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5월 29일 명동성당이 준공되었다. 서울 대교구 주교좌 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다.
사적 제258호인 명동성당은 평면 길이 약 69m, 너비 28m, 종탑 높이 47m, 건축면적 약 1,500㎡이다. 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1784년 당시 역관 김범우의 집으로 이승훈, 정약전의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모여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 설계와 공사감독은 프랑스인 신부 코스트가 담당했으며, 1945년 이름이 종현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뀌었다. 건물의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이고, 고딕 양식의 벽돌건물이다. 현재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며 구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본당이 설정된 것은 1882년경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보다 104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그 해 가을부터 수표교(手標橋)의 이벽(李檗)의 집에서 영세식이 있었고, 다음 해에는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부근) 소재 중국어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 대청마루에 모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에 교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신앙공동체는 그 이듬해 형조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간되어 김범우가 충청도로 유배되면서 해체되었고, 명동은 1882년에야 다시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미수호조약이 체결(1882년)됨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회장 김 가밀로에게 성당부지를 물색, 매입하게 하였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기지분쟁이 일어나 성당건립은 지연되었지만 신자수는 계속 증가하여 1892년에는 남대문 밖에다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을 분리시켰다. 이후 한때 종현성당은 문안성당, 약현성당은 문밖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약현본당의 분리와 함께 기지분쟁을 매듭지으면서 종현본당은 성당의 공사에 착수하였다. 코스트(Eugene Coste, 高宣善) 신부가 성당의 설계를 맡았고, 공사감독도 순수 지휘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면서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본당을 맡아보면서 성당건축을 마무리지었다. 1898년 5월 29일 성당을 축성식과 함께 ‘원죄 없으신 잉태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1900년 9월 10일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신학교에서 옮겨와 지하묘지에 안장하였고, 1925년 3월 3대 주임으로 비에모(Villemot, 禹一謨) 신부가 부임하였고, 이듬해 10월 17일 백동본당(栢洞本堂, 현 혜화동 본당)을 분리시켰고, 1939년 2월 11일에는 문화관을 준공하였다. 194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기준(李起俊, 도마) 신부가 종현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고, 1944년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파견한 전교수녀 2명을 맞아들여 사목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종현본당은 성당명을 종현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꾸고, 12월 8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 귀국환영 미사를 봉헌하였다. 1947년 가톨릭출판사를 설립하여 각종 서적을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6월 29일 세종로 본당, 1948년 12월 신당동 본당, 1949년 가회동 본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1950년 7월 16일 북한의 공산군에 의해 성당과 부속건물 및 교구청이 징발당하는 한편 신부들이 추방되었다가 9월 26일 서울수복과 함께 돌아온 신부들에 의해 성당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1955년 종로본당을 분리시켰고 1957년 7월 장금구(莊金龜,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강화본당으로 전출되면서 6대 본당주임으로서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신부가 부임했으며, 양 신부는 재임 동안 현 교육관 건물을 건립하였고, 한국 천주교로서는 최초로 본당주보를 창간하였다. 1962년 1월 3일 7대 본당주임으로 이종순(李鍾淳) 신부가 부임하였고 이 해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1964년 8월 1일 신인식(申仁植) 신부가 가르멜 수녀회 지도신부로 전출되면서 9대 본당주임으로 황민성(黃旼性) 신부가, 1965년 4월 10대 본당주임으로 이계중(李啓重) 신부가, 1968년 6월 28일 11대 본당주임으로 이문근(李文根) 신부가 각각 부임하였다. 1970년 2월 17일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를 구성하였고 3월부터는 토요특전미사제를 도입하여 시행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월간 <가톨릭 명동>을 창간하였다. 1971년 5월 14일 12대 본당주임으로 최석우(崔奭祐) 신부가 부임하면서 ‘명동 대성당 복원보수위원회’를 구성하여 다각적인 보수계획을 수립하였다. 1972년 13대 본당주임으로 김몽은(金蒙恩) 신부가 부임하였고 1976년에는 3.1 명동사건이 발생하였다. 1977년 3월 경갑룡(景甲龍) 주교가 14대 본당주임을 겸하였고 1982년 김수창(金壽昌) 신부가 1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83년 말 현재 신자수는 2만 6,974명이며,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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