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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롬 4:1-12)

by 【고동엽】 2022. 3. 11.

《제15강》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롬 4:1-12)

고대 로마의 '어거스트' 대왕 때에 당시 아주 포악하기로 이름난 해적 두목이 있었는데 그는 '사기, 폭행, 강도, 살인' 등 악한 짓만 골라하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목이 어찌나 힘이 항우장사인지 잡을 레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트' 황제가 큰 현상금을 걸고 누구든지 그놈 목을 잘라오면 후한 상금뿐 아니라 높은 벼슬까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감히 그를 잡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거스트' 대왕이 지방에 순시를 가는데 어떤 건강한 사람이 왕 앞에 와서는 넓죽 절을 하더니 "대왕! 제가 해적 두목의 목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제게 어떤 상을 주시겠습니까?" 대왕이 깜짝 놀라며 "네가 정말 그의 목을 가져왔느냐? 그럼 보여 봐라?" 그는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이놈 올시다!" 하면서 왕 앞에 꿇어 엎드려 "이 놈이 말 할 수 없는 많은 죄를 저 질렸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대왕의 충신이 되겠나이다" 하고 간절히 호소를 했습니다.
어진 대왕 '어거스트'는 그를 용서해 주면서 해군 장교로 삼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을 다해 결국 로마 제국의 해군 사령관까지 되었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그 의를 입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주홍 같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죄를 자백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하십니다. /할/ ◀제목소개!▶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인가를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이 구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전제한 것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롬1,2,3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음을 예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알면서도 행함이 없고 오히려 교만한 죄가 하나 더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유대인, 이방인, 헬라인들 모두 다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죄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순간적인 것도 아니며, 또 개인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 죄는 본질적인 죄로 원죄로부터 뼈 속 깊이 절어온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길은 없는가?" 묻게 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합니다. 인간의 의로써는 하나님께 갈 수 없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의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 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만이 결국은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틴 루터도 강조한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 어떤 구원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 누구를 용서해주면서 '불쌍해서 봐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일단 의인으로 만들어 놓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지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어떤 왕의 아들 잔치에 손님을 초청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랬더니 '밭을 샀다. 장가를 갔다. 소를 샀다'고 핑계를 하면서 오지 않습니다. 손님을 초대하기 위해 음식을 잔뜩 차려 놓았는데 손님이 오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입니다.
왕은 대단히 섭섭하여 "산으로, 길거리로 다니면서 거지나 병신이나 장님이나 가리지 말고 다 불러 오라! 그리고 내 집을 강권하여 채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만하면 자비와 사랑이 무궁무진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왕은 연회석에 나왔다가 화를 내며 "그대는 왜 의복을 입지 않았느뇨? 저를 밖으로 끌어내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무슨 말인가?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말입니다.
무조건 다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어 벌을 주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내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강제로 초청해서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기로 서니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는가?"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복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지금처럼 옷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할 때, 사람이 모이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 옷이 남루했습니다. 그러므로 큰 잔치에는 주인이 예복을 만들어 보내어서 입고 오게 합니다. 이 비유에서도 주인이 보낸 옷을 입지 않았기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죄인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복을 입혀 가지고 자격을 갖추게 한 다음 정당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예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바로 그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바로 예복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믿음의 예복으로 의롭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바울은 본문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 적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얻었느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도 따지고 보면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75세 때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은 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셨습니다.
창1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정도로 진실된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생각을 따라 애굽(애굽: 검은 땅이란 말로, 빅토리아호에서 내려오는 물이 나일 강으로 범람하여 땅이 시커멓게 발효되어 호미 질이 필요 없는 기름진 땅이 바로 애굽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조금만 농사가 안되면 애굽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세상으로 도망갑니다.)으로 내려갔다가 자신의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여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약해져서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첩으로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었지만, 그 후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자마자 그 가정에 불화가 터져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몰인정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육신 적인 행위로는 아무것도 하나님께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본문의 또 다른 의미는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육신 된 조상의 후손이 되려면 ⑴혈통이 같아야 합니다. ⑵민족적인 것, 문화적인 것을 이어 받아야 그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대인과 혈통이 같습니까?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물려받았습니까? 아닙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우리의 조상으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갈3: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행위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구원, 생명'을 말합니다. 인간의 노력, 수양, 열심, 행위 등 이런 것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만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인간 중 아브라함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자기 행위를 내세우면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와 똑같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똑같이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 아브라함조차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오늘날 이 죄악 된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행위로써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롬3: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롬3: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할/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자랑'이란 말은 바울이 자주 쓰는 말 중 하나입니다.
자랑이라는 말속에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랑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사람이나 자랑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게는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데도 역시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를 자랑하고 우리 성도들을 자랑합니다. 여러분들도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를 자랑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야!" 신앙은 입술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멘!/
사람들은 새 집을 자랑합니다. 새 자동차를, 출신학교를, 돈, 지위, 재주, 남편, 자식들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사실 우리에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셨는데 내 것인 양 어찌 자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율법이나 행위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빌3: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사람들이 육신 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도 자랑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⑵이스라엘 족속 중에 베냐민 지파요, ⑶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⑷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⑸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⑹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예수를 아는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해서 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 아니하고 그럴수록 겸손했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으며 자기는 연약함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주제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믿음을 통하여! 믿음에 의하여!'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흘러오는 도구 내지, 통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자랑하는 것 귀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자랑은 삼가십시오.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바로 그것이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 성에 어느 날 갑자기 적군이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롯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있는 사병들을 이끌고 밤중에 기습작전을 펴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롯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왜? 언제 적군이 보복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셔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상급이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보시다시피 저에게는 아직도 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서 기르고 있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난 너의 씨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 아브라함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 많아 늙었고 아내 사라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 많은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 적은 믿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 한 가지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15: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바울은 이 말씀을 꼭 붙잡고 여러 곳에서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성경 전체의 사상입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큰 믿음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믿음을 키워 가면서 쓰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왜 나에게 뜨거운 믿음이 없을까? 왜 내 믿음이 이 모양일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에 조성된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세우시고 더 큰 믿음의 주인공으로 삼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①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는 믿음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양심과 이성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계시에 들어갑니다. 또 특별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거나 말씀으로 나타내시는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버지와 조상들이 믿어오던 우상은 생명이 없고 오직 인류의 흥망성쇠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우상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 사상까지도 바꿨습니다.
②말씀대로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고 할 때, 그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실 이방 땅으로 가라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히11;8절에 보면 "갈 바를 전혀 몰라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만 믿고 고향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창12;4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다"고 했습니다.
③약속을 믿고 미래 지향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의 약속을 했습니다. '첫째, 너에게 자손을 주겠고, 둘째,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땅 문서를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땅을 주실 것을 믿고 천막을 치고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자손을 하늘에 별처럼,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주시겠다고 약속한 지가 20년이 다 가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④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떠나라! 아멘! 버리라! 아멘! 누구를 버리라고 했습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바치라! 아멘!

 

▶4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어떤 사람이 땡볕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했습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받습니까? 품삯을 받지요. 이 품삯은 은혜입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노력한 대가로 받는 것입니다. 일한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시킨 사람은 마땅히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어야 할 빚일 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그와 같은 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은혜로 얻는 것이지 내가 잘나서 내가 일해서 내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은혜는 '카리스'라는 말로 '선물'을 말합니다. 즉 값없이 공짜로 받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만약 일함으로 천국 간다고 한다면 은혜로 여기지 않고 삯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일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 부르더니 "생활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여기 이십 만원이요, 보태 쓰세요" 한다면 절을 몇 번이나 하면서 감사해야 됩니다.
왜? 그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행위/선을)이 완전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 일한 대가로 가기 때문에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것을 받을 빚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한 것 때문에 천국에 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빚진 분이 됩니다.

 

▶5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을 아니했습니다. 내세울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내 공로가 아닙니다. 품삯을 청구할 권리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죄만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경건치 아니한 자라도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주신다'고 했습니다.
"일은 아니할지라도" 여기 일은 어떤 행위 즉 선행을 가리킵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사람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한 자'를 말합니다.
"의롭다 하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도 안하고 악질 된 인간을 보고 하나님께서 "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해 주겠는데 네가 믿겠느냐?" "예! 나로서는 도저히 안 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할/ ▶맞습니다. 하나님은 강도를, 살인자를 변화시켜 성도로 만드십니다. '어거스틴'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성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의는 두 가지로 표현되는데, 세상의 의와 복음 적인 의입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의와 복음 적인 의는 그 바탕이 다릅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의인은 복음 앞에서는 오히려 죄인으로 정죄를 받고, 세상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자가 믿음 안에 들어오면 의로운 자가 됩니다.
본문 5절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인 "믿는 자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했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로마 교황청과 싸웠습니다. 기독교는 의인의 종교가 아닙니다. 죄인과 세리의 종교요, 헐벗고 굶주린 자의 종교입니다. 성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통증입니다. 죄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처절한 절규로 죄를 통곡하는 통증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죄의 통증이 있는 곳에는 새로운 삶이 보장됩니다.
기독교 복음은 언제나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눅15장에는 탕자가 집에 돌아오니 의인인 형보다 더 따뜻한 영접을 받습니다. 세상사람 상식으로는 탕자가 돌아오면 멸시, 학대, 매를 때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집안에서 살림을 지킨 장자에게는 칭찬과 영광의 상급을 주어야 마땅하거늘 그런데 아버지는 모순 된 일을 했습니다.
여기에 탕자는 죄 때문에 통증을 알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에 그늘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장자인 형은 바리새인처럼 의롭다고 자칭한 자입니다. "아버지, 나처럼 살림을 잘하고 열심히 아버지를 봉양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장자는 행위로 보상을 받으려고 했고, 동생은 죄의 통증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버리고 오직 아버지를 바라보며 호소했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아들로 인정하지 마시고, 품 군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종 된 자세로 살겠습니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존경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었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실수와 허물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서 동침했습니다.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자기의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방에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죄를 진 것입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편했을까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시32;3-4절에 자신의 아픔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다윗이 죄를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 종일토록 신음했다고 했습니다. 뼈마디가 다 녹아 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자기를 억누르는 듯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진 액이 다 말라버리고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아픔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악으로 인해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직시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다 회개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조건 없이 다윗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다가 죄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게 되었을 때, 자유 함을 받게 되었을 때 다윗의 그 기쁨,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바울이 그것을 어떤 단어로 표현했습니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불행한 사람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 사죄의 은총을 받는 일보다도 더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윗은 일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행위로 보면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6절은 '선한 일도 다 안 했고, 더더구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의인된 다윗의 간증을 빌린 것'입니다.
7-8절은 '그 죄를 사하심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불법은 허물을 포함한 고질적인 불복종이며 공공연한 패역을 뜻합니다. 법을 알고 어기는 자는 더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사하심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하심을 받고" 원어에 보면 '치워버린다, 옮겨버린다'는 뜻입니다. 눈이 산더미처럼 쌓이면 치워버립니다.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이면 치워버립니다.
8절에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분명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모든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떳떳이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의는 굉장합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짓고 삽니다. 불법을 행하고 윤리적, 도덕적, 또는 인간관계 속에 불공정한 거래로 말미암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불법을 치워버리고, 죄를 씻어주시고, 불공정한 일을 없는 것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이 사죄의 은총은 회개하고 받는 은혜입니다. 사죄는 값없이 주시는 은사요, 무조건 얻는 것이지만 축복은 회개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습니다.

 

▶9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참 자유 함을 누리게 되었을 때 그 감격, 그 기쁨, 그 행복이 얼마나 컸겠는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누린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라도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느냐? 이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이 누린 이 행복은 다윗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보다 훨씬 이전의 아브라함도 똑같은 사죄의 은총을 누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9절 하반 절에서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대저'라는 것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똑같이 누렸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이전이냐, 그렇지 않으면 할례 받고 난 이후냐? 사도 바울은 그것을 1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창15: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창17장에 가야 할례가 나옵니다.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한 것이 아니고 의롭기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례를 받는 순간 천국 티켓을 타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천국 백성 되었으니 천국 백성 된 표로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치는 것' 곧 표 내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보고 할례시냐? 무 할례시냐? 묻고는 무 할례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99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삭을 주겠다고 할 때는 85세였습니다. 믿음이 먼저고 할례는 그 후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지 할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11-12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 그 자체가 의롭다 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의 표"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입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소에 마크가 있습니다. 어느 농장 소유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세례도 중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표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칼빈은 세례가 구원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획득한 구원은 견고케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고 김용기 장로님은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면 신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어디서나 떳떳하고, 당당하게 밝혀야 죄를 덜 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세례를 받았던, 안 받았던 떳떳하고, 당당하게 외칩시다. '나는 크리스찬입니다' 나타내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으니"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신에게서 난자들에게 그 할례의식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를" 여기 자취란 말은 '본이 될 만한 모범을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요8:39절에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아브라함이 걸었던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행보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⑴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었습니다. ⑵말씀대로 믿었습니다. ⑶약속을 믿고 미래지향적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⑷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믿음 따라가야 할 줄 믿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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