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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 14 강 식사 시간에

by 【고동엽】 2022. 4. 15.
제 14 강  식사 시간에

룻기 2:14∼16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대지는 14절 상반부로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친절이 기록되어 있고, 둘째 대지는 14절 하반부로 보아스의 친철에 대한 룻의 반응이고, 셋째 대지는 15, 16절로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지시한 내용입니다.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14절 상반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친절을 살펴봅니다.
 2: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보아스가 룻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룻이 베는 자 곁에 앉았다는 말씀으로 보아 아마도 이 식사는 보아스와 일꾼들이 한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 상반절에는 식사 시간에 나온 메뉴가 세 가지 있습니다. 떡과 초, 그리고 볶은 곡식입니다. 떡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입니다. 초는 신포도주를 말합니다. 이 초에 떡을 찍어 먹으면 떡이 부드러워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였습니다. 십자가 형벌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바로 이 신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요 19:28-30,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떡과 더불어 볶은 곡식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한 양식입니다. 그런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니다.
 삼상 17:17,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                 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삼상 25:18,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                 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                 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삼하 17: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친절은 동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리로 와서," "먹으며," "찍으라." "볶은 곡식을 주매."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 곁에 많이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14절 하반부에는 보아스의 말에 룻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반응이 나옵니다.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보아스가 친절을 베풀어줄 때에 룻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아닙니다"하고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3절에서도 룻은 보아스가 베푼 은혜를 감사히 받았습니다.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히 받겠다는 말입니다.
 룻이 어디에 앉았습니까? 보아스 곁에 앉은 것이 아니고, 베는 자 사이도 아니고, 베는 자 옆에 앉았습니다. 룻은 자기의 위치를 지킬 줄 알았습니다.
 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룻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얼마나 만족했겠습니까? 목이 갈할 때는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마셨으니 또한 얼마나 시원했겠습니까?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들이 열 있는 사람하고 돈이 십억이 있는 사람하고 누가 더 만족할 것 같습니까?" 그 대답은 아들이 열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까요? 열 아들이 있으면 더 이상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돈은 십억이 있어도 만족을 모릅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이제 그만 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만족을 느낄 때 가능합니다. 작은 일에도 만족하시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이 보아스가 베푼 풍성한 식탁에 참석해서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벳새다 들판에서 베푸신 역사를 생각해봅니다. 벳새다 들판에 모인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얼마나 남았다고 했습니까?
 눅 9: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우리 하나님은 은혜에 자리에 참석한 자들에게 이와 같이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룻이 먹고 남은 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2:18,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룻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잘 싸두었습니다. 불쌍한 시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나오미를 생각하는 룻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지시합니다.
2:15∼16,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아직 보아스와 일꾼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제일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앉아서 쉬고 먹고 대화하고 시간을 보냈으니까 또 열심히 일해야지요. 얼마나 부지런합니까? 사람이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다른 사람에게 돕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다가도 그 마음이 없어집니다. 룻처럼 열심 있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피곤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나와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아름답고 갸륵하게 보시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돕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실 것입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려고 일어서니까 보아스의 마음속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일꾼들에게 명하였습니다.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본시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밭의 주인이므로 주인의 권한으로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룻을 책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지시를 내립니다.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룻이 넉넉히 주울 수 있도록 단에서 이삭을 일부러 빼놓으라고 했습니다. 또 룻이 일하는 것에 대해 "꾸짖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룻이 한나절을 주웠는데 17절을 보니까 한 에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에바라면 당시 사람들의 반 달치 삯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보아스가 친절을 베풀어주어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보아스와 같이 친절을 베풀어주는 분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여러분도 보아스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눅 10:30 이하를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한편으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거룩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지면 자기에게 주어진 귀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책임이 있는데 시체를 만지면 안돼지." 그러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계속해서 읽어봅니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 사람도 역시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보기는 보았는데 반응이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 피해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와 같이 되라고 하십니까? 사마리아 사람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보고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기는 보았는데 불쌍히 여기는 훈련이 안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보고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불쌍히 여길 줄 아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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