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전 과정의 목적인 성화 살전4:3, 요17:19 출처
마틴 로이드존스
신약 성경뿐 아니라 구약 성경 도처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원리는
성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중요한 진술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출발점이며 근본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신 모든 일의 궁국적인 목적은 우리의 성화인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갈4:4) 목적도
역시 우리의 성화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것이었으며
성령을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로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신 모든 일의 목적과 목표는 우리의 성화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더 많은 증거를 원하신다면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떠나시려는 순간에 그들을 위해 성부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9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실때 주님은 사실상 아버지를 향하여
"나를 당신의 뜻에 맡깁니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행하도록 하신 이 최종적 사역을 위해
나 자신을 구별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사역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그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목적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도에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이 일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잘 표현한 찬송가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죽으셨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선하게 만들기 위해 죽으셨네
- 세실 프랜스 알렉산더 -
잠시 뒤에 보여 드릴 내용이지만 우리는 두 번째 부분을 잊어버리고 십
자가의 죽으심을 오로지 죄사함만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첫 번째 원리는 성화가 구원의 전 과정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피해야 하는 몇가지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드겠습니다.
첫 번째 위험은 이 다양한 교리들을 개별화시켜서 잘못된 방식으로 서로 분리시키는 위험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와 그 안에 담긴 교리들을 살펴볼 때
그들이 모두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처럼 분명한 사실도 없다는 것을 종종 강조해왔습니다.
그 교리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별개의 나누어진 교리들을 느슨하게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리 사이에는 중대한 연결성이 있으며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교리들을 구분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사물을 구분하는 것과 분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사고하기 위해 그리고 실제로 성경이 그렇게 구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들을 분리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따르면 칭의와 성화는
같은 과정의 일부 즉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활동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즉 성화되지 않고는 칭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성화에 이른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비성경적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기록한 말을 예로 들어 봅시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사도는 여기서 구원의 전체 역사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칭의에서 영화로 바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고리도전서 1장 30절에 있는 바울의 다른 진술도 살펴봅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것들을 분리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이 당신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로마서 5장과 6장의 위대한 교리인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교리를 다룰 때
매우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바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며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칭의가 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성화와 구속도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는 사람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연관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전1:13)라고 질문할 권리가 있습니다.
구운 전체에 그리고 그의 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가운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추론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위험은 먼저 죄사함만을 구하고 성화는 나중에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앗 맞아요 아무 아무게는 구원을 추구했지요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죄사함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직 성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칭의와 죄사함이라는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그가 칭의를 받은 것처럼 성화도 받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와전히 잘못된 생각임에 분명합니다.
죄사함만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훌륭한 이유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죄사함을 구합니까? 왜 그것을 바랍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뿐입니다.
물론 죄사함을 구할 때 단지 자신에게 위로의 감정이 생기기만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참된 죄사함의 추구는 아닙니다.
죄사함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하심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시켜 놓은 무언가를 싫어하게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으로 죄사함을 구하고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 짓게 한 것으로부터 그들을 이토록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한 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이것이 죄사함을 추구하는 기초입니다.
"죄시함"이라는 말이 이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당신이 죄사함에 관심이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지옥에가 마땅한 죄인임을 어느 정도 아는 것입니다.
회개를 다룰 때 우리는 죄사함의 의미를 상세히 살펴보아야 했으며
참된 회개에 전인이 관여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지성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마음은 그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비교적 최근까지도 회개는 연약함,
그리고 낙담하고 평안을 찾지 못해 고뇌 가운데 부르짖는 사람들과 연관지어 왔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 회개이며 수 세기 동안 교회는 회개에 대해 그렇게 가르쳐습니다.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면 죄사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죄사함이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화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죄의 넘치는 죄성을 보고, 그로부터 분리되기를 갈망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갈망하게 되는 순간,
그 자체가 성화, 즉 하나님을 향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위안과 해방을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성화의 중대성을 강조하지 않는 그릇된 복음 전도는 실제로 대단히 위험합니다.
죄사함에서 멈추는 복음 전도는 성경적 복음 전도가 아닙니다.
모든 복음 전파의 핵심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을 참되게 선포한다면 성화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값 주고 사신 바 된 존재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성화를 가르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성화를 전파할 때 사도는 성령만이 아니라 동시에 십자가도 전파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초기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전도 한 결과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살전1:9)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성화이며 그러므로 이것이 데살로니가서에서 바울이 전한 첫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복음 전도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구별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제시할 때 철저한 "율법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고 한 옛 개념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들은 언제나 함께 해야 하며 성화는 복음 전도 메시지의 일부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성화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하고자하는
지극히 해로운 습관으로 부터 생겨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신의 문제들 우리의 죄들과 필요들을 생각하며
성화에 대해 말할 때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둡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오류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화에 대해 설교하면서 정반대의 순서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엇으되 내가 거룩하니-이유입니다.-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3-16).
어찌된 일인지 거룩을 설교하는 모임들과 집회들이 사람들이 특정한 죄로 인해 고민 빠졌을 때
찾아가야 하는 진료소라는 개념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제거할 수 없는 죄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이런 진료소에 찾아가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받으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성화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데는
한 가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나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그
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 된 삶을 살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화라는 주제를 이런 식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간격이나 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지속시키시며 하나님 자신이 완성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생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성화의 과정은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신성한 성품을 받는 순간
내가 거듭나는 순간 나를 죄로부터 분리시키게 될 뭔가가 들어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이 구절은 번역의 문제로 종종 잘못 이해되곤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5)
개정역 난와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셔서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이 너희를 세상과 그 영으로부터 떼어 내어
하나님께로 가게 하기 위해 심지어 시기할 정도까지 열망하시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거듭나서 성령을 받는 순간 이와 같은 구별의 과정은 이미 시작한 것이며
성화의 과정이 내 안에서 이미 시작되지 않고는 중생할 수 없습니다
육신과 성령의 갈등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모든 부분 모든 단계에서
나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내어 하나님께로 구별하려는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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