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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관계 (잠 23:24-25)

by 【고동엽】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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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관계 (잠 23:24-25)

오늘은 부모님 주일입니다. 그리고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 이 세상에서 이 어버이 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웃이나 형제 그리고 친구와 친척 도 다 좋은 관계이지만 이 어버이와의 관계와는 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내 몸으로 낳은 자식입니다. 그리고 나를 낳으신 부모입니다.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좋은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는 아니지만 효 그 이상으로 가정과 부모와 자녀의 문제를 다루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모님과 함께 식사나 하고 꽃이나 달아드리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기 때문에 몇 가지 부모님 생각을 깊이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모두 정신적인 것들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자녀들은 부모님에게 몇 가지 우선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 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녀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님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만큼 자식을 위한 희생과 사랑과 애정을 가진 존재가  없습니다. 부모는 그만큼 내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베풀고 희생하는 모습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자식에게 무조건적입니다. 부모의 인생은 자식이 전부입니다. 자식이 우상입니다. 혹 어떤 부모는 내 인생도 중요하다 하는 이해타산적인 부모도 있기는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 없는 내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에게는 자식 그 이상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모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오늘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제일 먼저 생각하며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는 “생전에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생존해 있을 때 할 일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님 생존시에는 관심도 없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큰 비석을 세우고 무덤을 근사하게 만들고 울고불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 왕릉 같은 무덤이나 웅장한 비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불효자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더 큰소리로 웁니다. 그렇게 큰소리로 울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모님 생전에 즐겁게 해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효의 정신입니다. 그 말은 기회 있을 때 행하고 실천하고 이루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기회가 다 지나갔을 때는 이미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 생전에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반드시 부모님의 영혼 구원을 이루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의 영혼이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일찍이 예수를 알고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 자식도 내 친구도 내가 전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 부모님은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내 부모가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지금쯤 성경말씀대로라면 지옥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을 믿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면 이 일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보통의 일입니까. 내 부모가 예수를 믿어도 믿지 않아도 그만인 그런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 부모가 살아생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은 상태로 하나님으로부터 불려 감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을 아십니까. 성경은 이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여러 번 여러 번 말씀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지옥에 가지 말고 천국에 가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면 웃습니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비웃습니다. 속으로 목사가 비이성적인 설교를 하는 줄 압니다. 그리고 현실성 없는 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 성경이 할말이 없어서 장난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천국과 지옥도 없는 기독교, 장치 성경이 누차에 걸쳐서 경고한 심판도 없는 기독교를 왜 믿습니까. 수양이나 하고 불안한 마음 위로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이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실의 삶에서 자신감을 잃고 확신도 없이 믿음과 생기를 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부모가 그 지옥엘 갑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그곳을 오죽하면 지옥이라 했겠습니까. 상상도 학 싶지 않은 곳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답이 금방 나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효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 부모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님이 세상을 다 사시고 돌아가시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가시도록 안내하는 영혼구원 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1억 원짜리 황금 수의를 입혀서 두꺼운 관에 넣어 큰 무덤에 묻어 놓으면 무엇 합니까. 그것이 뭐하는 짓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은 남의 무덤에 묻혀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도 남의 무덤에 잠시 묻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부활할 것인데 큰 무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원받는 것 그것이 최상의 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최대의 효는 내 부모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를 알게 해서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최대의 효입니다.


네 번째는 “부모님은 가장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내 부모는 싫다고 취소하고 다시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관계입니다.  이웃이나 친구는 싫으면 바꾸고 만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내 부모는 그럴 수 없는 특수 관계입니다. 내가 태어나 보니까 이미 나의 부모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내가 그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관계가 보통 그냥 관계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만나지 않고 보지 않고 그냥 지낼 수 있는 관계입니까. 이 부모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부모를 즐겁게 하고 너 낳은 부모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관계가 악화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악화되면 모든 것이 불화해집니다.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가 불화되면 그것은 형벌입니다. 저주입니다. 가장 비참한 삶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을 보면 이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불화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 부부가 이혼함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부부의 이혼은 참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근래 이 이혼율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모가 이혼하면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길거리에 버려집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한을 마음에 안고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성장한 후에도 그 결손적인 요소를 마음에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또 가정들이 불화화게 되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며느리를 얻으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특히 며느리와 시부모와의 갈등은 전체 가정들이 모두 겪고 있는 아픔입니다. 이 문제는 서양의 가정들도 모두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라고 합니다. 이 며느리의 문제는 갈등을 내포한 채 삶이 시작됩니다. 새 가족이 우리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설렐만한 기쁨의 일인데도 양가정의 독특한 문화가 극복도지 못하고 시부모라는 고질적인 문화가 극복되지 못해서 자녀가 결혼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이 갈등이 문제는 시작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좋은 경우와 바쁜 경우를 이렇게 비교해서 그 원인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듣고 자신의 가정환경과 그리고 지금 처해진 여러분의 처지에서 한번 깊이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시어머니가 미울 경우입니다. 이런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눈에 밉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시어머니들은 잘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빼 놓고 아들과 소곤소곤 상의할 때, 세 며느리 중 한 며느리만 편애하고 사랑할 때, 당신의 구세대적 사고방식만을 막무가내로 고집할 때, 용돈을 주고 보약을 해 드리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받을 때, 며느리가 시집살이 때문에 살이 빠졌는데도 아들에게만 얼굴에 살이 빠졌다고 할 때, 아들집에 오면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는 시어머니, 이런 경우가 며느리들이 볼 때 시어머니가 싫어질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감이 됩니까. 아주 하찮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이 관계를 악화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들입니다.  

다음은 시어머니 눈에 며느리가 미울 때입니다. 이런 때 며느리가 밉습니다. 여러분들 중 며느리들은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시집올 때 빈손으로 왔을 때, 늙은 시어미를 제쳐두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릴 때, 시어머니의 생일을 모르고 그냥 지나갈 때, 직장 다니는 며느리가 돈 줌 번다고 시어미가 하는 살림을 간섭할 때, 휴가 갈 때 자기들만 갈 때, 직장 다니는 며느리 밥 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그냥 놔둘 때, 며느리가 아들인 남편을 종 부려먹듯 할 때, 이때 시어머니의 눈에서 열불이 난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들이 생각이 모자라서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세 번째는 시어머니가 좋아지는 경우입니다. 며느리들에게도 시어머니가 좋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시어머니들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에게 “피곤하지 열심히 해라”하고 격려할 때,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함께 앉아서 남편들 흉볼 때,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장난칠 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함께 상의해 줄 때, 며느리 생일날 조금이라도 용돈을 줄 때, 아이 키우느라고 수고한다 하면서 우유 값을 주실 때 등입니다. 이런 경우에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고마움과 친근감을 느끼며 마음으로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닙니다. 며느리들은 격려와 칭찬이면 다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시어머니들에게는 이런 아량도 없고 조그만 용돈 줄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서로 마음 불편하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며느리가 예쁘게 보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예쁘게 보입니다. 며느리들은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어른으로 인정해 줄 때,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때 그 짐을 받아줄 때, 시어미를 엄마같이 대해 줄때, 때때로 “어머님 고맙습니다”하고 카드를 보내줄 때, 시어머니에게 검소한 며느리, 둘이 잘 살아가는 며느리 등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우선 별 것도 아니라는 생각부터 듭니다. 힘들 것도 없습니다.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됩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서로 열리지 않기 때문에 별 것도 아닌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좋은 관계가 평생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부모나 자식이나 한 가지를 꼭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식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부모는 하나님이 맺어준 특수한 관계라는 것과 부모에게 잘 하는 것이 결국 내가 복을 받고 살아가는 가장 큰 비결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점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의 젊은 부부들은 이 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저희들끼리만 살면 행복한 줄 알고 늙은 부모를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살면 결국 내가 늙었을 때는 내 아이들도 나에게 그렇게 합니다. 심은 그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옛날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늙은 어머니를 밥만 축낸다고 산속에 버리려고 지게에 지고 갔습니다. 산속에 어머니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니까 아이가 “할머니 어디다 두고 왔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산에 버리고 왔다”고 하니까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지게 잘 보관하세요” “왜 그러느냐” “잘 보관해야 나도 그 지게로 이 다음 아버지 늙으면 갔다 버릴 것 아닙니까”하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무 소리 못하고 다시 가서 어머니를 모셔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은 강조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고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그래야 내가 또 자식으로부터 그런 즐거움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부모의 입장입니다.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도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시어머니들에게는 이 생각이 부족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며느리가 아니고 딸입니다. 내 자식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고 며느리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의 폭이 그만큼 넓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식구들 끼리 이야기 하다가도 며느리가 들어오면 말을 그칩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여러 동서들 앞에서 한 며느리 흉을 봅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쓸데없는 고집을 피웁니다. 며느리가 해 주는 일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아들하고만 속닥속닥합니다. 그리고 집안일을 상의하는데 며느리를 소외시킵니다. 시부모가 그렇게 처신하면 오늘 며느리들은 모두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런 모습을 그냥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가 한번 두 번 쌓이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치유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버립니다. 모든 문제는 상대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들은 부모에게 즐겁게 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관계의 조화는 피차가 노력해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피차가 복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무엇이 더 소중한 일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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