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축하예배]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장 1-17절)
저는 족보에 대하여 꽤 신경을 쓰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의 성이 ‘석(昔)’씨인데, 보통 우리나라에서 석씨라 하면 주로 ‘돌 석(石)’ 자인 줄로만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제 친구들에게 “나는 ‘돌 석’ 자가 아니다.”라고 누차 해명해주어야 할 경우가 자주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 ‘예 석’ 자를 쓰는 ‘경주 석씨’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성이며 가문인지에 대해서도 늘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릴 때 언젠가 큰집에 갔을 때 지금은 소천하신 제 큰아버지께서 당시 소장하고 계시던 우리 집안의 족보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권위(?)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해서 우리 가문의 내력에 대해서 직접 알아볼 수 있었는데, 결과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었습니다.
좋은 것이란 우리 가문이 정말 ‘뼈대 있는’ 왕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신라 제4대 석탈해 임금이 바로 우리 가문의 시조이며, 그 후 신라 시대에 소위 진골이라 불린 ‘박, 석, 김’ - 바로 이 세 왕족 성씨에 들어가는 ‘예 석’ 자가 바로 우리 ‘경주 석씨’였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꺼림칙한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 가문의 시조께서 무슨 동해 바다에서 건져낸 알에서 태어났다는 그 출생 설화도 황당한 것이었지만, 나중에 이 석탈해가 출세하기 위하여 했다는 일도 정말 남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알에서 태어났으니까 무슨 든든한 집안이나 사회적 배경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일단 집 한 채부터 장만했어야만 했는데, 우리 시조께서는 순전히 사기행각으로써 어느 부자의 멀쩡한 집을 빼앗아버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창피스러운 이야기가 왜 가문의 족보에까지 기록으로 남아 전해져오고 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지만, 하여튼 처음에는 왕족 핏줄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수치스러운 혈통으로 남게 되어버렸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고 우리 주님의 육신 혈통의 족보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여기서 “세계(世系)”라고 번역된 말은 물론 ‘세계(世界)’(world)가 아니라 ‘이어지는 대(代)’(generation) 즉 ‘족보’라는 뜻에서 쓴 단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족보는 단지 가문을 따지거나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신약 성경 첫 열일곱 절에 기록된 말씀은, 우리 주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구속역사 속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복음서의 첫머리에서부터 정확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바로 이 예수님의 족보가 명백하고도 권위 있게 증거해주는 두 가지 사실을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되고야마는 것을 증거해줍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마태복음의 족보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한 데서부터 나타납니다.
이 족보에 예수님의 육신적 조상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름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아브라함과 다윗’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족보를 종결짓는 17절에도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각 부분에 “열 네 대”의 세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세 부분으로 나누어짐에 있어서도 역시 아브라함과 다윗이 각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예수님의 조상들을 매 세대마다 빠짐없이 총망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헬라어의 과용적인 용법에서는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표현은 ‘어느 아버지가 어느 아들을 낳고’라는 뜻에서도 쓰이지만 때로는 ‘몇 대 전의 아무개가 몇 대 후의 누구의 조상이 되고’라는 뜻으로도 흔히 사용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 기록된 족보는 다 직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몇 대를 건너뛰는 경우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바로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조상 중 일부는 생략하면서 일부러 이 족보를 각 부분에 14대 씩 들어가도록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읽는 사람들이 외우기 쉽게 하자는 뜻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과 다윗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윗’이란 이름을 히브리어로 쓰면 세 개의 자음이 나오는데 그 자음 하나하나가 대표하는 숫자를 합치면 바로 ‘14’라는 숫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상의 몇 가지들을 종합해볼 때 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아브라함과 다윗’ 이 두 사람이 극단적으로 강조되고 있음이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아브라함과 다윗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두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받은 민족이 예언되었으며 또한 그를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 약속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으로써, 이 주님을 통하여 참된 선민 공동체의 축복, 즉 택자 구원이라는 축복이 성취되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에게는 특히 그의 자손이 영영히 왕권을 누릴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예수께서 왕 중의 왕이신 메시아로 오심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까지의 역사를 보면, 이 두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이 현실적으로 성취되기 어려워 보였던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특히 이 본문에 나타나는 대로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가 그 대표적인 시기였습니다.
바벨론으로 강제 이거당한 일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란 누구의 눈에도 다 끝장난 헛꿈처럼 보였을 것이며 이스라엘은 이제 아주 재기불능에 빠졌다고 여겨졌을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남의 밑에서 종살이하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처지에 어찌 아브라함의 자손이 천하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되며, 바벨론과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강력한 제국들의 통치 아래 속국이 된 나라에 어찌 다윗의 왕가가 부활될 가망성이라도 남아있어 보였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번 내려주신 약속은 이런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완전히 성취되어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통하여 바로 이 점을 똑바로 확인하고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복 주시마고 한번 약속하셨을 때에는 당신의 그 귀하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시면서 그 약속을 이루어주고야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지혜와 공의로 다스릴 왕을 보내주시기로 일단 한번 약속하셨을 때에는 결국 “이새의 줄기와 뿌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으로 보내심으로써 그 약속을 끝내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그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성취된 최고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고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성도들을 이 장망성 세상으로부터 끝내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는 심판주로 다시 재림시켜 주시고, 그때 우리는 그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하여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세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살았듯이 저와 여러분은 장차 심판주로 반드시 다시 오실 이 주님을 소망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 같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성취되기까지는 이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생략된 수많은 세대들이 흘러갔던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역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사람들이 비웃듯이 이미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해주신 약속이 끝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택자 구원의 완성 역시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다윗 왕가에 주어진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오히려 나라가 분열되고 백성이 적국의 포로로 잡혀가는 절망적인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 역시 이 세상의 온갖 불신권력과 우상종교와 이단기독교로부터 집중포위공격을 당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만 보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에 이거’하는 환난을 통과하기까지 하면서도 결국 ‘왕 중의 왕’은 세상에 오고야 마셨으니, 주님 다시 오실 날 저와 여러분이 그 ‘온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모시고 천상교회에 입성하게 되는 최후승리 역시 반드시 누리게 되고야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이 이루어졌는데 두 번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복잡한 역사가 얽히고설키어도 결국 주님의 재림과 택자 구원의 약속은 아무 차질 없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 것을 이 예수님의 초림의 역사를 통하여 확실히 믿고 끝까지 굳게 붙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원 받는 백성이 되는 길이 모든 사람에게 다 평등하게 열려 있음을 증거해줍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에게가 아니라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 예수님의 족보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족보에는 좀 특이한 기록들이 몇 번 나타나는데,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한 것과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라는 기록들입니다.
또 6절에도 보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족보에 네 명의 여자 이름들이 나타나는 것은, 족보를 따질 때 남자의 성만 따라가는 우리가 보기에도 좀 의외의 내용이지만, 특히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더욱 기절초풍할 일이었습니다.
헬라사회에서나 유대사회에서나 공히 여자는 어떤 법적 권리란 것이 문자 그대로 전무했습니다.
여자는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었고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아버지나 남편의 권위 아래 철저히 종속되어 있었으며, 실상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 남자들은 자기가 종이나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매일 감사기도를 드렸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네 명이나 들어간 것만 해도 기가 막힐 일이었는데, 그 네 명의 여자들이 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다말”로 말하자면 창녀처럼 변장하여 자기 시아버지를 속이고 유혹하여 간음하여 자식을 낳게 된 여자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스파이를 도와줌으로써 나중에 여리고 성이 망할 때 구원받게 되기는 했지만 원래는 기생 출신이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즉 밧세바는 남편을 두고도 다윗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조상이 만일 자기 가문에 있었다면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족보에 기록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정말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집안의 역사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빼어 버리고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들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뿐 아니었습니다.
이 네 명의 여자들은 모두가 다 이방 여인들이기도 했습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여인들이었으며, 룻이 모압 여인인 것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밧세바 역시 남편 우리야가 헷 사람이었으니 그녀 역시 그럴 가망성이 높은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들의 피가 섞인 경우가 많이 있겠지만, 그런 사실을 일부러 자기 집안 족보의 기록에까지 일부러 남겨 놓으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의 족보에는 바로 이런 여인들의 이름이 뚜렷하게 기록된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던 사회에서, 그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요 특권과도 같았던 족보에 여자 이름들이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증명하고 있는 족보에 혈통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이방인들의 이름이 섞여버렸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이르게 되는 족보에 오히려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나 순결치 못한 과거가 있었던 여인들의 이름이 특별히 돋보이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족보는 이처럼 결코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서는 특히 아니 될 사람으로만 보이는 이름들이 들어가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야말로 바로 그와 같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장벽들을 완전히 허물어뜨린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와 같은 차별은 인간 사회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힘 있는 자는 약한 자를 차별하고, 유대인은 이방인을 멸시하며,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 있던 이런 장벽들, 지극히 당연한 줄 알았던 이런 차별들을 완전히 제거해버리셨습니다.
높고 높은 보좌에 계셔야 마땅하실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까지 오셨는데, 그 예수님 앞에서 그 어느 인생이 감히 누가 좀 더 더 잘나고 누가 좀 더 높고 누가 좀 더 착하고를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실로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사람은 스스로 자랑할 만한 아무 이유가 없으며 특히 남과 비교해서 스스로 교만할 만한 아무 근거가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로마서 3장 22절과 23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 곧 차별이 없는 의”를 이 예수님 탄생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알 수 있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전에는 서로가 좀 더 잘났다고 나누어지고 다투기만 하다가, 이 땅에 탄생하신 주님을 뵙게 되는 순간 우리는 바로 나 자신이 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아니 남들보다 더 못한, 아니 더 악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제법 자랑할 만한 인생인 줄로 자부하다가 이제는 나라는 존재가 도무지 하나님의 영광에 스스로 가까이 나아갈 길이 없는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중에서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차별이 없는 의’ 곧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얻게 되는 이 칭의를 발견하고 나누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불공평함을 원망하면서 평등을 바라고 추구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못하고 내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더 공부를 못하고 나보다 내 이웃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만이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만 심리를 부채질하여 나타난 공산주의는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평등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가난하게 되고 모두가 함께 독재자의 종으로 비참하게 낮아지는 평등만을 낳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다 꼭 같이 행복하게 되는 평등이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전혀 실현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평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는 유식자나 무식자나 권력자나 서민이나 할 것 없이 일단 모두가 다 겸손해야 할 꼭 같은 죄인의 처지에 있을 뿐임을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빈부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꼭 같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스러운 천국백성이 될 수가 있는, 이 놀라운 평등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아서 천당에 가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평등이요 완벽한 평등이 아니겠습니까?
금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세상에서 부하고 높은 자, 세상에서 남보다 선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열린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에게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다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이 성탄의 증거를 통하여 분명히 확신하고 이 축복을 자신의 영원한 보배로 만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 민족도 별 것 아닌 족보에 꽤나 신경을 쓰는 축에 들어가지만, 옛날 유대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했습니다.
힐렐이라는 유명한 랍비는 자기가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다윗 왕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항상 자랑했었고,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자기의 자서전을 쓰면서 제일 먼저 자신의 혈통부터 소개했었습니다.
이 같은 유대인들의 족보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 공적 문서로 보관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과 에돔인의 혈통을 반씩 받고 타고 태어난 헤롯 대왕은 자신의 이름이 그런 공식 전통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격지심으로 속을 태우다가 결국은 그 산헤드린 공회에 보관된 모든 족보를 파기해버릴 것을 명령했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세상 족보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이미 상식화되어 있고 자기가 자기 가문 시조의 몇 대 손인지를 따져보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제대로 알고 끝가지 소중히 여겨야 할 족보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과거의 족보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 이후의 족보는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족보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족보는 바로 우리 주님의 탄생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모든 성도들의 이름으로 채워지는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 족보는 계속 연이어 기록될 것입니다.
주님 재림의 약속을 확실히 믿는 자,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을 확실히 소망하는 자 - 바로 이런 성도의 이름들이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그 생명책의 족보에 분명히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찮은 세상의 족보는 정말 신경 쓸 필요 없지만, 이 천상의 족보에는 정말 우리의 이름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골이고 왕손이고 다 쓸데없는 소리지만, 이 족보에만큼은 저와 여러분들과 우리 자녀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의 양자로, 주님의 신부로 꼭 올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이 재림 약속에 믿음과 신자 구원의 소망 가운데 받아들임으로써, 이 영생의 가문에 그 이름을 틀림없이 새길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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