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족장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 통일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었던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는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고난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의 북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된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말년에 행하였던 악행, 즉 이방 신들을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하여 결국에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던 영향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단(Dan)과 베델(Bethel)에 금송아지를 섬기는 산당을 지어 백성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숭배하도록 하였고, 남 유다에서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 성전산 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남 유다에서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왕들이 나타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북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왕들이 많이 나타나서 나라를 부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성전의 문을 폐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왕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하나님의 앞에 악행을 자행하므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면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면서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들은 각 시대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잘못된 모습을 경고하기도 하고, 어떤 선지자는 자신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도 있었으며, 곧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회복의 예언들을 전하였던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선지자들 중에는 북이스라엘을 위하여 활동하였던 선지자가 있었으며, 남 유다를 위한 선지자, 그리고 이방 사람들을 위한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 : 호세아, 미가, 아모스
남 유다를 위한 선지자 : 이사야, 다니엘, 예레미야, 학개, 요엘, 스가랴, 스바냐, 에스겔, 말라기.
이방 민족을 위한 선지자 : 요나, 나훔, 하박국, 오바댜.
그리고 그 선지자들의 활동하였던 시기적으로 분류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BC 9세기 : 요엘, 오바댜
BC 8 세기 :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요나, 미가.
BC 7 세기 : 나훔,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포로 시대 : 다니엘 , 에스겔.
귀환 시대 : 학개, 스가랴, 말라기.
https://blog.naver.com/byunsdd/221522143360
http://blog.naver.com/supax/220591274623
오바댜
오바댜 선지자가 활동하였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남 유다의 선한 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왕이 된 여호람은 북이스라엘의 악명 높았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던 아달랴와 결혼함으로써 남 유다 왕국에 많은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여호람 왕은 자신의 왕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형제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유다 땅에서 그의 아내가 가지고 들어 왔던 바알숭배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에돔은 남 유다의 속국이었는데 여호람 시대에 독립하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과 아랍 사람들이 왕궁을 침범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까지도 일어났었으며 이때 왕자까지도 납치하여 갔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선지자 오바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며,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요엘
선지자 요엘이 활동하였던 시기의 역사적 배경은, 선지자 오바댜의 역사적 배경 직후인 것 같습니다. 여호람 왕이 죽자 그의 아내였던 아달랴는 왕자와 손자들을 죽기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학살을 당하였던 그의 손자 가운데 요아스만이 여호시바에 의해 구출되어 살아남아 있다가 여호시바와 결혼한 대 제사장인 여호야다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추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영향을 받아 요아스 왕은 우상 숭배를 금지시키고 모세의 율법에 따른 제사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선지자 요엘은 남 유다를 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는 남 유다의 웃시야 왕, 요담 왕, 아하스 왕, 그리고 히스기야 왕 시대에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부터 시작하여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할 때까지 약 40년간 사역을 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이때에 남 유다에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는 물질적으로 나라를 부흥 시켰으나 나라에는 도적이 들끓었고 종교적으로도 부패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음행이 창궐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뒤 왕위 쟁탈전과 정치적 음모가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백성들은 더욱 탐욕과 착취로 타락하게 되었다가 결국 BC 722년에 앗시리아(앗수르)에게 점령당하여 되었으며 호세아는 앗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 아모스는 남 유다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역은 북이스라엘에서 하였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사역하였던 시기는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다만 아모스는 호세야보다 먼저 선지자로 사역하였습니다.
요나
선지자 요나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던 니느웨는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앗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앗시리아에서는 정치적으로 후계자 선정 문제를 놓고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는데 아스루단 3세가 앗시리아의 왕으로 오르는 후에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있을 때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열병이 유행병으로 돌고 있었으며 때마침 일어난 일식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민심이 흉흉하였을 때였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북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시기적으로는 허세아가 사역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 때에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는 약 60년 동안 남 유다 왕국에서 선지자 사역을 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30년을 더 남 유다에서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웃시야 왕 시대에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인하여 번창하게 되어 요담 왕 시대에는 암몬으로부터 3년간 조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의 아하스가 왕이 되어 통치하게 된 후부터는 여호와의 길을 떠났으며, 친앗시리아 정책을 펴면서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전 문을 폐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악행을 저질렀던 아하스 다음으로 왕이 된 히스기야 왕은 폐쇄되었던 성전의 문을 다시 열었으며 다시 모세의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남 유다 왕국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할 기세를 보이다가 히스키야가 죽은 후 다음으로 왕이 된 므낫세 왕 시대에는 또 다시 우상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때에 수없이 많은 무죄한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므낫세 세력에 반대하다가 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 미가는 남 유다의 요담 왕, 아하스 왕, 그리고 히스기야 왕 시대의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이며 미가는 이사야 보다는 더 젊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미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앗시리아가 세력을 얻고 자기의 군대를 몰아 세계정복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위의 모든 나라들은 앗시리아의 위협 때문에 떨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이 이미 앗시리아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 후로부터 10년 뒤에는 북이스라엘이 마침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던 때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선지자 미가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하여 동시에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습니다. 미가는 선지자들 가운데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동시에 하나님의 경고 메지지를 전파하였던 유일한 선지자였습니다.
나훔
선지자 나훔이 기록한 “나훔서”를 요나서의 속편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나서와 나훔서, 이 두 책들은 같은 윤리적 맥락에서 니느웨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으며,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를 기록했다면,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선지자 스바냐는 남 유다의 요시아 왕 때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기록한 스바냐서는 요시아 왕이 남 유다를 종교적으로 개혁하기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요시아 왕에 의해 이미 폐지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선지지로 부름을 받기 이전에 살던 시대는 나훔이 살던 시대와 같은 시대로 히스기야 왕 이후의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고 있었을 시대였습니다. 므낫세 왕의 통치는 경건한 부왕 히스기야를 따르지 않고 그의 조부인 아하스의 길을 따라 악을 자행하였습니다. 성전 안에 바알 제단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힘놈 골짜기에서 그의 자녀들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그의 아들로서 왕이 된 아몬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계속해서 악을 자행해 왔지만 2년 만에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하박국이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시기는 신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언제까지 부패한 정치가 계속되어 무죄한 백성들을 착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통스럽게 질문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김 시대(BC 608~600년경)로 보고 있습니다.
요시야왕은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무리하여 자신의 죽음을 빨리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둘째아들 여호아하스가 남 유다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이집트의 왕 느고에 의해서 폐위되고 이집트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곧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 여호야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엘리야긴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여호아하스의 두 살 위의 형이었으며 25세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며 통치에 있어서도 무능력하였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예언서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 유다 왕 요시야가 왕이 된 지 13년째가 되던 BC 627년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갈 때까지 사역하였습니다.
여호야김 4년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시기를 요시아의 날로부터 그때까지 그에게 나타낸 모든 예언을 두루마리를 취하여 기록하라고 하신 명령에 의하여 예언서를 기록하였는데 그의 서기관이었던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술을 받아 적은 기록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박국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하였던 선지자로써 남 유다 왕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활동하였던 선지자입니다.
남 유다 왕국이 신흥제국인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함으로써 유다의 왕들과 수많은 지식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이때에 바벨론으로 왕과 그리고 지식인들과 함께 끌려갔었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예언자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 했을 때 그 자신과 세 친구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다니엘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라기보다는 예언자로써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갈 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의 명령에 의해서 유대 땅으로 돌아 올 때까지 약 70년을 사역하였습니다.
다니엘은 3개의 큰 제국의 시대를 지내면서 예언자로 사역 하였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들은 메데 파사, 희랍(그리스), 로마의 흥망성쇠와 그 후의 세상열국,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예언자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제사장 출신의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과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예언활동을 펼친 반면, 에스겔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이런 사건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이와 같은 일들을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과 관련시켜서 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유다 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었는데 이때가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약 11년 전 쯤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던 유다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을 때 활동하였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 학개, 스가랴와 말라기입니다.
학개
유다 백성이 세 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것처럼 그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로 귀환 할 때도 세 번에 걸쳐 귀환하였습니다.
첫 번째 귀환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한 직후에, 스룹바벨에 의해 인도 되어졌고, 두 번째 귀환은 이보다 80년이 흐른 뒤 아닥사스왕 7년인 BC 458년에 에스라에 의해 인도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귀환은 두 번째 귀환이 있은 후 13년이 지난 뒤인 아닥사스왕 20년, 즉 BC 445년에 느헤미야의 인도를 받으면서 귀환하였습니다.
귀환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로 알았고, 곧 재건사업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은 귀환 첫해 7월에 시작되었는데 기초공사는 빠르게 잘 진행되어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도 성전 재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였지만 유다 사람들은 반대하였는데 이와 같은 갈등에 의하여 성전재건은 더 이상 진해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초 작업만을 마친 채 16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다리오 왕 2년이 되던 해에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학개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학개서입니다.
스가랴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가입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네 번에 걸쳐서 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 계시는 BC 520년 다리오 왕 2년 8월에 임했으며, 두 번째 계시는 첫 번째 계시가 있었던 때보다 3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시는 2년이 지난 BC 518년 다리오 왕 4년, 9월에 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계시는 BC 480년 이후에 임하였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자로, 하나님께서 중단된 성전 건축에 대한 촉구하심을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BC 515년 3월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말라기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의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 말라기서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유다 땅으로 귀환한 후에 기록된 예언서입니다. 이때에는 이미 재건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형편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와 비슷하였습니다.
말라기서의 내용면으로 보게 되면 종교적, 사회적 타락과 퇴보,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생활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포로 생활을 하다가 유다 땅으로 돌아와 살기 시작한 직후에 볼 수 있었던 시대상에서 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처와 기대를 양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망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이 재건되면 메시야왕국이 실현 되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게 되지 못하자 실망하여 냉소주의와 불신앙이 온 유대 땅에 팽배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절망에 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각성 시키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출처 : https://blog.daum.net/jesus-1025/13414389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yunsdd&logNo=221522358491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구약 중간사 연대표 (0) | 2022.04.29 |
---|---|
다니엘의 세계사 전개 및 70이레 예언 (0) | 2022.04.28 |
성경 예언의 이해 (0) | 2022.04.28 |
이스라엘 유배기의 역사 (0) | 2022.04.28 |
선민 역사에 영향을 미친 고대 제국들 (0) | 2022.04.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