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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있습니다! (애 4:17-18)

by 【고동엽】 2022. 3. 31.

끝이 있습니다! (애 4:17-18)

 

   오늘이 201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남은 달력 한 장도 이틀이 지나면 떼 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아야 할 때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 맘 때면 마음에 떠오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485장입니다. 특히 1절 가사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막을 길 아주 없네.

저 요단강가 섰는데 내 친구 건너가네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환하도다

 

   우선 세월이 저 강물이 흘러가듯 흘러가는 것을 온 몸으로 깊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록 그 세월이 괴로운 세월일 지라도 가는 것을 막고 싶지만 막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다 그렇겠습니다만 저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어느 덧 흰 머리가 늘어가고 잔주름이 점점 깊은 골이 되어갑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벌써 초로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막을 수만 있다면 막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다음으로 압권은 ‘요단강 가에 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찬송을 작사한 데이비드 넬슨(David Nelson) 목사님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요단강 가’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단강 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생과 사를 가름하는 경계선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생의 끝자락을 말합니다.

   이 찬송을 작사할 당시 넬슨 목사님은 나이가 이제 막 40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나이로 볼 때 아직 죽음을 생각할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지금 요단강 가에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사를 더 살펴보면 요단강 가에 서서 보니 사랑하던 친구들이 요단강을 건너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빛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함께 신앙생활하던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이 세상을 떠나 저 요단강을 건너 천국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머지않아 친구들 뒤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래서 요단강 가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넬슨 목사님처럼 요단강 가에 서 있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레미야는 지금 요단강 가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끝과 나라의 끝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도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2013년을 마감하면서 요단강 가에 서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끝을 내다보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특별한 인생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나이 28살에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형을 집행하는 날 사형 집행 직전에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2분은 자기가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이별하는데 쓰고, 또 2분은 오늘까지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또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작별하는데 쓰고, 그리고 나머지 1분은 주변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둘러보고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 준 땅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작별하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훌쩍 2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남겨진 3분을 소중한 마음으로 대하는 그 순간 갑자기 왕명이 떨어졌습니다. 사형을 중지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넘기 직전 요단강 가에서 더 머무르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이후의 삶을 요단강 가에 서 있는 삶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유배지로 갔습니다. 정말 과거와 달리 성경을 깊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주는 영감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작품들이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의 불후의 명작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요단강 가에 선 채 남겨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단강 가에 선 채 우리의 남겨진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후회 없는 삶

   끝이 있음을 알아서 요단강 가에 선 채 남겨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후회 없는 삶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후회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쌓여서 인생을 마무리할 때는 정말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가 쓴 책입니다. 이분은 말기 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완화의료 전문의입니다. 이분이 지켜보니까 암 말기에는 신체적 고통도 심하지만 마음에서 오는 고통이 더 심하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고통은 대부분 돌이킬 수 없는 후회 때문이랍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을 리스트로 정리했는데 스물다섯 가지나 되더랍니다.

  1. 사랑하는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2.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3.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4.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5.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은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후회하며 인생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제 멋대로 자기 소견대로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믿음의 선진들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딤후 4:7-8을 보면, 바울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깨달았고, 그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길을 걸은 것이 아니고, 주어진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감정 변화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할 일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겨진 시간 후회 없이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이 있음을 알고 그 끝이 가까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단강 가에 선 채로 남겨진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남겨진 시간을 내게 주어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인내하는 삶

   끝이 있음을 알아서 요단강 가에 선 채 남겨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인내하는 삶입니다.

   사실 인생은 본질상 고통과 수고가 따릅니다. 창 3장을 보면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우선적인 형벌이 바로 고통과 수고입니다. 창 3:16을 보면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고 말씀했고, 또 3:17을 보면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등진 인생들에게 형벌로 사는 동안 고통을 겪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고 수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괴로운 인생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괴로운 인생길을 걸은 세월들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인생의 위기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특별한 고난을 겪게 됩니다. 때로는 질병 때문에 인생의 위기를 만납니다. 이 때 특히 육체적인 고난을 겪습니다. 때로는 사고나 천재지변 때문에 인생의 위기를 만납니다. 이 때 총체적인 고난을 겪습니다. 때로는 갈등 때문에 인생의 위기를 만납니다. 이 때 심적인 고난을 겪습니다. 때로는 실패 때문에 인생의 위기를 만납니다. 이 때 총체적인 고난을 겪습니다. 때로는 주를 위해 사역하다가 인생의 위기를 만납니다. 이 때 자칫 영적인 고난을 겪게 됩니다.

   이렇게 특별한 고난을 겪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들립니다. 인생을 지탱해 낼 힘이 없어서 무너져 내립니다. 그동안 쌓아온 것을 포기합니다. 심지어는 삶 자체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고 견뎌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잘 견뎌왔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히 12:2-3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을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고난을 잘 이겨낸 사람들은 예수를 바라보았고 또 예수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것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셨고 또 자신을 거역한 사람들을 참으신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잠시 지나갈 것이고, 또 자신을 거역한 사람들의 악행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참아 내려면 이 고난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고난의 끝이 있고 또 그 끝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터널은 아무리 길어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겨울은 아무리 혹독하게 추워도 반드시 끝이 있고 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겪는 고난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이점을 믿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처럼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끝이 있음을 아시고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 그 어떤 박해와 고난도 다 참아내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돌아보는 삶

   끝이 있음을 알아서 요단강 가에 선 채 남겨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돌아보는 삶입니다.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여유가 없습니다. 쫓기듯 살아갑니다.

   과거 걸어서 한 달 걸리던 것이 비행기로 1시간이면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 과거 하루 종일 걸리던 일이 컴퓨터가 생겨 몇 분이면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 과거 국민소득 1000불 시대에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던 일들이 국민소득 3만 불 가까이 되면서 다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갑에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여유가 생겨야 하는데 더 쫓기고 더 쪼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유를 찾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여전히 자기만 챙기기 급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유를 가지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더욱 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이웃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여유는 시간이 남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통장에 잔고가 늘어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진정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믿기 힘든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50대 노숙자가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방 안에는 1000만 원대의 현금과 고급 시계가 들어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자세히 조사를 해 보니 이 노숙자는 50억대의 재력가였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지하철역이나 공원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부자 노숙자는 돈은 많이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노숙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돈으로 자기도 번듯하게 살지 못했고, 또 그 많은 돈으로 곁에 어려운 노숙자들을 돌아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끝이 있음을 알면 됩니다. 요단강 가에 서보면 됩니다.

   우리가 요단강 가에 서보면 조만간에 우리도 저 요단강을 건너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요단강을 건널 때 이곳에서 가지고 누리던 그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소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됩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게 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의미의 내려놓음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내려놓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여유로 이웃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분입니다. 말하자면 노숙자시라는 것입니다. 본인 자신도 챙기기 힘든 형편이시지만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각종 문제로 고통 받는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 마음속에 진정한 여유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한 해의 끝자락을 바라보면서 끝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단강 가에 서서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후회 없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내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고난을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돌아보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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