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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향기 (잠 31:10)

by 【고동엽】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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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향기 (잠 31:10)

오늘은 여성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머니 주일을 지키면 여성주일의 의미도 지키는 것이 되는데 우리는 오늘 또 다시 여성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주일은 너무 희생만 강조하다 보니까 넓은 의미의 여성성 좁게 하는 것 같아서 여성주일을 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실 여성주일을 별도로 지킨다는 것은 그동안 여성들에게 소홀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머니 주일을 새롭게 지키는 것도 알고 보면 어머니들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버지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이미 아버지날이 지정되어 있음에도 그 날이 공감있게 지켜지지 않는 것은 아버지날을 지켜야 할 동기나 의미가 감동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일년 매일 매일이 아버지날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성의 시대입니다. 과거에 너무나 억눌려 있던 여성상이 오늘은 일대 변혁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고 변화하고 신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남자들이 모두 바짝 엎드려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 앞에서 잘 보이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오늘 남자들은 아내에게 잘못 보이면 가차 없이 쫓겨날 위험에 초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남자들은 큰소리는커녕 아주 일도 잘하고 애도 잘 보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빨리 돌아간다고 합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이런 점에 매우 소홀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인들은 집에서 희생하고 일만 하는 모습으로 자리 매겨져  왔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왜곡되고 굴절된 여성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여성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값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향기를 맛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의 향기는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조용함”입니다.


여인은 대체로 조용합니다. 조용하고 은밀하고 고상합니다. 그래서 여인에게서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시끄러움에서는 삭막함과 무질서함이 연상됩니다. 거기에 무슨 향기가 있고 고상함이 있겠습니까. 시끄러운 것은 남성사회 입니다. 국회를 보십시오. 너무 시끄럽지 않습니까. 그곳에 여자들을 보내면 조용해질 것입니다. 조용하면서도 일은 신속하게 잡음 없이 잘 마무리 할 것입니다. 아들 셋이 있는 집을 보십시오. 얼마나 요란하고 시끄러운지 모릅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물건 하나 제자리에 없습니다. 원래 시끄러운 사람은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조용한 사람이 소리 없이 할 일을 잘 합니다. 그래서 현숙하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얼마나 엄청난 일을 맡은 여인입니까. 처녀로 아이를 잉태할 때부터 예수께서 죽으실 때 까지 마리아가 얼마나 고난의 일을 많이 당했습니까. 그랬는데도 마리아는 그 일들을 모두 소리 없이 잘 감내해 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렇게 큰일을 감수하면서도 마리아는 이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름 없이 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원래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소리가 별로 없습니다. 여인들이 소리가 없는 것은 지금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말없이 소리 없이 일합니다. 그러면서도 할 일을 다 합니다. 그런 뜻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현숙하다는 말은 조용하다는 뜻입니다. 조용한 여인 그 여인이 현숙한 여인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로움”입니다.


현숙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누가 지혜롭지 못한 여인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말합니까. 그래서 지혜로운 여인을 만난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진주보다 값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소리 없이 남자들을 잘 리드합니다. 아마 이것은 하나님이 여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일 것입니다. 남자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자들이 세상을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자들은 이 세상을 움직인다, 그런데 여인은 그 남자들을 움직인다.”

  성경에 보면 아비가일 이야기가 나옵니다(삼하25:).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갈멜 지역 광야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그 지역에는 양치는 목축업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도적 떼들을 염려해야 하는데 다윗이 그 지역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양을 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지역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양을 무사히 치던 나발이라는 사람에게 사병들을 보내서 먹을 것을 보내라고 사병들을 보냈습니다. 사병들이 가서 나발에게 말하니 다윗이 누구기에 내가 먹을 것을 주느냐고 다윗이 보낸 사병들을 모욕해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남자도 참 지혜가 없는 무지한 남자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화가 난 다윗이 이 집을 그냥 쓸어버리겠다고 군사들을 이끌고 그 집으로 갑니다. 그때는 다윗이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큰 걱정을 합니다. 이것은 분명 큰 사건이 벌어질 일입니다. 그래서 급히 음식을 만들고 먹을 것을 챙겨가지고 다윗이 화가 나서 오고 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다윗에게 엎드려 호소했습니다. "내 남편은 참 무지한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름 그대로 미련한 자입니다. 제발 내가 대신 용서를 비니 이 예물을 받으시고 노를 푸시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노를 풀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지혜로운 아내가 아니었으면 그날 나발의 집안, 종들, 양떼는 풍비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내의 지혜로움으로 모두 무사했습니다. 지혜의 힘은 이렇게 크고 깊고 절박한 시간에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간신히 사건을 무마하고 아내가 돌아가서 보니까 남편이 술에 취해 있습니다. 술이 깬 뒤에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자초지종 말해주자 무지한 남편은 충격을 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열흘 만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나발입니다. 나발이라는 말은 미련한 자라는 뜻입니다. 미련한 남편이 죽자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그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현숙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여인상입니다. 하나님이 남자들에게는 이런 잔잔한 지혜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여인의 몫으로 여인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또 여인이라고 다 주어졌겠습니까. 여인 중에서도 얼마 안 되는 여인들에게만 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여인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지혜로움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인입니다.

세 번째는 “인내함”입니다.


지혜 중 지혜는 인내의 모습입니다. 이 요소가 여인의 속성입니다. 인내는 여인이 가지는 운명적인 속성입니다. 진정한 인내는 여인들이 발휘하는 힘입니다. 여인들이 아이를 키우는 힘이 인내의 산물입니다. 남자는 하루도 아이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남자에게는 그만한 인내의 힘이나 자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밖으로 돌고 여성은 안에서 삽니다. 그래서 남자는 바깥사람이고 여인은 안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봄이면 겨우내 자란 보리밭을 김매줍니다. 늦여름 먹을 것은 시원찮고 날씨는 덥고 내리쪼이는 햇빛 아래서 동네의 아낙내들이 모여 보리밭에서 풀을 뽑습니다. 보면 얼마나 더운지 모릅니다. 그때 여인들은 흘러내리는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때 어린 아이들이 그 보리밭까지 찾아와 젓을 달라고 칭얼댑니다. 그때 아이들은 참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들은 그 아이들을 마다하지 않고 땀범벅이 된 젖가슴을 열고 아이에게 젓을 먹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인데도 그 모습에서 경이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여인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힘을 세상의 여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어린 아이가 하나뿐 입니까. 집에는 큰 아이가 또 있습니다.

작은 아이보다 더 큰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큰 아이, 이 남편 때문에 세상의 여인들이 얼마나 또 속을 썩습니까. 어떤 남편은 아이들 보다 더 일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아내들은 그런 큰 아이를 그냥 말없이 데리고 살아줍니다. 때로 역겨울 때도 많을 것이고 분통터질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냥 봐주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인내의 힘입니까. 여인들에게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가정을 유지하고 관계를 유지하고 삶을 유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힘이 없으면 이 세상의 가정들은 파괴되고 관계가 쉽게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가정이 쉽게 파괴되는 요인들을 보면 모두 여인들이 전과 같이 참고 인내하는 비율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오늘 여인들은 예전과 같이 무작정 참고 인내하고 지혜를 발휘하기 보다는 쉽게 버리고 포기하고 파괴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정들이 결손 되는 비율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정의 구심점은 어디까지나 아내들입니다. 여인들입니다. 그래서 현숙한 여인은 인내하는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현숙하지 못한 여인은 인내하거나 희생하지 않습니다. 합니다.


  네 번째로 현숙한 여인은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 가진 여인을 말합니다.

그것이 “신앙심”입니다.


세상 적으로 아무리 인내하고 조용하다고 해서 다 현숙한 여인이겠습니까. 무엇을 위한 인내고 조용함입니까.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은 신앙을 가진 여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잠언 31장 30절을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며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현숙한 여인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바로 그런 여인일 것입니다. 요게벳은 참 으로 현숙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아주 참담한 시대에 아들 모세를 낳습니다. 아들을 낳았어도 마음 놓고 기를 수가 없는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집에서 기르다가 아이울음소리가 커지자 발각되면 모두가 죽음을 당할 때인지라 그 아들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나일강물에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보고자 숨어서 지켜보다가 마침 강에 목욕하러 나와 있던 공주의 손에 건짐 받는 것을 목격하고는 달려가 그 아이의 유모가 되기를 자청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아이에게 민족의 정신을 심어주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교육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모세는 성장해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일하다 마침내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 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이루어 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여인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생각이 크고 깊고 그러면서도 조용히 그 엄청난 일을 해 냅니까. 우리는 이 여인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조용하면서도 지혜롭고 그러면서도 마음과 생각이 큰 민족을 생각하고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이 여인이야 말로 아주 현숙한 여인입니다. 그 생각과 지혜가 모두 그의 깊은 신앙심에서 울어 나온 것입니다.

또 에스더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여인도 아주 현숙한 여인 중의 한사람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본능인데 이 에스더는 혹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좋은 위치를 담보하고 죽으면 죽으라는 각오로 왕께 나아가 자기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버리지 않습니까. 이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냥 순간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그냥 동포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그의 깊은 민족애와 순전한 신앙의 중심에서 나온 용기요 정신이고 행동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룻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도 참 지혜로운 현숙한 여인입니다. 현숙한 여인하면 우리는 이 룻이 더 점수를 많이 줄 수 있습니다.  룻이 시모를 따라나설 때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 때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고 아무 소망이 없는 시모를 따라서 남편의 나라로 갑니다. 아무 소망이나 희망의 근거도 없는데 그 룻이라는 여인은 그냥 시모를 따라 나섰습니다.

오늘 현대인들 같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따라나설 사람은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룻이라는 여인은 그 길을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섭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시모의 말을 막아가며 그 길을 주저하지 않고 갑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고향이 나의 고향이고, 어머니가 가는 곳이 내가 가는 곳입니다“. 아마 이 고백이 룻의 면면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대목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대목에서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룻이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이 길을 순탄하게 열어 놓으십니다. 예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룻이라는 여인의 현숙함은 땅에서도 알아주었고 하늘에서도 알아주게 되었습니다. 우선 룻의 이야기를 듣기에도 마음이 감동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현숙함이 풍기는 느낌이고 향기고 아름다움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의 구심점은 아내들이고 여인들이고 어머니들입니다. 여인들이 모두 지혜를 발휘해서 모두가 현숙한 여인들이 되면 이 세상의 가정은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인들이 이 신앙심을 가진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을 아무나 발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세련된 여성들이 신앙이 없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 세련됨이 상실되는 느낌이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세련됨 위에 신앙심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세련된 여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성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여성들에게서 이런 향기가 나고 느낌이 세상에 주어지고 현숙함이 유감없이 발휘되어서 탁하고 메말라지고 이해타산으로 얼룩져가는 이 시대를 정화해 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너무 공기가 탁합니다.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온갖 갈등과 편견과 불화와 불만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성의 역할이 그 어느 때 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가정들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거리로 버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여성들이 주안에서 모두 건강하고 향기 나고 아름다움으로 세상에 신앙인의 역할을 다 했으면 합니다. 오늘 여성주일을 맞이해서 이 세상에서 여성이 하는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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