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늦은 후회
시 137:1-9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
진대 내 오른 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또 다시 8,15 해방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벌써 63 주년입니다. 그리고 금년이 건국 60주년의 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참 수난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만 고난 받은 것 같이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나 혼자만 어려움을 당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모임에 가서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가서 들어보니 자기의 사연은 측에 끼지도 못하겠더라고 합니다. 어디서 그런 어려움을 다 당하고 살아가는지 자기의 고난은 말할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민족과 같은 역사를 가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5월 14일 건국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엊그제 이스라엘 대사가 “한국과 이스라엘은 너무나 닮은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에 압제를 받고 공산군의 침략을 받아 고난 받은 것과 이스라엘이 나치에 수난당하고 중동전으로 고난당한 것이 너무나 흡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덜 한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압제받고 능멸당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1-3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노래를 불러 보라 그러면 먹을 것을 주겠다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강가에 나아가 눈물지으며 한탄을 합니다. 그리고 4-6절에서 스스로 다짐하기를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또 8-9절에서는 바벨론이 오늘 부강하였지만 곧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본시는 “비탄시”입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침략당하고 포로로 끌려가 온갖 설움을 받고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갔습니다. 그때 시인이 바벨론에서 당한 쓰라린 생활을 보며 포로생활 말기에 이 시를 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본 시의 운율은 애가풍입니다. 처음부터 부드럽고 잔잔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본 시는 갈수록 분노가 고조되고 흥분이 강렬해집니다. 그리고 끝부분에 가서 바벨론을 저주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들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비탄에 가슴 아파 합니다.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1)고 했습니다. 이들이 왜 강가에 있었는가 하면 처량한 자신들의 모습 때문에 한적한 강가로 가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다리 뻗고 울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토록 회개를 촉구했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시하다가 마침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그리고 두고 온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면서 한없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짐하기를 “어찌 이방인을 위해 노래를 부를까”(4), “그러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으리로다”(6) 하고 그들은 목 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만일 내가 노래를 팔아 얻어먹는다면 저주를 받아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잃고 난 후에 소중함을 깨닫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후회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로부터 여러 번 경고 받았지만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원인은 순전히 내적인 원인 때문입니다. 불순종과 깨닫지 못함 그리고 경고무시와 교만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오늘 나라를 잃고 강가에 앉아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후로도 계속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전쟁과 포로와 압제의 역사입니다. 애굽에 430년간 노예생활을 하였고 바벨론에 의해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하였고 주후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되는 전쟁의 역사를 겪었고 그 후 1800년 동안 유랑민족으로 세상에서 떠돌아다니며 생존하다가 1948년 겨우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도 이스라엘은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국가공동체를 오늘까지 지탱시켜 온 힘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위에 세워진 애국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회당을 지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오경을 히브리어로 베껴서 함에 넣어두고 후손들에게 읽히고 가르치고 들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시인 하이네(Heine)는 “토라( 모세 5경)가 가는 곳이 곧 우리의 조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신앙의 터 위에 조국을 심었고 그 애국심이 흘러나와 나라와 민족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본시와 같은 시가 탄생한 것이고 고난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비극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3,1절, 6,25, 8,15는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역사와 같은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도 역사상 수백 번의 침략 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한국의 운명은 “열차의 객차 안에 있는 길 한복판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객차안 길 한 복판은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비키라고 건드리며 지나가는 길입니다. 우리나라는 주변대륙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 때마다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6,25로 경제 파탄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국운을 파탄시켰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므로 얼마든지 우호적으로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나라인데 일본은 오늘까지 아주 좋지 않은 이웃입니다. 아주 비열한 나라입니다. 우리민족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준 나라입니다. 36년 동안 지배도 악랄하게 했습니다. 역사에는 지배받은 나라가 많은데 일본과 같이 악랄한 나라는 없습니다. 억압의 역사를 보면 말도 이름도 다 빼앗은 나라는 일본뿐입니다. 항거하는 우리민족에게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항거하는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짓밟았습니까. 그런 악랄할 모습을 보고 당시 의분을 일으킨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사람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예배드릴 때 불 지르는 일본의 만행을 보다 못해 사진을 찍어 해외에 전송해 전 세계에 공개했습니다. 그래서 붙잡혀 얻어맞아 머리에 이상이 발생하여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외국인이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그때 대답하기를 “왜 이 시대가 이렇게 악한가, 그런데도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나섰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오늘까지 사과 한마디 없습니다. 위안부로 끌려가 만신창이 인생을 살아간 세대들이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외쳐도 한마디 사과의 말이 없습니다. 오늘 까지도 독도문제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들 생각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국력을 길러야
나라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실력이 없으면 지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군사력으로 지배는 받지 않아도 국력이나 경제력이 약하면 여지없이 지배당하고 살지 않습니까. 국가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정직한 나라로, 양심적인 나라로, 건실한 경제력을 지닌 나라로, 질서가 있는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가 힘 있는 나라가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지자들이 그토록 회개하라 외쳤습니다. 그 말은 “정직하라, 건실하라, 잘못을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양심을 저버리고 우상을 좆고 부패하고 나라를 병들게 했습니다. 나라가 병들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으로부터 무너져서 포로로 잡혀가서 피 눈물을 흘리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을 흠모하고 이방문물을 부러워하고 우상까지 수입해서 섬겼습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지탱할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라를 뺏기고 포로로 잡혀가 온갖 설움을 당하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평소 소중한 것을 모르면 뺏기고 깨닫게 되는데 그 때는 후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후회에서 나온 고백이 본문의 시입니다. 본문 시에서 시인은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까. 그 눈물은 피눈물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후에 피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나라 사랑
나라사랑은 말로 일시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사랑은 정신으로 사랑하고 삶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말로 다 하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말로는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다 제몫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오늘 여당은 책임감이 없습니다. 소명감이 없습니다. 요사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혼이 없습니다. 쇠고기 수입 흥정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 없이 할 수가 있습니까. 사실 사람들이 광우병 때문에 촛불을 든 것이 아니고 자존심이 상해서 거리로 나간 것입니다. 어떻게 백성들의 자존심을 그렇게 무시할 수 있습니까. 수입을 단계적으로 해도 괜찮았을 것인데 한꺼번에 인심 쓰듯 했으니 푸줏간 주인도 그런 식으로 협상은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당은 혼은 고사하고 염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촛불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기회주의자들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나라사랑이라는 말은 다 허구입니다. 어느 야당의원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광우병 시위가 한창일 때 사람들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불러들였고 다시 미국으로 보낼 때는 보안을 철저하게 해서 극비리에 내 보냈습니다. 광우병 대책위 공동위원장이라는 작자는 밤에는 촛불을 주도하고 낮에는 수입쇠고기 점에서 몰래 수입쇠고기를 사들고 나오다 대학생들에게 발각되어 대망신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나라사랑하는 태도입니까. 그것이 광우병 때문에 국민 건강을 해칠까봐 염려하는 나라 지도자들이라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미국인들 3억 명이 매일같이 주식으로 그 쇠고기를 먹고 살고 있고 30개월 넘은 소를 먹으면 모두 광우병에 걸리는 것처럼 떠들고 있는데 미국인들은 30개월 넘은 소를 연간 7만 마리나 잡아서 그 뼈를 고아낸 국물로 스프를 만들어 매일 주식으로 마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럽을 포함해서 전 세계 96개국이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해서 먹고 살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광우병에 얽매여서 이렇게 요란을 떨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가장 큰 문제인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언반구 말이 없고 금강산에서 내 백성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도, 저 북한 백성들이 수없이 굶어 떼죽음을 당해도 상관없이 몇 십 년 후에 나타날까 말까하는 광우병 때문에 그 요란을 떠는 것이 과연 나라사랑하는 태도입니까.
오늘 우리민족이 이렇게 생각 없이 살아가면 보복당하고 세계에서 소외당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장 미국에서 한국 차 불매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미국 사람이 옆에서 광우병 걸릴 텐데 어떻게 고기를 먹느냐고 비웃으며 나가더라고 합니다. 그러는 모습을 일본은 보고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국의 국가 브랜드는 자꾸만 추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국가 브랜드가 2005년도에는 25위였는데 2006년도에는 27위로 추락하고 2007년도에는 32위로 추락했습니다. 2008년 금년은 또 얼마나 추락할지 겁이 납니다. 이제는 나라 사랑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이성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쇼팽은 원래 폴란드 사람입니다. 20세 때에 불란서로 유학을 갑니다. 유학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너는 어디를 가든지 폴란드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어린 아들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관을 마음에 심어주었습니다. 유학을 떠나는 제자에게 담임선생님은 조그만 병에 폴란드 흙을 담아주면서 “너는 어디를 가든지 나라를 잊지 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유학의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제자에게, 아버지가, 스승이 해 주어야 할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쇼팽은 유학 가서 공부하는 동안 그 흙이 든 병을 책상 앞에 놓고 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쇼팽은 38세에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또 일찍 죽습니다. 쇼팽이 38세 나이로 죽을 때 “나의 조국 폴란드의 흙이 담긴 그 병을 내 무덤에 묻어 달라”고 유언합니다. 오늘 이것이 아버지가, 어른이, 지도자들이, 교사가 해야 할 교육입니다. 이 교육이 마침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일부 어른들이 그리고 일부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이상한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 전도사님이 고등부 학생을 지도하다가 한 학생이 입원해서 병원심방을 가서 위로하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학생이 정색을 하면서 “왜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기도하려고 하느냐“며 거절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딸은 중학생인데 어느 날 어머니에게 “나는 오늘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어리둥절해진 어머니가 “무슨 소리냐”고 묻자 담임선생님이 “너희 나이면 이제 스스로 결정할 나이니 무조건 부모 말 그대로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일부 교사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독을 마시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들이 대통령을 향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나왔는데도 전국의 학부형들 교사들 나라의 국민들 모두가 지금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아이가 교사로부터 매를 한번 맞고 오면 당장 쫒아가서 멱살을 잡고 요란을 떨면서도 이런 문제에는 이렇게 관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역사의 마디는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는 3,1절, 6,25, 8,15가 역사의 마디입니다. 그래서 3,1절 때는 국민에게 “나라와 자유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6,25때는 “나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8,15때는 “다시는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을 강하게 주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오늘 후대들에게 그런 교훈을 주는 어른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있으면 오늘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겠습니까. 모두 말해야 할 때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오늘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이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당했던 바벨론 포로 말기에 그 참상을 직접 목격한 시인입니다. 이 시인은 그 설움의 모습을 본 그대로 시로 후대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의 저변에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을 가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라는 애타는 절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이스라엘의 애국가 가사와 같은 시입니다. 여기에 슬픈 노래가 있고 비탄이 있고 뉘우침과 한탄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노래 속에 미래가, 장래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고대하는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이 시에는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시인의 안목이, 진정성이,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의 뜻을 존중하며 하늘의 뜻을 존중하는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그 나라를 위해 헌신을 하고 수고를 하고 땀을 흘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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