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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소중하게

by 【고동엽】 2022. 3. 29.
 
 
제 목 한 영혼을 소중하게 
본 문 누가복음 15장 3~7절
설교자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잃은 양의 비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은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찾고 찾다가 어렵게 찾아서 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너무 기뻐서 친지들을 불러 즐기면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나옵니다.

첫째, 목자가 1 마리를 잃어버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머지 99마리를 들에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디에 정신을 쏟다가 나머지 99마리는 그냥 들에 방치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해석할 때 하나님께서 목자 곁에 있던 99마리보다 잃은 양 한 마리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목자가 그 양을 찾은 뒤에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와서는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양 몇 마리 값을 들여 잔치를 벌인 것처럼 보입니다.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잃은 양 한 마리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다 보면 주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시려는 메시지 핵심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3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라고 말씀하면서 4절에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이 대목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이 비유가 성립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이 점을 수긍하지 않는다면 비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 공감하는 내용을 기초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문제는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도 누가가 당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어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우선 “들에 두고” 라는 말은 방치했다기 보다는 다른 목자에게 맡겼든지 들에 있는 임시 우리에 넣어두었다든지 나름대로 안전을 확보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적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나와 함께 즐기자” 라는 말은 큰 돈 들여서 잔치했다기 보다는 친지를 불러 함께 기쁨의 애찬을 나누었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시 비유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본문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 먼저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본문 1-2를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까이 나아오니”라는 말씀은 시제상 미완료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은 지금까지 자주 있었던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 “원망하여”라는 말도 역시 미완료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럴 때마다 계속 비방해 왔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죄인을 영접하고..”라고 표현했습니다. 단순히 함께 식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인으로서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해서 맞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설명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무엇을 잘못생각하고 있는지를 가르쳐주실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님의 눈에 비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눅 5:30을 보면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7:39를 보면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이란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들과 상종하다가는 자기들도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죄에 오염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 이런 시각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세리나 죄인들은 어떻게 하다가 한 번 실수로 그런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가 세리였기 때문에 죄인 취급을 당한다거나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구조적으로 연루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죄인이라 싸잡아 멸시하고 소외시키고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을 보는 눈에 병이 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이웃을 이웃으로 보지 못하는 관계적 시각 장애를 앓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로서 영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 이런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점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라는 철학자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를 “병든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병은 역시 마음의 병이고, 사람을 보는 우리 시각과 관점에 생긴 병입니다. 부버는 사람이 사람들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도구적 존재, 수단적 존재, 사물적 존재로 보는 ‘나와 그것의 관계’(I-it relation)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보는 ‘나와 너의 관계’(I-thou relation)입니다.

얼마 전에 다녀가신 아프리카 콩고의 김경식 선교사님과 선교 현장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콩고는 지금도 끊임없이 내전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그래서 전쟁으로 사고로 천재지변으로 사람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고, 사람 죽는 것을 보는 일이 일상화되어있답니다. 이제 백 명 단위로 죽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천 명 정도는 죽어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뉴스에 보도가 된답니다. 사고로 한두명이 다치거나 죽으면 가까운 가족이나 울고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다니지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버가 말하는 병입니다. 사람을 더 이상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것으로 보는 병 말입니다.

오늘 이 비유로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대라는 시대는 대중의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다 수로 파악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름대신 번호로 불립니다. 은행에 가도 번호표를 받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도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합니다. 학교에 가도 학번이 있고, 군에 가도 군번이 있고... 모두가 번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을 인격을 가진 소중한 한 영혼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풍조가 만연됩니다. 모두가 그것입니다. 나도 그것 너도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병입니다. 우리 마음의 눈에 생긴 백내장과 같은 병입니다. 이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이 비유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가요?

첫째, 하나의 소중함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그런 물음이 생겼습니다. “왜 99마리와 1마리인가?” 그냥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면 될 텐데 왜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비유 상황을 설정하셨을까요? 99마리와 1마리를 대조시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세상 경제 논리로 볼 때 99마리는 1마리보다는 그 가치가 훨씬 큽니다. 이것은 사람들 누구나 잘 알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논리로 볼 때 생명은 수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 가치는 물질 가치로 환산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단 한 번도 주님께서 몇 명의 생명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나를 위해 내 생명 하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어떤 청년이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같이 사랑하실 수 있습니까? 누구를 많이 사랑하면 누구는 덜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할 만큼 사랑하시면 그 외의 사람은 사랑하실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까?

경제 논리 세상 논리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영적 논리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은 내가 사랑할 유일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사랑하시고, 또 그런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 영혼 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 생명을 살리시려고 외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주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이 찬양처럼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을 보면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4절을 보면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이라고 했습니다. 100마리 중에 한 마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손자와 증손까지 33명이나 된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런데 그 아이들 이름을 외우지 못해서 고민이랍니다. 명절 때 모이면 그 얘가 그 얘 같아서 헷갈린답니다. 그런데 목자는 100마리의 양을 한 눈에 보고 있습니다.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영혼을 기억하십니다. 우리 한 영혼 한 영혼의 문제를 다 알고 계십니다. 세심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4절을 보면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찾을 때까지 쉬지 않고 찾고 또 찾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는 그 아이를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무리 급한 일,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다 중단합니다. 찾다가 어려운 일이 생겨도 결코 중단하지 않습니다. 찾다가 자기가 죽는 일이 있다고 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해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일하십니다.

5절을 보면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라고 했습니다.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았으면 괘씸해서 야단도 칠만한데 야단치기는커녕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찾았으면 다른 양 있는 곳에 두고 집으로 오면 될 텐데 그 양은 특별히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목자가 그 양에게 더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고 있는 영혼, 허물과 죄 때문에 가슴치고 있는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셋째, 회개의 필요성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이 비유의 결론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여기서 잃은 양 하나를 찾은 것은 곧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은 잃은 양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잃은 양을 찾은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잃은 양은 목자에게는 근심거리이고 염려거리입니다. 늘 마음을 억누르는 마음의 가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잃은 양과 죄인은 바로 1절에 나오는 ‘모든 세리와 죄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주님께 나아온 세리와 죄인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주님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갖은 수치와 모욕과 가로막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잃은 양이었다가 이제는 찾아진 양입니다. 주님은 저들을 기뻐하셨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도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와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저들은 여전히 잃은 양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진 양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잃은 양이 되서는 안 됩니다. 잃은 양이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다가 길을 잃은 것을 말합니다. 늘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길로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다음으로 잃은 양이 됐다면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잃은 양을 찾는데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잃은 양이 있는데 모른 채 하고 내 갈 길만 간다면 주님께 책망을 받을 일입니다. 잃은 양에게 주님께 돌아가자고 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잃은 양을 찾을 때 그 잃은 양의 위치를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잃은 양을 찾으셨을 때 그 가쁨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18-9일에 전도 축제를 벌입니다. 주님의 잃은 양을 찾는 하늘의 잔치입니다.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잔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잃은 양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대상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잃은 양을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당일 행사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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