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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의 신앙성구: 고전 15:1-11

by 【고동엽】 2022. 4. 4.
 
부활 목차 돌아가기
 

제목: 부활의 신앙
성구: 고전 15:1-11

바울의 신앙은 부활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부활을 기초로 하고 부활이 그 기둥이요 부활이 그 전부이다. 바울이 바울 된 것 자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행 9장)으로 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없는 기독교의 복음은 무력한 것이요, 무가치한 도덕률일 뿐이다.

부활의 권능만이 십자기를 능력 있게 한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패요 인간의 비참에 대한 동정일 뿐이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십자가를 내려다보실 때 죄의 어두움은 사라지고 생명의 빛이 만방에 비쳐지게 된 것이다. 그 광명한 생명의 빛은 바울을 바울되게 하신 능력이요 그가 증거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바울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깊이 체험하고 믿어야 한다. 바울이 믿음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것인가?

1. 영혼의 부활이다.
1) 생명(영혼)의 부활이다. 바울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 얻는 영혼은 부활이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요 11:25-26).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고전 15:20). 이것은 중생을 포함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중생의 보증이신 것이다.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하여 그 생명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있고 산 소망이 끊어졌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이다(롬 3:21-31, 고후 5:21).

2) 영생하는 생명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영생이신 것같이 우리의 부활도 영생인 것을 보증한다. 부활은 영생이어야 하며 소생이어서는 안 된다.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의 다시 산 것은 소생이지 영생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그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어 부족함이 없는 생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부활은 영생임을 믿어야 한다.

3) 인격적인 변화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완전한 인격적 변화를 일으켜 주신다. 바울은 핍박자요, 훼방자요, 살인자(딤전 1:13)이었으나 이제는 그의 인격이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새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부활 은총이 바울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로 변화시킨 것이다.

2. 육체의 부활이다.
바울이 체험한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다.
1) 예수의 부활은 육체적이요 성경적이다(고전 15:4, 요 20:27). 그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시 16:9, 10에 보면 “내 육체는 안전히 거하며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대부분의 예언들은 부활을 내포하거나 암시하고 있다. 성경은 그의 생애에 대하여 사실들만을 증거 하였고 그의 부활에 대하여 예언하셨고 또 이루신 것이다. 성경만이 그의 육체적 부활을 보증하며 신자가 육체로 부활할 것을 보장하고 있다.

2) 육체적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본문 15:18).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은 공개적이다. 마리아에게(막 16:19), 게바에게(눅 24:34), 두 제자에게(눅 24:13), 열 제자에게(요 20:19, 25), 5백여 성도에게와 도마와 야고보, 승천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나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부활의 진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부활도 공개적이요 사실적으로 될 것이다.

3) 육체적 부활은 변화된 육체이다(본문 15:52).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나타나실 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기(막 16:21)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육안으로 변화된 육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도 잘 몰라본 것(요 20:14)은 예수님이 영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변화된 육체일 것이다(고전 15:52, 눅 20:36 - 천사와 동등함). 예수님이 번화산에서 변화했던 빛나고 영광스런 모습(눅 9:29)은 우리의 부활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생각하여 본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체험한 부활이 곧 우리들의 부활과 같다. 바울이 체험한 부활 신앙이 곧 우리의 부활 신앙이어야 한다.

우리의 부활은 먼저 영혼이 살아야 하며(중생), 영생뿐 아니라 인격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을 때 교회는 교회의 사명과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 부활은 육체적이며 그것은 완전히 영화된 것으로서 천사와 같은 것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좀 더 확신과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승리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란다.

* 조형기, 설교선집, 기독신보사, 1992, pp.102-105


② 제목: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성구: 눅 24:1-12

인류가 기록한 역사 가운데 부활 사건만큼이나 더 진실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궁정으로 끌려가서 곤욕을 다 당하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억울한 재판으로 사형언도를 받으신 예수님이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인류역사의 최대의 진실이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1. 하나님의 사랑의 첫 승리를 실력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직접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 표현으로 사랑하여 주시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로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의 궤계를 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의 집권자 마귀에게 청천벼락과 같은 공포의 소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사탄의 권세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의 집권자 마귀를 근본적으로 파괴시켜 버리셨고, 또한 그의 모든 계획을 완전히 박멸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란 놀음에 일생동안 노예가 되어 살아온 우리 모든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말끔히 씻어주었던 사랑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2.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던 사건이다.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시어서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당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피와 땀을 쏟으시면서 고난당하실 때, 한 결 같이 그들은 망치소리 무섭고 칼과 창과 망치가 무서워서 도망가고 제각기 은신처를 찾아서 숨을 죽이면서 환멸과 상심과 나약과 비겁의 늪 속에서 탄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이들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말씀도 하시고 음식도 같이 하시고 위로해 주시자 그들은 화산의 용암이 분출하듯이 새 생명, 새 용기를 가지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대담히 증거 하는 증인들이 다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성정에서나 집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행 5:42). 그들은 또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우리는 지금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목숨 내걸고 복음 전한 사도들이 나오고 초대교회의 순교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 번은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게 되자 물리적 방법으로 이들을 옥에 가두고 ‘다시는 백성들에게 이 도를 못 전하게 하자’하고 대제사장 및 서기관 교법사들이 모여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저들을 벌할 수 있는 도리를 찾을까’하는데 느닷없이 가말리엘 교법사가 일어나서 ‘이 사람들은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도무지 무너뜨릴 수가 없겠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행 5:33-38).

3.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다 모인 가운데 매우 심각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제 멀지 않아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여든 제자들의 마음은 매우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근심의 빛이 역력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근심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할 것을 세 가지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내가 아버지께서 가서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만약에 부활이 없었다면 승천도 없을 것이요, 또한 예수님의 승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금도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여전히 무능한 사람들이 되고 성령의 감동 없이 십자가의 사건도 죽으심의 사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누구나 다 주를 찾고 부르는 자들에게 얼마든지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놀라운 자녀의 특권도 부여받게 되고 세상을 이기면서 성공적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최대의 진실인 부활을 곧 나의 부활적 신앙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만고불변의 진리이지만 내 자신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는 새 생명의 부활이 없다면 아무리 역사적 부활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부활적 신앙은 매년마다 부활절기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시는 데 있는 것이다.

* 이삼성, 설교선집, 기독신보사, 1992, pp.295-298


③ 제목: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교훈
성구: 눅 24:1-10

오늘 1948년 4월 22일, 선교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의 부활절 새벽을 맞이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 여의도 광장에서 나오신 여러분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교훈’이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인류 역사 6천년의 많은 날을 통해서 가장 슬픈 날이 어느 날이냐고 묻는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범하고 체포되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던 그 날이 인류 역사의 최대 비극의 날이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또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복되고 즐거운 날은 어느 날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악마, 사망,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바로 오늘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지난 금요일 오전 9시,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 셋이 섰는데 그 가운데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은 사형 집행을 당하는 세 사람 가운데 가장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에 못 박혀 오후 3시경에 “다 이루었다”(요 19:30) 성공을 선언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하며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시고는 고개를 툭 떨구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에 온 하늘은 빛을 잃고 땅은 지진으로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백부장은 이 광경을 보고 벌벌 떨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놀랍게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국회의원이 빌라도 총독 앞에 나타났습니다.

“총독 각하”
“음 무슨 일이오”
“오늘 십자가에 목 박힌 예수님을 내가 장례하고 싶습니다. 그 시체를 내게 줄 수 있습니까?”
“좋소, 장례하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건만, 떡을 얻어먹은 5천명도 손을 못 대고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나사로도 다시 죽을까 겁이나 손을 못 대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사도 요한도, 열심쟁이 베드로도 벌벌 떨며 멀리서 바라만 보고, 나머지 세자들도 두려워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이 총독 앞에 나타나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 장례해 드리겠다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으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큰 돌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습니다.

이렇게 장례를 하고 나니 바리새인, 헤롯당, 대제사장과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이 파수꾼들을 보내어 무덤 문을 큰 돌로 막고는 거기에 철저히 인봉하여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봉한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가 숨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선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만일 상관의 허락 없이 이 인봉을 뜯었다가는 죽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봉을 해 놓고는 군인들이 창과 칼을 비껴들고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사흘째 되는 이른 새벽, 갑자기 캄캄한 하늘에 문이 열리더니 빛이 강하게 내리비칩니다. 그렇게 거세던 군인들이 깜짝 놀라며 “이게 웬일이냐?” 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천군천사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군인들은 호랑이 앞에 강아지처럼 와들와들 떨기 시작합니다.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을 데굴데굴 굴려 버립니다. 굴러가는 돌이 멎을 때에 천사들이 그 돌 위에 성큼 올라앉는 것까지 떨면서 보던 군인들은 잠깐 기절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셔서 머리를 쌌던 수건과 몸을 감장했던 수의를 차곡차곡 개어놓고 그리고는 영광으로 옷을 입고 무덤을 나오십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음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실 때에 왜 필요 없는 수의와 수건을 차곡차곡 개어 놓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든지 뒤처리까지 깨끗이 하는 질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질서 있게 살라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필요 없는 쓰레기라도 질서 있게 정리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있다가 떠난 자리는 공원이든 산이든 깨끗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말 한 마디 걸음걸이 하나도, 종이 한 장을 버리거나 침 한 번 뱉는 것도 질서와 규칙을 따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부활절 새벽 예배를 마치고 이 자리를 떠날 때에는 종이 한 장 없이 다 주워 감으로써 예수님의 빈 무덤처럼 질서 있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시민에게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임을 교훈합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성탄절도 중요하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성례도 중요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의 재림도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기촛돌이요,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교인이 있다면 그는 불쌍한 자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이긴 독생자이심을 확증합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스스로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스스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의 지구 덩어리는 옛날 지구와 크기는 똑같으면서도 옛날보다는 작아진 감이 있습니다. 10만리 지구 덩어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꼭 같은데 옛날에는 걸어가던 인간이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뱅그르르 날아가니까 좁아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구의 어느 모퉁이고 못가는 데가 없이 다 가보고 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데가 꼭 한 곳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죽음 저편입니다.

오늘날 지구 위에는 표면상으로는 못갈 데 없이 어디든지 왕래할 수 있으나 무덤 저편에 갔다가 온 사람은 없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무덤에 들어간 다음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호랑이 굴에 한 사람이 뛰어 들어갔는데 그 사람이 열흘이 지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호랑이에게 먹힌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잠시 있다가 노래를 부르며 나옵니다. 이것은 그가 분명히 호랑이를 죽이고 나온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덤에 들어갔다가 나오신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 한 분밖에 또 누가 있습니까? 공자의 제자는 자기들 선생의 무덤을 자랑하고, 마호메트의 제자들은 자기들 교주의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것을 자랑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무덤에 시체가 있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하늘 영광의 옷을 입고 무덤에서 나오셨으니까 그는 이 세상의 일을 모두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덤 저 편인 내세의 일까지도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 전체가 힘을 모아도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문제인 악마, 사망, 지옥의 난제를 해결하고 개선가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악을 이기고 빛이 어두움을 이기고, 진리가 거짓을 이기고 생명이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긴 것으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보증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입니다.
세상은 선이 악에 눌려 얼마동안 고생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최후의 악을 밟고 이겼다는 선언입니다.

1917년에 소련에서 공산당이 시작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기 시작해서 이제는 예수쟁이가 거의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련에 예수 믿는 사람이 7천만이 넘는답니다(1978년도 조사). 전 인구의 25%가 넘는 신자를 가진 나라가 오늘의 소련이랍니다.

누가 이 부활의 위력을 막겠습니까? 솔직히 인간은 약합니다. 나는 모자랍니다. 지혜도 힘도 모두 모자랍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못할 일이 없는 신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나는 약한 줄로 알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의 명령은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고 전진해야 합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예수님의 명령에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기 때문에 북한 선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니까 ‘꿈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휴전선 너머의 세계를 무덤 속의 썩어진 시체처럼 생각했습니다. ‘무덤에서 썩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김일성의 수하에서 공산주의에 세뇌된 북한은 해방시키지 못 한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인간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꿈도 못 꾸었던 8·15의 해방을 주신 것처럼 앞으로 압록강 두만강에 돌아가 백두산의 소나무를 찍어 예배당 짓는 날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약하여 못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십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함락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여리고성 을 쌓은 것을 보면 여리고성 밖은 바람벽처럼 높은 벼랑입니다. 여리고성 안으로는 밋밋한 고개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면 누가 보아도 밖으로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리고성이 밖으로 무너졌다면 그 성 주의를 빙빙 돌던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지는 흙더미에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이 안으로 무너졌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과학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이적 중의 이적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밖으로 무너지지 않고 안으로 무너진 것은 더욱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할 수 없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줄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2천년의 역사과정에서 많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교인은 늘어만 가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뜻 깊은 부활절 새벽을 맞이하면서 연중행사처럼 그저 지나쳐 버리시렵니까?

1. 우리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까지 찾아오신 예수님을 나의 마음속에 임금님으로 영접합시다.
2. 나를 위해 세례 받으신 예수님 앞에 교회의 법을 지킵시다.
3.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앞에 우리도 땀과 눈물을 바칩시다.

* 김창인, 절기설교집, 충현교회 출판부, 1986. pp.141-150.


④ 제목: 십자가를 바라보라.
성구: 누가복음 23:25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가시던 길에 예수님은 호산나의 찬양과 종려가지를 흔드는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셨던 이 잠시 동안의 개선 환영은 덧없는 것이었습니다. 곧 심히 불행한 밤이 닥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에 우리는 우리들대로 호산나 찬양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는 길에 드리워져 있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날 갈보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꼭 같습니다. 누가는 그들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그들은 십자가의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 구경조차도 충분한 시간 동안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의 중심인 것을 알아 볼만큼 구경하지 않았습니다.

1. 인간의 비인간성
(1) 우리가 십자가를 잘 바라보면 그 때의 종교 지도자들이 눈이 멀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 큰 진리를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 예수님의 대적이 되고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바로 그 신앙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눈은 감겨져 있지 않습니까?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실하기만 하면 신조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믿습니까? 윤리란 상대적이어서 우리의 필요와 관심에 그 윤리를 맞추어야 한다고 믿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진리를 구석진 곳에다 몰아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2) 사업하는 사람들의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와 순결보다는 물질적인 이득을 얻는 데 더 마음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과 맞부딪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업에 마음을 쓰고 있었던 성전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일을 방해하는 자이다”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수입을 위협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막 11:15-18). 우리들 가운데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돈벌이만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3) 유다의 배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배반한 그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유다는 자기의 장래에 관하여 마음을 쓰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죄인을 가까이 따라다녔던 그는 자기의 장래가 위태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못 박히시게 한다면 자기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4)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은 자기를 가장 가까이 따르던 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자기들에게 생겨날 일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이 갖고 있었던 믿음보다 어했습니다. 위급할 때 그리고 일어서서 심문을 받아야 할 때 애매한 태도를 취한 적인 없습니까? 한사코 피하고자 어물쩡거리지는 않았습니까?

2. 하나님의 자기표현
(1) 만일 우리가 십자가 사건 가운데 보여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이 어두운 면 저 너머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 이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 역사 속으로 친히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상황 안쪽으로부터 우리들과 같은 인간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죄 때문에 숨이 막히고 쓸쓸하여 비참하게 된 우리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롬 5:8,10).

(2) 십자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게 될 그 처지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나타내어 주셨습니다.

(3) 우리가 십자가를 잘 바라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큰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그 능력을 말입니다.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역설적입니다.

(4)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자기표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 스탱스터는 “십자가가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최고 능력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십자가가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의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말했던 것입니다.

(5) 십자가를 잘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순종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을 보면서 우리는 온통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값진 것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할 수만 있으시면 다른 방법이나 수단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 사랑이 요구하는 바를 위한 예수님의 조건 없는 굴복을 봅니다.

3. 확신과 도전
(1) 여러분과 저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인이 갖는 희망에 대한 확신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제자정신에 대한 도전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확신과 도전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확신과 도전을 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세상에서 궁극적인 능력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가장 중심부에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2) 십자가에는 우리의 혼돈된 세계의 어두움 속에 빛과 희망이 있게 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돌아가실 때 정오인데도 어두움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어두움은 부활의 아침에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가 뜰 때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이미 살아나 계셨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능력과 사랑의 보장을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순종하는 제자의 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제자의 정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보여 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생명과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받아들이기 전에는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을 구속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사랑과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도전의 마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도전의 마음이란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매일의 생활 형식 속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신이 우리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마음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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