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서 퍼낼 보화! (눅 2;1-6)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성탄절은 무슨 날이지요?> <산타클로스의 생일입니다>라고 대답한 학생이 64%였습니다. <그러면 성탄절에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로부터 무슨 선물을 받고 싶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핸드폰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CD 게임이었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성탄절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가장 많은 대답이 크리스마스트리 꾸미기였습니다. 두 번째가 영화 보러 가기였습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성탄절이면 호텔 예약이 제일 많은 때입니다. 우리나라 콘도 예약 율이 가장 많은 날입니다. 성탄 이브는 모두 술 마시고 노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인 데 주인공 예수님은 없습니다.
아들, 딸을 잘 기르고 결혼을 시켜서 손자, 손녀까지 둔, 홀로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생일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모여서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다 모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딸, 손자, 손녀가 다 온다고 하니까 아침부터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자녀들이 찾아와서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TV를 보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났는데도 그 많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 가운데 상을 치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70이 가까운 어머니 혼자 부엌에서 덜거덕거리며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으면서도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고, 어머니에게 설거지까지 시켰습니다.
누구 생일입니까? 누가 누구를 축하해 준 것입니까? 오늘 날 성탄절이 그렇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에는 오직 예수를 생각하고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 빼놓고 무슨 성탄절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총독 가이사 아구스도는 통치하는 이스라엘을 파악하려고 호적신고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호적 신고는 본적지에 하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지금 나사렛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으로부터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호적 신고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여관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에 예수님을 해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뉘울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 누우신 곳이 구유였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그 분에게서 우리가 퍼내야 할 보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배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배입니다. 보배가 구유에 누워있습니다. 구유에서 퍼내야 보배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보배입니까?
1. 겸손
성탄절에 우리는 구유에서 겸손이라고 하는 보배를 퍼내야 합니다. 석가모니는 궁중에서 태어났습니다. 요즈음 보통 아이들은 병원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못 할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핵심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29)
이 세상에 자기 제자 발을 닦으신 스승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Empire state building이었습니다. 119층입니다. 그 후 더 높은 빌딩이 시카고에 생겼습니다. Sears Tower입니다. 그보다 더 높은 것은 동경 타워입니다. 지금은 토론토의 CN Tower가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만입니다. 고집입니다. 자기주장입니다. 양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 낳으신 분이십니다. 겸손의 표상입니다. 성탄절에 구유에서 퍼내야 할 보배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세 친구를 찾아와 소원을 물었습니다. 하나씩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물은 것입니다. 천사가 첫 번째 사람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스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약속대로 스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킹 왕이 되고 싶습니다.> 천사는 약속대로 그 사람을 킹 왕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두 친구위에 있고 싶었습니다. 천사가 무엇을 들어 주었으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둘 다 되고 싶었습니다. 스타도 되고 킹도 되고 싶습니다.> 천사는 그의 소원도 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스타킹이 되어 양말신세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올라가려고 합니다.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겸손하지 않습니다.
성탄절에 예수님의 구유로부터 겸손을 퍼내야 합니다. 금세기 최고의 영성 신학자로 추앙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필립 얀시 목사님입니다. 그는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지셔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으로 오실 때 마구간에 오신 것은, 마구간에 오실 때 구유에 누우신 것은 겸손 중에 겸손이요, 낮아짐 중에 낮아짐이요, 작아짐 중에 작아짐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문학가 C.S. Louise는 이런 진지한 말을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겸손해지고자 한다면, 내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겸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마구간에서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하루에 한 번씩 바라보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농구 코치로 유명했던 John Wooden 은 선수들에게 이런 훌륭한 조언을 하였습니다.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겸손 하라. 명성은 인간이 주는 것이니, 감사하라. 자만은 자아가 주는 것이니, 조심하라>
우리는 금년 성탄절에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주여! 나로 하여금 낮아 질대로 낮아지게 하옵소서. 잃어버렸던 겸손을 찾게 하여 주옵소서>
2. 희생
성탄절에 구유로부터 퍼내야 할 두 번째 보화가 있습니다. 희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자체가 희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희생하러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삽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죄 사함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대속물이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였습니다. 짐승의 죽음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짐승 피는 일시적이 피 이기에 일 년에 한 번씩 꼭 반복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원한 피 이기에 단번에 죄 사함을 해결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희생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구유에서 퍼내야 할 보배는 희생입니다.
어느 분이 너무나 이기적인 이 세상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을 원하지 않고 희생하는 사람은 원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Ministry that costs nothing accomplishes nothing)(J.H. Jowett)
미국의 훌륭한 설교자인 W. Wiersbie는 희생에 대하여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어떤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피 흘림이 있어야만 합니다.>(If there is to be any blessing, there must be some bleeding)
옛날 페르시아에 사이러스(Cyrus) 왕이 전쟁 중에 적국 왕자와 그 부인과 아이들을 생포해 왔습니다. 사이러스는 그들을 죽이기 전에 물었습니다.
<만일에 내가 왕자인 당신을 살려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아내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왕은 이 말 한 마디에 감동이 되어 그들을 다 풀어주었습니다. 살려 주었습니다. 그 날 밤늦게 집에 돌아온 왕자는 살아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기뻐서 축하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사이러스 왕이 적국의 왕이지만 참 훌륭한 분이더군요. 내가 보니 정말 잘 생긴 미남이더군. 의젓하고 늠름하고, 장수답고, 사나이답더군>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아내의 대답이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 합니다>
<그럼 뭘 봤어요?> <나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고 늠름하게 말하는 한 남자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예수님은 희생하러 마구간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유에 누우신 분이십니다. 성탄절에 구유로부터 퍼내야 할 보배는 희생입니다.
3. 임마누엘
성탄절에 구유에서 퍼내야 할 보배가 또 있습니다. 임마누엘입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보면서 이렇게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실 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하고, 냄새나고, 추한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구유에서 퍼내야 할 보배입니다.
미국 남 침례 신학교 학장을 지낸 시카고라 박사에게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이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는데 죽지 않고 3일 만에 나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버지는 그 말이 믿어져요?>
이 말을 듣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만일 성경에 요나가 물고기를 삼켰다고 기록했을지라도 나는 그대로 믿는다.>
우리는 오늘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오늘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예수님이 누워계신 구유로부터 퍼내야 할 보배가 있습니다.
1. 겸손의 보배입니다.
2. 희생의 보배입니다.
3. 임마누엘의 보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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