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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

by 【고동엽】 2022. 4. 21.

이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

                              

                             신성종 <대전 월평동산교회 담임목사>

 
이적이란 한 마디로 말해 종교적 현상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적은 신앙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타난 이적들을 부인했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부인했고, 석가도 외적 현상으로서의 이적을 부인했다. 모하메트도 근본적으로 부인했다.

주전 1세기 전에 살았던 키케로는 과학적 입장에서 “아무 것도 원인 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종교적 현상으로서의 이적을 부인했다. 솔직히 말해 현대인 대부분은 이적을 부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이적은 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고,지금도 이적은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이적이란 무엇인가? 이적은 크게 네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무신론적·현상학적·합리주의적·신앙적 관점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네 번째인 신앙적 관점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적을 독자들과 함께 탐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들에게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이적과 과학과의 관계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이란 본질적으로 현상을 중심으로 할 뿐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을 취급하기 때문에 이적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인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대는 과학만능시대이기 때문에 과학을 영원한 법칙,또는 불변의 법칙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보면 1637년 뉴톤의 만유인력이 발표되면서 자연의 법칙으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게 됐다. 따라서 자연 법칙 밖의 이적은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하게 됐다.

그러나 뉴톤의 법칙은 1900년 막스 푸랑크의 양의 이론이 발표되면서 깨지기 시작한데 이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면서 과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연의 사건들을 모두 인과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따라서 과학과 성경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신앙적 관점에서만 다루려고 한다.


예수님은 왜 이적을 행하섰는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생각할 때 흔히 하나님 아버지는 엄한 분이고 예수님은 자애로운 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벌하시지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신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엄하시지만 성모 마리아는 자애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성경적인 근거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예수님께 직접 알리지 못하고 마리아에게 고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그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예수님께 직접 아뢰는 것은 어려우니까 마리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도와달라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생각은 다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엄하시고 예수님은 자비로우신 것이 아닙니다. 엄하신 것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이고 자비로우신 것도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라는 말은 일치했다는 뜻입니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병을 주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예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벗어버려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께 떡을 구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뱀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생선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어야 담대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어야 병고침을 구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믿어야 복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행적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행위와 그의 됨됨이는 별개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외적인 행위와 그의 내적인 됨됨이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 아이는 공부는 잘하지만 사람은 별로라든가, 저 아이는 외모는 잘생겼지만 성격이 나쁘다라든가, 저 사람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버한다는 식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반드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모차르트는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내 손가락을 보지 말고 내가 가리키는 달을 바라보십시오. 저는 추한 사람이지만 제 음악은 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음악을 많이 작곡했습니까?
그러나 정작 모차르트라는 사람은 경박하고 추잡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영화는 모차르트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보는 관점으로 전개된 영화입니다. 영화상에서 살리에리는 당시의 천재 음악가로 소문난 모차르트를 자기 눈에 보이는 인간 모차르트와 그의 속에서 나오는 음악을 조화시키지 못합니다. 자기 눈에 비치는 인간 모차르트는 참 경박하고 예의도 없고 교만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 속에서 천사와 같은, 천국과 같은 음악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 뒤에, 자신의 재능 뒤에, 소유 뒤에 숨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대표하게 하려고 하지 자신의 참모습은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누구인가 하는 것을 그대로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은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누구이신가, 어떤 분인가를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이적과 기사가 불가피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이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증거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길게 설명하시지 않고「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러한 행적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알려면 예수님의 행적을 봐야 됩니다.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예수님의 이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신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모든 이적, 기적, 병고침을 제외해 봤더니 남는 것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의 이적에 대한 기사는 어떤 포장을 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이 없이는 예수님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행하심은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본질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41절을 보시면『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시는 것에서부터 이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적은 예수님의 사랑, 긍휼히 여기심의 연장선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에도 위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는 얼마나 큰 위력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가 민망히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며, 예수님의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민망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흘러가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가 병자를 고친다든가, 예언을 한다든가, 영적인 능력을 경험하는 것을 하나의 별도의 일로 생각하면 안 되고 은사와 열매를 별도의 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긍휼함은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능력을 행하고 은사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연장선에서 우리가 섬기고, 기도하고, 기도가 응답되고, 봉사하는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에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묻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뜻에 대해서는 아직 모릅니다.『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이것은 우리 모두의 질문 아닙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과연 그 능력을 사용하여 주실지 알지 못하는 데에서 우리의 고민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사실을 질문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나이까?’
‘내가 무엇을 행해 드리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뜻이 여기 어디에 있나이까?’
이것을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문둥병자가 했던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께 여쭤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내가 원한다는 예수님의 뜻을 아는 데에서부터 믿음이 비롯되는 것이고, 그 믿음이 역사해서 놀라운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에 힘을 쓰고,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몸부림을 칩니까? 때로는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금식을 하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기다리는 이유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말씀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는데 모든 말씀은 나중에 듣더라도 지금 한마디, 지금 필요한 한 마디라도 우리가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예배를 거르려고 하지 않고, 기도를 쉬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만 마디를 해주는 것보다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을 듣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람들의 말은 만 마디를 들어도 나를 살려줄 수 없고 내 운명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게 침묵하실까, 그것처럼 답답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두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우리가 기다리노라면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서 기다릴 때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한 마디 말씀이라도 족합니다.「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제가 미국에서 본 한 교회의 이름이 ‘말씀만 하옵소서 교회’였습니다. 정말로 기도의 응답을 받은 교회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교회’ 교회 이름만으로도 은혜가 되었는데 그게 우리의 기도 내용인 것입니다.「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 이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신성종<대전 월평동산교회 담임목사>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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