이집트 지역을 셀레우코스가 페르시아 지역을 각각 다스린다
이후 BC 315년 안티고누스는 제2의 알렉산드로스를 꿈꾸며 대왕의 자리에 앉으려는 야심을 품고 이집트 원정에 나선다
그러자 프톨레미와 키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동맹을 맺고 저지하였다.
BC 306년 나일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안티고누스는 패하였고, 이어 BC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도 안티고누스와 그의 아들 데메테리우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미와 페르시아의 셀레우코스 연합군에 대패하여 안티고누스가 차지했던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은 나누어 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프톨레미는 이스라엘 지역과 예루살렘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4. 알렉산더 사후 분열된 헬라 제국
1) 프톨레미 왕조(B.C.323년~30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B.C 323년부터 B.C 30년까지 애굽(이집트)을 지배한 마게도냐 혈통의 왕조이다. 초대 왕은 알렉산더 대왕의 측근이었던 프톨레미 1세이고, 마지막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B.C 30년 로마와의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자,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함으로 300여년을 이어오던 프톨레미 왕조는 역사에서 막을 내린다.
애굽의 국력이 전성기를 이룰 때에는 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 해안 전부를 차지하여 동부 지중해를 지배하였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경제, 학술이 가장 발달한 세계 최대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고대 애굽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잦은 전쟁과 소수 특권계급이 지배하는 구조 때문에 군사력이 급속히 쇠약해져 B.C.30년 로마제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프톨레미 왕조는 애굽 문자와 함께 헬라(그리스) 문자로 기록을 남겼는데 B.C.196년 프톨레미 5세때 제작된 로제타석은 고대 애굽의 문자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로제타석
① 프톨레미 1세 소테르 B.C 323-283
프톨레미 1세 소테르는 어린 시절부터 마게도냐 궁정에서 알렉산더와 함께 교육을 받은 절친이었다. 그는 알렉산더의 첫번째 원정부터 함께 하였고, B.C.327년에는 박트리아와 인더스 강 원정 중에는 수많은 공을 세워 마게도냐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프톨레미 1세는 대왕 알렉산더가 죽은 후 애굽 지역을 이어받아 통치하였다.
프톨레미는 1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팔레스틴 정벌에 나선 다음 지중해 해상권 장악을 위해 페니키아 해안 도시와 사마리아를 점령하였고 B.C 320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예루살렘 입성한 후에는 잔인한 방법으로 다스리고 10만명이 넘는 포로들을 애굽으로 끌고 갔는데 애굽으로 끌려온 유대 노예나 용병은 유대 디아스포라의 원조가 된다.
② 프톨레미 2세 필라델푸스 B.C 283-247
프톨레미 1세의 둘째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통치하다 단독 통치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두 숙청 살해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였던 리시마쿠스의 딸과 결혼했으나 권력투쟁으로 이혼 후 자신의 친 누이와 결혼하였다.
프톨레미 2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마게도냐 왕조가 어려움에 처하자게 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아시아와 에게해 지역을 차지하여 자신의 지배력을 확대하였다.
영토 확장을 도모하던 셀레우코스 안티오커스 1세와 다툼을 벌여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손에 넣는다. (1차 시리아 전쟁 B.C 276-271)
크레모니데아 전쟁에서 이집트 아테네 스파르타 연합군에 승리한 마게도냐는 지중해에서 프톨레미 왕조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2세를 지원하여 2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한다. (제2차 시리아 전쟁 B.C 260-253)
프톨레미 2세는 해전에서 크게 패하고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자신의 딸 베레니케와 안티오커스 2세와의 결혼 동맹을 맺는다.
프톨레미 2세는 히브리어 유대인의 율법서를 번역하기 전에 먼저 애굽에 잡혀 와 있는 포로들을 해방시켜주는 조건으로 유대 대제사장에게 율법서를 번역할 72명의 학자들을 초청하여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70인역 구약 성경)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장서 수집에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였으며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 등대를 건립하였는데 이 등대는 A.D 1326년 이슬람 침입때 파괴되었다.
③ 프톨레미 3세 유에르게데스 B.C.247-221
프톨레미 2세의 아들이며 셀레우코스 안티오커스 2세와 결혼한 베레니체와는 남매이다.
베레니체는 안티오커스 2세와 결혼했지만 안티오커스 2세는 프톨레미 2세가 죽자 전처 라오디케를 불러들인다. 다시 왕궁으로 복귀한 라오디케는 왕위가 자신의 아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남편 안티오커스 2세를 독살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힌다.
아들과 함께 안디옥으로 피신해 있던 베레니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프톨레미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누이 베레니체는 안티오커스 2세의 전처 라오디케에 의해 아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함께 온 애굽의 시녀들도 모두 살해당한다. 프톨레미 3세는 누이의 보복을 위해 셀레우코스를 공격한다(제3차 시리아 전쟁, B.C 246-241)
제3차 시리아 전쟁은 B.C 241년 화친조약이 맺어짐으로 종결되는데, 애굽의 영토는 안디옥 항구를 포함한 시리아 북부까지 확대되고 프톨레미 3세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간다.
프톨레미 3세 통치 시기 학문이 발전을 이루어져 알렉산드리아는 지리학, 천문학이 가장 발달한 도시로 되었다. 수리 천문학자인 에라스토스테레스와 아르키메데스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 기계학등 광범위한 과학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④ 프톨레미 4세 필로파테르 B.C 221-203
프톨레미 4세의 치세기에 애굽은 그동안 지배해 왔던 시리아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으며 애굽 원주민의 반란으로 국내의 안정이 흔들렸던 시기이다.
여색을 탐하고 나태했던 프톨레미 4세는 애굽을 사양길로 들어서게 한 무능한 왕이었다.
즉위 후 간신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의 중상모략으로 아가토클레스의 여동생을 연인으로 삼고 자신의 어머니와 제사장 동생을 살해했다.
당시 애굽의 사법은 뇌물 여하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부정부패가 심했고, 백성들의 불신은 깊기만 했다. 한편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3세는 즉위 후 메디아와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한 후 안티오커스 3세는 애굽의 혼란을 틈타 전쟁을 발발시킨다. (4차 시리아 전쟁, B.C 219-217)
안티오커스 3세는 전쟁 초기에 승리했는데 그는 프톨레미가 외교적인 제안을 해 오기를 기다리며 애굽으로의 진군을 멈추었다.
결과적으로는 B.C.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애굽은 승리를 거두어 팔레스틴과 시리아를 탈환한다. 이후 프톨레미 4세는 그의 방탕한 성격으로 인해 외교 문제는 신하들에게 맡김으로 신하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B.C.205년 프톨레미 4세는 갑자기 죽었다.
⑤ 프톨레미 5세 에피파네스 B.C. 203-181
소시비우스는 프톨레미 4세의 죽음을 비밀로 하다가 이듬해 왕비 아르시노에를 살해한 후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던 프톨레미 5세를 즉위시키고 충성스런 신하들을 모두 추방한다.
B.C.202년 소시비우스가 은퇴하자, 아가토클레스가 후견인을 자처하는데,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아가토클레스가 살해 당하고 애굽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즈음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세계 정세는 제 2차 포에니 전쟁(B.C.218-202)에서 승리한 로마가 지중해의 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내분으로 인해 애굽의 혼란이 계속되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3세는 과거 자신들의 영토였던 시리아를 탈환하고자 제 5차 시리아 전쟁(B.C.202-195년)을 일으킨다.
전쟁 당시 안티오커스 3세는 애굽의 본토까지 차지하려 했으나 애굽에서 밀을 수입하고 있던 로마가 애굽 본토는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안티오커스 3세는 로마의 요구대로 애굽 본토 공격을 포기하여 애굽은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프톨레미 5세는 국내의 반란과 증세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자 안티오커스 3세와 화해 협약을 맺고 안티오커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와 정략 결혼을 한다.
B.C. 198년 다시 안티오커스 3세가 팔레스틴을 공격하자 프톨레미 4세 때 부터 애굽의 가혹한 지배를 받던 팔레스틴 유대인들은 안티오커스 3세를 지지하였고 페니키아 지방과 예루살렘은 시리아에게 양도되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약 122년간 프톨레미 왕조가 지배가 끝나고 새로운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가 된다
한편 B.C 196년 프톨레미 5세는 로제타석을 제작한다. 로제타석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공격했던 1799년 발견된 비석으로 고대 애굽의 상형문자와 민중
문자,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림문자를 해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2) 셀레우코스 왕조 B.C 312-134
알렉산드로스 사후 셀레우코스 1세는 아나톨리아에서 인더스 계곡까지 이르는 알렉산더 제국의 최대 영토를 차지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323년부터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B.C 60년까지 30명의 왕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지나치게 피지배층의 문화를 경시하고 헬라 문화의 우월성만 강조하고 헬라화를 강요하여 갈등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제국의 최전성기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6대 왕인 안티오커스 3세 때로 이후 전쟁 여파로 점차 쇠퇴하게 된다.
안티오커스 3세는 프톨레미 왕조와 파르티아를 상대로 승리해 제국의 우위를 확보했으나 로마와의 전투에서는 완전히 완패하여 제국의 군사력과 패권을 잃는다.
그리고 안티오커스 4세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한 재정 파탄을 만회하기 위해 엘람의 신전을 약탈하였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결국 안티오커스 4세의 로마의 견제 정책과 유대인들을 헬라화 시키기 위한 핍박은 오히려 마카비 독립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되어 유대인은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우게 된다.
①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B.C 312-280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휘하의 장군이었으며 알렉산더 대왕과 동방 원정인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 함께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B.C. 321년 바벨론 총독에 임명되었으나 BC 316년 안티고누스에 의해 축출되어 애굽(이집트)으로 도망 후 프톨레미 1세의 도움을 받았다
B.C 301년 프톨레미 1세와 함께 안티고누스를 공격하여 승리한다
이후 알렉산더 왕조는 4인 체제(키산트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미, 셀류커스)로 바뀐다.
셀레우코스 1세는 수도를 바벨론이나 수사가 아닌 안티고누스가 차지하던 시리아 안디옥으로 정하고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킨다
B.C 280년 애굽의 프톨레미 1세가 죽은 후 후계 다툼에서 밀려난 프톨레미 1세의 장남 케라우누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망명을 신청하는데 불행히도 망명해 온 케라우누스에 의해 셀레우코스 1세는 장남과 함께 살해되고 그의 아들 안티오커스 1세가 즉위한다.
② 안티오커스 1세 소테르 B.C 280-261
셀레우코스 왕조의 초대 왕 셀레우코스 1세의 차남으로 B.C 292년 이후 아버지 셀레우코스 1세와 공동통치자로서 광대한 영토에 많은 도시를 세워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281년 아버지가 형과 함께 암살당하자 왕이 되었다.
소테르(해방자)는 B.C 276-275년 갈라디아 지방을 침입한 켈트족을 물리쳤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안티오커스 1세는 영토 확장을 위하여 프톨레미 2세가 지배하던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공격해 1차 시리아 전쟁(B.C 274-271)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전쟁은 지지부진하게 4년을 이어가면서 소모전으로 끝난다.
셀레우코스 1세는 B.C.261년 페르가몬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그 해에 사망하였다.
③ 안티오커스 2세 테오스 B.C 261-246
안티오커스 1세의 아들로 부왕이 프톨레미 왕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2차 시리아 전쟁(B.C.260-253)을 일으킨다. 이때 마게도냐 왕국은 안티오커스 2세를 지지한다.
안티오커스 2세는 애굽의 프톨레미 2세로부터 소아시아의 밀레토스, 에베소와 페니키아 해안 지역을 되찾는데 밀레토스 주민들은 '데오스'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안티오커스 2세는 B.C 253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 아들까지 낳은 아내 라오디케와 이혼하고 프톨레미 2세의 딸 베레니케와 정략 결혼한다.
B.C.247년 프톨레미 2세가 죽자 안티오커스 2세는 라오디케와 재결합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잇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라오디케는 남편 안티오커스 2세와 베레니체 및 그의 아들을 모두 살해한다.
④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쿠스 B.C 246-226
안티오커스 2세와 라오디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티오커스 2세가 전처 라오디케에 의해 독살된 후 라오디케와 베레니체는 각각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
베레니체는 프톨레미 3세에게 도움을 청하고 라오디케는 베레니체와 그의 아들을 살해한다. 프톨레미 3세는 누이와 조카의 보복을 위해 셀레우코스 왕조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제3차 시리아 전쟁(B.C.246-241)이다.
이 전쟁은 애굽의 압승으로 끝나고 셀레우코스 왕조는 전쟁의 패배와 함께 내분으로 국력은 약화되기 시작한다.
셀레우코스 2세의 동생 안티오커스 히에라쿠스는 아나톨리아에서 자립하여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였고 셀레우코스 2세는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의 도움을 받아 갈라디아와 동맹을 맺고 공격해 오는 동생 안티오커스를 물리치 오히려 아탈로스가 득세하는 기회만 주게 되었다. B.C 226년 셀레우코스 2세는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⑤ 셀레우코스 3세 소테르 B.C 226-223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쿠스의 장남으로 3년의 짧은 기간동안 통치하였다.
애굽과는 전쟁을 하지 않았고 사촌 아탈로스 1세가 다스리는 페르가몬 왕국과의 전쟁 중 자신의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암살당하였다. 동생 안티오커스 3세가 뒤를 이어 즉위한다
⑥ 안티오커스 3세 마그누스 대왕 B.C 222-187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쿠스의 차남으로 B.C 222년 약 18세의 나이에 왕이 되었다.
알렉산더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으나 제국 쇠망의 단초를 제공한 왕이다.
안티오커스 3세는 즉위 후, 반란과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야 했다.
애굽과 로도스, 페르가몬, 폰투스 왕국의 위협을 막아내고 선왕의 살해자들을 처단하여 제국을 안정시킨다.
당시 애굽의 프톨레미 4세는 부정부패와 불신으로 약해져 있었는데, 안티오커스 3세는 이러한 틈을 타 4차 시리아 전쟁 (B.C.219-217)을 일으킨다.
당시 애굽의 권력은 간신 소시비오스에게 있었는데 소시비오스는 안티오커스 3세에게 항복할 것처럼 꾸며 타결되지 않는 협상을 지연시키고 시간을 벌어 원주민 용병을 모은 후 시리아의 팔레스틴을 공격한다.
안티오커스 3세는 라피아에서 애굽과 전투를 하는데 결국은 패배함으로 4차 시리아 전쟁이 종결된다.
라피아 전투에서 승리한 애굽은 내분에 휩싸인다. 용병으로 훈련된 원주민들은 자신들에게도 힘이 있음을 깨닫고 상애굽에서 독립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애굽이 내분에 휩싸여 있는 동안 안티오커스 3세는 제국의 통치권을 재정비한다.
B.C 205년 애굽은 프톨레미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프톨레미 5세가 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내분으로 혼란한 정국이 된다.
안티오커스 3세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마게도냐 왕국과 손을 잡고 동방원정을 준비하며 애굽과 팔레스틴, 소아시아 지역을 통치하려 한다.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로마는 B.C 200년 애굽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로마는 애굽에서 곡물을 수입했기 때문이었다. 안티오커스 3세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 애굽의 속주를 공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5차 시리아 전쟁(B.C 205)
B.C 199년 애굽의 스코파스 장군에 의해 패배하지만 그 이듬해인 B.C 198년 요르단 파니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차지한다.
유대인들은 안티오커스 3세를 환영하였고, 안티오커스 3세도 환영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 호의는 얼마를 가지 못한다.
안티오커스 3세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미 5세와 결혼시켜, 자신의 영향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남편을 설득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음으로 오히려 안티오커스 3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B.C 197-196년 안티오커스 3세는 이오니아의 도시국가와 트라키아를 점령하여 합병한다. 이 일로 지중해에서 지배권을 넓히려는 로마와의 관계가 악화된다.
B.C.195년 로마와 셀레우코스 왕국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곧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18년간이나 괴롭힌 한니발 장군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망명해 온 것이다.
B.C.191년 로마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이톨리아 동맹이 안티오커스 3세를 사령관으로 선출하자 안티오커스 3세는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와 리디아 평원에서 격돌하여 전투를 벌인다(마그네시아 전투)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커스 3세는 로마 집정관 스키피오 장군 에게 패하여 항복한다. 전투에서 패배한 안티오커스 3세는 B.C 188년 아파메아에서 조약을 맺게되는데 그 조건은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1만 5천 달란트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타우루스 산맥이 새로운 국경선이 된다. 또한 배상금을 완납을 보증하기 위해 그의 아들(후일 안티오커스 4세)은 로마의 볼모가 된다.
그런데 영토를 빼앗긴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안티오커스 3세가 로마에 대패하자 속주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안티오커스 3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동방 원정을 떠나게 되는데 전쟁 배상금으로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안티오커스 3세는 신전 약탈 명령을 내린다.
안티오커스 3세는 엘리마이스 신전을 약탈하던 중 B.C 187년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셀레우코스 4세가 통치하게 된다.
⑦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테르 B.C.187-175
안티오커스 3세의 둘째 아들이자 셀레우코스 3세의 조카이다.
셀레우코스 4세는 로마의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해 시리아 본토와 예루살렘 성전 강탈을 시도한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은 400달란트와 금 200달란트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금과 토비아스의 아들 힐카누스의 재산이었다.
그런데 시리아의 장관 헬리오도루스가 무분별한 약탈을 하자 민중의 소요가 거세졌고 헬리오도루스는 예루살렘 성전 보물 몰수를 중지하고 셀레우코스 4세를 살해한다..
셀레우코스 4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에 볼모로 억류 중이던 안티오커스 4세는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대신 볼모로 두고 수리아로 돌아온다.
왕위는 당연히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안티오커스 4세는 조카를 대신하여 왕권을 차지한다.
⑧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 B.C.175-163
셀레우코스 4세의 동생으로 그는 모든 일을 계략과 속임수로 해결하려 했으며, 강자에 대해서는 아첨과 비굴함으로, 약자에게는 잔인함과 비열함으로 대했다.
안티오커스 4세는 조카를 대신하여 왕권을 차지한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른 뒤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안티오커스 4세는 그는 관료들과 주변 국가들에게는 온갖 협상과 선물공세로, 국내의 반대파들은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는 자신을 올림푸스의 신 제우스의 현현이라 하여 '에피파네스'라 부르도록(마카비하 6:2)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미친 놈'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라 불렀다.
당시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 3세였다. 왕이 없던 시절의 대제사장은 유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의 형제 요수아는 헬라파 지도자였는데 야손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대인의 신앙과 관습을 포기하였다. 야손은 안티오커스 4세에게 대제사장직을 위해 뇌물을 주었고, 체육관 건립허가를 위한 뇌물도 주었다.
안티오커스 4세는 애굽의 프톨레미 6세 필로메테르가 과거 안티오커스 3세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하자 애굽을 선제 공격한다. 6차 시리아 전쟁(B.C.170-168년)
안티오커스 4세는 애굽 왕의 모사들을 포섭하여 프톨레미 6세를 배반하게 함으로 애굽은 내란에 빠진다. 이 틈에 안티오커스 4세는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애굽을 격파하고 프톨레미 6세를 포로로 삼았다.
애굽을 점령한 안티오커스 4세는 애굽의 힘을 반분시키기 위해,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왕국으로 분할하려 한다.
멤피스는 프톨레미 6세가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미 8세가 다스리도록 하는 조약에 서명하면 더 이상 애굽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안티오커스 4세는 프톨레미 6세와 프톨레미 8세가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 후 B.C.169년 귀국한다. 안티오커스 4세가 애굽을 공격하는 동안 유대에는 안티오커스 4세가 전사했다는 가짜 뉴스가 전해지자 안티오커스 4세의 박해에서 벗어나고자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이 소식을 듣고 귀국한 안티오커스 4세는 피의 보복을 감행한다.
안티오커스 4세는 유다 예루살렘 4만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남자와 여자를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린다. 그리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데, 인두세, 제왕세, 성전세와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에 소금세를 부과한다. 다양한 세금 징수에 무력을 행사하고, 세금을 납부하지 못할 경우 개인이나 마을 전체가 노예로 팔려 나갔다.
안티오커스 4세가 유대에서 이렇게 잔인한 보복을 하는동안, 프톨레미 6세와 8세는 서로 화해한다.
안티오커스 4세는 B.C.167년 다시 애굽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자, 애굽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안티오커스 4세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로마 원로원에서 파견한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장군이 들어와 있었다. 라이나스 장군은 안티오커스 4세가 로마에 볼모로 있는 동안 함께 공부하며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볼모로 로마에 머물며 로마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안티오커스 4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퇴각하라는 원로원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분노한 마음으로 귀국하던 안티오커스 4세는 예루살렘에 들러 보복을 한다.
율법은 불태워졌고, 성전 제단에서는 부정한 제물로 우상을 숭배하고, 유대인들에게는 돼지고기를 먹게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나아가 유대교를 말살하기 위해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여러 도시에 보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반포한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들은 유대인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유대적 관습과 신앙을 사랑하였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여자들은 그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는 일을 택하였고, 은밀하게 안식일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보다 죽음을 택하였다.
부정한 음식에 손대기를 거절한 사람들 역시 잔인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안티오커스 4세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은 '율법에 충실한 자들''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의 '하시딤'집단이 생겨났는데 '바리새파' '엣센파'가 이들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본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유대
BC 223년 셀레우코스 3세 소테르가 살해되자 그의 형제 안티오쿠스 3세는 18세에 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알렉산더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정복 계획을 시작한다.
이때 애굽의 지배를 받고있던 유대는 셀레우코스 쪽으로 지지를 보내며 안티오쿠스 3세를 도와 유대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낸다(BC 19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를 통치하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의 신앙과 율법을 인정하고 3년간 세금 감면 혜택을 베푼다.
그런데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가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배상금 1만 5천 달란트를 물어주게 되자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에 배상금을 주기 위해 자기 나라 모든 신전들의 재산을 압류한다. 그리고 시리아의 장관 헬리오도루스를 시켜 속국인 예루살렘 성전까지 압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유다를 비롯한 곳곳에서 반기를 들었고 결국 안티오쿠스 3세는 BC 187년 수사에서 신전을 약탈한 뒤 암살당한다.
BC 175년 셀레우코스 4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즉 ‘신의 현현’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그의 희생자들은 그를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Antiochus Epimanes), 즉 ‘미친놈 안티오쿠스’라 불린다. 그만큼 그의 악행이 심했다는 증거이다.
안티오쿠스 4세는 돈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야손’이라는 사람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때까지 대제사장은 항상 아론의 후손이 맡아 왔고, 다윗과 솔로몬 이후 사독 가문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의 지배하에서도 지켜졌던 전통이 사라지고 그때로부터 성직의 매매가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BC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계속 성직 매매가 이어졌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애굽을 침략하여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까지 진격하자 다급해진 프톨레미 왕조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한다.
안티오쿠스 4세는 로마의 힘에 밀려 애굽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BC 169년 안티오쿠스 4세는 퇴각하면서 유대 땅을 거치는 동안 로마에 대한 굴욕과 자신의 헬라주의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가 전보다 더 심해진 것을 알고 예루살렘에 분풀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강탈하고 불을 지르고 성전을 늑탈하고 율법서를 불사르고 많은 백성을 학살했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살지 못하게 안식일을 지키지 말 것, 어린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 것, 율법서를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법령을 선포한다.
박해는 BC 167년 10월 절정에 도달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 제단과 우상을 세워놓고 돼지가 희생제물로 사용된 것이다. 수많은 희생자들 대부분은 ‘하시딤(Hasidim)이었다.
하시딤은 히브리어로 ’자비(헤세드)‘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 세속적이고 종교에 무관심한 동포들과 구분된 ‘경건한 자들’을 가리킨다.
율법을 철저히 지킨 그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따라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마카비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프톨레미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도표
제3장 유대 독립시대
1. 마카비 혁명
예루살렘 북쪽 모테인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 제사장 맛다디아가 있었는데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고 그는 하스몬(Hasmon)가 출신이었다
맛다디아는 안식일에 안티오쿠스 4세의 사신으로부터 돼지고기로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때 헬라파 유대인이 돼지고기로 희생 제사를 드리려고 하자 맛다디아는 그 유대인을 죽이고 사막에 숨으면서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런일로 화가 난 안티오쿠스 4세는 안식일에 어린아이와 여자를 포함해서 1천명을 죽이는데 이를 계기로 유대 지방에서는 하시딤(경건주의 율법학자들)과 맛다디아 집안이 연합하게 싸우게 된다.
1) 유다 마카비(재위 B.C 166-160)
B.C 167년부터 시작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는 B.C 164년에 그가 죽으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유다에서는 맛다디아가 죽고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지휘관에 올랐다.
망치라는 별명을 가진 마카비는 군사적인 탁월한 역량을 가진 용맹한 사람이었다
마카비가 이끄는 군대는 토벌에 나선 시리아의 군대 장관 리시아스에 맞서 벧 호론, 엠마오, 벧 주르 등지의 전투에서 게릴라 전법으로 혁혁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마침내 B.C 164년 12월 마카비는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마카비는 B.C 586년 유대 예루살렘 멸망 이후 421년 만에 이뤄낸 혁명이었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성전 회복하고 제우스 신상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성전 봉헌절로 수전절을 제정하여 기념하는 축제일로 정했다.
(오늘날의 ’하누카’)
B.C 164년 안티오쿠스 4세 뒤를 안티오쿠스 5세가 겨우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한다
안티오쿠스 5세는 유대 지방에 사독 계열의 헬라주의자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군대 장관 리시아스를 섭정관으로 파견하여 유다 반란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유다 마카비는 헬라화에 동정적인 대제사장 알키모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리시아스의 군대는 벧사가리야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왕위를 노리던 리시아스의 정적 필립이 페르시아로부터 시리아를 공격해 오자 리시아스는 급히 철군하고 만다
B.C 162년 안티오쿠스 5세가 조카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데메트리우스 1세 왕은 계속하여 알키모스를 두둔하고 유다 마카비를 비난했다.
그리고 유대 지역 질서 회복을 위해 또다시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행정관 바키데스와 그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유다 마카비는 게릴라 작전으로 저항하였다.
결국 데메트리우스 1세는 니카놀 장군을 사령관으로 세워 사정없이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유대가 니카놀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그 후 얼마 동안 집단 간의 평화가 유지된다
평화는 B.C 160년 뵈레아 전투에서 유다의 영웅 마카비가 전사하면서 깨진다
반란군의 기세를 꺾은 시리아 행정관 바키데스는 게릴라 운동의 싹을 잘라 버리려 했으나 유다 마카비의 후계자인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은 유대 광야로 도망쳐 슬기롭게 대처한다
2) 요나단(재위 B.C 160-142)
B.C 160년 유다 마카비가 죽자 마카비의 막내 동생 요나단이 둘째 형인 시몬의 도움을 받아 민족주의 유대인들의 지도자가 된다. 요나단은 용맹한 군인이었던 형 유다 마카비와는 달리 비상한 외교술로 국제 정세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였다.
요나단은 가깝게는 나바티안 왕국과, 멀리는 로마, 스파르타와 외교적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몇 년간 평화스러운 기간을 맞았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152년 유대에 대한 헬라화를 포기하고 유다 마카비의 막내 동생 요나단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데메트리우스 1세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우고 왕위를 탐내던 왕족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를 도와 그를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 더 큰 정치적 야망을 가진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충성하는 척하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기를 바랬다.
경장자를 물리친 알렉산더 발라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6세의 딸과 결혼하고 결혼식에 요나단을 초대하여 '왕의 친구'라 불렀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일부 유대인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에게 자색 옷을 입혀 시가 행진을 하도록 하였으며, 요나단을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함으로써 어느 정도 독립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싸우다 전사하자 데메트리오스 2세가 왕위에 오르고 요나단은 이를 경계해 일단 데메트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다가 그의 부하 장수 트리폰의 사기극에 휘말려 결국 살해당한다.
이후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둘째 형 시몬이 4대 유대인 저항 지도자로 오른다.
3) 시몬(재위 B.C 142-134)
맛다디아의 둘째 아들 시몬(142-134)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을 물려받는다. 시몬은 이스라엘에 존재하였던 여러 계파의 통합을 이루어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즉 하시딤과 헬라파와 마카비파의 통합을 이루어 냈다
BC 142년 셀레우코스 왕인 테메트리우스 2세가 유대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인정한다.
그리고 로마의 동맹국(갑바도기아, 시리아, 이집트, 페르가몬)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시몬은 BC 141년 아크라 요새의 전투에서 이기고 욥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국도를 장악하여 해상 교통이 열리게 하였다
성소 봉헌에 자극받은 다른 이민족들이 쳐들어오자 군사를 이끌고 갈릴래아에서 이민족 군대 3000명을 쓰러뜨렸다.
BC 135년 예리코 평야에서 요새를 시찰하고 환영 만찬에 참여하였다가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의 흉계에 빠져 살해당했다.
2. 하스몬 왕조(BC 135-63)
일반적으로 맛다디아에서부터 시몬의 통치까지를 마카비 혁명 시기라 하고 요한 힐카누스때부터는 하스몬 왕조라 부른다.
하스몬 왕조는 BC 142년~63년 까지 79년간 이스라엘에 새워진 유대인의 마지막 왕조이다.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는 대제사장을 겸하였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BC 63년 하스몬 왕조가 로마에 의해 복속된 이후 예수 그리스도 시대를 포함하여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까지 약 2000년간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한다
1) 요한 힐카누스(재위 BC 135-104)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야심찬 인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대제국을 세우고 대제국의 종교를 유대교로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왕위에 오르고 3년 동안 요한은 남쪽 에돔(이두매)를 공략해 과거 유대 왕국의 남단 지역인 브엘세바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요한은 이두매인들을 죽이기보다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유대교로 개종하게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하스몬 왕조는 어디까지나 셀레우코스 왕조가 자치권을 허락한 가문이었을 뿐, 종주권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있던 상황이었다.
안티오코스 7세는 하스몬 왕조에게 준 자치권을 거두고 다시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할 요량으로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안티오코스 7세에게 맞설 힘이 없던 요한은 결국 돈의 힘으로 해결을 보기로 하고 다윗왕의 능을 도굴해서 은 3000달란트를 꺼내 안티오코스 7세에게 바치고 협상을 제안했다.
결국 양측에 합의가 성사되어 요한이 새로 정복한 이두매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유대의 자치권은 인정하기로 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요한은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다가 BC 129년 안티오코스 7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다시 거침없이 정복 전쟁에 나섰다.
유대의 접경지역을 평정한 다음 BC 128년 사마리아로 쳐들어가 복속했다.
이어 요르단강 동편의 사해 북서부 지역과 페트라 및 이두매 남부 지역 까지 평정하고 이두매 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다.
이때 개종한 사람이 바로 이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이다.
하스몬 왕조는 시몬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요한 힐카누스의 치세의 하스몬 왕조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갈등으로 왕조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율법주의자들인 하시딤들은 요한에게 대사제장직을 내놓고 율법에 맞는 대사제장을 세워야 함을 주장했다. 하시딤들이 요한이 대사제장이 될 수 없는 근거로 제시한 이유는 요한의 어머니가 안티오코스 4세 때 로마군에 끌려갔던 사실을 들어 율법상 이방인에게 더럽혀진 여인의 아들은 대사제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요한은 격분하여 하시딤들을 모조리 내쳤고 하시딤 대신 기용된 자들이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개파들이었다. 이때 사해 두루마리를 통해 알려진 에세네파와 유대교의 바리새파 및 사두개파가 발생한다.
힐카누스는 자기가 발행한 주화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로서 31년에 걸쳐 정복과 화려한 통치를 하다가 BC 104년에 죽는다.
2) 아리스토불루스 1세(재위 BC 104-103)
요한 힐카누스가 재의 31년 간의 통치를 마치고 사망하자 장남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통치체계를 왕정으로 바꾸고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아리스토불로스 1세는 잔인한 데다가 유대교 전통보다는 헬레니즘을 더 좋아해서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를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로스는 불과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이 없어서 왕위는 그의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가장 먼저 감옥에 있던 알렉산더 얀네우스를 석방시키고 14살 연하인 그와 결혼한 후 왕으로 세운다
3) 알렉산더 얀네우스(재위 BC 103-76)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영토를 다윗 시대만큼 확장하는 등 군사면에서는 탁월했다.
갈릴리와 요르단강 동편 중부 등을 점령해 하스몬 왕조 최대 판도를 개척했다.
그러나 요한 힐카누스 1세에게 축출되었던 하시딤들이 바리새파가 되어서 얀네우스에게도 대사제장을 내놓을 것을 주장했고 결국 초막절 제사때 바리새파가 주동이 되어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얀네우스 자신에게 반발한 바리사이파 6000명을 학살했다.
또한 바리새파들이 개최한 연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800명을 십자가로 처형했다.
이때 8000명의 바리새파들이 예루살렘에서 도피하여 유대 광야로 나갔는데 이들이 나중에 엣세네파가 된다.
얀네우스는 대부분의 유대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종교적으로는 사두개파를 지지하고 정치적으로는 헬라파가 되었다
율법을 무시하고 독재를 일삼아 바리새파와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던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27년간 통치하다가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 사두개파 고문들을 해고시키고 바리새인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BC 76년에 죽는다.
4) 살로메 알렉산드라(재위 BC 76-67)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녀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바리새인들과 화해하고 율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통치 기간 사두개파들이 추방당하고 바리새인들의 권한이 커지게 된다.
이때가 바리새파의 황금시대로 솔로몬의 지혜서 , 시빌 신탁서 , 에녹서 , 요벨서 , 마카비 하서가 기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9년간 통치하는데 여자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기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장남인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가 노쇠하면서 두 아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이틈을 놓치지 않고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아버지 얀네우스 시절 정권에 참여했던 사두개파를 규합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남 힐카누스 2세는 바리새파들을 규합하여 맞섰고 알렉산드라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내와 자식들을 붙잡아 안토니아 요새에 가두었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행동하기가 어렵던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형인 힐카누스 2세와 협상을 벌였고 결국 힐카누스 2세는 대사제장직을 유지하고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유대의 왕이 되는 걸로 합의를 본다.
5) 아리스토불루스 2세(재위 BC 67-63) - 하스몬 왕조의 붕괴와 멸망
어머니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73세 나이로 죽자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그의 형 힐카누스 2세를 제사장의 자리에서 쫓아내 평민이 되게 하고 자신이 왕과 대제사장직을 겸하는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런 권력분점의 상황은 한 이두매인 때문에 끝이 나는데 그가 안티파터였다.
안티파터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가 왕이 되어버렸으니 안티파트터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해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안티파터는 힐카누스 2세에게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2세에게 도움을 청해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자고 부추겼고 아레타스 2세도 호응하여 나바테아군 5만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한편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폼페이우스의 부장인 스카우루스 장군에게 은 300달란트를 주고 도움을 청해 그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온 상황이었다.
아레타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병력을 철수해 돌아가버렸다.
이 일로 로마의 힘을 실감한 두 형제는 앞다투어 폼페이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쟁투를 벌였고 로마에게 아부하면서 두 형제의 정통성은 갈수록 추락해갔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두 형제를 중재하겠다면서 팔레스타인 정복에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의 각 도시들을 점령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기에 이르렀지만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상황에서도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분쟁을 멈출 줄 몰랐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려하자 아리스토불루스 2세 지지자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고 힐카누스 2세 지지자들은 항복하자고 하였다
결국 BC 63년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불태웠으며 1만 2천 명을 학살했다.
폼페이우스가 취한 조치는 사실상 하스몬 왕조의 붕괴를 의미했다.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왕조가 정복한 이두매, 사마리아, 갈릴리, 데카폴리스 등을 모두 독립시키고 원주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유대와 예루살렘은 시리아 총독 휘하의 행정장관이 통치하게 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가족들은 포로로 로마에 끌려갔으며 폼페이우스는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하스몬 왕조는 점차 끝이 나게 된다
3.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 - 유대교의 종교적 분파
하시딤이 마카비 가문과 뜻을 달리하면서 유대는 마침내 세 부류로 나누워진다.
1) 사두개파
사두개라는 말은 솔로몬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유한 귀족층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제사장 계급이었다.
매우 엄격한 율법주의자들로 성향은 보수적이며 왕정 시대와 바벨론 유배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서를 거부하고 오직 ‘모세 오경’만 인정하였으며, 부활이나 영혼 불멸, 천사론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보인다
사두개파는 종교 단체라기보다는 사회적 고위층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치적으로는 극히 현실 타협적이어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주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유다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입장을 택한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독립을 꾀하는 셀롯당의 사람들에게는 증오의 표적이 된다 .
AD 70년 유다 전쟁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이 전쟁에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두개파는 괴멸되었다.
2)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다 종교 탄압에 반발해서 경건한 유다인들(하시딤)마카비 혁명에 동참하면서 생겨난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바리새파의 반대자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페르시아인’(Perisian)을 의미하며 이들이 신학적으로 혁신적인 사상을 가졌다는 뜻으로 붙여준 별명이다.
처음에는 하스몬 왕조의 지도자들과 함께하였으나 점차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스몬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직을 겸임하고 세습하게 되자 이에 반대해서 그들과 결별하게 된다.
바벨론에서 귀환 이후 유대 사회는 성전 제사의 확장으로 회당에서의 율법 공부가 강조되었는데 바리새파는 율법의 수호자로 유대인들이 헬라 철학과 문학, 종교에 심취하면서 유대교 신앙이 도전받게 되자 헬레니즘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특별히 전통적인 해석대로 율법을 엄수하는 것을 강조했으며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교제를 하였고 물건 구매도 공동체 내에서 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는 달리 부활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도래, 천사와 악마의 존재, 메시아 대망, 부림절 등을 받아 들인다.
그리고 율법의 정확한 해설자이며, 구약 성경과 구전법을 포함하는 모든 책 즉 오늘날 구약성경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책들을 받아들인다.
AD 2세기 이후의 유대인 사회는 이들에 바리새파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들은 사두개파처럼 현실 타협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셀롯당 처럼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3) 에세네파와 쿰란공동체
에세네파는 약 4000여명 정도로 정결을 강조하고 재산을 공유했으며 비밀 유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영혼 불멸과 운명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다 .
에세네파는 사해 주변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장로의 지도하에 성경 필사와 성경 연구, 주석 작업에 재산을 공유했으며, 예배와 독서와 공동 식사를 중요한 행사로 삼았다.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파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유대의 세속 정치와 대중들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다.
에세네파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의를 강조한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스스로를 빛의 자녀들로 생각하고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보았고,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린다
특별히 쿰란 공동체는 엣세네파의 핵심 그룹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힘을 기울였는데 그들이 남긴 사해문서들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과는 달리 ‘쿰란 축제력’을 사용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반목하게 되었다. 또 대 제사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하스몬 왕가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
쿰란(Qumran) - 2000년전의 구약 사해 사본이 발견된 곳
사해 북쪽 서단에 쿰란이란 고대 거주지가 있는데 거주지에서 서쪽으로 3백여m 떨어진 곳에는 유대 광야의 높은 언덕이 막 시작되는 입구에 동굴 11개가 있다.
이곳에서 1947년 어느날 베드윈 족 양치기 소년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동굴에서 소년은 사해 사본을 발견한다.
고대 히브리어가 빼곡히 적혀 있는 두루마리는 성경 이사야서 등이 적힌 구약 필사본이다.
쿰란 주변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800여개의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
이들 중 약 1/4이 구약 사본이며 ,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으로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은 것들이다 .
이 두루마리들은 마카비 시대에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고 BC 2세기부터 AD 1 세기까지 이곳에서 쿰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필사해 자손들에게 물려줬던 것이다.
사해 사본이 2 천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은 매우 건조한 이 지역의 기후 탓이다 .
AD 68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던 쿰란공동체는 1949 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공동체는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두루마리 구약성서와 문헌들을 항아리에 담아 동굴에 숨겨 놓았다 . 고고학자들은 제 1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집터를 발견했다 .
복잡한 방들과 책상 의자가 놓여있는 방 , 양장피 , 잉크가 발굴됐다 .
그리고 와디와 연결해 물을 저장했던 물탱크 , 주방 , 연구실 , 기도실 , 도기가마 , 하수도 등이 잇따라 발굴됐다 .
사해 사본
4) 열심당(셀롯당)
이들은 로마에 대한 항거가 매우 과격하고 정치적이기 때문에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 그들은 본래 깊은 종교적 확신을 가진 유대 애국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토라에 대한 열정도 강하였다.
그들은 토라를 위하여 싸울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던질 각오가 있던 자들이다.
셀롯당은 과격한 독립운동 단체로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달리 그들을 지배하는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만을 왕으로 인정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얻고자 했다 .
AD 6년 아켈라오 해임 후에 로마는 직접 유다를 통치하면서 유다인들에게 호적 등록을 하게 했다. 이것은 세금징수를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유다인들이 반발하면서 바리새파에서 분파하여 셀롯당이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셀롯당이 있다 .
나바테아 왕국(B.C 400 ~ A.D 160)
B.C 1세기 -A.D 1 세기에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국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라비아인들을 일컬어 '나바테아인 '이라 부른다.
나바테아 왕국은 B.C 6 세기초에 페트라 지역으로 이동하여 에돔 땅을 점령하면서 그곳에 살던 원주민인 에돔 사람을 유다의 남부로 쫓아내고 나바테아 왕국을 세운다
나바테아인 들은 왕조 역사 기간 동안 계속하여 유대와 갈등을 갖고 전쟁을 하였으며 공존하는 기간에는 요단 동편의 북부 지방 베레아와 데가볼리의 동부지역을 차지한다
B.C.169년에는 당시 나바테아의 폭군이었던 아레다 1세가 유대의 대 제사장 야손과 전쟁을 하였으며 B.C 96년에는 통치자 아레다 2세가 시리아 왕조 평화를 위한 중재안을 제안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어 계속하여 오보다스 1세(B.C 95-87)와 라벨 2세(A.D 70-106)가 나바테아 왕국을 통치하다가 라벨 2세가 죽자 로마에 의해 강제 합병된다
AD 106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인접국 파르티아(Parthians)에 대한 전쟁을 계획하면서 남쪽 지방의 안정을 위해 먼저 나바테아 왕국을 정복한다.
로마 제국에 합병된 이후 나바테아는 더 이상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고 로마에 흡수되어 나바테안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역사의 동질성을 잃어버린다 .
페트라(Petra, 셀라 ) : 나바테아 왕국의 도시
페트라는 바위라는 뜻으로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해발 950m의 산악도시이다
해안단구 위에 건설된 도시로 붉은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BC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 지역으로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는 지역이다.
페트라는 BC 400년 경 아랍 족의 하나인 나바테아인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으며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 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페트라는 동서 방향으로 모세 계곡(시크 계곡)이 관통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곡은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솟구쳤다는 곳 중의 하나다. 모세 계곡은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의 암맥을 가진 사암(砂岩)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때문에 페트라를 '빨간 장밋빛 도시'라고 부른다 .
AD 7세기 경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라는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발견하게 되었다.
성서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그 당시 절대 권력을 누리던 애굽의 파라오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에 이곳 페트라를 지나갔다고 한다.
여러 바위 유적지 중의 하나인 앗데이르는 정면을 기둥으로 장식한 모습이 인상적이며 3 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제4장 로마 제국 시대
1. 이두메(헤롯) 왕조(BC 63년~AD 6년)
1) 헤롯 안티파터 2세
안티파터 2세는 폼페이우스 편에서 권력을 확대해나가다가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가 집권하게 되자 재빨리 카이사르 편에 서서 막대한 뇌물을 갖다 바치고 카이사르에게 병력을 보내 그를 도움으로써 카이사르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에 이른다.
힐카누스 2세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설득해 카이사르에게 안티파터 2세를 유대 통치자로 삼아줄 것을 호소해 결국 안티파터 2세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기에 이른다.
한편 로마에 끌려간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유대 통치자의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카이사르에게 나섰지만 카이사르는 외면했다.
안티파터 2세는 힐카누스 2세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등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두 아들중 장남 파사엘은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장관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리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로마의 정국이 혼미해진 가운데 안티파터 2세도 독살당하고 팔레스타인의 권좌를 놓고 파사엘과 헤롯이 분쟁을 벌였다.
헤롯은 신속하게 로마의 돌아가는 판국을 주시해 안토니우스에게 재빨리 붙어서 권력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하스몬 왕조의 복권을 노렸다.
그는 사두개파들을 규합하고 파르티아의 후원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올랐다. 파사엘은 파르티아군에게 붙잡혀 죽었으나 헤롯은 겨우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BC 37년 안티고누스는 자신을 왕으로 새긴 동전을 발행하는 등 왕권을 행사했으나 곧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군을 격파하였고 안티고누스는 붙잡혀 처형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완전히 멸망한다.
2) 헤롯 대왕(BC 37~AD 4)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로마는 원로원 체제가 아닌 제정으로 바뀌게 되면서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에도 변화가 온다.
로마의 황제가 다스리는 식민지인 유대에 로마 황제는 통치자로 분봉 왕을 임명하고 동시에 총독을 보내어 정치와 군사를 맡기고 종교는 유대의 대제사장에게 맡겨 역할을 분담하게 한 것이다.
로마는 이두매 사람 헤롯을 분봉 왕으로 임명한다.
헤롯은 그의 아버지 안티파터 시절부터 놀라운 정치력을 가진 인물로 유대인들을 아주 잘 알았고 정치적으로 로마를 만족시켰다.
그는 로마에서 보낸 총독과도 잘 지냈으며 유대의 대제사장과도 무리없이 국정을 이끌었다. 헤롯의 통치는 주전 37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4년까지이다.
헤롯은 두 가지 건축 사업을 통해 유대와 로마 제국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헤롯은 그의 재위 18년째인 BC 22년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거대한 규모로 확장 중축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부분적으로 기초공사는 깊이가 45미터까지 내려 갔으며, 표면지역은 가로가 480미터, 세로가 300미터가 되었다.
헤롯의 또 다른 건축은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의 가이사랴 신도시 건설이었다.
헤롯은 해안가에 호화로운 왕궁과 큰 건물을 지었고 바다의 파도와 상관없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구를 건설했다.
가이사랴 신도시 건설은 헤롯 재위 28년에 완성되었고, 총 공사는 12년이 소요되었다.
성경은 헤롯을 베들레헴에 유아살해 명령을 내린 잔혹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분봉 왕 헤롯은 자기 외에 ‘유대인의 왕’을 인정할 수 없었다.
헤롯은 그의 10명의 부인 가운데 2명을 죽였고 3명의 아들과 처남과 처조부를 살해했다. 때문에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죽인 이 일은 헤롯에게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헤롯의 사후 유대는 그의 아들들에 의해 셋으로 분활된다.
아켈라오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통치자가 되고,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되고, 빌립 2세는 갈릴리 동북쪽 드라고닛과 베타니아, 골란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로마 제국의 산물 - 호적, 세리, 백부장과 천부장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제국 전체의 인구를 조사한 이유는 세금을 철저하게 거두어 들이기 위함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세금을 꼼꼼하게 잘 거두어 들이는 것이 황제의 중요한 일이었다.
로마 제국하에서 세리는 자국민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고, 과외로 징수한 것을 가지고 생계를 이어가는 형태를 띠었다. 때문에 세리는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로마 정부에 고용당한 사람으로 정치적인 앞잡이들로 여김을 받았고, 몹시 멸시받는 사람들이었다.
신약성경에서 로마 군단의 중추 뼈라고 할 수 있는 백부장이 등장한다는 것은 당시 유대가 로마의 속주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천부장(호민관, 지역사령관)은 고대 로마에서 군사적인 문제를 처리하거나 시민들을 위해 일했던 관리로서,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책에 속했다.
3) 헤롯 아켈레오(BC 4~AD 6)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레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다스렸다
잔인한 사람으로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순례객을 포함하여 3,000여명을 죽였다
요셉과 마리아도 아기예수를 데리고 이집트에서 유대 땅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않고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간 사실도 있다.
AD 6년 아켈레오의 폭군적인 잔인성에 유대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로마 황제를 찾아가 청원하였고 로마 황제는 대규모 폭동이 염려되어 헤롯 아켈레오를 파면하고 지방도시 비엔나로 보낸다.
이후 유대는 로마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고 코포니우스는 전권을 가진 첫 번째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유대 지방에는 최초로 로마의 총독 관구가 들어서고 과세를 하기 위해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참고로 본디오 빌라도는 5번째 유대 총독이다
4) 헤롯 안디바(BC 4~AD 39)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지역과 베레아 및 요단 동쪽 지역을 다스렸다.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아 부왕의 통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며 교활하고 잔혹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그의 잔혹성 때문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는 그를 '여우'라 불렀다.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혀서 끌려다닐 때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넘겨받아 질문하고 희롱했던 사람이다
AD 20년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인 게네사렛 호숫가에 수도를 건설하고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라고 명명했다.
디베랴는 헬레니즘 문화를 대표하며 주요 상업로로 통하는 도시로 높은 인구 밀도를 중심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어업과 상업이 번창하였다.
헤롯 안디바는 처음에는 아라비아 왕국 아레타스의 딸 나바티안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러니 이후 헤롯 안디바는 이복 형제 빌립 1세(헤롯 대왕과 대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네 1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빼앗아 결혼하는데 그는 불법으로 형수를 취하였다는 세례 요한의 비난을 받고 그를 감옥에 가둔다
헤로디아는 자신을 비난하는 세례 요한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빌립 1세와 사이에서 낳은 딸 살로메를 이용하여 춤을 추게 하고 그 댓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청한다
AD 39년 헤롯 안디바가 죽자 그의 영토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아그립바 1세에게로 넘어갔다.
3) 헤롯 빌립 2세(BC 4~AD 36)
헤롯 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요단 동북부 이두래 지방과 드라고닛, 아우라니티스, 가울라니티스, 바타니아 지역을 통치했다.
그는 비교적 안정을 누리면서 상업과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가 차지한 영토는 본래 유대인의 영토가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시리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었다.
헤롯 빌립 2세는 요르단 강 수원지 근처에 오래된 도시 파네아스를 세우고 이 도시를 가이사랴 빌립보라 명하고 수도로 정했다. 이 도시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곳으로 유명하다. 벳새다 역시 그가 세운 도시였다.
헤롯 빌립 2세는 세례 요한이 처형될 때 춤을 추었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하였으나 자손이 없었다.
AD 34년에 헤롯 빌립 2세가 죽자 그의 땅은 시리아에 합병되었다가 37년 헤롯 대왕의 손자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면서 유다에게 돌려졌다.
4)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44)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AD 37년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자신의 친구인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된 직후 갈릴리 북쪽의 작은 영토의 통치자로 임명받는다.
한편 헤롯 안디바가 나바티안 공주를 쫓아내자 아라비아 왕국 아레타스 왕은 분노했다
AD 39년 아레타스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위협을 느낀 헤롯 안디바가 로마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칼리굴라 황제 이후 즉위한 클라우디우스가 헤롯 안디바의 부정을 듣고 그를 분봉왕 자리에서 내쫓고 해임한다
이때 아그립바 1세는 클라우디스가 황제가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결과 갈릴리 지역의 영토를 얻었고 로마의 은총을 입어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영토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유다의 왕이 되었다.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 지도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사실은 그가 옛 하스모니안 왕조의 합법적인 계승자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그립바 1세는 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으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였으며, 종교 지도자들의 뜻에 따라 유대교의 적을 제거하고 유대교를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몇몇 사람을 죽였는데, 먼저 세베데의 아들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살해하였으며,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자 베드로까지 잡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아그립바 1세는 AD 44년 3년간의 짧은 통치 끝에 갑자기 벌레에 먹히는 사건으로 가이사랴에서 죽었다
5) 헤롯 아그립바 2세(AD 45~95)
유다의 마지막 왕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 누이인 버니게와 근친상간하여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D 53년 아그립바 2세는 헤롯 빌립 2세의 이전 영토와 디베랴를 포함한 갈릴리 일부를 얻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감독 권한을 받았으나 정치적인 중요한 역할은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
아그립바 2세는 AD 66년부터 시작된 유대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로마에 충성하였다. 그리고 AD 70년 로마에 의해 유대가 멸망할 때 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유대 멸망 이후 아그립바 2세는 로마의 행정관으로 지낸다
2.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의 멸망
로마는 헤롯 아켈라오가 죽고 예루살렘 지역에서는 더 이상의 분봉왕을 세우지 않고 총독을 임명하여 직접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뒤로 로마는 유대 지역 전체를 분봉왕을 통한 통치를 그만두고 총독에 의한 직접 통치로 바꾼다.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유대의 총독으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이후 본디오 빌라도를 보냈는데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수도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금고를 털자 유대 민중들이 항의하였고 빌라도는 군인들의 도음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가 황제 숭배를 강요하면서 시리아의 총독 페트로니우스를 시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워놓고 숭배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유대 민중들은 페트로니우스 총독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이자 총독은 간신히 시리아로 도망하게 된다.
AD 66년 플로루스는 로마에 바쳐야 하는 세금이 밀리자, 예루살렘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의 금화를 몰수해 세금으로 환원시킨다.
이에 유대인들은 플로루스에게 저항하면서 총독을 경멸하기 위해 구호금을 모금했다.
이에 플로루스가 이들을 잡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실시했고 곧이어 유대인들은 로마 정권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킨다.
네로는 시리아 민정 책임자였던 케스티우스 칼레스 총독을 예루살렘으로 급파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강경 대응에 다시 시리아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유대 전쟁이 된 것이다.
이 전쟁에는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가 참전하게 되었고 그들이 이후 네로에 이어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4년간 유대 전쟁 중에서 마지막 5개월이 가장 치열했다.
AD 70년 예루살렘은 도성 전체가 완전히 로마에게 무너져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성전기물들도 로마로 가져갔다.
끝까지 마사다 성채 안에서 저항하던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960명은 모두 자결함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유대 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산혜드린 공회는 없어지고,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도 모두 사라진다.
마사다 (Massada) - 고대의 산상 절벽 요새
마사다는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로마에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이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 "라는 뜻으로 死海文書가 발견된 쿰란 남쪽 51km 지점에 있다
꼭대기는 평평하고 주위는 벼랑인 지형(mesa)으로 배처럼 생긴 마사다는 사해의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사해 해면으로부터 434m이다.
주변 유대 광야의 산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으며, 정상은 넓은 평지(길이 600m, 폭 250m)를 이루고 있다 .
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제 1 성전(솔로몬 성전, BC 900 경 ) 때부터라고 하지만 , 이곳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 헤롯 대왕 (BC 37년~AD 4년 )의 궁전과 요새들 및 그리고 AD 72-73 년에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한 사건 때문이다.
맨 처음 이곳을 요새로 만든 사람은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더 얀네우스 (BC 103-76 재위 )이지만, 그후 마사다를 건설한 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헤롯이였다 .
그가 남긴 건축물들 가운데는 화려한 궁전 2채 (1채는 3층 건물)와 두터운 성곽 그리고 약 75 만ℓ나 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 탱크들에 연결된 수로(水路)들이 있다 .
유다 전쟁사에 따르면 제 1차 유대 전쟁 최종기(AD 66~73년)에 로마는 월등한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더불어 성전을 파괴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AD 66년 로마의 지배를 완강히 반대하던 유대교 분파 열심당 (Zealots)이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며 저장된 물과 식량 과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한다 . 그러자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하기 위해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로마 정예부대 10군단을 이끌고 마사다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한다 .
로마군은 2년에 걸친 정상 공격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요새 꼭대기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시키기 위한 공성퇴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거대한 경사로를 6 개월에 걸쳐서 축조한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1,000 명도 채 못되는 수비대는 1만 5,000 명이 넘는 로마군을 맞아 거의 2 년을 버텼으나 로마군은 요새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6 개월에 걸쳐 축조하여 마침내 수비대의 나무 방벽들을 불태우고 요새를 무너뜨리게 된다.
이때 로마군이 성벽이 파괴된 곳으로 진격해 올 바로 그날 (AD 73년 4월 15일) 밤에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모두를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한다 "내일 아침 로마 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 밤에 우리가 스스로 자유스럽게 영광의 죽음을 선택 합시다."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족의 가장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여 그 열 명이 나머지 남자들을 죽였고 남은 열 명이 한명을 추첨하여 아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한다 .
요새에 들어간 로마 군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수비대원들이 이미 자살해버린 사실을 발견하고 간신히 수로에 숨어 살아남은 부녀자와 어린이 7명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
많은 관심을 끈 발굴 유물들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 사람 이름이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로 , 마지막 남은 수비대원들이 먼저 죽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 마련한 제비뽑기를 하였던 물건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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