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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애국! (시 127:1-2)
매년 6월만 되면 우리는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날 우리 나라의 비극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섭리가 위기 때마다 나타났으니 망정이지 그 섭리가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성경 말씀이 시편 127편입니다.
시127: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얼마나 감미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간의 수고, 여기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열심히 집을 지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 수고는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또 사람이 성을 아무리 밤을 새워 지켜도 그 밤에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것도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수고를 할지라도 하나님이 돕지 아니하시면 그 수고도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시간에 지난날의 참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교훈을 받는 것도 좋으리라고 봅니다.
1. 정신이 힘입니다.
6월 하면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동족 상잔의 비극의 역사입니다. 이 날이 며칠 전에 이미 지나갔지만 벌써 금년으로 4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6,25를 겪지 않은 세대가 벌써 80%를 넘어섰다고 하니, 이제는 그 비극의 참상도 흐려져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제는 머지않아 6,25의 체험을 통한 반공 교육도 어렵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흔히 6,25를 설명할 때마다 남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하게 되고, 군사력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북한의 병력은 남한 병력의 꼭 두 배였습니다. 북한 병력이 182,680명이었는데 우리는 그 절반인 94,974명이었습니다. 북한은 탱크가 242대인데 우리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전투기는 210대인데 우리는 고작 22대였습니다.
도무지 피아가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속수 무책으로 낙동강까지 밀려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정책이 국방력 증강 정책입니다. 국방 예산을 늘리고, 신무기를 개발하고, 병력 수를 늘리는 정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엄밀히 말해서 국방력이 병력수와 무기에만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 있었던 이스라엘의 6일 전쟁이 그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때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요르단의 3개 연합군과 이스라엘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상대는 1억의 인구를 가진 나라들이었고 이스라엘은 고작해서 1천만밖에 안 되는 소국입니다.
그런데도 개전 2시간 만에 적의 주력 부대를 마비시켜 놓았고, 48시간 만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고, 상대방의 전차를 200대나 부숴 놓고 나서, 가자지구 사령관의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그리고 전쟁 6일 만에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는 본토의 두배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쟁은 병력의 수나 무기의 힘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서방 기자가 이스라엘 진지를 방문해서 여군들이 열심히 군사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렵지 않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군이 대답하기를 "나라가 망해서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사람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 정신이 무기와 비교가 되는 것입니까? 미국이 월남에서 패배한 것이 무기가 부족해서입니까? 그것은 정싱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주위의 1억을 상대로 해서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인구 가지고 생존을 위해서 싸워야 했으니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나가서 싸웠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강하지 않고 배깁니까? 67년 6월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라고 하는 사람은 전방에 병사들을 내보내 놓고는 자신은 방송국에 앉아서 시편 27편을 낭송하고 있었습니다.
시27:1-3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전쟁터에서 확성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저 국방장관의 확신에 찬 시편 낭독을 듣는 병사들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이 사람들을 이길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무기에서 나오는 힘가 비교가 되는 힘입니까? 이 사람들은 병력수가 많다고 해서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그 국방장간은 구약성경 학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착상이 나온 것입니다.
미디안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드온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나가서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모두 32,000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사람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줄인 것이 300명입니다. 그 300명이 서 메뚜기같이 많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칩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진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쟁은 사람의 수에 있지 않고 더구나 화력에 있지도 않다는 메시지입니다.
2. 기도하는 힘입니다.
그러면 나라의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신이고 더 나아가서 기도하는 힘입니다.
요아스왕 때 일리사가 병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왕이었지만 선지자 엘리사를 너무 많이 의지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요아스는 엘리사를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왕하13:14)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고 외칩니다. 요아스는 엘리사를 보고 "병거와 마병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세 차례의 전쟁 때문입니다.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작전을 짜고 있습니다.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있었지만 그 작전은 모두 누설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하는 중에 아람왕의 침실에서 속삭이는 말까지 다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알고 화가 난 아람왕이 엘리사를 사로잡으려고 엘리사가 묵고 있는 도단성에 병사들을 보내서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아람군대들의 눈을 멀게 해서 생포당하게 했습니다. 이쯤되니까 아람왕 벤하닷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온 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포위해서 성 안에 있는 사람, 모두를 굶겨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도 엘리사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난데없이 하늘로부터 병거 소리, 말발굽 소리, 큰 군대 소리를 불러일으켜 아람 군대가 그 밤에 혼비 백산해서 도망을 갑니다. 이것이 무기만 가지고 될 일입니까?
이 같은 엘리사가 지금 죽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아스가 엘리사를 찾아와서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고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군대의 힘만을 너무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비축하고, 군대를 증강하고, 그래야 강한 나라가 된다고 믿었던 제왕들이 많았습니다. 사울이 블레셋으로부터 혼이 난 후에는 힘이 있는 자, 용기가 있는 자를 보면 무조건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삼상14:52절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있는 자나 용맹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 그래서 막강한 군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평안했느냐 하면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너무나 막강해지니까 이웃의 주변 나라들이 꼼짝을 못하고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전쟁은 그칠 줄을 몰랐고 군대를 더욱 증강하고 무기를 만들기에 바빴습니다. 내가 강해지니까 상대방도 강해졌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전쟁이 그칠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도 전쟁에서 아들과 함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무사도 아니고 대장부도 아닌 연약한 사무엘이 통치할 때는 그 큰 나라 블레셋이 굴복해서 빼앗았던 성읍들을 돌려 주었고, 이웃 나라들과 아주 평화롭게 지냅니다.
삼상7:13-14절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내가 부드러우니까 상대방도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이것을 관계의 변화라고 합니다.
이해하기는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군인들이 나라를 통치하면 나라가 일사 불란하게 잘될 것 같아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싸울 일만 나꾸 일어납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내가 강해지니까 백성들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분위기가 항상 긴장 상태에 있고 부드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문민 통치를 자꾸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술수를 부리지 않고 부드러우면 나라가 싸울 일이 없어지고 평온해지는 것입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병을 잘 고치는 목회자가 하는 교회에는 병자가 없을 것 같지만 그 교회는 병자가 더 많습니다. 귀신을 잘 내쫓기로 소문난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는 왜 그렇게 귀신 들린 사람이 우글거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옛부터 동양에서는 이상적인 정치가를 명군이라고 했습니다. 정치를 잘해서 업적을 많이 남긴 임금을 명군이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위대한 임금을 현군이라고 했습니다. 어진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세종대왕 같은 이를 현군이라고 합니다. 나라를 어질게 통치했다고 해서 붙여주는 이름입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위대한 임금이 있습니다. 그를 성군이라고 합니다. 덕치가라는 뜻입니다. 중국에서는 요 임금, 순 임금을 성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굳이 붙이자면 순종을 들수 있습니다.
순종 임금은 저녁 밥을 지을 시간이 되면 대궐문 앞에 서서 내려다 보이는 백성들의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지 않으면 그 날은 주연상은 불론이고 저녁상도 물렸다는 것입니다. "내 백성들이 밥을 굶는데 내 어찌 혼자 배불리랴."하고 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순종을 용렬하고나약한 비운의 왕이라고 평가를 하지만 그래도 그가 성군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성군의 정치 철학은 "무위 이치"입니다.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을 무위이치라고 합니다. 대궐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해마다 풍년이 들고, 경찰서를 증설하지 않는데도 나라에 도적이 없고, 해마다 개헌을 하지 않는데도 나라가 잘 다스려집니다. 이것이 무위이치입니다.
그런데 보통 임금들은 매일같이 경향 각지로 시찰을 다니고, 이 나라, 저 나라로 왔다갔다 순방을 하고,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도 보면 사고는 더 많이 일어나고, 여름에 홍수 피해는 더 많이 발생하고, 세상은 더 많이 살벌해지고 그렇습니다. 이게 모두 사람의 생각대로, 사람의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꼭 군대가 많아야 나라가 경고하고, 무기를 많이 증강해야 꼭 든든한 나라가 되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네 자손에게 알게 하라 네 자손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네 자손이 묻거든 그 뜻을 밝히 가르쳐 알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지나간 시대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의 뜻을 알게 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역사 공부입니다. 그것을 앎으로써 오늘을 보다 지혜롭게 살고, 중요한 것은 중요한 줄 알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시127: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 시간에는 6,25를 상기하면서 성경이 주시는 교훈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60만 군대가 지키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세우지 아니하시면 이 나라의 부흥도 어림없습니다.
이 새대의 최대의 애국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부여된 사명임을 알고 기도하며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향해서 최선 다해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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