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만에요
A.J 머스트 라는 사람은 베트남 전쟁 당시 밤마다 촛불을 들고 백악관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반전 시위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혼자서 외롭게 서 있어야 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매일 밤마다 촛불을 들고 무언의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텔레비전 방송기자가 빗속에 촛불을 들고 서 있는 그를 취재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기자는 대화중에 머스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밤에 혼자 촛불을 들고 이곳 백악관 앞에 서 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고 이 나라의 정책이 변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난 이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는 다만 이 나라가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
평화라는 말에는 두가지가 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이 그것이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다.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는 로마 식민백성인 히브리 민족의 것으로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이다.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샬롬’이라는 인사를 기꺼이 주고받았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구해야 할 평화는 팍스가 아니라 샬롬이다.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새해에는 샬롬의 평화가 우리 삶속에 넘치기를 기원한다.
/김의환 목사
3. 사자와 염소
어느 여름 날, 모든 것들이 지독한 더위에 허덕이고 있을 때, 사자와 염소가 조그마한 샘터에 목을 축이려고 동시에 찾아왔다. 그들은 곧 어느 쪽이 먼저 물을 마시느냐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쪽이 모두, 죽더라도 상대에게 저항하겠다는 결의를 굳히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숨 돌리기 위해 잠깐 싸움을 그치자, 독수리떼가 그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어, 그들의 어느 쪽이 쓰러지더라도, 다만 그 위에 덤벼들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들은 까마귀나 독수리한테 먹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양쪽이 모두 화해하는 쪽이 훨씬 낫겠다고 의견이 일치하여 당장에 화해했다.
* 평화는 여러 가지 의견을 차츰 바꾸어가고, 낡은 장해물을 서서히 허물며, 새 가구를 조용히 쌓아가는 매일, 매주, 매월의 과정이다. 평화의 추구가 아무리 수수한 것일지라도, 그 추구는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4. 가장 평화로운 사진
언젠가 평화를 가장 잘 묘사한 그림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공모전이 개최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화가는 절묘한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갖춘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 풍경에는 투명한 호수, 부드럽게 흐르는 시내, 소와 양떼들이 풀을 뜯는 풍요로운 목장의 푸른 들판, 나뭇가지 위에서 새들이 노래하고 있는 무성한 나무, 그늘진 나뭇가지 아래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었으며, 부드럽게 흘러가는 흰구름은 푸른 창공을 가로질러 가며 산허리에 그림자를 수놓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 그림은 평화를 참으로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상을 탄 그림이 묘사한 풍경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위 하나가 바다 한가운데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거친 폭풍우가 그 위에 휘몰아치고 주변으로는 큰 파도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습니다. 거친 허리체인 앞에서 곤경에 처한 배 한 척이 심하게 떠밀려 다니고,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흑암을 이루며 사나운 폭풍은 노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의 중앙에는, 바위 꼭대기의 조그마한 틈새에 비둘기 한 마리가 조용히 등지를 틀고 앉아 새끼들을 부드러운 날개로 덮어서 엄청난 폭풍 가운데서도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요 우리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라
성경: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
방울뱀은 치명적인 송곳니를 가졌지만 다른 방울뱀과 싸울 때는 독이 나오는 송곳니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자나 늑대도 영토 내의 주도권쟁탈을 위해서 싸우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습니다.
'평화'라는 단어의 '평'은 심장 두 개가 나란히 공존하는 '평화의 이념'을 나타냅니다. '화'는 입(구) 속에 밥(화)이 있다는 '경제적 평화'를 의미합니다. 공동체정신이 곧 평화의 출발점입니다. 오늘도 나의 일들도 중요하지만은 다른 사람들의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평화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예수님의 평화
이탈리아 시인 단테가 피렌체에서 추방됐을 때 의미 있는 삶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먼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 먹고 집을 나섰다. 멀고 먼 여행이었다. 어느 차가운 늦은 밤,단테는 프란치스코 수도원 한 곳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온 수도승이 문을 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이 늦은 밤에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질문이 떨어지자 단테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저는 평화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승은 밤이 늦어 문을 열어줄 수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수도원에서도 그는 평화를 찾지 못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러 오셨다. 부활 후 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주님은 세 번이나 그들에게 평화를 선언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지어다.” 또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아니하다.” 평화는 성령의 열매이다. 우리는 언제나 평화를 구해야 한다. 평화가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줄 수 있다.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7. ‘평화의 왕’ 예수
20세기는 인류가 싸운 100년이었다. 한마디로 전쟁의 연속이었다. 영국에서 발행한 ‘평화 속에 전쟁’이란 보고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후만 해도 100개국에서 130건의 군사분규가 있었고 3500만명이 전쟁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만 1000만명이 죽었고 2차대전 6?25 월남전 걸프전에서 약 5000만명이 희생되었다. 인류는 20세기 100년동안에 세 가지 사실을 배웠는데 이데올로기보다 자유가 낫다는 것, 자원보다 두뇌가 낫다는 것, 대립보다 공존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립이란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는 교만에서 나온다. 그러나 공존은 ‘함께 살자. 피차 돕고 의지하자. 함께 잘되자’는 형제애 정신에서 나온다.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시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공존이란 이름을 붙여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말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라는 평화의 고시였다. 아기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오신 ‘평화의 아기’시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증오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오신 ‘평화의 아기’이시다. 예수가 탄생하셨을 때는 참으로 어수선한 시대였다. 만일 그 당시 신문이 있었다면 아마도 이런 헤드라인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헤롯왕 재혼, 왕비의 호소 일축되다!”
“로마 황제 세금 인상 위해 유다 전역에 인구조사 지시”
“여리고 도상에 또 강도 출현, 여행자 3명 살해”
“예루살렘 근교에서 제롯당(열심당)과 로마 주둔군 충돌 백여 명 사망”
이런 때에 팔레스타인 한 구석 작은 빵 굽는 마을에 평화의 왕이 탄생한 것이었다. 6. 25 때 미군 병사 존 토스네스가 참호에서 밤을 새우는데 갑자기 일단의 한국인들이 어둠속에서 나타났다. 총을 들이대자 그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고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그것은 평화를 노래하는 천사의 음성이었다”고 간증하였다.
/최효섭 목사(미국 아쿨라연합감리교회 원로목사)
8. 모든 이와 평화하라
성경: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
아파트 복도에 작은 자투리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 항아리나 쓰레기통을 놓고 쓰는 그런 아파트 단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맨 끝 집에 사는 사람이 침대 메트리스를 옮기다가 그만 잘못하여 두어집 항아리 뚜껑을 건드려 깨고 말았습니다. 메트리스를 옮기는데 온 신경을 쓰다보니 항아리 뚜껑을 건드린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가보니 한 젊은 아주머니가 누가 우리 항아리 뚜껑을 깨뜨렸는지 잡히기만 하면 요절을 내겠노라며 온갖 욕설 다 퍼붓고 있었습니다. 항아리 뚜껑을 깬 사람은 그 여자의 기세가 너무 등등하여 차마 "내가 그랬다"고 나서기가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얼른 집안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다음날 출근을 하는데 보니 그 앞집의 항아리 뚜껑도 깨져 있었습니다. 또 한번 난리가 나겠구나 하며 쓴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데 그 집 문이 열리며 한 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아이고, 항아리 뚜껑이 깨졌네. 복도에다 항아리를 내놓아서 사람들 다니는데 불편했겠구나. 사람은 안 다쳤는지 모르겠군! 안으로 들여놔야겠다."
그 소리를 먼발치서 듣고 있던 이 사람은 퇴근길에 꼭 예쁜 항아리 하나 사서 갖다주며 사과하리라 생각하였답니다. 오늘도 할 수 만 있으면 모든 이와 평화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9. 벌 대신에 주신 마음의 평화
동학운동이 실패로 끝나갈 때 여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교회에 피난해 왔다. 당시 교회는 서양 사람의 건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정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장소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가능한 대로 조선 정부의 법을 지키면서 선교를 하려고 했다. 동학교도들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다가 예수를 믿겠다고 황해도 소래교회를 찾아왔다. 그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으려면 살인죄를 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고였으나 그 중 한 사람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찬송을 부르며 평안을 유지하여 간수들을 놀라게 했다. 감옥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을 가고 친일파들이 숙청되자 그는 자연히 사면되었다. 그는 그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소래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아무리 날씨가 험해도 16㎞를 걸어서 매주 교회에 출석하였다. 심지어 일 때문에 30㎞ 밖에 있을 때에는 미리 토요일 밤에 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주일을 온전히 지킨 다음 밤늦게 높은 산을 넘어서 다시 자기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1895년 늦가을 언더우드는 소래교회를 방문해서 그와 세례문답을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언더우드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있는 죄인인 나를 예수께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는 제게 벌 대신에 마음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를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른 동학교도도 한 사람을 죽였는데 황해도 해주의 가톨릭교회로 피하여 보호를 받았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외세를 등에 업고 조선정부를 무시하며 불법자들을 옹호하고 백성들을 함부로 다루어 원성이 자자했다. 천주교는 종교단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권력집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여기에 비해서 개신교는 가능한 대로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담당하면서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10. 마음의 평화
일본의 ‘하루야마 시게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글을 쓰는 작가인데,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0년 동안 책을 쓰면서 건강의 6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이 여섯 가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피곤하지 않게 하라!
둘째는 적절한 잠을 자라!
셋째는 식욕을 절제하라!
넷째는 화를 내지 말라!
다섯째는 두뇌를 계속적으로 사용하라!
여섯째는 적당한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 이 사람은 “뇌내혁명((腦內革命)“이라는 책을 쓰면서 정말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 여섯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첨가했는데,
그것은 ‘마음의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화가 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55%로 보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11. 평화를 구하는 농부의 기도
김형석 교수가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에 유엔 본부를 견학한 일이 있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인 만큼 큰 기대를 가지고 방청석에 앉았다. 마침 안전보장 이사회의 소집이 공고되어 있었고, 정해진 시간 10분 전부터 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어도 제시간에 출석한 대표는 하나도 없었다. 무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하나 둘 씩 자리를 잡고 앉았고, 회의에 임하는 자세는 더욱 엉망이어서 진지한 구석이라고 전혀 없었다. 각자의 주장을 끝내고 나면 다른 대표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딴전을 부리거나 잡담을 하다가는 회의장을 빠져 나가더라는 것이다. 실망감이 컸다. 이들에게 세계의 평화를 맡겨도 좋을것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날 저녁에 초대받아 간 한 농부의 집 식탁에 앉았다. 조촐하지만 단란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농부는 기도를 드렸다.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김교수의 나라인 한국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온 세계가 평화 가운데서 인류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했다. 김 교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유엔 본부에서의 답답했던 가슴이 한 농부의 기도를 통하여 평안하게 되었다. 김교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세계의 평화는 유엔이 지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드리는 한 농부의 진실어린 기도가 있어서 세계의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12. 평화의 길
미국 국회 의사당에서 가장 평화스러운 곳은 상하 양원의 중간 쯤에 있는 한 작은 방으로 국회 의사당 원형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있다. 그 방에는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의 그림이 보인다. 두 판벽 널은 미국 국쇄의 양면을 짊어지고 있고 그 아래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이국민(This Nation Under God)"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배경 유리창에는 월계관 화환 가장 자리에 명시한 다른 주와 더불어 원 식민지를 상징하는 13개의 별이 나타나있다. 유리창의 두 모퉁이에는 초와 책이 보이는데 그 책은 성경을 나타낸다. 초와 성경사이에 시편 119편 105절 말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기레 빛이니이다."가 인용되어 있다. 흰 상수리 제단 위에는 펼쳐진 성경이 놓여있다. 그 방에는 무릎 꿇는 벤치와 미국기, 푸른 의자들과 융단이 고작이다. 이 작은 교회는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하심에 잘 순종해야 국민이 위대해지고 평안해진다는 진리를 강력하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를 해외에 가장 많이 보낸 때가 영국과 미국의 국력이 가장 강했던 때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에 능력이 뒤따라 가기 때문이다.
13. 평화의 사도
모나코라는 아주 작은 나라가 있다. 국민들은 음악을 사랑하며 범죄가 없는 곳이다. 모나코가 평화로운 나라임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예가 하나 있다. 이 나라에는 유명한 국립교향악단이 있는데「사랑과 평화 의 노래」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단원은 85명.이 나라의 군인은 82명이다. 교향악단 단원 수가 육해공군을 합친 수보다 많다.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14. 평화하라
성경: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원래 악처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에게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욕설을 듣는 것은 물론 때로는 그보다 더 심한 육체적인 괴로움을 당하기까지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 위대한 현철이 하필 그와 같은 악처에게 시달리면서 고생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마침내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선생님,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악한 여자를 아내로 삼고 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훌륭한 기수는 가장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라오. 어째서 그런고하면, 그런 말을 잘 달래서 탈 수 있는 사람이면 다른 어떤 말이나 다 잘 탈 수가 있기 때문이오. 나도 지금 크산티페를 잘 달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어떠한 성질이라도 잘 달랠 수가 있을 것이오."소크라테스의 말을 듣고 그에게 질문한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즉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나가는데 남과 다른 훌륭한 점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예화입니다. 할 수만 있거든 모든 이와 평화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도 모든 이와 평화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15.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는 자
어느 목사 한 분이 몇 년 전 한국에 와서 특별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에 마음의 평화를 얻는 비결을 발견했다. 귀로에 잠깐 하와이에 들렸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안고 양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예수 상을 보았다. 그는 예수의 지친 모습에서 숱한 노력 끝에 잃은 양을 찾으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특히 그가 예수 상에서 받은 강한 인상은 선한 목자 품에 안긴 양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양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평화를 얻은 것이 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어깨 위에 있었다. 그는 잃었던 양이었으나 이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에게 당신의 미래를 맡기라.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평화의 근원이시며 심지가 견고한 당신을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
16. 대포를 실은 배
빅토르 위고의 단편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대포를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났다.거친 파도는 대포를 묶은 쇠사슬을 단숨에 끊어 버렸다.선원들은 배 안에서 이리저리 딍구는 대포를 고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선원들은 태풍보다 배 안의 대포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그때 선원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우리를 진정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외부의 태풍이 아니라,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대포다.’”
인생을 살다보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들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문제가 사실은 외부의 공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내부에서 굴러다니는 대포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고,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얻는 길이다.
/설동욱목사(예정교회)
17. 평화하면 평안하다
세상에는 참 많은 불화들이 있습니다. 그 불화의 원인들을 찾아보면 의외로 하찮은 것들일 때가 참 많습니다. 치약을 끝에서부터 꼭꼭 짜지 않고 중간을 눌러 짠다고 그것 때문에 싸우다가 이혼한 부부가 있습니다. 물론 단지 그것 때문에 이혼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식으로 살다보니 이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양말을 벗을 때 뒤집어서 벗지 말고 똑바로 벗어놓으라고 잔소리하다가 이혼한 부부도 있습니다. 치약 짜는 순서나 양말 벗는 습관이 부부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치약을 중간부터 눌러 짜지 말고 끝에서부터 꼭꼭 눌러 짜라고 남편이나 아내가 말한다면, 그 말대로 치약 끝에서부터 꼭꼭 짜주면 될 일입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며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서로 고집을 부리고 싸울 일인지 잠깐이라도 돌아봅시다. 이제까지 그런 사소한 문제로 자기의 고집을 부리고 다투고 싸웠다면 앞으로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조용히 따라줍시다. 평화는 그와 같은 작은 일을 실천하는 데서부터 옵니다.
_김동호, 《평화하면 평안하다》 중에서
18. 우리시대의 사명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초승달로 불리는 아주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 근동 지역의 수많은 침략과 치욕적인 짓밟힘을 당하며 그 잔혹한 수난과 고난 속에서 꽃피운 그들의 사명과 정체성은 ‘샬롬’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표 민요도 ‘샬롬’이라는 노래다. 이스라엘은 평화를 갈망하며 결국 인류 역사 속에 메시아를 만났고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인류의 하나됨의 평화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은 우리 시대의 사명과 정체성은 무엇일까? ‘샬롬’ 즉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 역사를 회고해보자. 휴전선은 20세기 초반,근대 역사의 한복판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의 충돌로 빚어진 용트림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은 우리 민족의 휴전선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마지막 휴전선이다. 즉 휴전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이요,반대로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때는 세계의 화약고가 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교훈을 살펴보면 공민왕은 신돈을 세워 북벌정책과 개혁정책의 사명과 정체성을 이루려 했고,조선의 선조는 일본의 침입을 막고 국토를 지키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효종과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문명을 하루속히 받아들여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사명이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역사 변혁의 중요한 기로에서 당리당략과 당파 싸움에 혈안이 되어 피눈물 나는 역사의 실패를 경험하였다. 이 시대 한반도,우리 민족의 사명은 평화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시대의 사명과 정체성인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눈물로 회개하며 다시 변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한반도가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샬롬의 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셋째, 이웃과 화해해야 한다. 기득권을 쥐기 위한 패권 싸움을 중지하고, 누구를 정죄하거나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하나된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예수님도 자신의 몸을 깨트려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다. 원자를 깨트릴 때 엄청난 위력을 가진 핵폭탄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시대의 제사장으로서 먼저 희생과 섬김으로 자신을 깨고 부수면 이 땅의 평화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먼저 평화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자.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19. 평화의 하나님
인간의 3대 욕망은 오래 사는 것, 부자 되는 것, 복수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상처를 받고 또 복수할 마음을 품는다. 물질적으로 크게 넉넉해졌지만, 관용과 배려는 더 작아지고 있다. 사람들의 내면에 평안이 없고, 서로 평강을 북돋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는 삶의 바탕인데도 사람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일을 뒤로 미룬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다. 우리 시대 교회는 산상수훈을 소홀히 하고 있다. 복음은 평화의 옷을 입고 있다. 본회퍼는 "평화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라고 했고 존 브로우더스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역설했다. 심지어 유대교의 랍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샬롬(평화)이라고 붙였다.
한국정교회 본부 교육관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평화를 찾아라. 그리하면 네 주위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신경하 감독회장 (기독교대한감리회)
20. 전쟁과 평화
지난 3000년동안 지구상에는 3300여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미국과 옛 소련의 군비경쟁이 한창이었을 때 양국이 가진 핵탄두는 지구를 41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날마다 3만5000여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세력 확장을 위해 전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500억달러에 이른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전쟁을 통하여 그 얼마나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되고 있는가? 부모를 잃은 고아들,자녀를 잃은 부모의 한맺힘,신체 일부분을 잃은 장애인들의 고통,심각한 전쟁의 후유증을 누가 책임질 수 있는가?
이라크와 미국, 북한과 미국의 대치가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겨보면 좋겠다.
/이영무 목사(영신교회)
21. 유일한 평화의 왕
평화는 모든 보화들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철학도 평화를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철학이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행위도 평화를 줄 수는 없다. 어떻게 행위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광산으로 내려가든, 어떤 나무를 흔들든, 어떤 문을 두드리든 간에 이 가련한 세상은 당신에게 평화를 줄 수 없다. 평화는 오로지 하나다. 오직 한 분만이 평화를 가지고 있고, 오직 한 분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을 알고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그의 이름은 '평화의 왕'이시다.
22. 평화의 원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참만족을 얻지 못했고,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에 순박한 시골 농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 농부의 얼굴은 유난히도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로운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후 그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작곡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작성한 50항목에 이르는 유서의 한 구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맡깁니다."
23. 큰 전쟁막은 한줄의 글
남미의 아르헨티니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해 오히려 두 나라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았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일은 칠레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했다.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갔다. 양국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있는 기사였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마음이 두 나라의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성경은 언제나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권면한다.
/김의환 목사
24. 마음의 격량을 잠재우는 법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다.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적당한 운동,적당한 음식,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어떻게 이 마음의 평화를 얻겠는가? 성 프란체스코는 어느날 우물에서 물 긷는 여인을 관찰했다.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뒤 작은 나뭇조각을 물위에 띄우고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었다.
“왜 물항아리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갑니까?” 그녀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군요? 항아리가 흔들려도 물이 넘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라고 대답했다.
프란체스코는 “격노가 일어날 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때,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분노와 갈등,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인내를 생각하면 평안을 찾을 수 있다.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중에 평화로다”고 천사들이 노래했다. 예수님은 평화의 터전을 이루려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님을 모시고 평화롭게 살아야 하겠다.
/고수철 목사
25. 마음의 평화를 얻는 비결
하루 중 틈틈이 평화로운 생각들을 마음 속에 그려라. 당신이 언젠가 본 일이 있는 평화로운 정경이 담긴 추억의 그림, 석양이 기울어 황혼의 그림자가 점차 주위에 깔리기 시작하는, 정적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골짜기의 그림이 마음 속을 흐르게 하라. 혹은 잔물결치는 물 위에 내리쏟아지는 은색의 달빛이라든가, 부드러운 모래펄에 찰싹찰싹 물결쳐 오는 바닷가의 경치를 회상하라. 이와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의 추억은 당신의 마음에 치료약으로 작용한다.
-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중에서 -
* 세상이 숨가쁘게 돌아갑니다.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돌아볼 틈도 없이 거칠고 바쁘게 돌아갑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좋은 풍경을 마음에 그려보는 평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평화가 곧 평화의 시작이며,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합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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