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혁명
행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
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
니라.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금년으로 종교개혁이 단행된 지 487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옛날 1500년대에 기독교가 커지고 팽창하게 되다 보니까 이 기독교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참신하던 신앙이 모두 타락해서 인간주의로 흐르게 되었고 눈물도 사라지고 감격도 잃고 종교가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할 것이 따로 있지 종교, 신앙, 기독교가 타락해서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가던 뜻있는 신앙인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그 막강하던 교황 권에 맞서서 개혁을 부르짖고 신앙갱신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을 전후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옛날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옛날 좀 가난하기는 했어도 그때는 삶이 소박했고 순수했고 진정한 이웃이 있었고 삶이 따뜻했었습니다. 그때는 인심도 포근했고 넉넉했습니다. 그것이 옛날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하루 종일 대문을 열어놓고 다녀도 안심이었습니다. 누구도 빈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생활이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많이 성장했는데도 삶이 형편없이 삭막해지고 심성들이 각박해지고 거짓과 사기와 속임은 더 많아졌습니다.
오늘은 참 순수함이 없습니다. 그 좋던 그 순수함의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도 참 징그러울 정도로 영악해졌습니다. 얼마나 영악해졌는가하면 이렇게 변했습니다. 3살짜리 여자 아이와 네 살짜리 남자아이가 이웃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둘은 서로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사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네 살짜리 남자 아이가 세살짜리 여자아이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살짜리 여자아이가 순간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때 네 살짜리 남자 아이가 태연하게 말합니다. “왜 이래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옛날 그 순수한 시대가 그리워지지 않겠습니까.
신앙도 옛날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옛날 신앙이 얼마나 뜨겁고 열정적이고 행복하고 즐겁고 눈물이 있고 좋았습니까. 부흥회 때가 되면 참 행복합니다. 참 즐거웠습니다. 성탄절 때가 되면 모두들 흥분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배에는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가을 대심방 때가 되면 집을 고치고 벽지를 새로 바르고 온 집안을 청소하고 큰 잔치였습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목사님은 마치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때는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순수하고 행복하고 감격적이었고 즐거웠습니다. 오늘에 비교해 보면 그 옛날의 삶은 훨씬 더 정감 있고 순수하고 감격과 즐거움과 기다림이 있었던 생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때에 비하면 삶은 넉넉해졌다고 하지만 삶에 재미가 없습니다. 오늘은 살기에 급급하고 살벌하고 갈등이 많습니다. 우선 삶에 감격이 없습니다. 신앙에도 형식적인 면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섭리하시고 인도하시고 돌보신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기적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맛보지 못하고 그냥 일반적인 신앙의 삶을 겨우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삶에 감격이 있겠습니까. 눈물이 있겠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우리의 그 참신하던 신앙이 굳어버리고 제도화 되어버리고 습관화 되고 형식화 되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이 형식화 되면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게 되고 눈에서 눈물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감격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이 형식화되고 습관처럼 신앙생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기독교가 시작될 때 그 참신하고 감격이 있고 은혜가 있었던 그때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때 신앙인들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모습을 보면 참 참신하고 뜨겁고 순수하고 눈물과 감격과 나눔과 사랑과 매일같이 기적이 수반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져서 3천명, 5천명, 수다한 무리들이 믿겠다고 교회로 몰려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그때는 날마다 모였다고 말씀합니다. 강요해서 모인 것이 아니고 모두 자발적으로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모여서 성찬을 떼며 주님을 생각하고 기념하고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모이면 음식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이면 찬양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잃어버린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그래야 신앙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곳에 성령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잃어버린 감격을 되찾고 무디어진 감각을 되찾자는 운동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온전한 신앙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꾸준히 듣는 생활”
신앙의 첫째 자질은 “하나님의 음성을 매일 듣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영적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루 종일 듣는 것이 세속의 소리만 듣고 살아갑니다. 매일같이 듣는다는 것이 대치하고 갈등의 소리, 테러와 전쟁 소식만 듣고 속이고 사기 치는 범죄 소식만 듣고 물가, 경쟁, 입시 소리만 듣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속상하고 세상이 재미가 없고 삶이 비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거기 어디서 마음이 살찌고 정서가 풍성해지고 영성이 풍성해지는 요인들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매일같이 영성을 메말라가고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는 모호하니까 내 신앙은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보십시오. 신앙은 완전히 껍데기만 남아 형식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힘이 생기고 능력이 주어지고 용기와 소망과 인내의 자질이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독일의 퀼른지방에 2차대전 때 독일 군이 감옥으로 사용했던 비밀 지하 동굴이 있습니다. 거기 유대인들 잡혀서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채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극한 상황을 버티고 살았습니다. 후에 그곳에서 발견한 낙서들이 공개되었습니다. 그 낙서 중에 이런 문구가 발견되었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더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런 힘은 어느 날 나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힘은 묵상을 통해서 주어지는 힘이고 용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묵상 중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로 묵상생활은 하나님의 음성 듣고 영감을 받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꾸준히 듣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갱신노력”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자주 갈아엎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흙이 부드러워지고 생기가 유지되고 흙이 건강해집니다. 그 땅에 씨를 뿌리면 금방 싹이 나옵니다. 그 땅을 갈아엎는 일이 말하자면 갱신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자주 갈아엎어 주어야 합니다. 자주 갈아엎지 않으면 우리 마음도 굳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시를 읽고 노래하고 문화생활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성을 자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삭막하게 굳어져 버립니다. 여러분은 때로 무표정하고 무반응하고 정서가 메마르고 눈물도 없고 감격도 없고 웃음도 없는 사람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인간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마음이 굳어버려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삶에 감격을 느끼지 못하고 즐거움과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삭막한 인생입니까.
그래서 생활도 자꾸만 갱신해야 합니다. 집안도 환경을 자주 바꾸고 취미생활도 하고 여행도 하고 가족 모임도 자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생활의 변화도 없고 매일같이 일에 매여 살게 되면 세월이 흐른 후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나는 그동안 뭘 했나, 속아 살았구나”하고 허무를 느끼고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삶을 자주 새롭게 하고 환경을 자주 만들어 살고 메말라가는 정서를 꾸준히 충족시키며 살아가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 생활이 말하자면 갱신이고 개혁입니다. 사람의 성격도 마음먹고 갱신하고 개혁하고 훈련하면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면 좋지 않은 성격이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제하고 참아보고 불만도 극복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극복이 되고 성격이 개조될 수 있습니다. 그 노력이 갱신입니다.
어떤 젊은 아빠가 골목길에서 우는 어린 아이를 엎고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습니다. 이 아빠는 아이를 달래면서 연신 중얼거렸습니다. “봉팔아, 화내지 마라, 봉팔아 화내지 마라.”길을 가던 한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젊은 양반이 참 고생도 하네, 우는 아이 달래기 짜증나고 화나는 법인데 젊은이는 참을성이 있네”하고 대견하게 보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근데 애기 이름이 봉팔 이유”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 아빠가 말합니다. “아니요, 제가 봉팔 인데요.” 이 젊은 아빠는 아이를 달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달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연신 화내지 마라, 화내지 말고 참아라 하고 자기 자신을 자꾸만 채찍하고 달래고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써 아이를 팽개치고 집을 나가버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갱신이고 절제이고 자기수정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날마다 갱신하고 개혁하고 바꾸어나가면 얼마든지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을 수 있고 신앙이 굳어버리지 않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삶을 생각 없이 그냥 놔두면 신앙도 굳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얼마가지 않아 영적 감각을 상실하고 감격도 사라지고 눈물도 말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꾸준히 갱신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머리를 한달에 두어 번씩 잘라 주어야 하듯 손톱도 잘라 주어야 하듯 밭의 흙도 자주 갈아엎듯이 우리의 삶도 신앙도 늘 날마다 갱신해야 나가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면 신앙도 굳어지고 감동도 없어지고 눈물도 없어지고 마침내는 무감각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안수 받을 때 그 감격을 회복하라”고 권고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를 보면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권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도들이 날마다 모이고 떡을 떼며 음식을 나누고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시켜서 억지로 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날마다 그 삶을 행복하고 기쁘게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영적 은혜가 충만했기 때문에 그 삶을 행복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임에 성령이 임재 하였고 기적이 일어났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 안정되고 시대가 안정되다 보니까 그 참신하던 신앙이 마침내 제도화되기 시작하고 형식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기독교로 발전하여 교황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황이 교만해졌습니다. 인간주의로 흐릅니다. 그래서 한 말이 “모든 교회의 법은 교황권 밑에 있다”는 망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는 그렇게 타락해갔습니다. 그 참신하고 뜨겁고 순수했던 신앙이 그렇게 굳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안 되겠다는 여론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영국의 위클리프라는 신부가 용기 있게 발언했습니다. “교회법은 교황권 보다 위에 있으며 모든 교회의 권위는 성서에 있다.” 이 당연한 말을 위클리프는 목숨을 걸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프라하 대학 총장이었던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또 말했습니다. “성서가 모든 법보다 우위에 있다.” 그 말을 하고 그는 교화에 맞섰다고 화형당해 죽었습니다. 그래도 당시 교황권은 세력이 커지면서 세속권 까지 장악하고 교황청은 부패가 극에 달해 갔습니다. 그러자 이태리의 설교자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죄악의 도성 이 프로랜스를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것이다”하고 목숨을 걸고 질타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는 “추기경 자리를 줄 테니 제발 조용히 하라“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답하기를 “추기경의 붉은 모자를 쓰느니 차라리 순교의 붉은 모자를 쓰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다고 이 사보나롤라는 1498년에 참수형에 처한 후 몸을 불태워 가루를 아르노 강물에 뿌려버렸습니다. 신앙이 제도화되면 이렇게 무서워집니다.
그 참신하고 감격적이던 신앙도 이렇게 세속화 되어갔습니다. 교황권이 이렇게 도전을 받게 되자 교황청에서는 마침내 종교재판국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교황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재판을 통해서 희생시켰습니다. 심지어 프랑스의 데페브로라는 사람은 당시 평신도는 읽지 못하게 되어있던 신약성경을 읽었다고 화형에 처해 죽였습니다. 그러니 그 시대 종교가 얼마나 지탄의 대상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루터가 1517. 10. 31일 교회 갱신을 부르짖고 개혁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언제나 새로워지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신앙은 계속 갱신하고 새롭게 하지 않으면 제도화되고 형식화 됩니다. 그러면 그 신앙의 모양은 그럴 듯하지만 내적으로 내용이 없고 힘이 약화되고 감격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피조물임을 알게 해 줍니다. 우리의 삶에서 도덕적으로 해이됨을 알게 일깨워 줍니다. 성령은 우리 자신에게 영적 온도를 알게 해 줍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성령에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신앙이 살고 세상이 삽니다. 길은 하나뿐입니다. 길이 많은 것 같아도 오직 한길뿐입니다. 그 한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가면 다 풀립니다. 다 해결됩니다. 신앙인들이 다른데 관심 두고 다른데 목적을 두고 살아가니까 신앙이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발생하고 사고가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갱신하고 개혁하고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돋아난 새살처럼 예민하고 감각이 있고 부드럽고 감격이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축복의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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