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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결혼, 이혼 심방)이혼과 재혼에 관한 성경적 고찰

by 【고동엽】 2022. 3. 5.

지난 2003년 통계청이 펴낸 “통계로 본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일본 프랑스를 비롯한 선진국보다 높다는 놀라운 수치를 보여줬다.

그 해 보건복지부와 현도사회복지대학교가 공동 발간한 우리나라 혼인 대비 이혼율 조사에 따르면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로써 현재 한국은 매년 2쌍이 혼인하는 반면에 1쌍이 이혼하는 이른바 ‘이혼 천국 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굳이 이혼에 관한 사회적 지표 수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얼마나 관대하고 포용적인가를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연일 TV, 영화, 소설, 광고 등 대중 매체를 통하여 무차별 생산, 확산되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담론들은 더 이상 낯선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혼과 재혼에 대한 맹목적인 호기심과 열정이 세련된 시대 정신인양 호도 되고있다.

하지만 성경적 이해와 분별 없이 횡행하는 이혼과 재혼은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정뿐 아니라 진리의 터가 되어야 할 교회의 근간마저 뒤흔들고 있다.
도처에서 교회와 가정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미 무너진 잔해아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신음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경천동지할 일임에도 어찌된 일인지 교회와 성도의 반응은 너무나 의외이다.
혼인 예식의 맨 마지막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라고 선언한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나 하나님과 회중 앞에 맹세한 성도들도
이혼과 재혼의 제단 앞에서 불온한 시선을 희번덕거리며 서성이고 있다.

성경적 교훈과 신앙적 양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수많은 이혼과 재혼들이
음란한 시대의 표상들과 어울려 변질되고 남용되고 있는 이 때에,
사회적 분위기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모습은 결코 참 교회와 참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다시 맞은 가정의 달,
가정 해체와 교회 붕괴의 확실한 주범이 되고 있는 이 시대의 이혼과 재혼의 풍조에 대해 돌아본 뒤,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성경적 해답을 얻고자 한다.
성경적 가정과 교회의 참된 회복을 간절히 염원하면서 말이다.


1. 성경적 혼인과 이혼과 재혼에 관한 예수님의 진언(眞言)과 사람의 반응

이혼과 재혼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금기 목록이 아니다.
이것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 불신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현재의 높은 이혼과 재혼의 비율에 대해 더욱 민감해 하며
그것이 가져다 주는 사회적, 심리적, 경제적 변화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세상 사람들도 이혼의 필요악적 요소에 대해 긍정하곤 한다.
그리고 혼인의 종결로서 이혼은 반드시 가족 간의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며,
정도에 따라서는 가정의 기능 마비와 가족의 해체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혼에 대한 원인과 책임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잘못과 반성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이혼과 재혼은 결코 혼인과 별개 사안이 아니다.
성경적인 혼인으로부터 이탈한 이혼은 혼인에 대한 적극적 부정(不正)이며
성경에서 지지하지 않는 재혼은 혼인에 대한 모략(謀略)이다.
그러므로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갖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혼인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누가 혼인 제도를 세우셨는가?
혼인이 표상하는 바는 무엇인가?
혼인을 지배하는 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먼저 깨달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참된 혼인과 관련된 모든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한 말씀으로 요약해 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하나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

참된 혼인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핑계할 수 없으리만큼 단순하고 명료하다.
혼인은 하나님께 친히 만드신 신적 제도이다.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영적, 육체적 연합과 사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혼인)은 하나님이 아닌 그 누구도 나눌 수 없다.
주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혼(은) 불가!’하다.
이혼 없는 재혼이 불가능하다면 원칙적으로 ‘재혼(또한) 불가!’인 셈이다.

문제는 우리의 죄된 마음이다.
이토록 단순 명료한 주님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으로 가득 찬 우문(愚問)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스스로 답하기를,
“주님의 입장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과감하고 절도 있게) 주님의 주장에 대해 더 이상 생각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겠습니다”고 하거나
아예 “이 부분에 관한 한, 주님의 생각은 내 것과 확실히 차이가 있군요.
하지만 나의 생각을 돌이킬 마음이 없습니다”며 맞선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교회와 가정을 사단 세력이 득실대는 음란과 방종의 진영 속에 방치해 두는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오늘날 성경이 오류가 없다고 믿는 많은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교회들조차 이혼과 재혼의 문제에 직면해서는
성경보다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앞세우고 있다.
성경을 세상 문화에 종속시키든지,
세상 문화를 성경에 주입시키든 그것이 주님의 말씀에 강한 신뢰를 갖지 못한 이유 때문이라면
결국 교회는 세상과 구별없는 모임이나 장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유일한 준거 법칙으로 삼고자 하는 성도라면
비성경적인 이혼과 재혼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미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세속적인 이혼과 재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장 은밀하면서도 강력한 사단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금지된 이혼과 허락된 이혼

“혼인의 약속은 주께서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깨트릴 권세가 사람에게는 없다”(마 19:9 주석)
는 칼빈의 주장은 이혼에 대한 개혁주의 교회의 기본 입장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는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러한즉 사람이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같이 이혼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려한다.

‘이혼 불가’를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신명기 24장에서 ‘이혼 증서를 주라’고 한 모세의 언급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즉 모세가 구약의 율례를 들어 이혼을 인정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이혼 불가’ 선언은 철회되어야 할 것이고,
예수님의 주장이 맞는다면 모세의 주장과 대립하는 것이므로
신구약 성경의 불일치라는 모순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모세와 예수님의 주장에는 그 어떤 모순이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명기 24장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여인)에 주고 그를 자기 집으로 보낼 것이요’
라는 말씀은 이미 어떠한 이유로 아내와 헤어지기로 한 남자가 취해야 할 규례에 관한 진술일 뿐이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아내와 헤어지기로 작정한 남편이라면 마땅히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아내에게 주어야 한다.
이 이혼 증서는 버림받은 여성들의 복지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긴급 조치 사항이다.
만약 이혼증서가 없다면 그녀는 성적 노리개 감이나 창녀와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 이것을 쥐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모세는 그 남편이나 여인에게 ‘이혼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그들의 ‘이혼’에 합법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혼증서’를 내어 준 모세의 행위를 두고서
이미 구약 시대에 이혼이 성행하였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모세가 이혼을 인정했다고 보더라도 이 사안은 명백히 여인의 음행과 관련된 판단이었으므로
오직 배우자의 음행에 한해 이혼을 인정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본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배우자의 ‘음행한 연고’라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이혼 사유가 된다(마 5: 32).

음행은 혼인의 기초를 무너뜨릴 만한 심각한 죄악이기에
배우자의 음행은 다른 배우자에게 그 사람으로부터 이혼할 합법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배우자의 음행은 이혼의 충분요건이지만 필수요건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음행을 근거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지만 반드시 이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음행이 중대한 범죄이기는 하지만 혼인의 순결성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배우자가 음행을 한 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그를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
우상과 음행을 일삼은 원수 같은 이스라엘(교회)을 끝까지 용서하신 하나님의 마음처럼 말이다.


3. 성경적 이혼의 근거와 재혼의 조건

그렇다면 음행이외에 이혼에 대한 다른 조건은 없는가.
이 물음에 관해서는 개혁주의권내에서도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성경적인 이혼의 근거는 오직 음행뿐이라는 주장과 음행과 함께
(고의적인)저버림(willful desertion)도 혼인의 끈을 끊어버린다는 주장이 있다.

저버림은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 언급된,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는 말씀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구절에서 저버림이 이혼과 재혼의 합법적인 허용을 의미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다.
이 말씀은 불신자인 배우자의 적극적인 행동에 대한 신자 편에서의 판단을 묘사한 내용일 뿐이다.
떠나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이다.
불신자인 배우자가 막무가내 떠나고 할 때, 신자가 막아설 수 없다면 떠나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신자에 대한 불신자인 남편과 아내의 저버림은 가정을 파괴시킬만한 가공할 내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저버림이 예수님이 친히 언급하신 ‘음행 외의’
또 하나의 확실한 이혼 조건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음행은 성경적인 이혼의 합법적인 (충분)조건임에 분명하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무흠자(음행이나 그 외의 이유로 버림을 당한 배우자)의 재혼이 실제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성경적 사색 없이 이혼과 재혼을 용인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설다 못해 희한한 물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물음에 대해 너무나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마태복음 19장과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해석에 따르면,

첫째, ‘음행한 연고’외에 아내(남편)를 버리는 일(이혼)은 불가하다.
둘째, ‘음행한 연고’외에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재혼)드는 자는 간음한 것이다.
셋째, ‘음행한 연고’로 버림을 받은 이에게 장가(재혼)가는 일 또한 간음 행위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시각에서는 무흠한 사람 이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재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음행’이 아닌 그 어떤 이유로도 이혼이 불가하며
만약 이혼을 하고서 다른 사람과 혼인(재혼)을 한다면 양자 간에 평생 간음을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흠한 이혼자에게 재혼이란 불가능한가?
이에 대해 성경은,
다른 사람과의 혼인(재혼)은 배우자가 죽은 이후에만 가능하다(고전 7:39; 롬 7:2-3)고 진술하고 있다.

비록 정당한 사유(배우자의 음행)로 이혼하였다 하더라도 전 남편(아내)이 살아있다면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어 있다. 혼인은 배우자가 죽기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매어두신 생명의 끈이기 때문이다.

무흠자일지라도 오직 배우자의 사별이후에 재혼이 가능하다는 성경의 엄중한 교훈이
당황스럽고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이들이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논지는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까지 경건한 주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불변의 진리이다.
잘못되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면 된다.
잘못을 인정한다면 다시 그 길로 가지 않으면 된다.

주님이 금하신 일을 사람의 생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보다도 끔찍하고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기에 혼인과 이혼과 재혼은 오직 말씀의 정당한 보증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성경의 엄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인의 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이며,
이혼과 재혼에 대한 성경적 투쟁은 교회의 신실성을 드러내는 척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대 교회의 이혼과 재혼의 영역은 거의 무법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씀에 충실하자는 구호를 내 걸은 교회에서
혼인과 이혼과 재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무시되고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교회 안에 넘쳐나는 비성경적 가르침들과 거짓 확신들은 교회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진리의 파수꾼이어야 할 교회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불법적인 이혼과 재혼의 중매를 자처하고 교회를 방종과 음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고의든지 무지이든 은혜와 사랑이라는 명분아래 자행되는 비성경적인 혼인과 이혼,
그리고 재혼은 가정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일이다.

이혼하려는 남편과 아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원하는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알아서 개척하라”가 아니라
“그냥 지내든지 아니면 남편(아내)과 화합하라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1)”고 하신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이혼과 재혼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배우는 일이다.
비록 그런 종류의 일들이 세상 사람들의 안목과 내 자신의 마음에 흡족함이 없을지라도
성도라면 오직 성령과 말씀이 주는 하늘의 긍휼과 위로를 힘입고 살아야 한다.

사람 편에서 끊을 수 없는 혼인의 끈은,
한번 잡으신 인생의 끈을 절대로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며,
이혼과 재혼에 대한 성경적 투쟁은
교회의 신실성을 이 땅에 유감 없이 드러내는 소중한 척도임을 상기하자.

이 오월 가정의 달,
오직 말씀만이 무너져 가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살리는 유일한 방편임을 깨닫는다면
분명 우리의 인생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복된 날로 기억될 것이다.


김병혁 목사 / 에드먼톤개신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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