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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강》 성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롬 6:1-11)

by 【고동엽】 2022. 3. 11.

《제20강》 성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롬 6:1-11)

 

5장까지의 내용을 간추립니다. ▶1:1-17절(로마서의 제목, 큰 표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로마서는 한 마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1;18절-3;18절(죄악론) 죄 속에 빠진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에 빠져 그 몸과 마음이 온통 죄 속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 구원받은 자가 없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도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3;18절까지의 결론입니다.
그 다음 3;19-5;21절까지의 배경은 완전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행위로, 율법으로, 인간 노력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우리는 그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야 됨을 가르쳐 줍니다.
이제 6장부터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결, 곧 성화에 관한 진리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 날 이후>라는 단편집에 보면 아주 교훈적인 글이 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잠시 이 땅에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나서 그 날 이후에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과연 예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한 술주정뱅이를 만났습니다. 술에 취해서 그의 코는 빨갛게 변해 있었습니다. 손발도 몹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골이 상접해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알아보시고 측은한 심정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물어보셨습니다. "형제여, 어찌하다가 이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셨군요. 내가 앉은뱅이로 있었을 때 당신은 나의 두 다리를 고쳐주셨지요. 그런데 내가 앉은뱅이였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구걸을 하며 살았어도 별로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의 두 다리를 성하게 고쳐주고 난 뒤에는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방황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어떤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얼굴에 아주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알아보시고 물으셨습니다. "자매여, 자매는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소?" 그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귀신 들렸을 때 당신이 내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내가 귀신이 들렸을 때는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정신으로 온전히 돌아섰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외로웠습니다. 비참한 내 모습을 보고서 나도 모르게 점점 더 타락의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상념 속에서 이번에는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선창 가에서 어떤 청년 하나가 대낮부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다른 사람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라서 그를 붙들고 물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인가?"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왈칵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내가 눈먼 소경이었을 때는 그래도 마음만은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더러운 세상 꼴을 두 눈으로 보면서 살려고 하니까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되는 대로 분풀이를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유지하며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은혜를 받은 자답게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할/ ◀제목소개!▶

 

오늘 본문은 예수 믿는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부활을 세례에 비유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런즉'이란 접속사가 나오는데 언제든지 접속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에서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다시 상고하는 의미에서 접속사가 옵니다.
지난주에 배운 5;20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으니 은혜를 넘치게 받기 위해서는 죄를 많이 지으면 되겠구나!"라고 본문의 참뜻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반론을 제기한 말입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내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백이요, 천입니다. 내 죄가 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는 수십만, 수백만, 수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죄악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 현재, 미래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모든 죄악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욱 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듣게 될 때,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했으니까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이런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말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또는 죄를 끊지 못한다. 혹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는 말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죄를 끊지 못하고 죄 속에 빠지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죄에 거하겠느냐?"고 가상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밥을 많이 굶어본 사람만이 밥의 고마움을 압니다. 고생을 많이 해본 사람만이 인생의 쓴맛, 단맛을 잘 압니다. 가령 나라에 반란죄를 짓고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이 대통령의 특명으로 사형에서 풀려났다고 합시다. 이 사형수는 자기 죄가 큰 것을 알고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대통령의 용서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니 그 마음속에 얼마나 대통령에 대한 은혜가 크겠습니까?
바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은 배를 골아본 사람이 밥의 고마움의 깊이를 아는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죄에 심각성을 깨닫고 아울러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마음 속 깊이 느낀다는 의미인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으니 죄를 짓자! 그러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역설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속에 빠지겠느냐?" 묻고는 2절에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2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무섭게 칼로 자르듯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강한 의지가 담긴 어투입니다. "무슨 소리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천만의 말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 보내주셨습니다. 죄인인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게 죽이고, 그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화란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가운데,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놀랍게도 렘브란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로마 병정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머리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셔야 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은 창에 허리를 상하셔야 했습니다. 내가 손으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손바닥에 굵은 못이 박혀야 했습니다. 내가 발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의 발에 굵은 못이 또한 박혀야 했습니다. 우리가 이 엄숙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어찌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할/
우리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를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죄 속에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죄에 대하여 죽은 자란" 단번의 죽음을 말합니다.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사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10절을 미리 보겠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살아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여러분, 죽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인연이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으면 땅에 묻어 버립니다. 미련 없이 묻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죄가 왕 노릇 하는 죄의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 대해서 죽은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와 세상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천국을 향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죄라는 열차를 타고 지옥을 향해 내려갔지만, 이제는 은혜의 열차를 타고 천국을 향해서 올라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는 썩어 냄새나는 몸을 들먹거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이야깁니다. 그가 한 때 기방에 빠져 공부를 게으르게 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의 따끔한 책망을 받고 크게 깨닫고 기방 출입을 끊었습니다. 하루는 유신이 말을 따고 사색에 빠져 있는데 도착한 곳은 그의 단골 기방 앞이었습니다. 그 때 유신은 말에서 내려 단칼에 말의 목을 잘라버렸습니다.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누구든지 나를 유혹하는 자는 이 칼로 목을 잘라버리겠다."고 말했답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바로 김유신의 결단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세례는 글자 그대로 물로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장로교에서 하는 머리에 물을 뿌리는 형식과, 손에 물을 찍어 머리를 씻는 형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례의 원 뜻은 <잠근다. 뿌리다. 씻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세례에 대하여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례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보다 적극적인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8절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형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절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5절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합하여, 연합하여, 함께>라는 단어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면 지금까지 내가 속했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즉 대상이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과 연합하여 살았고 죄와 손잡고 살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들과는 결별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겠다는 것이 세례의 참 의미입니다.
▶미국에 어떤 젊은 여자가 남편을 잃었습니다. 이 부부는 금실이 대단했습니다. 이 여인은 통곡을 하면서 "나는 당신이 없으면 못산다"고 몸부림치더니 남편의 시체를 유리관 속에 보관해서 서재에 두었습니다. 그 부인은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어디가나 꼭꼭 다녀온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죽은 남편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 부인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물론 죽은 남편에게 보고를 하고 말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파리에서 한 남자를 만나 전격적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새 남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서재에 가서 유리관 속에 있는 남편에게 "여보 나 돌아왔어요, 그동안 얼마나 외로 왔어요!" 새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누굽니까?" "옛날에 사망한 내 남편입니다." "아니 이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시체를 묻기 전에는 나하고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랑하는 옛 남편을 매장하지 않는 한 새 사람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옛것을 매장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은 어려서는 부모의 손을 잡습니다. 소년이 되면 친구의 손을 잡습니다. 청년이 되면 이성의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룹니다. 장년이 되면 돈, 명예, 권력 등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늙으면 나무 지팡이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잡아야 합니까? 예수를 잡아야 합니다. 예수를 잡아야 우리의 삶이 윤택해집니다. 세상에 돈, 명예, 권력, 사업, 직장, 친구의 우정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이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이십니다. /믿/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란 주님과 함께 장사되었음을 말합니다. 골2:12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옛 생활을 장사지내고 예수와 더불어 새 생활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불의한 마음이 장사되고 의로움으로 부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저주가 장사되고, 우리의 가난이 장사되고, 혈기와 자만심과 자아가 장사되고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야 합니다.
▶세례 의식 속에서 우리의 무덤을 발견하고 동시에 우리의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믿/
죽은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도, 욕심도, 명예도, 시기, 질투도 모두 끝나게 됩니다. 여기 장사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함께 장사되고 다시 주님과 더불어 주의 거룩한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함입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의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여기 '영광'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행2:24절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여기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원래 가졌던 영광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더불어 누렸던 영광을 다시 찾으신 것입니다. 요17;5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죄와 사망을 심판하시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은 계1;18절에서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아멘!/
▶이제 4절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우리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고, 죽음의 철장권세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는 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오늘 제목의 결론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할/
"우리는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생명을 얻은 값을 해야 합니다. 새 생명이란 예수의 생명의 씨앗을 받은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뭐니뭐니 해도 전도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또 기뻐하시는 일은 몸 된 교회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를 위해 일해 보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일하는 소에게는 망을 씌우지 않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건강도, 물질도, 조건도, 모두다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무관심하십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잔치 날을 앞두고 부잣집 가축들이 회의가 열렸습니다. "소는 내가 희생이 되면 좋겠지만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봄, 가을 논밭을 갈아야하고, 장날에 수레를 끌어야 하기 때문에 남아야 되겠다"고 합니다. 모두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수탉이 말합니다. "나는 고단하게 잠든 네 가족들을 새벽에 깨우기 위해 울어야 하고, 마누라는 영양 공급을 위해 알을 낳아야 되니 남아야 되지 않겠소?" 역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개가 말합니다. "나는 도둑을 막기 위해 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돼지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때 모든 가축들이 말하기를 "매일 먹고 놀았으니 너 밖에 죽을 자가 없다!"고 말했답니다.
마25;30절에 주님은 일하지 않고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은 자에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시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저주하십니다. 우리 모두 새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죽도록 주님께 충성하십시다. /할/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성도의 세례는 예수와 연합하였으므로 나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고, 내가 받은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받고 내가 죽어 땅에 장사된 것은 예수님이 대신 장사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예수와 연합을 이룰 때만이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하신 생명이 내게로 와서 내 영을 살려 놓고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세상 염려 우수사려를 다 지고 가셨습니다.
사53: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믿/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가 알거니와" 이 말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알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경험으로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옛사람" 첫 아담 안에서 태어난 육의 사람을 말합니다. 죄로 인해 부패된 사람입니다. 아담 안에서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던 나, 죽음의 노예가 되었던 나를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4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을' 의미합니다. 장사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다는 뜻이요, 장례식은 사망 확인서와 같습니다.
엡4: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사람은 하나님께 정죄 받아 받듯이 사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형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죽음 목숨이며 아무 세력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다 이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 죄의 몸은 옛사람이 주장하는 몸을 가리키고, 멸한다는 말은 옛사람의 지배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으로 살 때만이 옛사람의 지배에서 끊어집니다. 그때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해야 되는데 또 죄의 종에 빠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옛사람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와 연합을 이룬다는 말은 주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말이요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자는 옛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육신은 미움, 시기, 질투, 분냄, 욕심, 탐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만발하게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옛 사람에 속한 몸을 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속 사람인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영이 되었으나 아직 몸을 구속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도 죄의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인 영은 주님 뜻대로, 믿음대로 살려고 애쓰지만, 죄의 몸인 육신이 따라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고, '아! 어찌할꼬!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을 쳐 복종하며 주의 성령의 능력을 부여잡을 때만이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7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난 자입니다. 죄를 짓고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아 사형을 받으면 법이 다시는 그 사람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 옛사람이 정죄 받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므로 법적 정죄에서 벗어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얻었음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제 의인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완료형). 의인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과 아직도 의인인지, 죄인인지 구별을 못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의인이 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구원에 확신에 서 있는 사람이요, 이제 의인이 되었으니 의인답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힘써, 애써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할/

▶8-9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장사를 하는 사람이 백만 원을 투자하면 천만 원을 벌 수 있다는 확신만 있고, 보장만 있다면 투자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농부가 밭에 한 가마니의 씨를 뿌리면 가을에 300백 가마니를 수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씨를 뿌립니다.
확신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죽으면 다시 산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은 완전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쉽게 표현하면 <예, 말씀대로 일 잘하겠습니다> 고분고분 듣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수단, 요령, 방법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과 사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달으라고 무거운 징계를 주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죽으십시다.
죽는 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도 못 가고, 사업도 못하고, 놀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다 중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내가 내 힘으로 해 오던 일들을 다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새로운 나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중심이 나였지만 이제 우리는 삶의 중심이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나의 삶에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편히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생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움켜쥐고 있으면 그것은 내 문제요, 내 고민과 걱정이지만 예수께 맡겨 버리면 그것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함께 죽은 것으로 끝나 버리면 기독교는 절망의 종교입니다만 그러나 함께 사는 그 약속 때문에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요 축복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10-11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와 같이"라고 하는 원칙에 따라서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사건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라는 말은 명령문입니다. 여기라는 말입니다. 여기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보다 더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체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예수와 함께 산 새 사람입니다." "너는 어디에서 사느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의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합니다.
나는 이제 예수 안에서 지난날의 어두운 과거는 죽어 장사 지냈고, 예수 안에서 해방되고 부활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이와 같은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 믿으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지금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엡3;20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할/
▶초대교회 김익두목사님은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 시험에 응시를 했으나 번 번히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 뒤에 장사에 손을 댔는데 희한하게도 하는 장사마다 되지 않습니다. 홧김에 술집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이 되어 보는 사람마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게 만드는 아주 불량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김익두가 시장 바닥에서 어린 아이가 주는 부흥회 전도지 한 장을 받고 그 난봉꾼이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 날 밤 몰래 부흥회에 참석해서 엄청난 은혜를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굳게 작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그에게 술을 권하면 "안돼. 내가 지금 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어." "무슨 약을 먹고 있는데?" "신약과 구약을 먹고 있어. 그렇게 좋은 보약이 없지. 너희들도 한 번 먹어봐. 달라질 거야." /할/
그 뒤 그는 평양신학교에 제3회 졸업생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2만8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면서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고, 전국에 150개 교회를 개척했고, 신유의 은사를 통해서 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었고, 그러다가 6.25 동란 당시에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원이 무차별 난사한 총에 맞아 순교하기까지, 그는 참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깡패가 변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었습니다. /할/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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