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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공경 (출 20:1-17)

by 【고동엽】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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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공경  (출 20:1-17)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二十․十二)



  오늘은 세계적으로 지키는 어머니주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 八일을 어머니날로 지켰습니다. 一년에 하루라도 특별히 어머니를 생각하고 존경하는 일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사실은 매일 어머니를 존경하고 생각하고 높이기 위해서 이런 운동이 일어난 줄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너무 혼란하고 거칠어서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고 심지어 자녀가 부모를 구타하는 일이며, 어떤 때에는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런 세상입니다.
  이런 시대에 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부모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반드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머니주일을 맞아 범위를 좀 넓혀서 이 제五계명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각 사람에게 친히 깨달을 바를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계명은 인륜이라기보다는 천륜입니다.
  우리는 종종 봉건사상이니 봉건시대의 윤리제도니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 세상은 변하는 세상인데 이 시대에 옛날 계명이 현대인의 생리에 혹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청년들도 없지 않아 있는 줄 생각됩니다. 봉건사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시대가 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옛날이나 오늘이나 동서의 고금을 물론하고 변치 않는 사실도 있고 변치 않는 진리도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물이라고 하는 것은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가 합할 때에 된다고 하는 이 사실도 변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사랑하며 희생하며 기른다고 하는 이 사실은 아브라함 때나 오늘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에 기초를 둔 도덕의 법칙도 변함은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천륜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에 근원을 둔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다음에 생각할 것은 이 계명은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실 때에, 두 돌 비에 새겨서 주었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습니다. 첫 비석에는 첫째 계명으로부터 넷째 계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사람의 하나님께 향한 모든 의무에 대한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비석에는 다섯째 계명으로부터 열째 계명까지가 있었습니다.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무에 관한 계명이 있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먼저 위로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맺은 다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제일 먼저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효도를 하라고 즉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부모와의 관계가 그 첫째인 까닭입니다.
  사실 이 계명을 잘 지키면 다른 계명은 자연히 지켜집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효자, 효부가 살인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 간음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도적질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탐낼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불효자와 불 효녀는 살인도 할 수 있고, 간음도 할 수 있고 도적질도 할 수 있고 무슨 죄나 다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계명입니다.
  셋째로 이 계명은 신앙의 첫 열매를 요구하는 계명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첫째 계명으로 넷째 계명까지를 다 지키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돈독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신앙이 인간 사이에서 제일 먼저 어떤 열매로 나타나느냐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효도는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여러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너희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조금 더 바꾸어 말하면『너희가 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참 신앙이 있습니까? 이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 사회에 나타날 때에 제일 먼저 부모에게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은 반드시 부모를 공경함으로, 그에게 순복 함으로, 그에게 효도를 다 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신앙은 있노라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이요, 거짓 신앙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제五계명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강조해서 우리에게 가르쳤고 구약시대에는 이 계명을 거역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한 것입니다. 그리해서 출애굽기 二十一장 十七절에 보면『자기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이런 모세의 법이 있었습니다. 二十一장 十五절에는『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줄일지니라.』신명기(申命記) 二十七장 十六절에는『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잠언 三十장 十七절에는『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그 뜻은 죽을 때 바로 못 죽고 죽은 다음에도 묻히지 못해서 그 시체가 날짐승의 밥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또한 신약시대에 와서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자녀들아,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명(自明)의 철리(哲理)의 이치라는 말입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그러면 현대인으로서 이 계명을 어떻게 잘 지킬 수 있겠느냐? 이런 시대에서 어떻게 우리가 이 계명을 바로 지킬 수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당면문제입니다.
  여기 대해서 실제적으로 몇 가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우리가 옳은 길을 걷고 옳은 생활을 해서, 우선 부모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야 이 계명을 바로 지킬 수 있겠습니다. 죄를 지으면 그 자신이 형벌을 받기 전에 그를 가장 사랑하는 이가 그보다 먼저 형벌을 받습니다. 자녀가 죄는 지으면 그 부모의 마음이 상합니다. 부모가 형벌을 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그런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어린 요셉을 시기해서 그를 먼 곳에 팔고는,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야곱이 근 二十년 동안 밤낮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습니다. 아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고 동생을 죽이며 말할 수 없이 악한 일을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까지 죽게 될 때에 그 아들 때문에 다윗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습니까?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땅히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야 할 아들이나 딸 때문에 남 몰래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가운데는 혹 없습니까? 마땅히 아들로서 혹은 마땅히 딸로서 옳은 일을 걷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부모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녀들은 없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제 회개합시다.


  첫째 이 계명을 우리가 어기면 다른 계명도 다 어깁니다. 먼저 부모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그릇된 것을 떠나서 옳은 길을 가면 이것이 첫째로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입니다.
  둘째는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물론 부모도 사람이니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사도 바울이 자녀를 가르칠 때에「주안에서……」하는 말을 삽입한 줄 생각합니다.『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우리 동양 도덕에도 옛날에 그렇게 순종을 가르치면서도 간(諫)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혹 부모가 잘못된 명령을 할 떼에는 효자라도 간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외입니다.
  대체로 생각하면 부모 자신은 혹 실수하는 때가 없이 않아 있지마는, 누구든지 자기 자녀들을 바로 지도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므로 원칙으로 말해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교훈은 옳습니다.
  해방 이후에 대학이 많아졌습니다. 대학 졸업생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청년들 가운데 혹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부모가 우리만큼 알아야지. 나는 대학 출신인데……우리 아버지는 옛날 중학교나 졸업했는지……또 우리 어머니는 국민학교나 졸업했는지……난 대학 출신인데……이런 생각한다고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날 수 있습니다.
  제가 참고로 들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유력한 분이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소학교 시절에는 자기 부모를 어떻게 생각했냐고 하면『우리 부모 같은 이는 없어, 우리 부모는 무엇이나 다 안다.』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십 여세 나서 중학교에 진학을 해서 생각해 보니까, 뭐 꼭 그렇지는 않더랍니다.『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도 모르는 것이 더러 있더군.』
  그 다음에는 이렇게 생각이 되더랍니다. 그 후 공부를 좀더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갔습니다. 다시 자기 부모를 생각해 보니까『우리 부모는 아는 게 정 없어, 나만 못해.』이런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러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나올 때에는 부모에 대해서 생각할 때『아이 구 우리 부모는 너무 완고하고 고집스러워서 어디 청년을 이해해 줘야지. 이 시대를 알아야지. 참 답답해!』그런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十년쯤 일하고 三十이 넘어서 그 부모를 다시 생각해 보니 무슨 생각이 나느냐 하면『지금 생각해 보니까 학생 시절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말씀 가운데 옳은 말이 많던 걸. 어떤 것은 안 들었어.』그런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리고 여러 해 지나서 나이 五十쯤 되어 부모를 다시 생각해 보니『과연 우리 부모는 참 훌륭했구나. 내 학생시절, 청년시절에 우리 부모의 말을 좀더 잘 들었다면 실수 안 하는 것이 많았을 걸.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엔 내가 미련했어.』이런 생각이 나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아들이나 아버지나 경험이 조금씩 다를 줄 압니다.
  무식하다고 해도 여러분의 자녀보다 나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경험이 많은 것입니다. 젊은 사람보다 경험이 많습니다. 무슨 판단이든지 경험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보다 사랑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는 여러분을 얼마나 더 사랑하는 지 모릅니다. 이 하늘 아래에는 부모만큼 여러분을 사랑하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의 말을 순종 안하고 누구의 말을 순종하겠습니까? 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부모를 높이고 봉양할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를 높이고 봉양한다고 하는 말도 민주사회에 꼭 맞는 알인지 모르겠습니다. 혹 북한에서는 아버지를 동무라고 부른다고도 합니다. 남한에는 제발 그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민주사회라 하니까 어떤 때 보면 부자(父子)의 구별도 없어졌고 장유(長幼)의 서차(序次)도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더러 있습니다.
  대통령을 국민들이 모여서 선거를 하니까 학생들은 우리 교장은 우리 학생들이 선거를 하면 좋겠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변하는 수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자 이런 사고방식으로 그대로 나가다가는 우리 가정에서『아버지도 투표해서 선정하자.』그렇지 아니할까 염려되는 때도 더러 있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풍속이 변하지마는 창조의 질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요, 딸은 딸입니다. 어른은 어른이요, 아이는 아이입니다. 창조의 질서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존경할 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을 봉양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욱이 부모님이 노쇠해서 자기의 사업을 할 수 없고, 한국 같은 장래에 쓸 것을 축적할 수도 없는 이런 경제사회에 있어서, 장성한 자녀들이 특별히 연로한 부모님들을 봉양할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입으시는 것, 잡수시는 것, 모든 면으로 그러해야 합니다. 용돈도 좀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도 내 주머니의 돈만 못하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꼭 사실인 줄 압니다. 아들한테 용돈 달라고 하는 말은 참 하기 어려운 줄 압니다. 용돈 달라는 말하기 전에 미리 좀 넉넉히 드리세요. 여러분, 아기 생일잔치는 잘하면서 부모님 생일을 혹 잊어버리는 분이 없습니까? 자기는 어디 가려면 조금만 바빠도 택시 타고 가면서, 부모님이 어디 가진다면 버스 값이나 드리는 분은 없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서양에서 매우 드물어요.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이 점점 많으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해서 음식 잡수시다가도 음식을 자꾸 흘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도 그렇게 되어오지마는 서양에서는 큰상에서 온 가족이 다 앉아서 함께 먹습니다. 이 가정도 그렇게 한 상에서 식사를 하는데 제일 높은데 앉은 할아버지가 음식을 줄줄 흘리니까 이거 참 창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며느리가 보기가 답답합니다. 그래서 부득이『미안하지만, 할아버지는 딴 곳에서 잡수세요』하고 딴 상에다 잡수시게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접하느라고 딴 상에다 드리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접이 아닙니다. 그저 주방 한 옆에 조그만 상에다 따로 잡수시게 했는데, 그것도 아마 떠 넣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요. 그릇을 들고서 잡숫느라고 하더니 또 그릇을 떨어뜨려서 자꾸 깨뜨립니다. 자 이러니 그 다음에는 며느리가 성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거 원 안 깨지는 그릇이 없겠나 하고 돌아보니까 주방 옆에 고양이 밥 주발이 있는데 그게 나무그릇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씻어서 거기다 밥을 담아 드립니다. 아마 씻기야 잘 씻었겠지요.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이제는 주방 옆에 앉아서 그 고양이 밥 주발에 갖다 드리는 것을 조금씩 잡숫고 그렇게 지냅니다.
  한 번은 그 아들과 며느리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너 댓 살 난 아들아이가 나무목침 같은 것을 하나 갖다 놓고는 주머니칼로 부지런히 가운데를 파냅니다. 그래서야『야 이놈아, 너 뭘 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나무그릇 만들어요, 나무그릇.』한단 말입니다.『나무그릇은 만들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하고 다시 물어보니까『아버지 늙은 다음에 밥 담아 드려야지요.』여러분 우리가 다 웃으시는데 이것을 꼭 우리가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우리 자녀가 우리를 잘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의 옛 글에도 효순환생효순자 악역환생악역자(孝順還生孝順子 惡逆還生惡役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효도하고 순한 사람의 그 아들이, 효도하고 순한 아들을 낳고 거스리는 아들은 이 다음에 자기를 거스리는 아들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꼭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한 달 전에 어떤 감리교 목사님이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목사님한테는 특별히 감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분 말이『소망의 시간을 늘 그렇게 방송을 해 줘서, 우리 집에서는 이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는데 두 번씩이나 듣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도 듣고 주일날 아침에도 듣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도 듣고 주일날 아침에도 듣습니다.』라고 합니다.『그건 왜 두 번씩 듣습니까?』『그런 게 아니라 제가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 분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들으십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많아 가시니까 한 一년 전부터는 귀가 먹어서 좀 적은 소리는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이 구 이거 소망의 시간도 못 듣고 이젠 뭘 하려고 사노? 자꾸 이렇게 탄식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제 아내가 정 그러시면 내가 소망의 시간을 필기해서 드릴 텐데 그걸 읽어보세요 하고는 매주일 그것을 베낍니다. 할머니가 시력은 다시 밝아지셔서 잘 보시거든요.
  그래서 딸이 소망의 시간을 다 베껴서 쓰는데 말하는 것을 다 따라 베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대강 베꼈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또 베낍니다. 이렇게 한 후 다시 정서를 해서 어머니한테 바치고야 주일날 예배당엘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민망해서 제가 아내보고 그걸 매 주일 어떻게 합니까? 이따금 이나 하구려 하였더니 아내의 대답하는 말이 이제 뭐 얼마나 더 앉아 계시겠고? 그저 앉아 계시는 동안은 내가 이걸 하려고 합니다. 하는군요. 이래서 저도 소망의 시간을 두 번씩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나이 많은 부모님들 모시기에 좀 피곤한 이가 혹 계십니까?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나이 많은 부모님들이 건강하다고 우리 부모님은 백세를 사실 거라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언제 돌아가실 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옛날 글에도 나무는 조용히 섰고 자 해도 바람이 그치지를 아니하고 아들은 봉양을 하고자 해도 어버이가 기다리지를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얼마 못 앉아 계실 테니 어떻든지 살아 계시는 동안에 부모님을 잘 공경해서 이와 같이 거칠고 혼란한 사회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모범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출처/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6권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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